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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1
창세기 17장 1절 [2장 1항]
살아계신 참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외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신으로 불리는 것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거짓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계신가? 그분은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가장 순수한 영이십니다. 무한하다는 것은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고 할 때 공간과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에 제한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무한하신 분으로서 광대하시며, 또한 영원하십니다. 사람을 만들어 하나님 자신을 알리셨지만, 알리신 만큼 알 수 있을 뿐 그분은 무한하신 분으로 측량할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순수한 영이신데, 영은 볼 수가 없습니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시지만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영은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습니다. 살과 뼈가 없다는 것으로 설명한 바 있지만 하나님은 육체로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십니다. 가장 순수한 영으로서 하나님은 늘 불변하신 분으로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속성은 “전능하시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시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못하시는 게 없다는 것이요,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32:1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심지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세례 요한이 한 말인데, 당시 저들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운 그런 삶을 나타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늘 구약 선지자들이 당시 백성들을 향하여 지적했던 내용인데,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으로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못하게는 게 없고,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신경의 첫 부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가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을 만드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전능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창조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33:9) 그럼 창조만 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지금도 그의 전능하심으로 섭리하십니다.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보존하시며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불순종한 사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조차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십니다. 이런 섭리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65:7)라고 고백합니다.
창조와 섭리만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나타나는데, 로버트 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을 참조하면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인간의 모습을 갖추시게 하신 일, 그분의 육체를 지탱해 우리의 허물을 위해 능히 진노의 무게를 감당하시게 하신 일,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일 등이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이 회심할 때 일어나는 변화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 혹은 새 창조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은 창조만이 아니라 중생, 새 창조에 있어서도 그분의 능력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자들을 은혜 안에 보존하시는 일, 그들로 하여금 유혹을 극복하고 모든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인내와 기쁨으로 혹독한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하시는 일, 마지막 날에 그들의 죽은 몸을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모두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모순어법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R. C 스프로울 교수는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참고).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자신이 움직일 수 없는 큰 바위도 만들 수 있습니까?” 이때 ‘예’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전능하시기 때문에 만들었는데 자신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전능하다고 할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아니오’라고 한다면 움직일 수 없는 큰 바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전능하다고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전능하다고 할 수 없는 답을 위해 만들어진 질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전능하다고 해서, 다시 말해 못하시는 게 없고 모든 일을 다 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은 거짓말도 할 수 있고, 후회도 할 수 있고, 변경하는 일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존재와 본질 그리고 속성에 있어 모순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인 이상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짓말도 할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불변하신 하나님인 이상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후회도 하시고, 변경하시는 일도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115편 3절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이때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능력이 하늘만큼 높고 크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속성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의미입니다. 못하시는 게 없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데,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스스로 모순되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그분의 속성에 있어 어긋나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것이고, 그래서 지금도 섭리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도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고 계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한 가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창세기 17장 1절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지난 시간 야고보서 1장 17절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걸맞은 것을 주고자 하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있다가 살필 거룩이라는 속성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읽은 창세기 17장 1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하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완전하라고 말씀하고자 하시면 어떤 속성이 더 어울립니까? 자신의 완전성을 가지고 오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5장 4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데 창세기 17장 1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소개하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마지막 절(16)을 보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7장 1절에서는 구십구 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정도가 지났을 때인데, 어떤 면에서는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마엘이라는 이 아들에게 두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이스마엘이라는 이 아들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네가 행한 일은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일조차 내가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전능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죄조차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걸림돌이 생기면 당황합니다. 걸림돌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넘어갈 수 없는 큰 바위가 내 앞에 있으면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아브람처럼 실수하고 또 실패하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수도, 실패도 없습니다. 그의 전능하심으로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십니다. 먼저 지혜와 지식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정요석 교수는 둘 다 하나님의 지성적 속성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구별된다고 설명합니다(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아시는 것이라면, 그래서 하나님을 전지하시다고도 하는데, 지혜는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데 적용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R. C. 스프로울 교수도 성경은 지식과 지혜를 구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하실 지도, 모든 것을 어떻게 운영하시고 통치하실지도 아신다는 설명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와 섭리, 구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먼저 창조와 섭리의 역사와 관련해서 우리는 시편 19편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 시편 104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깃든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몇 구절만 언급하면,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9절입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14절과 15절에서는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24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창조와 섭리만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는 드러나는데, 로마서 8장 28절만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앞에서 죄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죄가 하나님의 뜻 밖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지혜로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수밖에 없도록 뜻을 정하시고 정하신 뜻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 밖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죄가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만든 사람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람의 죄조차 자신의 선한 뜻을 위하여 사용하시고, 특별히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늘 묻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있는가! 왜 내 부모는 이런 사람인가! 혹은 왜 내 자녀는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그렇게 정하셨고, 또한 정하셨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의 구원의 완성시켜 가신다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의 깊고 높으신 지혜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솔직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대한 무지, 그래서 자주 넘어집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넘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붙드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게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우리는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처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뿐만 아니라, 배운 하나님의 지혜가 믿음의 내용으로 나타나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늘 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십니다. 거룩하다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단어로부터 나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많은 부분 도덕적인 면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거룩은 죄로부터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일차적인 뜻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큰 질적 차이의 위치나 관계입니다(이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고). 쉽게 말해 하나님은 우리와 분명 다른 분이시고,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모든 피조물 위에 무한히 높이 계신 분이시란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11절을 보시면 홍해 사건 이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노래할 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사무엘상 2장 2절에서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정요석 교수는 이것을 ‘하나님의 위엄 있는 거룩함’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위엄 있는 거룩함으로 계시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도 구별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피조물에게 있는 어떤 죄를 찾아볼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함에 대하여 이사야 6장에서는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6:2-3) 여기서 스랍은 천사를 말하는데, 타락한 천사가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아니한 천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날개 중 둘은 자기 얼굴을 가리었다고 말하고, 둘은 자기의 발을 가리었다고 말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이지만 그런 천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함으로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이사야의 반응인데, 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물론 하나님의 본질을 본 것은 아닙니다. 실체를 보고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출33:20) 실체를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이요,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죄 없는 천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이요, 죄인이 우리와는 더더욱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분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인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누구도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과, 단지 부르신 것으로만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음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그러나 창세기 17장에서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신자일지라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만 하지 않습니다. 덧붙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스스로 계끗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룩은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거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스스로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우리의 마땅한 바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빛과 어둠이 사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기 때문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가 될 수 없기 때문에(고후6:14-16) 불법에서 분리되고 구별된 자로, 어둠에서 분리되고 구별된 자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마5:48). 그러나 선한 모든 결과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가 주체이십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가장 자유로우십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앞에서 시편 115편 3절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그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의 원함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면 하고, 하고자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는 의지가 어떤 것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피조물이라는 것 자체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지 역시 피조물이라고 할 때 뭔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타락하고 난 뒤에는 타락한 것이 반드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선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의미에서의 선을 사람이 행할 수 있는가? 성경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피조물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은 피조물과 상관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늘 자유롭습니다. 어디에 매여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뜻이 있어 피조물을 만드신 이후에는 피조물의 영향을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있습니다. 여기에 ‘절대’라는 말까지 붙여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권위자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에게 자유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정확하게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에 자유라는 말을 붙이지만,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는 하나님 외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행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자유로우실 뿐만 아니라, 다섯 번째로 하나님은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을 붙지 않는다, 비교할만한 것이나 상대적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출애굽기 3장 14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는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있다는 것은 우리처럼 그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계실 분,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천지의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의 근본 원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가장 자유로우실 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할 때 ‘있다’ 혹은 ‘존재하다’는 단어를 사용해서 ‘나는 있는 대로 있다’, ‘나는 존재하는 대로 존재한다’는 그런 의미로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영어는 이 부분을 ‘I am that I am’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있는 분이십니다.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누군가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고 계신 그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속성으로는 자존성이라고 하는데, 이 구절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존하신 하나님만이 가장 자유로우시고 또한 가장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존재됨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존재됨을 좀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기서 ‘내가 나 된 것’이란 표현이 영어 번역으로 ‘I am that I am’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만이 있는 대로 있는 분이시요, 그만이 존재하시는 대로 존재하시는 분이시지, 어떤 피조물도 그렇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존재됨을 이렇게 수식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by the grace of God’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물론 이것은 구원의 은총 안에 있는 자들에게 붙는 수식입니다. 그럼 구원의 은총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은 이런 수식어가 붙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인간이 창조된 것부터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천지 안에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됨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이십니다. 아무런 조건과 제약이 붙지 않습니다. 비교 대상이 없고 상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유와 절대성은 특별히 모든 사람 가운데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시기로 하신 부분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로마서 9장 1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13-23)
이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내용 안에서 좀 더 살피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로마서 9장에서도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만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허물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유롭고 절대적이십니다. 이런 자유성과 절대성으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신앙고백서의 이어지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자신의 불변하며 가장 의로우신 뜻의 의논을 따라 모든 것들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도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시고, 또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자유롭고 절대적인 주권으로 선택 혹은 유기까지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결국 유기자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있게 되지만, 택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택하셨다고 해서 죄와 상관없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와 하와를 제외하고 그 시작부터가 죄인으로 시작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긍휼로, 그리고 그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타났는데, 공의와 함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늘 찬송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