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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4성제는 고(苦, 고통), 집(集, 고통의 원인-집착), 멸(滅, 고통의 소멸-해탈), 도(道,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팔정도)를 가리키며, 이 네 가지가 인생의 고통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무고집멸도"는 이 네 가지 진리조차도 본질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통의 원인과 소멸의 길도, 그 자체로는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으며,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병이 걸리면 치료를 통해 치유되듯이, 고통과 그 극복 방법도 변화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순환하는 과정일 뿐이다.
無智亦無得(무지역무득):
여기서 "무지"는 지혜도 없고를 뜻하며, "무득"은 얻음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깨달음과 지혜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깨달음이 고정된 결과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조차도 변화하고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물이 흐르듯, 지혜와 깨달음도 고정된 실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하는 상태이다.
깨달음이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얻고 잃음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지혜도 결국 일시적인 과정일 뿐, 그 자체로 영속적인 실체가 아니다.
以無所得故(이무소득고):
이 부분은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얻을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착각이라고 가르친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나 욕망 자체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얻을 만한 영속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집착을 내려놓음의 중요한 가르침으로,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모든 것도 결국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임을 나타낸다.
마치 허공을 잡으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듯, 깨달음도 집착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종합하면,
이 구절은 불교에서 말하는 "고집멸도(苦集滅道)"와 깨달음의 과정조차도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고통을 극복하려고 할 때, 그 과정 자체도 변화의 일부일 뿐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또한 지혜와 깨달음 역시 실체가 아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얻으려는 집착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부기附記]
"팔정도(八正道)"는 불교의 수행 방법 중 하나로, 고통을 극복하고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의미한다.
正見 (정견) - 올바른 견해, 바른 이해 (사물과 현상을 바르게 보는 것)
正思惟 (정사유) - 올바른 사고, 바른 생각 (바르게 사고하는 것)
正語 (정어) - 올바른 말, 바른 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
正業 (정업) - 올바른 행동, 바른 행위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는 것)
正命 (정명) - 올바른 생계, 바른 생활 (생계를 도덕적으로 유지하는 것)
正精進 (정정진) - 올바른 노력, 바른 정진 (바르게 노력하는 것)
正念 (정념) - 올바른 마음챙김, 바른 마음 (현재의 순간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正定 (정정) - 올바른 집중, 바른 삼매 (정신을 바르게 집중하는 것)
공(空)과 무(無)의 개념 비교
공(空)과 무(無)는 동양철학과, 특히 불교와 도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두 개념은 종종 비슷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철학적 배경과 그 의미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空)의 개념
불교에서 공(空)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하며, 독립적이고 영원한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 이는 불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연기(緣起)"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기란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고, 그 본질은 실체가 없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空)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변화와 상호 의존성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불교의 공(空)은 "무아(無我)"와 연결된다. 무아란 고정된 자아(自我)가 없음을 뜻하며,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여러 요소들의 일시적인 결합이라는 깨달음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공(空)은 단순히 비어 있거나 무(無)에 빠진 상태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인 이해에서 오는 통찰이라 할 수 있다.
무(無)의 개념
반면, 도교에서의 "무(無)"는 모든 것의 근원이며, 생성과 변화의 시작점을 가리킨다. 도교의 "도(道)"는 무(無)에서 시작되며, 모든 존재와 현상은 이 무(無)로부터 나온다고 해석한다. 무(無)는 단순히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역동적인 가능성의 상태를 말한다. 도교에서 무(無)는 완전한 공허(空虛)나 부재(不在)가 아니라, 존재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원리를 가리킨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무(無)는 도(道)의 본질로서 설명되는데, "도는 무에서 유를 낳고, 유는 다시 만물을 낳는다"는 구절은 무(無)가 모든 창조와 변화의 근원이자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무(無)는 공(空)과 달리 비어있는 상태에서 시작되지만, 그 안에는 잠재된 모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空)과 무(無)의 차이점
철학적 맥락의 차이:
공(空)은 불교에서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한 깨우침과 관련이 있으며, 존재의 비실체성을 강조한다. 반면 무(無)는 도교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비어 있음'이지만, 그 안에 창조와 변화를 포함하는 원리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기능적 차이:
공(空)은 존재의 본질을 비워내고,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는 통찰 개념이다. 무(無)는 비어 있음에서 유(有)가 생성되는 역동적인 원리로, 그 자체가 존재와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공(空)은 비어 있음을 깨닫는 것에 중점을 두고, 무(無)는 그 비어 있음에서 모든 것이 생성되는 가능성을 설명한다고 하겠다.
소결하면,
공(空)과 무(無)는 각각 불교와 도교에서 중요한 개념이지만,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공(空)은 모든 현상이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이며, 무(無)는 모든 존재와 변화의 근원이자 시작점을 일컫는다. 자칫 이 두 개념을 혼동하거나 단순화하는 오류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공(空)을 무(無)와 동일시하거나 허무주의로 해석하는 부분에서 불교와 도교의 본래 의미와 크게 어긋나는 개념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동양철학의 중요한 두 축인 공(空)과 무(無)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번 연재는 여기서 줄입니다.
다음 연재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양학박사 담원(영묵) 김성수 합장
원문을 링크합니다.
https://blog.naver.com/sencelife/223611641009
[붙임]
본 게시글은 20여년전 법륜회 상임법사를 하면서 강론하였던 원고를 첨삭하여 게시합니다.
연재가 끝나면 그간의 사유와 단상을 덧붙여 전자출판을 통해 무료로 배부할 계획입니다.
1차적으로 가장 많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을 연재하고, 이어서 금강경, 천수경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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