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코스 : 군남홍수조절지 – 신탄리역
군남댐(저수량 7100만 톤)은 북한에 있는 황강댐(총저수량 3억5000만 톤)의 무단 방류에 대비하고 임진강의 홍수 조절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홍수 조절 전용 단일목적댐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 일시에 무단 방류하면 과연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북한의 황강댐은 미사일 급에 해당하는 또 다른 무기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는데 군남댐은 그들의 무단 방류를 혼자서 모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상을 갖추고 평화스러움을 자아내며 농업용수 공급의 역할도 하고 있다.
사람도 군남댐과 같은 인품을 품고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통일 이음길을 걸어간다. 산길을 따라 걸어갈 때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슬픈 소리가 아닌 한적한 숲속에서 들려주는 노래 같아 정다움을 느낀다.
비록 야산의 임도이지만 바닥에는 낙엽이 깔렸고 불어오는 바람은 가슴을 적셔도 차갑지 않고 햇볕은 뜨겁지 않아 걸어도 땀이 나지 않아 상쾌하게 걸어갈 때 뒤에 따라 오는 부부가 있어 인사를 나누니 경기 둘레길을 종주하는 동지였다.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만나니 즐겁고 한적한 산길의 분위기에 젖어 설렘이 배가 될 때 낙엽이 깔린 고요한 길에서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면서 임도를 공사 중에 있었다. 박찬일 사장은 이곳이 군사 작전 도로라고 하면서 총성도 들린다고 하였다.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외진 곳에서 사람을 만나도 왠지 조심스러운데 고요한 산길에 젖어 있을 때 총성이 들린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오늘은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는 언덕을 넘어가는데 ‘연강 나룻길’이란 팻말이 보였다. 연천 지방에서는 임진강을 연강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진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굽어보며 걸을 수 있는 이곳을 연강 나룻길로 조성하였다.
남북이 대치하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태풍전망대로 이어지는 연강 나룻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걸어갈 때 옥녀봉 갈림길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산상에서 임진강의 풍광을 조망하지 못하였기에 옥녀봉에 올라 조망할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레길은 옥녀봉으로 오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혼자 온 것이 아니기에 서운함을 누르고 둘레길을 향하여 걸어가는데 산기슭은 율무와 콩밭이다. 연천군이 우리나라의 율무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는 말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평화 누리길 12코스, 통일 이음길을 알리는 대문을 통과하여 걸어갈 때 “ 수많은 이산가족이 가늠하지 못할 만큼의 눈물과 상처를 떠안아야 했습니다. 우리 모두 통일에 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적힌 통일 희망 로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하단에 “오징어는 38선을 지나면 낙지가 됩니다. 떨어진 시간이 길었던 걸까요? 사용하는 말이 달라져서 서로를 이해하는 장벽이 되고 있어요”라고 적어놓았다.
연천군이 군사 분계선과 가까운 곳이 되어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분단의 아픔을 노래하고 통일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있지 않은 것은 그들이 연강 나룻길을 조성하면서 “길은 나뉘어도 하늘은 하나, 평화를 향한 휴전선 아래 처음 길”이란 구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 어찌 임진강이 둘이 있을 수 있을까? 임진강은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조강에 합류하는 하나의 강으로 남과 북으로 나눌 수 없다. 본래 쪼갤 수 없는 것을 나누어 쪼갠 자 그 누구인가?
산길을 내려서 로하스 파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창동에서 온 부부는 다시 만나 반갑다고 막걸리 한잔을 권한다. 보기만 하여도 시원할 것 같은 막걸리였지만 아직 반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습지 산책로를 따라 진행하면서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으나 2차선 포장도로에 진입하여 걸어갈 때 옥계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고 마을을 지켜주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웃으며 맞이한다.
옥계리를 지나가면서 상당한 거리를 도로 따라 진행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옥계교를 건너 둘레길은 도로를 우회하는 천변을 따라 걸어갔다. 좌측은 개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인삼밭이 있다.
돌고 돌아 옥계 1교를 지나 도로에 진입하여 마을을 통과하면서 둘레길은 동네의 뒷산으로 향한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완만한 오르막이 되었으나 힘들이지 않고 오르니 임도 변에 도당골 청화동을 알리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 도당골은 가무 사리(남양홍씨의 집성촌)와 가재울 사이에 있는 마을로 조선 개국초 고려 신하 이양소가 숨어 지내던 곳이다. 그의 높은 지조를 후세사람들이 도연명에게 비견할만하다 하여 도연명이 은밀한 곳인 도당에서 뜻을 따와 도당동이라 이름 지었고 조정에서 내려준 그의 시호인 청화에 연유하며 청화동이라 불리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연천군지)라고 하였다.
이양소는 태종 이방원이 다섯 차례나 방문하여 조선에 출사하기를 권하였지만 끝내 사양하고 야인으로 생을 마치어 선비의 표상인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정신을 굳게 지켰다.
한때의 부귀를 탐할 것인가? 아니면 만세토록 그 이름이 빛날 것인가 ? 양자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라고 하겠지만 현실에 직면할 때 십중팔구는 부귀를 택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었다.
배신이 난무하는 시대에 올곧게 절개를 지킨 숭고한 뜻에 고개를 숙이며 진행할 때 다소 평평한 곳이 있어 점심을 먹었다. 차린 것은 없어도 진수성찬이요 산해진미인 것은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안다.
점심을 먹고 즈믄해 삼거리에 이르렀다. 즈믄해! 말이 너무 정답지 않은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정표에 설명해 놓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애석하게도 즈믄해 삼거리만이 있을 뿐이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즈믄해는 ”천년“의 순우리말이었다. 우리말은 정감이 있어 들으면 들을수록 또다시 듣고 싶다. 한자로 표기된 우리말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가듯 어서 빨리 우리말로 돌아와야 한다.
상리 약수터에 이르러 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가야 할 길을 살펴보니 평지길이 시작될 것 같다. 청화산과 헤어진다는 생각에 왠지 서운한 생각이 든다. 청화산의 유래를 음미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 청화산은 가무 사리 서쪽의 군남면 옥계리 경계가 되는 산이다. 순천 이씨 세보에 의하면 도당골에 은거했던 이양소가 매일 이 산에 올라 송악을 향해서 망궐례望闕禮(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유교 의례)를 올리며 고려조의 신하로서 절개를 시킨 곳이라 하여 조정에서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이 산을 ‘백이의 맑은 가풍과 이의 빛나는 산이라 (伯夷之淸風夷之華山) 뜻에서 두 자를 취해 청화산 淸華山이라 명명했다. “(안내문에서) 한다.
도로에 이르렀다. 도로변 가로수인 은행나무잎이 노랗다. 가을이 익었다. 노란 나뭇잎이 아름다웠지만 잠시의 스쳐 지나가는 전경이었고 상리 6교를 지나 도보여행가나 자전거 동호인들의 쉼터가 된 신망리역을 지나며 철길을 우측으로 벗으로 두고 걸어간다.
경원선 철길 따라 걸어가면 신탄리역에 바로 이를 것 같은데 둘레길은 마을 골목길을 지나 차탄천에 이르렀다. 맑은 개울이 흐른다. 어렸을 때는 개울가에서 파리통을 놓고 고기를 잡고 놀았는데 고기잡이들의 모습은 눈에 띠지 않았다.
”차탄천이라는 이름은 수레 여울에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 후일 태종으로 즉위하게 되는 이방원이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고 연천으로 낙향한 친구 이양소를 만나기 위해 연천에 오는 도중 이 여울에서 수레가 빠졌고 이 일화를 계기로 ‘수레’가 ‘여울’에 빠졌다는 의미에서 수레 여울을 한자로 옮기면서 차탄천(車수레차 灘여울탄 川내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 하였다. <인터넷에서 퍼옴>
차탄천 둑길을 따라 걸어가는 길은 평지 길로 보기만 하여도 시원스럽게 뚫려있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발바닥을 땅과 마주치며 걸어왔다.
그 앞이 보이지 않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로 펼쳐지어 지레 겁을 먹은 적도 있지만 언제나 묵묵히 한 발 한 발 걸었다. 10km가 조금 넘는 둑길을 만났을지라도 경쾌한 발걸음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를 성찰하며 걸어간다.
성인 공자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도다”라고 하였는데 정자가 이를 해석하기를 이는 “도체道體이다.
하늘의 운행은 쉼이 없어서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며,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물건은 생겨나 다하지 않으니 모두 도와 일체가 되어 밤낮으로 운행하여 일찍이 그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를 본받아서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으니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순수함 또한 그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자신을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쉬지 않고 노력할 뿐이다.
잠수교에 이르니 마을에서 설치한 공원이 있어 커피 한잔을 마시며 또다시 천변을 따라 걸어가는데 오른쪽으로 고대산이 우뚝하게 솟아있다. 단풍에 물든 고대산을 바라보며 신탄리역에 이르렀다.
“ 신탄리新炭里는 ‘새 숯막’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전부터 고대산의 풍부한 임산 자원을 숯으로 가공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마을입니다. 여지도서에도 新炭이라 적혀 있으며 경원선 철도 부설된 뒤로는 숯 가공이 더욱 번창했습니다. 또한, 새 숯막이라는 지명이 대광리와 철원 사이에 주막거리가 새로 생겼다 하여 새술막新酒幕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관광안내 지도에서)
경흥대로 드넓은 벌판과 두메산골을 달려가던 철마가 이곳 신탄리역에서 중단되어 더 달려갈 수 없었을 때 철마는 얼마나 애통하였을까? 그러나 이곳에서 사는 마을 사람들은 그 슬픔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의 꿈을 꾸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 우리 마을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난 60년간 경원선 마지막 역이자 철도 중단 점이었던 신탄리역 주위에 형성된 마을입니다. 동쪽으로는 등산으로 유명한 고대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차탄천이 흐르는 청정지역입니다. 우리 마을은 향후 경원선 복원 시 북방 경제 협력의 중추적 기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희망의 바람이 부는 마을입니다….” <지역 안내문에서 퍼옴>
● 일 시 : 2022년 10월 23일 일요일 흐림
● 동 행 : 박찬일 사장님. 김헌형. 산거북이. 좋은 소식
● 동 선
- 09시21분 : 군남 홍수 조절지
- 10시55분 : 옥계 3리 표지석
- 11시45분 ; 도당골(점심)
- 12시40분 : 즈믄해 3거리.
- 13시10분 : 상리 약수터
- 13시30분 ; 신망리역
- 14시40분 ; 보막교
- 15시30분 ; 잠수교(사격장 입구. 1시간 휴식)
- 17시20분 ; 신탄리역
● 총거리 및 소요시간
- 총거리 : 25.1km
- 소요시간 : 7시간5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