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안 며느리들이 세종에서 회합을 할 예정이다 누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지난 2~3일 눈이 많이 와 처가 차 운전하는데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내가 운전사 노릇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천안 외곽을 벗어나자 눈내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요즘 강우 및 강설은 좁은 지역을 폭격해 지역 편차가 심하다
세종에 도착 내려주고 나는 가까운 부강면을 찾았다
보만정 및 검담서원을 찾았다
검담서원은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강학공간이다
동춘당 송준길은 문묘에 배향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서인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조선후기 양송으로 불리며 노론의 전제정치를 주도하게 만든 인물이라 노론 그들이 조선후기를 지배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협력한 일제강점기까지 무난하게 그들의 유적은 잘 보호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현대까지도 그들의 유적지는 곳곳에 산재해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들을 나라로 만들려고 나라 곳곳 향교마다 그들을 추앙하도록 해동 18현의 한 인물로 남아있게 한 것이다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검담서원의 묘정비와 강학공간으로 이용했던 정자인 보만정이 여기에 있다.
보만정은 원래 현종 10년(1669) 동춘당 송준길이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려고 이곳 검담에 세운 정자이다.
숙종 20년(1694)에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검담서원을 세웠는데, 이 때부터 보만정은 검담서원의 강학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이 훼철될 때 함께 없어졌다가 1920년대 초 다시 세워졌다.
보만정 앞뜰 가운데에 서 있는 검담서원 묘정비는 받침부분과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영조 42년(1766)에 세워진 것으로 김원행(金元行)이 글을 짓고, 손자의 손자인 송명흠(宋明欽)이 썼다.
보만정은 조선 후기 강학공간으로서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건축적으로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로 접어드는 과정에서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묘정비는 검담서원의 내력 및 동춘당 송준길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관리하는 주체들끼리 이익싸움이 났는지 맹지가 되버려 접근하는 길도 없다 다행히 겨울이라 가까이 가 보았지 여름이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더우기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 길 마저 이렇게 못 들어가도록 철망 담으로 막아놓았으니 심보들이 고약하다
조선후기 노론의 심보, 일제강점기 일제 지배층의 심보, 대한민국 우익 보수들의 심보를 보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