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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감금된 올드보이의 70이레>의 줄거리:
70이레 환상은 모든 세대의 선민들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감금상태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 그 길을, 세계사 속에서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묘사하고 보여줍니다. 문제는,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자신이 감금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인류 각자와 선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감금되어 있었던 관계로 자신의 감금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성취와 업적은 별로 급한 일이 아닙니다. 우선은 감금탈출입니다.
감금된 올드보이의 70이레
(다니엘 9:20~27)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감금된 올드보이의 70이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감금된 올드보이의 70이레’
영화 올드보이는 직접 관람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그 내용을 알 만큼 무척 유명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오대수는 자신의 이름을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라고 풀이할 만큼 주위를 끌만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공이 납치됩니다. 무려 15년 동안 TV하나 놓여있는 싸구려 호텔 같은 8평방에 감금되어서 군만두만 먹다가 풀려난 후에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반전은 15년 동안 갇혀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실은 자신이 15년간 복수를 당하고 있었던 처지였습니다.
한편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이러한 감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같이 초로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몸 건강하고 자녀들은 제자리를 잡아서 형통하며 노후자금이 충분한 상태라면 괜찮은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 같은 경우에는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최고의 직장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 연애도 하고 있다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삶으로 보일 것입니다. 중년의 나이라면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든지, 직장에서 승승장구 하고 자녀들도 똑똑해서 일류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면 삶이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좋고 무탈하여도 실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15년 동안 감금되어 군만두만 먹고 있었던 것과 같은 감금된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감금된 삶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참 해방과 참 자유를 얻은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금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일지라도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안다면 삶이 아무리 잘 풀리더라도 가슴을 치며 답답해 할 수밖에 없는 감금된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유와 해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대수는 적어도 자유롭게 살다가 감금되었기에 15년간 자유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금된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감금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에서 발생하는 슬픔과 불안 괴로움과 같은 감정들은 모두 감금된 상태에서 주어진 것인데,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며 어떤 일을 성취하고 업적을 남기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볼 때에 한 일이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또 많은 일을 해왔다고 할지라도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해도 여러분의 가치가 다른 사람에 비해 낮은 것은 아닙니다. 또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 감금된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이렇게 감금된 채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다니엘은 70이레 환상을 통해 참 자유와 해방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70이레 환상은 역사적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70이레 환상을 세계사의 전개에 대한 예언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70이레 환상이 주어진 전후맥락을 기억함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70년 뒤에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선민들이 포로로부터 해방되는 일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임도 깨닫습니다. 그래서 선민들이 기적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기를 바라며 중보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70이레 환상의 깨달음을 주십니다.
다니엘의 중보기도에는 선민들을 자유롭게 하실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를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의 염려가 담겨있었습니다. 이 염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해답을 제시해주십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나타난 70년이라는 기간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시면서 선민들이 이 세상에 감금된 포로의 상태로부터 빠져나와서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은 그 예언의 구체적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이 환상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단계인 7이레는 BC.538년에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 포로귀환이 이루어지면서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때부터 성전재건이 끝날 때까지의 약 100년간의 기간이 바로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인 62이레는 성전과 성벽이 재건된 이후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00년 간 지속된 시기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중간기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70년이 지나서 로마의 디도 장군이 성전을 파괴하기까지의 시기입니다. 성전이 더 이상 건축물로써 존재하지 않고 성전의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이양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네 번째 마지막 단계의 한 이레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70년부터 현재까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70이레의 환상에서 나타난 기간과 실제 역사적 시간은 비례하거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에서 2000년 가까운 기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단계인 7이레는 성전재건을 허락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첫 번째 단계인 7이레와 두 번째 단계인 62이레는 모두 성전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까지를 70이레 중에 69이레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메시야 등장에 대한 열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복음이 온전하게 준비되고 성전이 파괴되는 과정에는 이레가 할당되지 않은 중간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기간의 한 이레에서는 현재까지 2000년이 흘러가게 됩니다.
이 단계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 감금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기 위한 곳입니다. 즉 성전재건은 하나님께서 선민 각자에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하셨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적 상대자로써 나타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전재건의 명령은 고레스 왕에 의해서 내려진 것이지만 이러한 역사를 주도하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선민들이 성전을 짓겠다고 계획한 것도 아니고 주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전재건의 역사하심은 선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들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고, 선민들의 마음을 채우셔서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얻을 수 있는 축복 중에 최고의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선민이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이름을 인용하는 것이며 선민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부를지라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는 서로를 배우자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나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배우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양자를 들였습니다. 오직 한 아이에게 자신을 부모로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민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 받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선민은 죄인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 받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은 죄인이면서 미친 사람에 불과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붙잡고 여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성전재건이라는 사건을 통해 선민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이것은 선민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오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70이레 환상의 첫 단계인 7이레에서 성전재건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이 세상에 감금되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로부터 빠져나가는 첫 단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가 나타납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왜 성전이 재건되고 성벽이 완성되고 광장과 거리가 세워지는데 이 기간을 곤란하다고 표현한 것일까요? 주석들은 선민의 나라가 망한 후에 그 터에 자리 잡고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성전재건을 방해하게 될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해석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약 100년 간 성전이 재건될 때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이방인들의 방해가 두 번째 단계인 62이레가 의미하는 400년간까지 지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곤란한 동안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을 부를 때에 마음의 차원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 각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어야 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신을 불러대고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이방 종교들의 주술적 행위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를 때에는 마음도 그에 합당한 상태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입과 마음이 일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마음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으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가지고 싶고, 만나고 싶고, 연합하고 싶어 하는 갈망이 불타오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비단 하나님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입만 열면 돈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그렇게 입으로 돈의 이름을 부르고 머리로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마음이 돈에 대한 갈망으로 점화되어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이라면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국회의원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현실에서는 아직 국회의원이 아니라면 마음에는 그 자리에 대한 염원이 불타오릅니다. 한 청년이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 마음에서는 그녀에 대한 갈망이 불타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는 자들에게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시편 14편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갖고 싶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싶어서 그 이름을 갈망하지 않는 자는 치우치고 더럽고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레미야서 29장 13절에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선민들이 이 세상의 감금된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해방의 원리입니다.
영화 속에서 오대수는 자신이 15년 동안 감금되었음을 알기에 자유를 그리워하면서 상대를 증오하여 복수를 꾀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감금되었음을 모르기에 자유를 그리워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세상에 감금되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감금된 상태의 증거는 항상 기뻐할 수 없고,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감금되었다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증거를 통해 감금되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분노하고 불만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이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신 자유로운 마음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사라진 이유는 우리가 원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감금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세상의 감금 상태에서의 탈출을 성전재건의 명령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방인 즉 일반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주술적으로 부릅니다. 세상에 감금된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는 것은 곧 마음이 세상에 포로 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받은 선민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앞서 나타난 ‘그 곤란한 동안’이라는 말의 의미도 해석됩니다. 입으로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마음에서 생겨나는 세상의 대한 열망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는 부르지만 여전히 마음으로는 돈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건강에 대한 열망 때문에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기에 곤란함을 겪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광장은 말 그대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써 선민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루츠는 본래 성벽을 짓고 나서 성벽을 둘러싸는 물이 흐르는 도랑을 의미합니다. 성벽 자체가 방어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도랑을 만들어서 성벽자체로의 접근조차도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하시고, 당신을 열망해서 하나가 되도록 프러포즈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을 열망하는 상태를 곤란하게 여깁니다. 이때에 성벽을 쌓고 그 주변에 도랑까지 판다는 것은 선민의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비록 마음이 세상에 끌려가고 세상 것을 열망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이 세상과 담을 쌓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을 열망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5절의 말씀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62이레가 지나가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가 삼 년 같다는 뜻으로 몹시 애태우며 기다림을 이릅니다. 이처럼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간절함을 의미합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62이레는 온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의 기다림과 결심과 준비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중간기입니다.
26절을 보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을 나타냅니다. 표현상 비참한 느낌이 듭니다만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열망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한 사건입니다.
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이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것은 곧 성전의 존재 의미가 예수님께로 완전히 이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성전을 주셨던 하나님의 의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역사 속에서 성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선민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 받았으나 마음으로는 세상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곤란한 상태가, 이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인하여 이 곤란함이 완전히 해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러한 해방의 길을 완성시키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레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레는 선민의 삶에 대해서 적용되는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복음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세 번째 단계의 70~80년간은 이레가 표현되지 않는 중간기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이레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27절을 보면 이 기간 동안 나타나게 될 적그리스도의 출연과 활약이 보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적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등장하게 될 한 인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감금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성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적그리스도 또한 존재할 것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며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반드시 나타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는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는 단순히 전반에는 적그리스도의 반발이 약했지만 후반에는 더 강할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적그리스도의 하는 일에 약함이나 강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년 반이라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힘을 발휘하고 득세를 하는 시점이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승리를 얻어서 교회를 말살하거나 근본적으로 뿌리를 뽑을 수는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날개로 번역된 말을 직역하면 성전 꼭대기를 의미합니다. 포악하고 가증한 것이 성전 꼭대기에 서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한 장소인데 성전 꼭대기에 서게 되리라는 것은 성전을 정복한다는 의미입니다.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정복하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성도들을 꾈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성도들 중에서 나타나는 자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정복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70이레의 환상은 세상에서 감금된 상태에서의 해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성도들을 세상의 감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면서도 세상을 열망하는 마음을 곤란하게 여기는 성도의 마음에서 곤란함을 제거합니다. 마음에는 세상을 담고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분임을 오해하게 만들어서 마음에 품은 대로 세상의 가치를 주시는 분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대한 열망을 위해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정복하는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마음으로는 세상을 열망할 수밖에 없음을 두고 곤란하게 느끼는 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찾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고, 부활하여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할 수 있게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곤란함을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고 편안하게 인식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건강이 나빠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에서는 건강을 열망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곤란함을 느끼며 십자가를 찾고자 합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성도에게 와서 세상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부추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에 건강문제를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면 해결해주신다고 유혹합니다.
심지어 목사님에게도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유혹은 찾아옵니다. 적그리스도는 예배당 건축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속이며 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교인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땅의 일은 하나님의 명분을 붙일지라도 결국 땅의 일입니다. 마귀는 이러한 땅의 일에 성도들의 마음이 현혹되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선교에 대해서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를 통해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기를 바라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을 마귀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당 건축이든 선교든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세상을 향한 열망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이루겠다고 하나님의 명분을 내세운다면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 감금된 상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럴 때에 나의 육체를 통해서 이루어질 이 땅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감금된 상태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곤란함을 느꼈다면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셨던 것처럼, 감금된 상태와 곤란한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느끼게 하는 모든 적그리스도를 향하여 우리도 저주를 퍼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온전한 탈출이 이루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 세상을 열망하는 곤란한 상태를 곤란하게 느끼게 하셔서 십자가를 붙잡게 해주시옵소서. 또한 이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꾐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셔서 온전한 탈출과 해방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