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깨달음空性으로 가는 지혜품
323
진리에는 현상을 논한 속제俗諦와
상대를 초월한 절대성 진제眞諦가 있다.
인식세계를 초월하면 진제가 되고
현상적 이치를 논하면 속제가 된다.
⚹ 속제俗諦란 현상적 인식 세계를 보는 이치
진제眞諦란 현상과 인식 이전의 근원적 진리
324
속제俗諦를 논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보살승과 소승으로 구별할 수 있다.
보살은 속제를 오직 연기라 하고
소승은 무아를 말하나 단멸이 있다.
325
만일 수행자가 공성空性에 들려면
현상적 사리事理(이치)를 알아야 한다.
진제眞諦에 만법의 실체 없기에無自性
찰나성刹那性이라고 할 근거가 없다.
⚹ 찰나성刹那性이란 : 만법의 이치는 현재 이 순간만 있고 과거 미래가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샨티데바스님은 여기서는 만법을 움직이는 고정된 주체가 없는데 어디에서 이 순간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즉 만법의 근원은 시간성과 공간성 이전 소식인데 어디에서 이 순간을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순간을 인정하면 현재를 인정하게 되고 현재를 인정하면 과거와 미래도 인정된다. 이렇게 시간을 인식하면 공간을 보게 되고 현상을 인식하므로 현상을 가지고 억지로 이치를 논하게 된다. 이것은 상대적이고 이원적 사고체계로써 만법의 근원적 이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상적 논리를 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26
수행자는 진제에 의해 도道를 보고
사람들은 현상에서 도道를 구한다.
이것을 모르면 부정관不淨觀을 오인하여
청정관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 부정관不淨觀이란 : 세속적 욕망과 애욕을 끊게 하고자
애욕에 대치 관법으로 부처님이 가르쳤던 수행법이다.
327
인연 조건에 의해 나타난 현상은
일정 기간 머물지만 실체는 없다.
허깨비가 허상이나 작용이 있기에
선업과 악업도 따라 나타난다.
328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서 현상은 나타난다.
만일 조건적 흐름이 끊어지면
세속적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329
속제俗諦에서 인식하는 앎은 있고
진제眞諦에서 경험적 분별은 부정된다.
허깨비는 실재성이 없지만 나타나듯이
사물에 자성은 없지만(眞空)작용은 있다.(妙有)
330
공성空性에 대한 인식을 가진다면
존재하는 사물의 인식은 소멸한다.
비존재성에 무자성을 인식한다면
공성空性에 대한 인식마저 소멸한다.
331
무자성이라고 나타난 존재물을
만일 현상에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의지할 대상이 없는 비존재물이
어떻게 마음속에 나타날 수 있을까.
332
존재물存在物(有)과 비존재물非存在物(無)이
마음 가운데 나타나지 않을 때
그때 대상에 의지할 길이 없으므로
마음은 반연攀緣을 잃고 적멸에 든다.
333
(문) 사성제에 의해서 불도를 닦는데
굳이 공성을 알아야 할 필요 있는가?
(답) 대승경에 보리심.보살도가 아니면
큰 깨달음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334
공성空性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공성과 사성제가 원융하지 않으면
진정한 열반에 들어가기 어렵다.
335
공성空性에 대한 깊은 자각이 없다면
마음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상정無想定에도 업습業習이 남아 있어
바른 신심으로 공성을 닦아야 한다.
336
공성은 번뇌장과 소지장을 다스리기에
큰 지혜 얻으려면 공성空性을 닦으라.
괴로움은 사물을 인식할 때 생기는데
공성空性은 두려움의 근원을 소멸시킨다.
337
만일 내가 실체적 자아가 있다면
여러 가지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공성에 실체적 ‘나’ 없는데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타나겠는가.
338
자아를 가지고 현실을 대하면
현상을 접할 때 공포가 생긴다.
실체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에
주객이 없으면 공포도 사라진다.
339
만일 유아론자와 무아론 자가
행의 주체와 과보의 주체가 다르다면
그건 현상에서 나와 남을 혼동했으니
‘나’에 대한 이런 견해는 무의미하다.
340
과거와 미래의 마음에 ‘나’란 없듯
현재의 마음을 ‘나’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성. 공간성 경계에서
마음이 멸하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341
파초 줄기 속에 텅 비어 있듯이
마음을 바로 보면 ‘나’란 찾지 못한다.
어리석음은 무명의 소치라 말하나
중생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말했다.
342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나’를 말하나
자칫 ‘나’라는 아집이 증대할 수 있다.
고苦에 대한 아집이 제어되지 않을 땐
무아와 공성을 수습함이 가장 좋다.
343
나타난 현상은 꿈같고 허상인데
이를 바르게 보면 무얼 집착하랴.
이 몸에는 실체성 자아가 없으니
남자. 여자에 애착할 것 있겠는가.
344
만일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여기에 대한 대치법對治法을 통해서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고찰을 하라.
수행자에게 양식은 선정과 지혜다.
⚹ 대치법對治法이란 근기에 맞추어 마음 다스리는 법
345
이처럼 육체감각에 주체가 없다면
몸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을 느끼는 것도 공空일 뿐인데
남녀 사랑을 끝없이 갈망하는 자여!
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가.
346
눈, 귀를 통해 보고 듣고 아는 것
그것은 몽환과 같은 마음일 뿐이다.
대상이란 인식할 때 생겨나기 때문에
대승에선 감수感受의 주체는 부정된다.
347
이처럼 감수感受의 주체가 있지 않기에
‘나’ 없는 몸이란 인연의 집합체集合體다.
마음의 실체는 어디에도 볼 수 없으니
중생은 본래부터 무자성無自性일 뿐이다.
348
진제에서 만법은 불생불멸이라면
속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어찌하여 진속이제二諦를 말하는가.
오직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 진제에 속제는 왜 없다고 했는가 ?
진제에 시간 공간이 없으므로 절대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진제에서 보면 속제가 진제고 진제가 속제다.
이 때문에 만법과 만물은 진리 아님이 없다.
그럼 왜 속제를 말하는가?
그것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상 단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349
자아인식이 대상 이전에 생겼다면
그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생겨날까?
‘나’란 인식과 대상이 동시적이라면
그것은 무엇에 의하여 나타나는가?
350
대열반에 든 성취자는 망념이 없으니
속제俗諦라는 정신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것은
현상 연기라는 속제俗諦를 말한 것이다.
351
천지창조를 자재천(神)이 했다면
도대체 신神이란 무엇인지 말해보라.
만일 그것이 절대권능을 지녔다면
절대성에 상대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 절대에는 상대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상대라는 말은 가설이 된다.
만일 절대가 상대의 반대개념이라면 절대가 바로 상대가 되는 모순이 된다.
그래서 존재의 근본은 본래 절대성 존재이므로 만법은 진리 아님이 없다.
352
때문에 창조신이란 실제가 아니므로
이것으로 우주자연을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이 무지하여 창조주를 설정하고
거기에 집착하여 헛된 견해를 짓는다.
353
신神이 창조했다는 세상은 무엇인가?
그것이 창조자의 의지 때문이라면
그와 같은 의지는 곧 중생심이 된다.
절대자에게는 중생심이 없기 때문에
천지 창조자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굳이 절대자가 천지창조를 했다면
창조자 또한 생기고 멸하는 법이니
절대라는 실체성은 인정할 수 없다.
354
신神이 허공도 아뜨만自我도 아니라면
그것은 토끼 뿔이요. 거북이 털이다.
만일 신神이 불가사의 존재라 한다면
그렇게 규정한 사람은 무슨 근거인가.
355
신神을 안다면 자신을 알 것이요,
자신을 알면 생멸망상 사라졌는데
생멸심 끊어진 무심 무상 절대자가
생멸하는 모순세상 만들 이유 없다.
* 무심無心 : 절대성은 무아無我라 창조성이 없다.
무상無相 : 시공이 끊어진 곳엔 어떤 모양도 없다.
356
분별심으로 절대 진리를 볼 수 없고
존재(有)로써 비존재(無自性)는 파악 못한다.
비존재 속에 존재는 사라지게 되고
무자성無自性진리 앞에 나타날 법은 없다.
357
존재물과 비존재물도 인식에 있다면
꿈속에서 자식 잃고 죽었다는 생각처럼
실체성 없는 망상에서 기인 되듯이
존재에 대한 인식에는 실체성이 없다.
358
이런 까닭에 이치를 깊이 분석하면
천지 창조자가 따로 있을 수 없어
개별적이나 독립적인 조건도 아니며
오직 인연 따라 생멸연기할 뿐이다.
359
허깨비로 인하여 나타난 허상이
조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모든 존재의 근본은 무엇인가?
홀연히 나왔는지 추궁해 보라.
360
존재물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고
머무름도 아니고 지나감도 아니다.
허깨비는 무자성이기에 무지인은
나타난 허상을 보고 실재라 한다.
361
온갖 조건에 따라 현상은 나오지만
존재와 비존재 모두 허망할 뿐이다.
까닭에 소멸도 없고 발생도 없기에
모든 법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362
법은 공空하기에 얻고 잃음이 없고
즐거움과 괴로움도 망식妄識의 작용
본래부터 나고 죽음은 공空하므로
경에“생사와 열반도 공空이라”했다.
363
사람이 선행하면 복을 받다가
이내 악도에 빠져 괴로움 받는다.
세상에는 재앙은 많고 복은 적어
지혜롭지 못하면 고뇌가 생겨난다.
364
세월은 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는데
부처님의 큰 지혜 구하기는 어렵고
산란심은 제어하기 쉽지 않은데
선정삼매 증득하긴 더욱 어렵다.
365
부처님 법 들을 기회 얻기 어려운데
번뇌의 파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중생은 이렇게 윤회 속에 있으면서
고난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366
얻을 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느 때 속제俗諦를 가지고
공성空性을 설할 수 있을까.
얻을 바 없다는 공의 도리에 입각하여
성불에 필요한 공덕을 말할 수 있을까.
* 속제俗諦 : 현상적 이치 妙有
공성空性 : 법신. 진여. 열반 眞空
첫댓글 큰스님 법문 잘 인식해서 실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