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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세례 불세례가 일상인 삶>의 줄거리:
성령세례를 받으셨습니까? 불세례는요? 그렇다면 물세례는 분명히 예배당에서 세례식을 통해서 받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세례의 의미를 알아야 대답할 수 있겠지요. 한 가지만 분명히 하지요. 세례는 그 의미상 날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어떻게 날마다 성령과 불로 세례 받는지 알아봅니다.
성령 세례 불세례가 일상인 삶
(누가복음 3:1~20)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 세례 불세례가 일상인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 세례 불세례가 일상인 삶’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일상적인 사건으로 반복하여 경험하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가장 즐거워하는 취미는 무엇입니까? 성령 세례와 불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어떤 취미도 더 이상 즐거울 수 없습니다. 성령 세례와 불세례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기에 반드시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이보다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에 관한 언급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세례 요한의 탄생을 장황하게 기록하였던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다만 세례 요한의 사역과 연관된 기록들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간략한 편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소재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와 불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이유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선지자였음이 바로 이로부터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게 될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확실하게 받기 위하여 물세례를 주는 예비사역을 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세 가지 세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세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의미를 아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성령 세례나 불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16절을 보면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을 직역하자면 ‘성령과 불 안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령 세례와 불세례가 같은 것이냐 혹은 다른 것이냐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갈라집니다. 저는 성령 세례와 불세례가 구분되지만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이 성령 세례만을 언급하였더라도 불세례는 분리 될 수 없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과 팔은 구분되지만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이 움직여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세례는 반드시 성령 세례에 따라오고 성령 세례는 반드시 불세례를 동반합니다. 성령 세례 없는 불세례는 없으며 불세례가 따르지 않는 성령 세례는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먼저 물세례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세례는 우리가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마음에서 좋아하는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가지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생기리라 믿어지는 대상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마음에 담게 될 때에는 더러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물세례는 마음이 더러워졌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돈이 잘 벌리지 않자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합니다. 그러다가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는 중에 돈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돈을 들여놓음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였고 이것이 더러운 일이며 저주에 찌든 결과임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마음이 더러워졌고 저주에 찌들었음을 깨달았다면 그러한 삶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 상태가 계속된다는 것은 더러움의 확장이고 저주의 번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물세례의 핵심취지입니다.
생각만 해도 움직이기만 해도 더러움이 발생하고 죄와 저주에 찌든 속을 토해내는 것이 삶이라면 죽는 것만이 옳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배우자나 자녀에 대하여 저주와 더러움을 묻히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장에 나가면 사업을 저주와 죄악으로 말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나는 죽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 물세례가 의미하는 회개의 깨달음입니다.
한편 본문 7절을 보면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하였습니다. 목사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복음을 듣겠다고 오는 사람은 누구나 반가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독사의 자식이든지 아니든지 일단 복음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이 귀한 기회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생각으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뱀의 특징으로부터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뱀은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비어있는 마음이 흡입력을 발휘하면서 무엇인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붙드느냐는 것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붙들도록 선택받은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마음을 붙였던 대상은 세상이었습니다. 돈, 출세, 형통, 권력, 인기 같은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의 배를 붙이고 사는 모습이 마치 뱀과 같았기에 요한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했던 것입니다.
물세례에는 반드시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것들을 소원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더럽고 저주에 찌들어 있는가를 깨달을 때 회개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물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침례를 통해서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물세례는 나는 죽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가진단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의 동선은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진리 안에서 물세례는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돈, 건강, 자녀의 형통 같은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던 내가 더럽고 저주받은 상태였음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세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나 바람을 가지고 있다면 예배당 안에서 세례식을 받았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물세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일까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동선을 기준으로 볼 때,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성령 세례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하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늘나라와 그곳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의 마음이 연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물세례가 상징하는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힘을 통과하기 전에는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세례를 통과하여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제 돈을 좋아하던 만큼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성공과 부흥을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만큼 하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목사님들 같은 경우는 교인이 한 명이라도 늘어나는 것을 꿈에도 소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는 물세례의 의미가 충족되면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는 성령 세례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공과 부흥 대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정치인들은 당선을 가장 좋아하고 직장인들은 승진을 가장 좋아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형통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은 건강의 회복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물세례의 과정을 거치고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 세례의 효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세상보다 더 좋아하게 되고 더 우선적인 현실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이는 어떤 것들보다도 더 강하게 보이게 하십니다. 들리는 어떤 것보다도 더 강하게 들리게 하십니다. 만져지는 어떤 것보다도 더 강하게 느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의 효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안개 속에 계신 것 같이 희미하고 계신지 안 계신지도 분명히 느껴지지 않는다면 성령 세례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령 세례의 증거를 쉽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담배를 끊게 되었다는 말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담배를 끊으신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담배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셨다고 합니다. 담배뿐만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 담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가족들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 세례는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고 강하게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 앞에서 철저하게 물세례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물세례에 충실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려서 돈이 많이 벌렸으면 좋겠다, 배우자나 자녀가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함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이 지속되면 일에도 가족에게도 나의 더러움을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러운 상태에서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로써 죽었으며 무덤에 묻혔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가 나를 괴롭히든 혹은 행복하게 해주든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며 물세례의 의미를 실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배우자 앞에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세례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관건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물세례의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물세례의 의미가 완성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성령 세례는 약속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님이 오셔서 눈앞에 보이는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강하게 보이게 하시고 들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가장 좋은 분으로써 마음에 느껴지게 되고 소망의 전부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물세례의 의미를 실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에 연합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할 때에 성령 세례는 약속을 따라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온 천지에 하나님만 보이고 하나님이 가득하심을 느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아름다운 과정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 세례가 일상적인 체험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불세례란 무엇일까요? 불세례도 예수님의 동선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은 물세례의 의미가 충족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것은 성령 세례의 의미가 충족된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불세례는 우리가 보통 때 이야기하지 않은 또 하나의 동선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까지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공생애로 이어지는 동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만 행하신 공생애의 동선이 있습니다. 이 동선이 불세례와 연관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불세례는 나에게 주어지는 힘이고 에너지입니다. 실제로 불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연소의 과정이며 불순물을 태워서 재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재로 만드는 불의 특성은 심판과 진노의 상징으로써 자주 사용됩니다. 다만 우리가 받고자 하는 불세례는 심판과 진노가 아닌 삶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세례는 모세가 소명을 받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에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불이 붙었음에도 떨기나무는 재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상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마주한 모세는 사명을 받아 애굽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200만에서 250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켜 광야로 이끌어 사십년간 인도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주셨던 것은 지팡이 하나뿐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물세례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좋아하던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 세례를 받고 나면 세상에서는 더는 좋아할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며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여전히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다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에 세상에서 의욕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불세례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뜻을 주십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의욕과 동기와 힘이 제로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최고로 좋기에 이 세상을 살아야 될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으며 동기부여도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루어집니다. 출애굽과 같은 큰 사건을 일으키실 수도 있지만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사소한 사건들로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지 않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불세례를 주십니다. 할 수도 없고 할 능력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힘을 주셔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이 이 땅을 살아가게 되는 힘의 원천으로써의 불세례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2~3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의미를 충족하게 되었고 더는 세상을 꿈꿀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나라의 독립을 꿈꾸고 예수님이 왕이 되신 나라에서 장관이 될 꿈을 가졌었지만 더 이상 그러한 바람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하늘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을 갖고자 하는 마음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1장을 보면 아직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질문했던 내용이 나타납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도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것이었고 다윗 왕국의 전성기가 재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을 경험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이들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한 제자들의 어떠한 행적에서도 이전과 같은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나라가 언제 독립할지 다윗 왕국이 언제 재현될지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대신 하나님을 바라게 되는 것이 성령 세례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 세례에 뒤따른 것이 불세례였습니다. 다시 3절을 보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혀는 입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뜻과 생각이 제자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와 전파된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고 물세례의 의미를 충족시킨다면 성령 세례는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제일 좋아하는 성령 세례의 의미가 충족되면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불같은 에너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무서워서 떨며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불세례를 받았을 때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불려갔던 산헤드린공회는 일찍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더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를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세상을 살아가야 될 이유도 명분도 동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불세례의 힘을 통해 주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물세례의 의미를 충족시킴을 통해서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일상적으로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즐겁고 재미있고 유익한 취미는 없습니다. 또한 절대적인 삶의 요소로써 붙잡고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의 의미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성령 세례와 불세례의 의미에 대해 알았습니다. 성령 세례와 불세례가 우리가 날마다 해나갈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