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에는 유서 깊은 명산인 유왕산(留王山)이 있다. 이 산은 부여군에서 최남단에 위치해있는 양화면 원당리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암수리(岩樹里) 사당산(四堂山)에서 뻗어나온 산이다. 부여 낙화암을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이 강경의 황산(黃山) 나루터를 지나 금강으로 이어지는 서쪽에 자리 잡았다. 이 유왕산은 백제의 멸망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산이다.
백제 31대 의자왕이 사치와 방종에 빠져 충신들의 충언을 듣지 않고 국정을 문란케 하던 중,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羅唐)연합군의 협공을 받은 일이 있었다. 왕은 중진을 모아 대책을 세웠으나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백강(白江)을 건너왔다. 계백(階伯)의 황산벌 방어도 실패로 돌아가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포위당하게 되었다. 왕은 웅진성(熊津城)으로 태자와 함께 도망을 갔다가 항복했다. 둘째 아들 태(泰)도 사비성에서 패하고 말았다. 왕과 태자 등 1만 2천여 명이 소정방에게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배편으로 압송되면서 이 산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왕이 이 앞에 머물렀다 하여 이름이 머물 류(留), 임금 왕(王), 즉 유왕산이다.
당나라에 잡혀가는 왕과 그 일행을 떠나보내는 백성들의 심정은 참담했다. 백성들은 떠나는 왕과 왕족에게 슬픔과 아픔을 새기며 마지막 절을 올렸다는 망배산(望拜山)이 남쪽에 있다. 또한 당나라에 대한 원한을 새겼다 해서 원당산(怨唐山)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원당산(元堂山)이라 불린다. 백성들은 왕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기원의 제사를 이 산에서 드렸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유왕산은 언제부터인가 지역의 남녀노소가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매년 음력 8월 17일이면 20리 안팎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유왕산에 올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풍습이 생겼다. 특히 청춘 남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모여들었다. 젊은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 이 날은 그야말로 해방의 날이었다. 산에 오른 사람들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사람은 짝사랑하던 연인을 훔쳐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고백도 못해보고 남에게 시집보낸 그녀를 다시 재회하는 만남의 광장이기도 했다.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유왕산이었다.
그런데 연중행사였던 유왕산 모임이 애석하게 중단되었다. 일제 말엽에 일본정부에서 이 모임에 참여하는 젊은 사람들을 잡아 징용으로 끌어가는 바람에 수년 동안 중지되었다. 해방 후에는 6ㆍ25 전쟁 직전에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삼엄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공산당이 남한의 지하조직을 통해 산에서 봉화를 올리는 일이 잦아지자 통제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당국은 산에 오르는 일을 전면적으로 제지하고 나섰다. 그 후부터 유왕산 모임도 지지부진(遲遲不進) 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 파묻혀 버린 옛 이야기가 되었다. 뜻있는 사람들이 다시 유왕산 모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모임을 시도하고 있으나 옛날처럼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은 백제 망국사의 한(恨)이 맺혀있는 유적지로서 길이 보존되고, 이 고장에서 살아가는 자손들이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