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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훈독경 (天一國訓讀經)
제5권 참가정과 가정교회 - 제10일
본향의 집
날짜 : 1986. 5. 25(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1. 사랑의 본질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집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향에서 살 때는 모르지만 고향을 떠나면 그 고향이 얼마나 그리운가를 알게 됩니다. 어째서, 고향이 그리워지느냐?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은 고향에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 부모를 중심삼고 종적으로 할아버지가 있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떠나면, 그 자리에 형제의 인연이 머물러 있게 됩니다.
우리가 머물고 싶은 곳이 어디냐? 바로, 그곳이 고향집입니다. 그 고향집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를 위하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사랑,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모를 사랑하고 손자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가정에서 사랑을 중심삼은 종횡의 인연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본연의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 일생의 준비를 갖추도록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일생 동안 사랑을 중심삼고 살 수 있도록 준비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준비해 가지고 모든 사랑의 인연을 어디에 갖다 퍼붓게 되었을 것이냐? 종적인 부모로부터 자기가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을 횡적으로 퍼부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본연적인 부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횡적인 면에서 하나됩니다.
누구든지 가정에서 받은 종적인 사랑의 깊이에 따라서 부부생활도 넓은 사랑의 인연을 갖추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백 퍼센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부부간에도 백 퍼센트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느냐? 사랑은 종적인 것과 횡적인 것이 화합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종적인 사랑이 백이라면, 횡적인 사랑도 백이 되어야 합니다.
갓 결혼한 젊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묻기를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합니다. 대번에 조건을 걸고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뿐만 아니라 형제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면서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가 대답하기를 “아니야! 당신을 사랑하는 데는 우리 어머니만큼은 사랑 못 해. 우리 아버지만큼은 사랑 못 해” 하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싫어하느냐?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145-274)
2. 정서적인 면을 유발시키는 상대적인 여건이 많아야
좁은 집 틈바구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선, 넓어야 좋아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넓은 광장에서 환경이 어울리게 될 때 좋아하는 것입니다. 넓은 자리에서 자기의 상대적인 모든 것이 갖추어질 때 기뻐합니다. 좁은 곳을 싫어하고, 넓은 곳을 원합니다. 넓은 광장이 있으면 모두 다 좋아하지만, 거기서도 제일 좋은 것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은 어떤 것이냐? 내 몸과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나를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귀합니다. 아무리 푸른빛이 동산에 꽉 찼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빨간 꽃 한 송이가 내 몸과 마음의 정서를 집약시킨다고 할 때는 그 사랑의 마음을 유발시키는 꽃 한 송이가 푸른 동산의 주체가 됩니다. 그러한 주체는 내 마음과 몸의 깊고 넓고 높음을 대표할 수 있는 심정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많은 것을 좋아하고 돈도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사는 집도 넓고 큰 것을 좋아합니다. 나무가 한 그루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나무들이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무도 한 가지의 종류보다 여러 가지 종류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 여러 가지 종류가 필요하냐? 여러 가지를 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정서적인 분야를 자극시킬 수 있는 상대적인 여건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인 분야를 자극시키는 상대적인 여건이 많아진다는 것은 내가 그러한 여건을 통해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양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산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있어야 합니다. 꽃이 피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종류를 원합니다. 무엇이든 적은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할 때 어떤 가정에서 자랐는가를 봅니다. 식구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느냐, 혹은 과부의 가정에서 자랐느냐? 과부의 가정에서 자랐다면 보편적으로 볼 때 “성격이 모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원만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의 식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층층시하에서 연단을 받고, 거기에서 위로 모실 줄 알고 좌우로 생활을 거쳐가면서 팔방으로 화합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더라도 금방 자리를 잡습니다. (145-276)
3. 고향이 그리운 것은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
‘본향’ 하게 되면 반드시 집을 생각하는데, 왜 집을 생각하느냐? 그 집이 나라에서 가장 초라하더라도 그리운 것입니다. 찌그러진 하코방 집에서 사랑하는 그대와 속삭이는 것은 호화스러운 궁전의 보좌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과 대조할 수 없습니다.
고향이 왜 그리우냐? 그곳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이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이 있고, 그리고 형제자매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는 사촌, 오촌, 팔촌의 아저씨와 아줌마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다 거추장스러운 것 같지만 근처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구요! 세상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중심삼은 한 가정만 딱 있고, 그 동네에 친척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일날 일이에요!
인간이 왜 태어났느냐? 돈벌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벌어서 뭘 해요? 밥 먹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좋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공부를 못 해서 울고불고 하지만, 그건 할 수 없이 그럽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이 안 되어 있으니까 공부해야 따라잡겠다고 생각해서 그러지 공부해서 따라잡을 필요가 없게 되면 공부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공부해서 뭘 하겠어요? 알면 뭘 해요? 머리만 커 가지고 혓바닥만 나불거리고, 입술만 나불거리고, 어디에 가서든 조잘거리는 사람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습니다. 말을 못 하고, 재간이 없고, 무뚝뚝하고 두루뭉수리하더라도 참사랑을 가졌으면 그만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을 사랑하느냐? 미인들만 사랑하고 잘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뚝배기 같은 사람이나 제멋대로 생긴 사람이라도 고향을 다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 내가 듣던 꾀꼬리 소리는 다른 데서 듣던 꾀꼬리 소리와 달랐습니다. 아무리 참새가 짹짹거리는 소리가 같은 소리라도 이국 땅에서 듣는 참새 소리는 내 정서를 유발시키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더라 이겁니다. 그렇지만 고향에서 짹짹거리던 참새 소리는 내가 어디에 가서도 잊을 수 없는 소리로서 내 정서적인 면을 언제나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에 있는 산천이 그립고, 고향에 있는 뜰이 그립고, 고향에 있는 바위가 그리운 것입니다. 그 바위는 금강산의 좋은 경치를 대표하는 위세당당한 바위와 비교할 수 없는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왜 그렇느냐? 거기에는 정서적인 인연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45-282)
4. 어머니 아버지가 본향 땅
사람은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태어났습니다. 늙은 할머니들도 이제는 지난날을 다 청산하고 앞으로 찾아가야 할 북망산천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느냐? 사랑의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왔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복중에서 태어날 때는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태어나는데, 누구든지 어떻게 태어나고 싶으냐 하면 어머니의 사랑이 백 퍼센트 우주를 대표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백 퍼센트 우주를 대표하면서 날벼락이 치듯이 사랑하는 자리에서 태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날벼락을 치는 듯한 가운데서 사랑의 초점이 딱 격돌할 때 내가 그 사랑의 열매로 뛰쳐나왔다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람이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귀합니다.
내 본향의 집이 어디냐 할 때 어디라고 해야 되겠어요? 내 본향의 집이 어디냐 할 때, 그것은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본향의 집은 어머니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지요?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어머니가 귀한 줄 압니다. 보통 고향집과 고향 땅만을 그리워할 줄 아는데, 그것은 상대적인 땅입니다. 본질적인 고향 땅, 주체적인 본향 땅은 어머니의 몸입니다. 고향 땅이 어디냐 할 때, 나로 말하면 평안북도 정주의 상사리라는 산골입니다. 그렇지만 본향 땅은 거기가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내 본향 땅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이 본향 땅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근본으로 되어 있는 곳이 본향 땅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느냐?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밭입니다. 내 본향 땅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사랑에서 근원이 되어 나온 자신이 얼마나 귀하냐 이겁니다.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순수한 사랑은 하나님의 눈이 휘영청 해지고 입이 벌어지면서 “아, 좋구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우주의 근본이 되어서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입장에 있지만, 너희들은 시작이 확실하구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 주류에 연결될 수 있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서 태어났구나! 너는 나보다도 훌륭한 존재구나” 하실 수 있는 존재가 나입니다. 또, 나를 놓고 하나님이 “이야, 나도 부럽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태어나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까지도 “이야, 네가 나보다 멋지구나” 하실 수 있는 본분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러한 본원지의 생을 안고 태어난 여러분 자신인 것을 이제부터 알라는 것입니다. (145-286)
5. 본향의 집은 사랑의 보금자리
나도 어머니 젖을 먹던 생각이 납니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우리 어머니 젖을 빨아먹고 그랬습니다. 철이 안 나서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앉혀 놓고 “야, 이 자식아! 왜 이래” 하면서도 빨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칠팔 세가 되어 가지고 어머니 가슴을 헤치고 들어오면 척 젖을 빨려 주던 어머니의 얼굴을 볼 때 불만이 있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는 뭐냐? 자기가 낳은 아이가 똥을 싸고 다니지만 희망을 갖고 “야, 네가 커서 우리 문중에서 어떻게 되어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원의 성사가 거기에 깃들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흐뭇하고, 보면 볼수록 좋고, 만지면 만질수록 두둑해지고, 크면 클수록 소망이 부풀어오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노골적인 얘기를 해서 안됐습니다만, 나는 어머님을 참 좋아했습니다.
어디에 갔다 오면 밤새껏 어머니한테 얘기해 주고 보고해 주는 것입니다. “난 이러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하고, 어떤 때는 “이러 이러한 나쁜 일을 했습니다. 싸움도 하고, 여자가 한 대 쥐어박아서 여기에 흠집도 생겼습니다”라는 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말을 해도 잘 들어 주고 박자를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지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창을 보고 바람벽에 얘기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러니까 좋은 말을 하면 좋아하고, 슬픈 말에는 같이 슬퍼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본향이 어디라구요?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뱃속도 됩니다. 어머니는 살을 상징하고, 아버지는 뼈를 상징합니다. 옛날에 한국에 “어머니의 살을 받고, 아버지의 뼈를 받고…” 하던 노래도 있었잖아요? 어머니의 살을 이어받아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향이 어디냐 이거예요, 본향이? 집이 어디냐 할 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향의 집은 내 아버지 어머니로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곳이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145-288)
우리 본향의 집이 어디예요? 사랑이 본향의 집입니다. 기분 나쁘지 않지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초점을 맞추었던 그 집이 우리의 본향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 집도 서까래를 얹어서 초점을 맞춰 가지고 용마루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초점을 맞춘 그 사랑 가운데 내가 용마루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빠요? “사방을 받쳐 주는 것은 기둥이기 때문에 장차 기둥들을 만들기 위해서 세운 것이 우리 아들딸이구만” 하면 기분이 나쁘냐구요?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사랑의 집을 짓는 것이구나” 하고 말이에요.
내가 태어나기를 사랑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랑의 집에서 흠뻑 취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초점을 맞춘 그 자리에서 출발한 나는 10개월 동안 부모의 사랑의 초점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부모가 10개월 동안 매일같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주던 복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생각해 봤어요? 그래 가지고 10개월이 되어서 태어날 때 어땠어요?
부인들, 큰소리하지 말라구요! “아이구, 남자들은 애기를 낳아 보지 못해서 부인의 사정을 몰라” 하지만, 보라구요! 조그만 여편네가 “아이구, 나 죽는다”고 소리치는 걸 들을 때 남편네의 가슴이 퉁퉁 하겠소, 통통 하겠소? 아무리 방앗간의 소리가 크다고 한들 그 가슴이 뛰는 소리에 비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크다고 한들 그 가슴이 울리는 소리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구요?
여자들은 모르지요. 암만 그래야 모른다구요. 한 곳은 죽겠다고 하는데, 한 곳에서는 웃어서 되겠어요? 거기에 박자를 맞춰 가지고 더 마음을 졸이는 남편의 가슴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최후의 순간보다도 더 기가 막힌 사정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여자라는 종자들은 지금까지 생각지 않고 살아왔다고 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것을 깨닫는 것도 좋을싸!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가 완전히 하나되어서 “야아…” 하고 힘을 주면서 내가 나오기를 얼마나 축수했느냐 이거예요. 여기에 보기 싫은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때는 우주도 숨을 들이쉬었다가 “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내가 태어났으니까 그만하면 됐지 뭐가 원통해요? 뭐가 분해요? 뭐가 미달돼요? 우주가 “왜 불평해, 이 쌍것들” 한다는 것입니다. (145-293)
6. 사랑의 길을 따라서 조화가 벌어지는 게 원칙
그렇게 자기가 태어났는데, 그 살덩이와 뼈가 자기의 것이에요? 부모의 사랑의 산물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나이가 스무 살이 되어서 학교에 다니는 간나 자식들, 어머니 아버지의 길리움을 받아 가지고 신세를 톡톡히 지면서 “아, 내 맘대로지” 한다구요. 이 쌍간나놈의 자식들…! 통일교회에는 그러한 식이 없다 이거예요. 사랑의 법도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145-295)
그래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출발해 가지고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태어났고, 나는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낳아 가지고 사랑으로 키웁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면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해도 동정하는 사람이 없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아파 보라구요. 어머니 아버지는 밤을 지새워 가면서 염려해 주고 보호해 줍니다. 그런데 사랑의 어머니 아버지를 가진 것을 고마워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열 다섯이나 열 여섯의 틴에이저들이 어머니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가정의 보호를 받으면서 “내 마음대로 하지” 하는 요놈의 망할 녀석들, 사랑의 보금자리를 차 버리려고 하는 무리들은 천지의 박대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개인주의 세계에서는 우주가 전부 다 빼앗아 갑니다. 아무것도 못 가집니다. “너희들은 나라도 못 가져, 이놈의 자식! 너희들은 사회에서도 필요 없어. 너희들은 부모에게도 필요 없고 가정에도 필요 없어” 하면서 추방합니다. 자기네들이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추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거되는 방향으로 급속히 달리고 있는 것이 선진국가의 젊은 군상들입니다. 아무리 가야 그놈들은 1세기도 못 남아집니다.
아무튼, 그렇게 자라 가지고 철들어 학교에 가게 되면 어머니 아버지가 가방도 싸 주고, 책보도 싸 주고, 시중도 들어주고 그럽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게 좋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주의냐? 사랑주의입니다. 그런 놀음을 어머니 아버지가 하지만 사랑 때문에 지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아요. 사랑을 안 하면 지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뭐라고 하게 되면 “아이구, 나 싫어” 하면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속을 못 받습니다. 사랑으로써만 상속을 받을 수 있고 부모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안됩니다. (145-297)
7. 사랑의 실체가 되어 본향 땅으로 돌아가자
가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모이지만, 나중에는 무엇이 부모냐 하면 이 세계가 부모입니다. 세계로부터 누구든지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원소들을 보급받습니다. 복중에서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가지고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땅의 자연이라는 부모의 품에서 내가 음식을 먹고 커 나갑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본연의 세계에서 커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복중에서 애기가 탯줄로 호흡하고 먹으면서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현재 영양소를 자연이라는 부모로부터 보급받지만, 여기에서도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랑의 호흡기관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 가정의 사랑, 세계의 사랑, 우주의 사랑, 천주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이와 같은 사랑에 화합할 수 있는 사람이 가는 길은 막을 자가 없습니다. 어디든지 통합니다. (145-303)
본향의 집이 어디에 있느냐? 어머니 아버지가 내 집이요, 그 집의 형제들이 내 집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 동네의 이웃사촌이 사랑의 내 집이요, 이 나라가 사랑의 내 집이요, 이 세계가 사랑의 내 집이요, 이 우주가 사랑의 내 집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우주가 집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뭐라고 그러던가요? 우주촌이라고 하지요? 우주촌보다도 우주집이라고 해야 됩니다. 지구촌이 아니에요. 지구집입니다.
그러한 집 가운데 내가 사랑의 핵에서 돌면 지구가 돌아가고 우주가 돌아갑니다. 그렇게 내가 돌면 세계가 돌아가는 놀음을 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자리에 선 것이 내 인생이라는 걸 생각할 때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그러니까 “눈아, 사랑에 취해라! 모든 사지백체도 사랑에 화동할 수 있도록 자라라! 우주를 여행하게 될 때 너를 중심삼고 찬양하고, 너를 중심삼고 노래하고, 너를 중심삼고 화동하고, 너를 중심삼고 기뻐할 수 있는 화동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 인생 길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으니까 하나님부터 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랑의 집입니다. 우주의 하나님이시니 만큼 우주적인 본향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렇게 멋지게 살아야 됩니다. 다리를 뻗을 수 없는 좁은 방이라도 “아이구, 이 집이 왜 이렇게 좁아” 하지 않고 우주에 다리를 뻗는다는 생각으로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세상이 다 내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계를 여행하고 사는 것이 이상 아니에요? 그러면서 내가 열매를 가득히 하늘의 창고에 갖다 쌓기 위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살이가 얼마나 고귀하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늙은 부인네들과 남자들은 생각해 보라구요! 몸은 늙었더라도 이제라도 젊은 청춘시대, 사춘기 시대의 그때를 다시 한 번 회상해 보면서 지난날을 다 헛되이 보냈거들랑 생각으로라도 선생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대조해 가면서 생애를 바로잡아 가지고 땜을 때워서라도 사랑의 여행객이 되어 본향 땅으로 돌아갈지어다, 아멘! (14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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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아~ 주♥♥♥
감사합니다 아주
늘 ~~~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아주
하늘부모님천지인참부모님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