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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각각을 우리는 이야기의 상황, 1차 독자의 상황, 그리고 현대 독자의 상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건을 기록한 사람을 저자라고 한다면 저자가 자기 시대의 독자들을 생각하고 자기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옛 이야기를 다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건은 저자에 의해서 자기 시대의 독자들에게 소개됩니다. 그렇게 할 때 저자는 자기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야기를 전개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의 기록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자를 이해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기록을 했으며 그때 저자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 글을 기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1차 독자이며 원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나 경전은 오래된 책이니까 그 오래 전 과거에 그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고전과 같이 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이 마치 오늘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우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처럼 깨달아집니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씀처럼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 책이 바로 고전이며 경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이 무척 오래 전에 기록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아니 가장 먼저 이 성경을 읽어야 했던 독자들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역대기상 16장을 읽으면서 그 이야기에 나오는 다윗의 시대 상황과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대기 저자의 상황, 그리고 이 성경을 읽는 오늘 우리의 상황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역대기를 읽는 우리가 만나는 세 가지 다른 상황
먼저, 다윗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것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세워진 나라는 블레셋과 같은 강력한 이웃 나라와 맞서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전투에서는 사울왕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한 적이 있습니다. 블레셋은 전부터 이스라엘을 자주 침범하고 곡식을 약탈했습니다. 다윗은 그처럼 약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즉시 블레셋과 전투를 해야 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역대상 14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전투에 임했으며 어떤 승리를 거두었는지를 읽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하는 중요한 과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가 살고 있던 성으로 모셔왔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께 여쭙지도 않은 채로 그 프로젝트를 실시하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웃사가 죽은 불상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상고했을 것이고 그 결과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야 한다는 것과 그 법궤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를 잘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는 마침내 다윗의 성으로 들어왔으며 모든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각자 맡은 역할대로 나팔을 불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또는 찬송을 인도했습니다. 그처럼 영광스러운 예배 의식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하나님은 다윗과 이스라엘 나라를 통하여 통치하실 것입니다. 이 기쁜 날 다윗은 춤을 추며 기뻐했고 온 백성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덩이와 과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다시 나라를 세울 힘을 얻었고 백성의 사기는 충천해졌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기록한 역대기 기록자들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나라를 잃고 먼 나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아직도 폐허가 되어 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던 사람들은 간데없고 주변 이방인들과 섞여서 살면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이나 자부심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700년 전에 있었던 다윗 왕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쩌면 이 글의 독자들은 다윗이 나라를 어떻게 세웠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도 하나님을 모시고 그렇게 나라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글의 독자들은 아마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5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모으사
우리로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할지어다
역대상 16:34~35
사실 이 글의 원독자들은 만국 가운데서 건져냄을 받았고 이곳 예루살렘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라는 이 말씀은 원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이야기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나라를 새롭게 하리라는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2차 독자인 우리들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의 상황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기는 옛말이 되었고 지금은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 그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점점 희귀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없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 기독교 급진주의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을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벌임으로써 기독교회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교회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연합하여 한국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고 세상을 선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다윗이 블레셋의 침공 가운데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야 하는 과제 앞에 선 것과 같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나라를 재건하는 과제 앞에 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셔들이고 모든 백성과 함께 기뻐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시대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아마 이 역대기서의 일차 독자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주는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로를 얻으며, 동시에 그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독자들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같은 처지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선배들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선배들이 걸어간 바로 그 길이며, 우리가 읽는 이 말씀과 이야기는 우리 선배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서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그러면, 이제 다윗이 모든 백성 앞에서 찬양대에게 부르도록 이끌어 준 그 찬양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를 자기 성 하나님의 장막 안에 안치한 후에 모든 백성 앞에서 찬양대를 동원하여 찬양을 하게 했습니다. 이 찬양은 역대기상 16장 8절부터 36절에 실려 있습니다.
찬양의 가사를 보면, 먼저 다윗은 청중에게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제안합니다(8~11절). 그 청중이란 다윗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언약을 기억하자고 권면합니다(12~22절).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그 언약입니다. 다윗이 기억하자고 권면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것뿐 아니라 그들이 민족들 사이에서 유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찬양은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선포합니다(23~29절). 모든 민족 중에 선포할 노래는 하나님이 모든 신 중에 뛰어나시며 존귀와 위엄과 영광과 능력과 즐거움이 주님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 나라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찬양은 만물에게로 그 대상을 확대합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바다와 나무들, 그 모든 충만한 것에게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선포합니다(30~33절). 이처럼 만물에게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권면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송영, 그리고 간구로 마무리됩니다(34~36절). 그 간구는 구원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만국 가운데서 우리를 모으셨으니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찬양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능력과 권능과 자비를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는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이 찬양의 주제입니다.
이 찬양을 생각해 보면, 찬양의 인도자는 지금 온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 모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대합니다. 그뿐 아니라 열방의 민족들에게도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제안합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만백성과 민족들과 만물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이끄는 지휘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인간의 본분을 생각나게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존재, 곧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 곧 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에 비길만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두시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 모습은 시편 8편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찬양이 바로 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온 백성을 인도하여 열방에게 제안하며 만물의 찬양을 모두 모아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제사장의 노래, 그것이 다윗이 드리는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찬양과 경배의 노래가 끝날 때 어떻게 마무리됩니까? 3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모든 백성이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떡과 과자가 든 주머니를 가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윗도 자기 집을 위하여 축복하려고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언약과 행사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그리고 열방과 만물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거룩한 예배에 동참할 것을 선포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예배자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축복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4.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에 동참하자
저는 오늘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기억할 한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기록자, 곧 저자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 그 이야기를 기록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저자의 상황을 이해할 때 그 이야기가 본래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저자의 상황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오늘은 역대기상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서에도 나옵니다만, 역대기가 소개하는 방식은 좀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포로에서 돌아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다윗을 모델로 하여 나라를 세우려는 의도로 역대기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서와는 달리 역대기에서는 다윗의 악행이 잘 드러나지 않고 그가 베푼 선정과 신앙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또한 성전을 어떻게 세우고 운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됩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역대기서를 읽는다면 저자의 의도가 백성들을 격려하여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있는 우리들의 현실에 적용할 점을 포착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면서 성경을 읽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대기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66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서 역대기의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작업은 성경연구를 깊이 한 사람들에게 생기는 관점입니다. 즉,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신만의 관점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최근 두어 달 동안 성경에서 이미지를 찾아보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무엇에 대하여 들려주는가를 핵심적인 이미지로 포착해보려는 작업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참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진면목을 세상에 나타내는 방법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그분을 섬기고 경배할 때 그 영광을 세상에 반사하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기울어진 거울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자기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이며 성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에덴동산과 성전으로부터 온 세상을 회복하는 창조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언제나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세우며, 공허한 땅에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고 그 빛나는 영광을 세상이 나타낼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의 처소로 모셔 들임으로 모든 백성을 하나님 앞에 불러 모으고 찬양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떡과 과자를 들려주면서 가정으로 돌아가 축복하게 합니다. 이런 활동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은혜를 자기의 처소에서 나눌 때 나라는 회복되고 그 땅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재 우리나라와 우리 지역 공동체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는 어떻게 그 본분과 소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각 개인과 교회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윗의 이 프로젝트를 보면서 작년 부활절에 성동구의 네 교회 성가대가 모여 찬양제를 드렸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한 자리에 모인 네 교회의 성가대가 부른 찬양에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금년 부활절에는 왕십리교회에서 교회들이 모여 찬양제를 드립니다. 다만 금년에는 종려주일에 그 행사가 열립니다. 저는 상상합니다. 언젠가 왕십리광장에서 성동구의 교회들이 모여 다 같이 다윗의 나라에서 있었던 찬양을 함께 부르는 날이 올 것을 바라봅니다. 그때 우리들은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 같은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동구를 축복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교회들은 하나님의 대리인들로서 연대하고 협력하며 세상에 진정한 축복이 되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진영으로 나뉘어진 세력 간의 갈등입니다. 하지만 모든 백성은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과 수단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됨을 이루고 그 하나됨은 결국 우리를 상호이해에 이르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에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에 모시고 온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나라를 새롭게 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며 비전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