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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법>의 줄거리:
어떤 투자에도 흑자와 이익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투자 한 가지 알려드립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법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안 믿으셔도 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제까지 평생 하신 그 어떤 투자보다 말도 안 되게 쉽고 또 그 결실이 확실합니다. 이거 놓치면 바보 되는 겁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법
(마가복음 4:1~20)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법’
이 세상과 관계된 삶의 문제들이 생길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십니까? 저는 항상 제 마음을 먼저 보고자 합니다. 제목에 반영된 대로 마음이 옥토인 상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토인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 삶의 문제가 해결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제 인생은 대단치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는 일에 주목하는 것이 분명한 해답이 됨을 경험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돈 문제는 생깁니다. 그럴 때에 저는 돈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옥토로 유지할 수만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 또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고 또 16장 32절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유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마음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어떻게 옥토로 유지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마음의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반드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감히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0절 이후로는 앞서 나타난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이 나타납니다. 14절을 보면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마음이 옥토와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회사에서 어떤 동료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매몰찬 사람이 다른 동료에 대해서는 한없이 따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어떤 대상에 대해 옥토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대상에 대해 가시떨기 같을 수도 없고 옥토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옥토로 유지해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삶의 모든 문제 또한 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참 놀라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이 진실을 알고 계신 분들께서는 더 큰 은혜를 받으시길 바라며, 아직 이러한 경험이 없으신 분들에게는 이 말씀의 은혜가 이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마음의 네 가지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길가, 돌밭, 가시떨기, 옥토로 나누어집니다. 이 차이를 명백히 알기 위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되게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공통점을 기반으로 네 가지 마음상태의 차이점을 비교해보자는 것입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같은 경기를 하더라도 성별과 체급이라는 기준으로 선수들을 가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들을 귀는 곧 믿음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귀에 들려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사탄의 말씀 또한 엄연히 존재합니다. 굳이 사탄의 유혹을 말씀이라고 부른 이유는 사람들이 소중한 가치로써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하기 위하여 다분히 냉소적인 관점에서 말씀이라고 칭해보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듯이, 사탄의 말씀을 들으며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말씀에 대해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결코 옥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에 대해 옥토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의 마음은 옥토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이 믿음의 과정에는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추구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마음 채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은 신명기 6장 4~5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앞의 여호와는 단순한 명칭이고 뒤의 여호와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 외의 모든 대상은 스스로 있지 않고 지음을 받은 것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비어있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흡입력을 총동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모든 존재들 중에 유일하게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대상들은 스스로 계신 분에 의해 지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공백을 온전히 채우고자 한다면 스스로 계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대상도 마음의 공백을 온전히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심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마음에 담고 온전히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삶은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실 것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반면 사탄의 말씀은 이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옥토가 되지 못하는 길 가, 돌밭, 가시떨기의 마음은 모두 사탄의 말씀을 믿고 옥토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음을 갖고 옥토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로도 사람의 마음은 채워질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들어졌기에 사람이 보기에도 소중하게 여길만합니다. 이러한 것들로 얼마든지 마음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사탄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나 헌금이나 충성과 봉사를 막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풍부한 재물은 마음을 채우기에 무척이나 합당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재능이 넘치는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채우기에 또한 합당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바로 사탄의 말씀에 대해 옥토가 된 상태입니다. 사탄은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근면하고 성실할 것을 요청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고진감래, 성공한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라, 노력하는 만큼 얻게 되리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만 한다고 유혹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말씀이라는 두 가지 말씀에 대한 반응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을 옥토로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옥토로 유지될 때에 그 결과는 영육 간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로 맺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의 실제 삶의 모습을 예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삶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재정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나이가 있으니 건강 문제도 생겨납니다. 최근에 안과에 갔더니 백내장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무릎은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삐걱거립니다. 늦게 낳은 아들이 있기에 자녀문제 또한 때때로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해 제가 반복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마음이 옥토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여겨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마음이 옥토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앞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말을 기준 삼게 하는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깜깜한 밤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 위 일엽편주에서 주무셨습니다. 주님께서 풍랑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사건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강릉에 살고 있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갑니다.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이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주무실 수 있었을지 생각하고 저에게 있는 세상의 문제들과 비교해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에서 대답이 정해집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삶에서 생겨난 이런저런 문제들로 고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이 나오고 나면 마음 채움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나의 마음을 압박하는 세상의 문제들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공백에서 생겨난 흡입력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갖는 것이 ‘들을 귀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하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산 아래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옥토가 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의 상징입니다. 이 사건을 또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다면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반응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겨났다면 실제로 마음은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길을 바로 예수님이 만드셨습니다. 세상 문제에 대해 근심하던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이르신 주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일을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도 좋은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이 돌을 들어 머리를 찍어 내리는 상황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고통 앞에서도 마음의 평강은 유지되었고 오히려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마음이 옥토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옥토가 된다면 세상 문제들에 대해 손대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근심이 생기더라도 그 상태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옥토가 될 수 있다면 풍랑 속에서 주무신 예수님과 같은 평안을 누릴 것이고, 마음이 옥토가 될 수 없다면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제자들과 같이 걱정과 염려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풍랑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장이 될 것인가 제자들의 입장이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처럼 되기로 하였습니다. 변화산의 베드로도 세상의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참수형을 기다리던 중에 천사가 와서 발로 차도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풍랑 속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두려워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의 편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통해 마음이 옥토인지를 확인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사탄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게 된 상태입니다.
길가는 하나님의 말씀은 염두에 두지 않고 세상의 가치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사탄은 “마음은 하나님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 결혼을 잘 해야 채워질 수 있다, 자녀가 엘리트코스를 밟으면 채워질 수 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상태가 바로 길 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실은 이러한 마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만으로 기쁠 수 있다는 말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낍니다. 사탄의 말씀에 대해 믿음이 확고하여 옥토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요체인 하나님만이 마음 채움을 위한 기쁨거리 만족거리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이른다는 말씀이 도대체 들리지를 않습니다. 전도하시면서 비슷한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길가 같은 마음상태입니다.
돌밭은 바위 층 위에 흙이 얇게 덮인 상태입니다. 해가 뜨면 금세 달궈지기에 싹도 빨리 납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릴 토양이 없기에 금세 말라죽고 맙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기쁨이고 만족이심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현실에 도무지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흙 밑의 바위 층처럼 너무도 굳건하게 마음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과 만족이 되심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견고한 바위 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버리고 아내 사라까지 포기한 것까지는 얇은 흙에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세에 얻은 이삭만은 아브라함의 생명보다 소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옥토와 같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이삭 바치기를 선택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시고자 먼저 재산을 몰수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재산은 욥의 마음에 바위 층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열 명의 자녀들을 한꺼번에 죽게 하십니다. 그런데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자녀들도 욥의 마음에 바위층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건강까지 빼앗아 가십니다. 하지만 욥은 그래도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건강까지도 욥의 마음에서 바위층은 아님을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특정한 대상에 대한 사랑과 애착은 얼마든지 우리 마음의 바위층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바위층이 존재하는 한 말씀은 삶에서 뿌리 내릴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떨기가 있습니다. 18~19절을 보면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욕심은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것입니다. 내 것처럼 여겨지지만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대표적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삶입니다. 내 몸도 본래 내 것이 아니며, 배우자도 내 것이 아니며, 부모도 자녀도 내 것이 될 수 없으며, 직장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책임 하에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책임지고자 할 때에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지라도 삶에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질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주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마음이 옥토인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나면 삶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여 가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길 때에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돈 걱정을 했을까?”라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자녀 문제가 생길 때에도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자녀 걱정을 했을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물음을 가지며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채움의 길로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고 삶의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나가시는 옥토의 주인공들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선포되었으니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옥토로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이 마음과 삶에 맺히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날마다 간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