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1
사도행전 17장 24-28절
지난 시간부터 사도신경에 대해 살피고 있는데, 사도신경의 첫 번째 부분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지만 한 분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의 근원으로써 삼위 하나님께 아버지란 표현을 돌릴 수 있고, 또한 그런 아버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구조가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고 할 때 사도신경의 첫 부분은 위격 상호 간의 관계를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이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무(無)로부터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에는 창조만이 아니라 섭리에 대한 고백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6일로 마쳤지만 창조와 함께 그의 섭리가 없다면 창조된 모든 것이 유지되고 보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내가 믿는다는 것은 그의 섭리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지탱시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믿는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나아가 아버지란 표현이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기도 하지만, 특별히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양자된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도 아버지라고 표현됩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게 채워주실 것도 믿으며, 심지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내게 어떠한 악을 보내신다 할지라도 그가 그것을 나의 선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것도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요, 특별히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보자면 그가 우리의 신실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문의 내용입니다. 이어 27문에서는 섭리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데, 이미 26문에서 섭리에 대하여 다루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27문에서 다시금 섭리에 대하여 다룹니다. 26문의 경우 창조에 대한 내용에 이어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 그것들을 지탱시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본래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내용은 영원 전에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난 뒤 작정의 실행으로서 창조와 섭리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무(無)로부터 지으시고, 지으신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지탱시키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섭리에 대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문인데, 여기서 섭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슨 뜻입니까?
답. 섭리란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인데(행17:25-28, 렘23:23-24, 사29:15-16, 겔8:12), 그는 이를 통하여 마치 그의 손으로 붙잡으시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을 지탱시키시고(히1:3), 식물들과 풀들, 비와 가뭄(렘5:24, 행14:17), 풍작과 흉작,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요9:3), 부와 가난(잠22:2), 양식과 음료 등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우신 손길로 임하도록 그렇게 그것들을 다스리십니다(마10:20, 잠16:33).
우선 섭리를 정의하면서 요리문답은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처럼 동일한 그의 전능하심으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섭리의 대상은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창조하신 모든 것만이 섭리의 대상인가? 정확하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과 함께 창조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요리문답은 이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하여 그의 손으로 붙잡으시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을 지탱시키신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우신 손길로 임하도록 그렇게 그것들을 다스리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섭리를 정의함에 있어서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는데, 하나는 붙잡는 것 혹은 지탱시키는 것으로, 다른 하나는 다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전자를 유지 혹은 보존이라고 하고, 후자를 통치라고 합니다.
일단 오늘 본문 사도행전 17장 24절 이하 28절을 보시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은 아덴 지역에서 선포한 내용인데, 바울 당시 아덴 지역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풍부한 철학적 전통과 문학, 예술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위한 업적들을 자랑하던 곳입니다. 특히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우상들이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보시면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다고 할 때 이들 가운데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어 쟁론하기도 했습니다(18).
참고로 섭리와 관련해 당시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세 가진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의 문제에 관하여, 혹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관하여 무슨 섭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두 번째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신적인 섭리 대신 만물의 본질 자체에 존재하는 절대적 필연성과 변화를 제시하며, 만물이, 심지어 하나님 자신도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필연성을 운명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로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철학자들은 하나님이 만물을 바라보고 알기는 하나 그것들을 인도하고 다스리지는 않는다고 보며, 다만 천체들의 운행을 유지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미쳐서 자연의 낮은 부분들에 어떤 능력이나 덕을 미칠 뿐이며, 그런 영향력을 통해서 일어나는 적용과 운동들은 전적으로 물질과 또한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데,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말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심을 말씀합니다. ‘주재’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데, 천지의 주재라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맡아서 처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kuvrio"[퀴리오스]’라고 해서 소유자, 주인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인이고, 그가 주인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까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재요, 주인이신데, 그가 어떤 일을 하시는가? 25절에 보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란 겁니다(민16:22).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생명과 호흡의 시작이요 원인이시라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이후 자녀를 낳게 된다고 할 때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땅에 있는 짐승, 하늘의 새, 그리고 바다의 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의 꽃과 열매 등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26절을 보시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고도 말씀합니다. 성경은 맨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에덴동산이었지만 인류가 많아지면서 온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을 통해 어느 한 민족이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자리를 잡고 더욱 확장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8절에서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일하심 없이 인간이 살 수 있는가? 그의 일하심 없이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가? 그의 일하심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를 보존해 주셔야지만 살고 기동하며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섭리에 대하여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라고 할 때 본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의 손길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섭리가 유지 혹은 보존과 통치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전자는 히브리서 1장 3절을 통해, 후자는 마태복음 10장 29절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1장 3절을 통해 유지 혹은 보존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히브리서 1장 3절의 경우 정확하게는 성부가 아니라 성자와 관련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자만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는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능력의 말씀을 만물을 붙드신다고 할 때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 3절을 통해서도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지으신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그의 능력으의 말씀으로 유지 혹은 보존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일부 내용들은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 세계가 그리고 우주가 마치 기계와 같아서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지구가 남극과 북극을 이은 가상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자전이라고 표현합니다. 저절로 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돈다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자연이라고 하는데, 이미 이 말 자체에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그분의 섭리가 부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만물 그대로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구가 남극과 북극을 이은 가상의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그렇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1년에 한 바퀴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하는 것을 공전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계속해서 공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법칙에 따른 결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것은 창조의 역사와 함께 섭리의 역사를 지금까지 실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쉬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6일 창조 후 제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안식하셨다는 것은 섭리의 역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창조하시던 것을 끝내셨다,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에 대해서는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창조와 함께 그의 섭리는 지금까지 한번이 멈춘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소위 지구의 자전이 있는 것, 그래서 낮과 밤이 있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유지하심과 보존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공전을 통해 우리나라의 경우 계절이 바뀌기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유지하심과 보존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비인격적인 피조물만 유지하고 보존하시는 역사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피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유지하고 보존하시는 일들이 있는데, 특별히 사람과 관련해서는 필요한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유지하고 보존시키십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리 육체가 살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또 필요한 영양분이 공급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모든 것을 주시되 사람으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심으로 얻게 하시고 유지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숨을 쉬고 활동하는 것도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10장 29절을 통해 다스림, 즉 통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이 말씀의 배경은 28절만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즉 너희 몸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 죽음에 이르게 될 만큼 무서운 박해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요, 복음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게 29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데, 팔리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참새를 잡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유통하여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가 팔리는 것이 일단 잡는 사람이 잘 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잡는 사람이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면 아무리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다스리심, 그분의 통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아무리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누구도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0장 30절과 31절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많은 참새보다 귀한 주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지기도 합니다. 넘겨져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런 순교에 대하여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의 섭리 아래서, 그의 통치 아래서 바로 그 일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식물들과 풀들, 비와 가뭄, 풍작과 흉작,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양식과 음료 등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우신 손길로 임하도록 그렇게 그것들을 다스리신다고 설명합니다.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라 좋지 못한 일도 있을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일지라도 이 땅에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거기에 사탄이 사용됩니다. 또한 사탄의 유혹 아래에서 악인들도 사용이 됩니다. 외적으로는 악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지만 거기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도 있습니다. 즉 한 사건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도 있고, 사탄의 일도 있고, 악인들의 일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탄을 사용하시고 또한 악인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십니다. 욥으로 하여금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자도 여호와란 사실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심지어 맨 나중에는 그동안은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본 자처럼 있다는 고백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탄과 악인은 자신의 악한 뜻을 위하여 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마땅히 찬양 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고, 사탄과 악인은 그들의 악으로 인하여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욥만이 아니라 요셉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45장 7절 그리고 창세기 50장 20절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야곱의 열 두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백성들 안에서도 죄가 있고 악이 있습니다.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런 미움이 결국 동생을 죽이기로 했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팔게 됩니다. 요셉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안타까운 사건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판 역사 속에서도 섭리하셨고, 나아가 팔린 가운데서도 섭리하셨는데 결국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문을 애굽 아래 있게 하심으로 그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다스린다고 할 때 사탄도, 사람도 그의 섭리의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과 함께 창조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섭리하신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욥의 소유를 자기 힘으로 빼앗아간 악인들과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의 악행도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입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도 다스리시고, 의인의 악행에 대해서도 다스린다는 말을 그가 죄의 저자가 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 않았지만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죄조차 작정하실 수 있으시며, 죄에 대하여 작정하셨다면 자신이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죄에 대하여 섭리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대하여 인간의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지만, 사탄이나 악인들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그 모든 것을 합니다. 물론 구분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인의 악행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그 모든 것을 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의인의 선행에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했다고 말할지라도 반드시 그 의지를 선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면 스스로의 의지로 악만 행합니다. 그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으로 악을 악으로 갚으십니다. 강퍅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의인이 되는 것, 그리고 의인이지만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가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일뿐만 아니라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를 위한 열심을 낸 것조차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고전15:10).
이런 이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유일한 원인자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에 대하여 구분한다는 측면에서 제1원인과 제2원인 혹은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이라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제1원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먼 원인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제2원인 혹은 가까운 원인인 사람의 의지 등을 사용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섭리에 대한 고백 2항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제1원인인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과 관련해서는 만물이 불변하고 무오하게 일어날지라도(행2:23), 하나님은 동일한 섭리에 의해 제2원인들의 본성을 따라 필연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우연적으로 만물로 하여금 발생하도록 명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잠언 16장 4절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해 지으시되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지으실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죄의 원인자이실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죄조차 그리고 죄인조차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다스리시되 그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고, 그리하여 로마서 8장 28절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알고 믿는 것이 특별히 성부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8문입니다.
28문.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을 그의 섭리로 여전히 지탱시키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됩니까?
답. 역경(逆境) 중에서 인내하고(롬5:3, 약1:3, 시39:9, 욥1:21-22), 순경(順境) 중에 감사하며(신8:10, 살전5:18),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든든히 신뢰하며(시55:22,롬5:4), 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롬8:38-39). 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완전히 그의 손에 달려 있어서 그의 뜻이 없이는 아무 것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욥1:21, 2:6, 행17:25,28, 잠21: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의 위로와 구원과 관련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도 않고 그의 섭리를 믿지도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창조와 섭리를 알고 믿는 것은 우리에게도 유익함을 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연이 없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역경(逆境)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에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역경을 허락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가 돕기까지 인내하게 됩니다. 물론 역경이 있을 때 항상 인내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지는 일도 있습니다. 어쩌면 인내보다는 넘어질 때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주실 것까지 믿기에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인생을 살다보면 순경(順境)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물론 순경 가운데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임을 잊고 교만하게 마치 우리의 공로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다윗을 비롯하여 하나님께 칭찬 받은 왕들 가운데 보면 평안의 때 교만함을 나타내 보이는 일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꺾으십니다. 꺾으셔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많은 부분 징계를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모릅니다. 장차 있을 일이 역경일지 아니면 순경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데 있습니다. 가장 아끼는 아들조차 우리를 위해 내놓으셨다면 우리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로마서 8장 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동일한 의미에서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은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경이든, 순경이든 결국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문에서 비와 가뭄, 풍작과 흉작,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양식과 음료 등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우신 손길로 임하도록 그렇게 그것들을 다스린다고 설명하는데, 우리는 풍작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흉작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건강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질병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부가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가난이 우리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흉작보다는 풍작을, 질병보다는 건강을, 가난보다는 부를 소망하고 또 그것이 주어지더라도 결코 교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바가 있지만,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넘어졌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만 맡기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에게만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또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리문답 28문의 내용처럼 역경을 만나면 인내해야 하고, 순경을 만나면 감사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