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제751차 산마루답사
▣ 답사종류 : 산마루답사
▣ 답사지 : 전북 부안, 정읍, 김제 일대
▣ 주제 : 백제 부흥군과 동학농민혁명군의 현장을 찾아
▣ 부제 : 그들의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
▣ 답사일시 : 2025년 3월 1일(토) ~2일(일)
▣ 답사준비위원장 : 윤여상(010-4321-5315)
▣ 비상연락처 : 윤여상(010-4321-5315), 박투장지우(010-8080-2000)
▣ 답사신청기한
2025년 2월 24일(월) 오후 6시
답사 기간이 3일 연휴라서 미리 숙소를 예약했기에 전일정은 신청 인원에 따라서 조기 마감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빠른 신청 부탁드림니다
▣ 답사비
전일정 : 80,000원(예상)
토요일 : 20,000원, 일요일 : 20,000원
전일정 답사비는 취침인원에 따라 변동가능하므로 답사 마감 후 입금 계좌와 함께 최종 공지 합니다.
토요일 공식 일정 후 추가 비용에 대하여는 1/N입니다.
우리얼 규정에 의거 정회원 외엔 답사비의 20% 추가금이 있습니다.
▣ 집결지
토요일 : 10시
부안군 내소사주차장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159)
일요일 : 9시 30분
정읍시 황토현전적지 주차장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1411)
대중교통으로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마감 후 교통정리 합니다.
▣ 일 정
(토요일)
10: 00 부안 내소사 주차장 집결 후 내소사 답사
12: 00 점심 식사 후 개암사 이동
13: 00 개암사 및 우금산성 답사
17: 00 부안 백산성
17: 30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18: 00 말목장터
18: 10 저녁 식사
19: 00 숙소 이동
20: 00 주제 토론 또는 야간답사
(일요일)
09: 30 황토현 전적지
10: 00 동학농민혁명 박물관
10: 30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세계에 새겨진 혁명의 기록, 세계기록유산인 동학농민혁명기록물 특별전관람)
13: 00 점심식사
13: 40 원평집강소
14: 00 구미란 전적지(동학농민군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전투지)
15: 00 답사 종료 or 김제 금산사 답사
답사 일정은 상황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전일정 회원의 숙소는 황토현전적지 옆 황토현권역 어울림센타로 정했습니다.
숙소는 깨끗하지만 온돌방방으로 침대는 없습니다.
[백제부흥운동]
백제 의자왕이 항복을 하자 나당 연합군은 왕도 사비도성과 북방의 웅진성을 점령하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고토를 지배하려 하였다. 나당 연합군은 사비도성에 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였으며, 특히 항복한 의자왕에게 굴욕을 강요하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하였다. 격분한 백제 유민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도성을 탈환하고 왕통을 잇기 위하여 백제 전역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제부흥군은 초기에는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대표적인 전투가 임존성 전투, 사비성 부근에서의 전투, 웅진강구 및 두량윤성 전투 등이다. 백제부흥군 3만여 명이 참여한 임존성은 복신이 지휘하고 있었으며, 초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 660년 8월 26일 임존성을 공격하여 온 당의 소정방(蘇定方)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기세를 높였고, 기세에 200여 성이 백제부흥군에 호응하였다. 복신이 거느린 부흥군은 두량윤성에서 신라군의 공격에 맞서 한 달여 동안 싸워 성공적으로 막아 내었다. 두량윤성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이 승리하자 백제부흥군의 위상이 높아졌고, 백제부흥군의 각 세력들은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임존성 전투와 두량윤성 전투에서 승리한 복신·도침은 곧바로 끊어진 국맥을 잇기 위하여 백제 왕조의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백제부흥군은 뜻하지 않게 내분이 일어나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발단은 백제부흥군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양대 축인 복신과 도침 사이에서 일어났다. 661년 3월의 웅진강구 및 두량윤성 전투 이후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였고, 이어 663년 6월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신의 죽음으로 백제부흥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러한 내분을 파악한 나당 연합군은 663년 9월 총공세를 가하였다. 위기에 처한 풍왕은 왜와 고구려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왜는 배 1,000척과 원군 2만 7000명을 파견하여 백제부흥군을 도왔다. 663년 8월 17일 나당 연합군 수군이 왜 수군과 백강구에서 큰 전투를 벌여 왜선 400척을 불태울 정도로 크게 승리하였다. 이어 663년 9월 7일 주류성을 함락하고, 663년 11월 저항하고 있던 임존성마저 함락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백제 멸망과 백제부흥운동은 당, 신라, 백제, 왜 등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국제 전쟁이었으며, 성패가 이후 전쟁에 참가하였던 국가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더불어 한국 고대 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국권 회복 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백제부흥운동으로 당의 한반도 지배 정책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
1894년 1년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으며,
1892년에서 1893년 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하였는 바,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 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 이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으나,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동,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