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 스님
만 가지 말보다 직접 체험해서 몸으로 감동한 이들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흔들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실한 불자들로 남아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법상에서 주장자 대신 능동(能動)으로 많은 이들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이끌었던 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살았던 인연에 지금도 표충사를 떠올릴 때마다 감동하면서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젊은 시절 해산 스님은, 당시 전국 선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그 정진력을 인정받은 수행자였다. 연로해서도 뼈와 가죽만 남아있을 정도로 야윈 모습이었지만 수좌들에게는 등골에 식은땀이 나도록 힘차게 경책하셨다. 그럼에도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제방 선원에서 운수 납자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먹지 않는다’는 법문이 말로만 하는 공염불이 아니라 그 연세에도 해야만 하는 수행자의 하루 일과임을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신 스님은 모든 수행자의 귀감이 되셨던 것이다.
해산 스님께선 79년 열반에 드셨다. 먼발치에서 입적하셨단 소식을 접하고는 마치 부모님을 잃은듯 목이 메여 왔으나 스님께서 말학(末學)후배에게 남기신 호미정진의 정신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도시 포교당에서 포교를 정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가끔 피곤하고 힘들때 노구를 이끄시고 호미를 놓지 않으셨던 스님을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 저 밑에서부터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고 힘이 난다. 젊었을 때 열심히 정진해야 나이 들어서도 허리가 곧아서 그 정진력으로 좌탈 입망 할 수 있고, 수좌는 좌복 위에서 목숨을 마쳐야 한다는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현원(玄元) 스님
부산 生으로 표충사에서 득도했다. 통도사 강원을 수료. 연화사 봉국사 주지 역임.
<붓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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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해산(海山) 스님!
왼쪽 손에는 누렇게 변한 풀을 안고
오른쪽 손에는 흙 묻은 호미를 들고서-.
군데군데 떨어져 낡은 배잠뱅이 바지가랭이를
좌측은 여섯 번 걷어 올린 듯하며
우측은 아래로부터 네 번 걷어 올린듯,
그리고 낡아빠진 배잠뱅이 여러 곳엔
밭고랑의 진흙들이 잔뜩 묻은 모습으로 어슴프레 희미하게,
그분은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지극히 전형적인 촌부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큰스님’의 자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때묻지 않아 욕심없이 사는 그냥 농부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대중스님들과 함께 울력을 마치시고
부산불교청년회 회원들이 3박4일 일정으로
수계받으러 왔다는 전갈을 듣고 부랴부랴
설법전 툇마루를 막 올라서는 중이셨습니다.
나는 그 때 옆의 학생에게
“저 스님이 이곳 표충사 주지스님이 맞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해산海山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랬습니다.
그 초라하고(?) 청정하신 그분이 바로 해산 스님이셨습니다.
1969년 늦은 겨울 33년 전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이는 20대의 청춘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손이 시려오는 차가운 개울가에 나가서
얼음 같은 물에 손을 담그며 몸을 씻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할 때였습니다.
우리는 넓은 대중방에 나란히 동그랗게 둘러앉아
준비해간 바룻대를 펴고 난생 처음 바루공양이란 것을 했습니다.
30여 명의 학생들과 청장년들이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소리도 나고 서투르기 그지없어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진행 중일때 해산 스님께서는
“소리 내고 먹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많이들 드세요.”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너그러우셨습니다.
자애로우셨습니다.
진공眞空 거사, 2002
<해산 스님 이야기> 중
*사진 제공/성월거사님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