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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봄 1부 - 개와 늑대 사이
1. 누구지?
누가 저 새들을 뿌려 놓았지
雪國을 돌아 달려온 해를
짹짹거리며 쪼아먹는
상냥한 반짝거림을
누가 저 빛을 쏟아부었지
깜깜한 밤을 한 두름에 꿰어
마른 나뭇가지 위에 올린
황금 화살을
누가 저 종소리를 걸어 놓았지
닫아놓은 빗장을 열고
푸릇푸릇 밟고 와
흐드러진 꽃눈 개비를
누가 내 상처에 꽃을 피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얀 얼굴로 도드라지게 웃는
이 포옹을
2. 개와 늑대 사이
서산에 해 걸리우고
머리 위 달 뜬 시간
직선에 하루를 바친 그대들
휜 등,
둥근 어깨 잇대려고
직각의 공간에서 쏟아져 나와
원을 향해 모여든다
모두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시간의 문틈에 끼어
행복한 그대가
보아선 안될 것을 보거나
꼭 봐야 했을 것을 보거나
하여,
어디선가 놓쳤을 조각을 찾아
시간을 표류하는 것이다
그 시간은 개와 늑대 사이
아주 낯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그대가 그대를 찾아가는 사잇길
*개와 늑대 사이: 해가 어스무래 질 녘
3. 무명시인에게
당신 산 깊은 골짝 찾아드느라
발이 성치 않았겠습니다
거기 꽃 핀 듯이 홀린 듯이 가는 길이
무척이나 아팠겠습니다
동그란 하늘, 바람 자는 골짝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겠지요
엉겅퀴 무성한 숲 헤쳐
한 편 두 편 일군 화전이
목숨 같았겠습니다
저 소주 두어 병 등짐에 담아가
당신이 빈(貧) 속에 술 부리는 동안
몸소 심으신 소박한 꽃밭에
헌 속을 부리도록 허락하실는지요
딴청 꽃 한 송이 따
가슴에 꽂고 꽃이 되어도
짐짓 모른 채 하실는지요
천리향인 듯 향기가 오랩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빈(貧) 마음에
꽤나 찾아들겠습니다
4. 궐곡 저수지에서
저수지를 얼음 끌로 내려쳤다
짜 아아 아아 아앙
물 깨어나는 소리 십 리를 간다
"겨울철 별미는 누가 뭐래도 빙어회가 단연 으뜸이지"
어머니 뒤섞인 시간 속에서 흐드러진 맛을 매만진다
물의 뼈가 둥근 배를 열자
아침 햇살이 심연을 뚫고
내 몸에 담긴 지구의 46억 년 기억과 마주쳤다
간극이 환하다
고패질에 꿰여
찰칵찰칵 찰나를 꿈틀거리는 빙어
강 건너 먼 길을 돌아 나온 아버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쉿! 하시고는 영원의 문을 여셨다
46억 년을 다 삼켜도 찾지 못한 비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해온 첫 시간
이 비린내 펄떡이는 우주를 열고
어머니 들어가신다
5. 첫사랑 보내다
딸그락
사랑이 금속판 위로 떨어졌다
명쾌한 마침표
휘청 세상이 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생 어느 귀퉁이 해가 들고
눈먼 운명으로 태어나
뿌리째 앓던 열여덟 첫사랑
사랑이여 잘 가시라
거즈 악물고
저 피 맛 같은
추억,
뢴트겐에서 발치하다
나는 그대 떠난 꽃 자국
6. 옛집 앞에 서다
조막손 굵어질 때까지 나를 키운 건
아버지의 옛집이었다
관광버스 꽁무니를 따라가 손에 쥔 과자 봉지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던 그들이 베푼 허기진 과거를
달팽이처럼 지고 다녔다
노을을 등지고 떠나온 고향 집
삶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념을 의지 삼아
미나리 너울대던 마을
빨간 자두 농익던 마을을 조랑조랑 떠나왔다
뒤돌아보지 마라
앞을 보고 걷지 않으면 엎어진다
아버지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건 파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는 집을 버려두셨다
나는 무른 땅이 위태로울 때마다 되돌아가
아버지의 견고한 절망과 마주 섰다
똑똑히 보아두어라
이것이 절망이다
절망은 모두 이곳에 두어라
이제 내 아이의 손을 잡고 불현듯 옛 앞에 섰다
7. 가재
계류를 버티는 힘은 껍질이다
변화하는 내부와 변화하지 않는 껍질과의 공존이
어려울 때 가재는 탈피를 한다
돌 등을 아리는 봄볕이
고양이 등을 타고 산을 넘을 때
비루한 현실에 대항하며 맹렬한 언어로
불안을 파는 살점들의 비린내는
이단을 불허하는 이단이다
비틀며
발톱을 뽑으며
속을 까내며
죽기 살기로
둥그런 머리뼈가 산도에 눌려 타원이 되면 탄생이다
드디어 날 것이다
계류를 따라 도는 산이
저 스스로의 힘으로 그림자를 휜다
8. 전나무 숲길에서
월정사 전나무숲 그늘로 스며들면
숲이 함구한 묵음을 듣게 된다
나무마다 정령이 일제히 깨어나
풀 내 나는 목소리로 길을 트는데
그 길 끝에 닿으면
침몰하던 사랑이 별을 품고 서 있다
마음은 마음 밖으로 나가
피안에 창을 내고
소용돌이치는 바닥과 마주한다
슬픈 그대여
날이 저물면
사랑을 끄고 어둠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
그대의 오늘이 여전히 캄캄해서
한 잎 지는 꽃잎에도 괴롭거나
사랑이 뱀처럼 감아올 때나
오욕이 그대를 삼키려 들 때는
월정사 전나무 숲으로
오시라
9. 저녁
사람이 물질로 변하는 낯선 상실을 견디고
슬픔이 전라全裸로 고여 드는 저녁에 서면
짐승의 울음은 어둠을 물고 와
조용히 윤곽을 지우며 간다
철철 피가 흐르는 이 시간엔
태어나고 죽는 것이
인류의 일상이었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겠다던 오기도
내가 선택한 삶의 결과였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목 끝에서 자전自轉하는
서슬 퍼런 문장이
오문처럼 탈락하는 저녁
10. 부둣길에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도 좋다
떠나보내지 않아본 사람은
머물지 않는 곳
그리움조차 풍경이 되는 곳
돌아오마 약속하지 않아도
기다림은 숨이 되고
나도 이곳에서는
너를 아주 오래 기다려도
될 것 같다
11. 고래를 잡으러 갔었네
고래를 잡으러 갔었네
거기에 고래가 있었네
고래들이 있었네
힘차게 뿜어내는 물기둥만 보았네
고래가 거기 있다는 것만 보았네
막막한 섬
멸종되어가는 신화
수몰된 고래의 등
고래를 잡으러 갔었네
거기에 고래가 있었네
화석이 된 고서의 문자 같은
서글픈 분노 같은
12. 2%
나는 그렇다네
늘 변명이 많지
열 번 간 길 잃고 헤맨다고 놀리면
길치도 병이라고 하지
현관문에 열쇠 꽂아두면
도둑 든다고 지청구할 때
필요해서 가져가겠지 한다네
산더미처럼 밀린 집안일
그게 뭐 중요하냐고
오늘은 책 읽고 음악 듣고
낮잠도 한숨 자야겠다고
몸에 좋은 음식은 안 먹는다고 끌탕을 하면
무엇을 먹든 즐겁게 먹으면 된다고 하지
어떻게 사냐고 물으면
아직 사나흘 먹을 쌀이 있으니 걱정 없다고 한다네
나도 안다네
태평하고 무능하고 실수 잦고
나사는 반쯤 풀려 있고 몽상가에다
주책없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
이 모든 걸 통틀어 한마디로 변명할 수도 있다네
그나마 지성과 외모가 받쳐줘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말일세
재물이 없으니 내겐 거짓 친구가 없다네
태평하고 무능하니 몸도 마음도 한가하지
또, 상상이 많아 늘 즐겁다네
빈틈이 많은 덕에 이웃과는 거리감이 없지
건망증이 심해서 미움도 잊어버린다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반푼이라고 하지
요즘 신세대 표현으로 2%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다네
그렇지만 말일세
이런 내가 좋다네
사는 게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게 뭐 별건가
공짜 행복은 없다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삶이 덧없다네
그리고 지성과 외모가 되니
기죽을 일도 없다네
그런데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내 지성과 외모에 감동하지 않는 표정인걸
13. 황룡사지
하늘이 빚은 터에
주춧돌 세워놓고
풀빛으로 천 년을 기다렸네
금당이 허물린 꽃자리
바람은 되돌아 흐르고
변치 않는 마음만
사랑이라 불리었네
말씀을 적시던 뒤란 우물엔
그 이름 푸르게 깃든 황룡사
이 땅 굽이쳐 길을 잃어도
가시는 길마다 길이 되나니
그대 발자국마다 씨알이 돋겠네
천 년의 꽃이 들풀처럼 성하겠네
하여 빛이 어둠을 밀고 오면
사랑은 몸을 일으켜
찬란히 오시라
14. 폭설
색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고공에서 그러잡고 매달린 날들
풀썩 지상에 엎어져
낯 질린 저 창백
벌건 대낮에 무른 달빛이
뚜벅뚜벅 걸어와 길을 만든다
길 끝이 희다
서늘한 것들 견고한 것들
모두 그 길로 간다
뭉뚱그려진다
쓰윽 문지르자 공(空)이다
15. 괴리(乖離)
기억 푸른 곳에 겨울비 내립니다
사람들은 다리를 끌며
로또 판매점으로 가고 있어요
오늘은 월요일
딱히 할 일없는 저는 천천히 하루를 찢어내요
온도가 너무 낮아서 어느 봄날 찾아온
첫사랑 기억을 가져왔어요
조금 식긴 했어도 따듯하군요
정의는 사라졌다!
그가 절규합니다
모든 외침은 죽어갑니다
신과 사랑과 진리는 교회 종탑 위에 걸렸지요
이미 낡은 그가 길을 잃고 희미해지는군요
사랑 때문에 나부끼던
바람의 기억들이 지워질까 봐
얼른 그의 이름을 외워둡니다
내일도 모래도 사람들은 다리를 끌며 로또를 사겠죠
완벽한 타협은 물의 방식을 닮았습니다
16. 누락
무심한 생각이 오후를 점멸해 버린 골목
어디선가 고양이 졸음 덜 깬 몸짓으로
기품 없이 어슬렁 나와 볕 아래 누웠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배고픈 개도 헐떡거리며 지나갔다
유모차에 몸을 반쯤 눕힌 아기가 다리를 한 짝 흔들고
표정을 벗은 할머니는 사거리를 지나 아기와 함께
시간을 덜어내며 온 길을 가고 있다
가게 안 상인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웃다가 졸다가
가끔 헛기침하기도 한다
그 골목엔 오롯이 따가운 볕과
지루한 시간만 넘쳐나고 있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근심을 잠시 잊고
졸음으로 치닫던 그녀는
기지개를 켜고 턱이 빠지라 하품을 하다
누가 축복이나 한 듯
존재마저 잊히는 평화로운 이곳에서
눈부신 4월, 나무가 보내는 싱그러운 눈짓
꽃의 낙화 그리고 설렘 등에 대하여
잠시 황홀경에 빠졌다가 봄의 뒤편
생각이 쉬는 그늘에 다시 앉는다
17. 유월이여 오라!
유월이여 오라!
섧고 꽃 진 자리에
푸른 잎의 약속으로 오라
빛나는 태양은
우리들 머리 위에 있고
뜨겁게 피어오르던 덩굴장미를
아직도 기억하노니
저마다의 사연일랑
사위어가는 꽃잎에 적어놓고
마주 잡은 손, 초록 물올라
하늘까지 뻗어보자
18. 10월을 완성하다
‘쓸쓸’이 섞인 부드러운 입김으로 호흡했다. 그리고 잠시 서서
몸을 털었다. 발치에 꽃 비늘이 만장으로 찢어지는 흩날림을 보면서
오상고절을 계절 끝까지 뿌려 두었다. 하늘은 잡아당겨 내려놓고
가을볕을 쓱쓱 문질러 몸에 발랐다. 키득키득 돋아나는 웃음소리는
바늘로 콕콕 찔러 놓았다.
이제 잎새를 씻어내야 한다.
서서히 체온을 낮추다가 찬 입김을 훅훅 불어 넣으니
온 산과 들이 물든다.
바람, 꽃, 하늘, 가을볕과 단풍까지
여기에 딱 하나 더,
그대라는 우주!
19. 해체 사건
미세한 혈관까지 자라나서 온종일 물을 마셨어요 처음엔
돌 나물같이 사근사근 나더니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거예요
무른 것으로 하여
빙하처럼 영속된 결빙들이
하르르 무너져 내릴 때
굳은 것에도 뿌리가 자라나 봐요
정점을 향해 잠식해가는 혈류를 보아요
아, 나는 곧 꽃이 될 거예요
20. 포옹
내가 다니는 골목
자고 나면 보는 하늘
바람이 휘돌아 오면
어느 집 문간을 기대다 왔는지
알 수 있는 언덕길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엉치께에 파자마를 걸친
수세미 머리 남자가
잠 가득한 눈 반쯤 뜨고
조리대 앞에서 커피를
내린다
입은 하품을 참느라 벌어져 있다
그녀는 그를 가리키며 그라고 했다
그녀는 또 깔끔하고 부드러운 인상에
스티치를 넣은 핸드메이드 슈트를 입고
따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그라고도 했다
나는 그녀의 순진한 눈을 노려보았다
그와 그인 그를 사랑하지 못하기로 했다
그냥 그와 그인 그가 그인 그를 사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와 그인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사랑하던 그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를 사랑하기로 맘먹자
거꾸로 숙여 찍은 언덕길이 보였다
그녀가 그 길을 가리키며 그라고 했다
21. 동백꽃 질 때
신기루인 듯
삼월 천지 흰꽃발 나린 뒤
닦아낸 하늘에서
불에 덴 바늘 다발
부시게 쏟아지는데
이 좋은 봄
맑은 것이 마음 안에 그득 들면
묵은 격정
각혈하듯
명치끝에서 뚝 떨어지다
22. 달동네
옴팡지게 볼록한 이곳은
축복받은 땅입니다
어둠이 새벽을 먼저 여는 간절곶
부드러운 달빛이 가장 먼저 닿는 곳
내려 누운 강물 파닥이는 밤엔
몸 그림자 헹구며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들의 고향
달 비늘 묽은 새벽이면
온 산 황금빛 불 번지며
울컥 아침을 덮쳐오는
감격의 땅 입니다
23. 너의 안부를 묻는다
위대한 여름은 갔다
늘 내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너
사랑을 앓다가 노랗게 단풍 든 네 얼굴
여름의 정수리에서
해가 뜬 바가지 물을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이 가을로 왔다
뜨거웠던 지난여름은 열매를 맺고
이제 나는 사랑을 기억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성숙했다면
우리는 사랑을 의심했을까
계절이 변화하듯 사랑도 모습을 바꾸는 가을
너는 지금 어디쯤에서 낙엽 지고 있는지
어떤 색으로 물들었는지
나만큼이나 붉어졌는지
이 가을 너의 안부를 묻는다
* 물바가지에 든 해를 마시고 범일 국사를 잉태했다는 설화 인용
* 위대한 여름은 갔다 - 릴케의 '가을날'에서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인용
24. 빛나는 것은 찬란하다
빛나는 것은 찬란하다
은빛 물비늘이 그렇고
화사하게 웃는 입술 사이 가지런한 이가 그렇고
손뼉 치는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그렇고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그렇고
네가 나를 위해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이 그렇다
낮엔 햇빛으로 밤엔 달빛으로
너의 눈물이 머금은 소망
아무것도 아닌 나를
빛나게 하는 너의 사랑
25. 기적
얼마나 오랜 이야기인지
앨범 속 흑백사진에서 톡 튀어나와
어미 닭 꼬리를 물고
졸졸 따라가는 병아리들 이야기입니다
하얀 달빛이 목련의 잎만 한 창문으로 들어와
방안을 환하게 밝히던 어느 해 겨울이었습니다
온종일 국수 오십 원어치로 허기를 달래주고
물만 마신 엄마의 가슴이 쿵쿵 뛰는 밤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손을 모았습니다
첫째 둘째 병아리는 하품합니다
막내 병아리는 모은 손을 꼬물거립니다
셋째 병아리는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먹을 걸 주시지
하늘에 계신데
비행기를 타고 오실까
밤이 깊어 달빛은 고요하게 빛나고
하늘에선 성탄을 알리는 함박눈이
온 세상을 순백으로 덮었습니다
긴 울음소리를 가슴에 담은 어미 닭은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을 쓰다듬다
새벽녘 눈 밟는 소리로 외할머니를 맞았습니다
자다 깬 병아리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 있습니다
셋째 병아리는 그때 알았습니다
서슬 퍼런 할머니의 등이 가느다랗게 떨리며 슬퍼 보인다는 것을
하느님은 비행기를 타고 내려오시는 게 아니라
대신 누군가를 보낸다는 것을
26. 진화(進化)
외로움도 몸에 배면 낡는다
내 그늘이 네 뼈에 곪을까 염려하여
사랑을 비켜섬으로써
미완(未完)이 생을 지탱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섭지 않다
너를 향한 불 뭉치가 자고 나면 죽어있고
약간의 비애가
사등이를 드나드는 빛기둥과 마주 앉으면
나는 여전히 너를 순하게 사랑한다
설령 뜨겁지 않은 죄를 범했다 해도
사랑하지 않은 죄는 짓지 않았으므로
미완(未完)이 그늘 든 내 몸을
고유한 필적(筆跡)으로
새길 수 있게 허락하였다
훗날 이 몸은 슬고
낡은 외로움은 밝을 것이다
그제야 내 사랑이 완성되겠다
27. 인화(印畫)
밤사이
함박눈이
내렸다
잠결에
창을 열고
찰칵!
기억 한 줌 찍었다
쓴 사랑에 익숙해져 가는
중독된 쓸쓸에 흰 꽃들이 박혔다
28.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마음은 이미
코스모스 핀 들길을 지나
추억을 밟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랑이어서
떠나올 땐 아무것도 남지
않는 줄 알았는데
삶의 뒤편에서 젖어 울었어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홀로 가을을 걷지만
그대 곁을 스치던 바람
그대가 보았던 파아란 하늘
내게도 머무니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이여 고맙습니다
29. 만년설
베른 알프스산맥 융프라우산 설경을
본적이 있는가
태고의 만년설이
희다 못해 發光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품어낼 수 없어도
화강암 위로 차곡차곡 담아낸 시간의 행적을
나 보았느니
아이거와 묀히의 허리를 뚫고 올라와
인터라겐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그대 처녀여
숭고한 결정체여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신의 전지전능을 찬미할 때
사람도 거룩함을 나 알았느니
이곳에서 기적을 보다
30. 회생의 전말
구급 대원들은 미끄덩거리는 몸을 담요에 싸 들것에 싣고 승강기를 탔다고 했다
직립할 수 없었던 그는 날 것으로 누워 십팔층을 내려오는 동안 하얗게 질식해가는
소방관의 얼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땀의 찝찔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한다
그 잠깐의 시간에 육과 혼이 당기고 놓치기를 수차례, 끝까지 합일할 수 있었던 것은
온몸에 비누칠하고 벌거벗은 채 들것에서 흘러내리는 사십이 인치 허리가 낯깍여서란다
트럼펫에서 나오는 장송곡 우묵 파 놓은 묏자리에 든 관 주위를 둘러싼 검은 옷의
인척과 지인들 그리고 숙연해 보이는 혹은 못내 아쉬워 보이는 흰 국화의 낙화 의식
이쯤을 염두에 두었을까
그가 저승문을 여닫으며 늘어놓는 핑계는 점잖지 못한 육에의 일탈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저 약은 놈 저승사자 따돌리기는 식은 죽 먹기일세 하며 놀림 반 위로 반 건네는 말을
한바탕 웃음으로 받아치는 그의 호기 어린 얼굴엔 삶에 대한 무서운 집념, 꺾이지 않는 투지가
넘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년시절 잘려 나간 그의 다리가 홀로 서자마자 신기하게도
판박이처럼 닮은 업둥이 그 아이가 그의 희어 버린 머리카락을 잡고 일어나 기우뚱거리며
걸음마를 배우는 중임에 그 품새만 보면 귀에 걸린 입과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이러니하게
화폭이 되는 것을 보고 서로 다른 피를 섞어놓고 빨간색이니 같다고 우기는 것쯤이야
타당한 생각이 들어 그 끈을 잡고 저승문도 제 맘대로 드나드는 놀이라고 하면
그래 이놈아 좋것다 하고는 함께 껄껄 웃어넘길 수밖에 별도리가 없지 않은가
31. 언 길을 보다
어둠도 잠들어 깊은 밤
겨울 숨만 소리치는 밤
성에 낀 창으로
조심조심 새벽이 온다
적막도 이르지 못한
빈 들판 그으며
언 길을 낸다
길 위엔
얼음보다 차가운 고요
물처럼 찼다
*최종상 시인의 '언길을 보다'에 답하여
32. 따듯한 슬픔
숲길을 오르면
싱싱한 슬픔을 먹고
푸르러지는 나무가 산다
사람들은 혼란한 상처에
조용한 색깔을 바르고
깊이 품었다 다친 사랑도
숲에 두고 간다
모두가 털어버려 쓸쓸한 숲길엔
고독보다 체온이 무성해지고
놓쳐 성긴 자리 월훈(月暈) 돋으면
우리는 측백나무 한 그루와
나무를 세우고 있는 맑은 숲
못살게 그리워지는 것이다
사랑하여 슬프던
슬퍼서 더 푸르러지는
따듯한 슬픔의 숲이
33. 무엇이 더 소중할까
7년 동안 암흑을 견디고 나온 매미가 7일 동안 울고 있는
여름날의 오후 폭염이 난자한 거리에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만
부드러운 흙을 밟고 있었다 그 중 안경을 낀 아이는 몇 마리의
개미에 몰두해 있고 어린 소녀는 토끼풀꽃을 엮어 화관을
만들고 있다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거리와 연결된
동산으로 올라가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소년이 어린 소녀를 향해
웃자 나무 위에서 매미 한 마리 떨어져 죽는다
아이들은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그 거리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세세한 것들로부터 생기를 얻었고 그들의 놀이가 7일을 위한 7년의
기다림에 눈이 멀기 전까진 오늘의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34. 잔혹 봄
봄이 어떻게 왔느냐면
예리한 날이 살갗을 찢고 푸욱 끌려와 붉은 꽃을 울컥 피우며 왔어
음악을 좋아하던 의사는 비명, 마취, 국소마취라는 세 음표에
열심히 되돌이표를 붙였어
대지가 젖줄을 터뜨리며 오는 봄은
붉은 푸름이든 붉은 붉음이든 젖통이 파리해지지
그걸 알게 된 건 겨울 호흡을 끊고 온 전령이
그녀의 배꼽에 꽃씨를 뿌린 그때였어
칼날이 몸을 뚫고 내는 치명은 싸늘할 만치 뜨겁다는 걸
이만큼의 뜨거움이 없다면 발밑 이름 없는 풀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걸
수술실에선 감미로운 파바로티의 고음이 재생되고
의사는 긴장감이 주는 매혹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는데
힘없이 무너진 그녀의 맑은 눈빛이
호흡을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녀를 병실에 옮기고 맥박을 체크하면서
아직 이 봄이 가기엔 너무 이른 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냈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어두운 장막 뒤로 의식을 숨겼지만
언제나처럼 총총거리며 햇볕을 쫴는 무의식은 그녀를 찾아냈어
아이처럼 흑흑 대며 울던 그녀는 꽃이 필 때의 섬뜩함을 손금에 새겼지
때는 이른 봄이야
이젠 그녀를 업고 간 그늘을 전부 봉합한 의사만이
그녀가 놓치고 온 그녀를 기억하게 될 거야
35. 살아가는 이유
먹으려고 사니 살려고 먹니
살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살아야 하지
사랑하고 있니 사랑받고 있니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꿈을 꾸겠지
부자니 가난하니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자여도 행복할 수 있지
심부름을 시키니 심부름을 하니
시키는 사람은 머리가 바쁘고 하는 사람은 다리가 바쁘지
만족하니
언제라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준비가 되어있지
왜 사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느껴지는 것
손에 잡히는 것과 스쳐 가는 것
이 모든 걸 사랑하기에도 숨찬데
굳이 사는 이유까지 찾을 필요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