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DDP, 한국 스포츠의 메카였던 곳
동대문운동장, 한국 근현대 스포츠 역사를 목격한 증인
DDP, 한국 패션과 디자인의 역사를 기록해 나갈 새로운 증인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혹시 성동원두(城東原頭)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한때 서울운동장이라 불렸던, 지금은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의 애칭이었다. 한양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
즉 서울 동쪽의 운동장이란 뜻이다.
오래전 국가대표 축구경기가 열리면 “여기는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라며 중계를
시작하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될 때 추억이 깃든 곳이 사라진다며
아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 야구를 좋아했던 기자는 1970년대 후반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내내 친구와 ‘봉황대기
고교야구’를 직관하러 간 추억이 있고, 야구부가 있던 고등학교 시절은 물론 졸업 후에도 모교의 야구경기를 응원하러
간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동대문운동장은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다. 경성운동장에서 서울운동장으로, 그리고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뀐 이름만큼 우리 근현대사를 목격하고 체험한 증인이기도 하다.
(2021. 04. 28)동대문운동장 기념관.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4. 19) DDP,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자리에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동대문운동장 소사(小史)
동대문운동장은 1925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종합운동장으로 개장되었다. 당시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체육 증진을 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으나 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도 내린다. 일제강점기 초기 체육행사는 주로 학교 운동장에서 열렸었다.
당시 교육기관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고 조선인들이 관전하러 많이 몰리는 등 독립운동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컸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관제 행사와 통제된 운동 경기를 열기 위해 경성운동장을 건립했다. 그 과정에서 한양 도성의 성벽을
허물고 대한제국 시절 훈련원 자리를 덮어 버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운동장 역할에 걸맞게 각종 체육행사를 소화했지만 많은 정치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서울운동장은 이승만 시절부터 유신 시절까지 수많은 ‘반공 궐기대회’가 열렸던 단골 장소였다.
1975년 무렵의 서울운동장 일대.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운동장은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83년에 프로야구 개막 경기가 열린 곳이 서울운동장 야구장이었고, 축구장에서는 1989년에 프로축구 개막 경기가 열렸다.
1985년에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또 바뀐다. ‘서울’이라는 타이틀을 잠실에 세워지던 올림픽 주경기장에
내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축구 국가대표의 주요 경기는 잠실의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열렸다.
그래도 몇몇 경기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었는데 박지성과 이천수가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르기도 했다.
동대문운동장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설 노후화에 대한 지적이 많아졌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는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2003년에 주경기장은 운동장으로서의 역할은 다하고 폐쇄됐다.
그리고 철거 전까지 주차장으로, 그리고 노점상들의 풍물시장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의 하나였던 동대문운동장은 철거가 논의된다. 체육계와 인근 상인, 그리고 풍물시장에
입주한 노점상들이 반대했지만 개발 논리가 승리했다. 결국, 2007년 12월 동대문운동장은 철거되었다.
풍물시장과 주차장으로 이용되던 시절의 동대문운동장. (출처: 나무위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그리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4월 어느 날 옛 동대문운동장 터는 눈이 부셨다. DDP 즉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금속성 외피가 화창한 햇빛을
더욱 강렬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DDP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디자인 서울’을 모토로 계획한 전시장과 쇼핑몰이 들어선 건축물이다.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는데 자료에 의하면 세계 최대의 ‘비정형 건축물’이라고 한다.
2007년 철거된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200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14년 3월에 개장했다.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나며 보는 느낌과 직접 걸으며 곁에서 본 느낌은 너무 달랐다. 자료에서 언급한 비정형이라는 표현은 기자에게 ‘비현실적’이라는 해석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외계에서 온 우주선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DDP가 처음 들어섰을 때 많은 한국 사람이 ‘거대하고 기괴하다’고 생각한 게 이해되었다.
거대하고 기괴한 DDP 옆을 지키는 두 거인 조형물이 어쩌면 이 건축물을 더욱 외계에서 온 우주선처럼 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김영원’ 조각가의 <그림자의 그림자-길>과 <그림자의 그림자-꽃이 피다>, 거대한 두 개의 조형물은 그 크기로
지나는 사랃들을 압도하며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2021. 04. 28) 김영원 조각가의 '그림자의 그림자-길'.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4. 19) 김영원 조각가의 '그림자의 그림자-꽃이 피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DDP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함께 있다. 대로변의 DDP를 공원이 뒤에서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공원 이름에 ‘역사문화’가 들어간 이유는 그 자리가 역사와 문화와 관련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동대문운동장이라는
근대 체육의 역사와 문화가 태동한 곳이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시절의 역사와 문화도 깃든 곳이기도 하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땅 밑에 잠들어 있던 조선 시대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80년 넘게 운동장 아래에 묻혀있던 ‘이간수문’도 이때 햇빛을 봤다. 남산에서 내려오던 물을 청계천으로 흘려보내던
수문이었다. 현재 이간수문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는데 조선 시대에 목책을 끼워 넣었던 돌구멍은 물론 운동장
건설 과정에서 헐린 성벽 일부도 함께 볼 수 있다.
(2021. 04. 28) 이간수문. 남산에서 내려오던 물을 청계천으로 보내던 수문이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4. 19) 이간수문의 목책.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4. 28) 이간수문과 성벽. 동대문운동장은 성벽을 허문 자리에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조선총독부는 운동장을 만들 당시 성벽을 허물고 옛 훈련원 자리도 덮어 버렸다.
그래서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운동장 아래에 묻혀있던 옛 군사시설의 흔적도 함께 발굴되었다.
이러한 옛 시절의 흔적과 복원된 시설을 중심으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섰다.
물론 동대문운동장의 흔적도 남아있다. 다만 두 개의 조명탑과 ‘동대문운동장기념관’으로 남아있다.
기념관에는 운동장과 함께한 각종 기록물과 모형을 전시하고 있었다.
추억이 깃든 곳이 사라졌다는 아쉬움 마음과 함께 영원히 묻힐 뻔한 역사의 현장이 후손에게 돌아왔다는 다행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등 양가감정에 빠지게 하는 곳이다.
(2021. 04. 28)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발견된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의 흔적.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4. 19) 동대문운동장 시절의 전광판. 운동장은 철거하고 전광판만 기념으로 남겼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4. 28)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에 전시된 모형. 동대문운동장은 철거되고 모형으로 남았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체육의 메카에서 패션의 메카로
DDP 인근에서 만난 사람 중 30대 이상은 되어야 동대문운동장 시절을 기억했다.
그보다 젊은 층들은 동대문이라는 단어에서 패션과 디자인을 떠올렸다. 특히 DDP를 최신 트렌드의 패션과
디자인 행사가 열리는 상징적인 곳으로 여겼다.
(2021. 04. 28) 성동글로벌경영고 패션디자인과 학생들. 왼쪽부터 이리나, 양예빈, 양신우.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곳을 자주 지나는데 그때마다 패션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곤 해요.
친구들과도 취업은 물론 패션 사업으로 성공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하고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만난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에 다니는 ‘이리나’ 학생의 말이다. 그녀는 물론 함께 온 친구들도
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다고 했다. 그녀들은 동대문운동장이었던 시절은 정확히 몰라도 이 지역이 품고 있는
패션과 디자인을 향한 가치는 잘 알고 있었다.
차범근 전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은 학생 시절 경기는 물론 운동 장비를 구하느라 동대문운동장을 찾곤 했다고 한다.
많은 체육인의 꿈이 서린 곳이 이제는 패션 전문가를 꿈꾸는 젊은 청춘의 발길을 잡아끄는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