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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Shadow of Empire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Eeclaiming the Bible
as a History of Faithful Resistance
신실한 저항의 역사로서 성서 새로 보기
Editor Richard A. Horsley
리처드 호슬리 엮음
옮긴이 정연복
예수와 제국(1)
리처드 A. 호슬리
로마제국은 나사렛 예수에게, 가장 분명히는 그의 몸에 자국들을 남겼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한 사형집행 형태였다. 그것은 희생자들을 장대나 대들보에 매달아 장시간, 어쩌면 심지어 여러날 동안 서서히 질식시켜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최대한 고통을 주려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주로 완강하게 반항하는 노예들, 그리고 자신들의 지배에 맞선 속주의 반란자들을 처형하는 데 사용했다. 그것은 희생자들에게 창피를 주어 품위를 떨어뜨리고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로마의 궁극적인 방식이었다. 분명히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자료에서 당연시된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것을 날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십자가 위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은 왜 로마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는지를 나타낸다. 그들은 그를 로마의 통치에 맞서 폭동의 지도자로서 십자가에 처형했다. 이것을 감추려고 애쓰기는커녕, 복음서들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자주색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왕으로서 조롱하는 이야기로 그것을 확증한다(마가 15:16-20). 로마인들뿐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들도 예수가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가 20세기에 이해되어온 방식에 비추어 판단할 때, 로마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큰 실수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무죄한 사람이었다. 그는 폭도로서 십자가에 처형시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로마인들에게 아주 위협적이었을 아무런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에 관한 20세기의 세 가지 매우 일반화된 믿음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 예수는 사역의 절정에서 "성전 정화"를 했다는 믿음이다. 더욱이 예수는 사람들이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둘 모두를 행해야 한다고 현명하게 선언했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현대 서구의 가정에 의존한다. 예수는 당연히 종교적 인물이었으므로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이런 가정에 담긴 함축적 의미는 훨씬 더 깊다. 예수는 낡은(지방색을 띠고 몹시 편협한) 종교인 "유대교"에서 벗어난 새로운(보편적이고 더 영적인) 종교인 "기독교"의 출현을 위한 역사적 촉매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유대교"와 달랐고, 또 유대교와 충돌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를 영속시킨 견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에서처럼, 고대의 유대와 갈릴리 사회에서도, 종교는 정치적-경제적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가정들에 기초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예수는 열둘, 즉 "추종자들"이 되었고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한 공동체를 형성했고, 그의 말과 행동 중의 일부를 기억한 열두 명 가량의 개인들의 개인적인 종교 교사였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현대 서구 개인주의의 가정에 의존한다. 이 가정을 극복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사회적 관례들과 정치-경제적 관계들의 네트워크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을 최소한 지적으로는 인식하게 되었다. 예수는 위기와 갈등의 독특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남들과의 강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 예수는 단지 비폭력이 아니라 무저항을 옹호했다는 믿음이다: "너희의 원수들을 사랑하라." "다른 뺨을 돌려대라." 이러한 해석은 문학적 맥락과 동떨어지고 따라서 역사적 맥락과도 동떨어진 개별적인 말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 즉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접근방법에 의존한다.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되기 위해, 예수는 남들과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 의사소통을 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배우는 학생들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일방적으로 혹은 의사소통 맥락과 동떨어진 채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에 관한 정보를 위한 사실상 우리의 유일한 자료인 복음서들은, 역사적 맥락에서의 정치적 갈등을 수반하는 플롯을 가진 완전한 이야기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마침내 인식하게 되었다. 복음서들은 또한 경제적 생존, 권력자들에 의한 체포, 예루살렘의 통치자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에 맞선 예언자 선포들 같은 다양한 쟁점에 관한 예수의 연설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상호작용 가운데 있는 역사적 예수를 식별하기 시작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창문은 고립된 말씀들에 의해서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한 복음서 이야기들과 예수의 말씀들과 같은 의사소통의 진정한 단위를 비판적으로 읽고, 또 그 다음에는 다양한 쟁점에 관한 이러한 묘사들을 비판적으로 비교하는 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21세기 초반의 지나간 몇 년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역사적 예수"는 전례가 없었던 정치적 소란의 한 세기를 통틀어 두드러지게 용케도 비정치적인 채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뚜렷하게 보일 수 있다. 600만 유대인들의 대학살도, 수십 년의 반식민지 반란들과 유럽의 식민지 세력들에 의한 진압도, 일반적인 가정들, 관점, 그리고 접근방벙에 대한 폭넓은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오직 미국이 중동, 즉 이라크에서의 침략과 점령에서 자신의 "확고한" 힘을 주제넘게 단언한 후에야 비로소 소수의 성서 해석자들이 물려받은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하나의 제국이므로, 중동에서의 선제공격에서 자신의 제국의 힘을 보다 노골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고 신보수주의 지식인들은 주장해왔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미국이 참으로 제국주의 세력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이끌었다. 미국의 집단적 정체성 속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로마라는 인식이 얼마나 깊이 깔려 있는지를 역사가들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최근의 이러한 발전들은 이제 "새로운 로마인들"로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불편을 느끼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원래의 로마와 고대 중동의 관계에 관해, 그리고 특히 로마인들이 한 사람의 폭도로서 십자가에 매달았던 그 인물에 관해 면밀히 질문하도록 이끌었다.
로마의 정복과 로마의 통치
로마인들은 예수가 사역을 시작한 갈릴리의 삶의 조건들, 그리고 그의 사역이 절정에 이른 예루살렘에서의 삶의 조건들을 결정했다. 로마 군대는 갈릴리와 유대를 정복하고 또 재정복했다. 사람들을 겁먹게 하여 굴복시키려고, 그들은 마을들을 파괴했고 사람들 중 일부를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고 저항의 지도자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로마 장군들은 지방 사람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했다. 로마인들은 시골을 통제하고 조공을 거두기 위해 예속 통치자들, 즉 혜롯 가문의 왕들과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임명했다. 로마 총독들은 강도들, 예언자들, 그리고 분쟁을 야기하는 말썽꾸러기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리고 대중적 메시아들이 이끈 보다 광범위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한 번 군대를 파견하여 시골을 황폐화시키고 폭동의 지도자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정복
로마가 부상하기 전에, 유럽 군대는 근동 민족들에 대한 서구의 정치적-문화적 지배를 이미 확립했었다. 알렉산더 대제의 후계자들이 확립한 이전의 서구 제국들이 피정복 민족들의 반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서로 전쟁을 벌였던 것처럼, 로마는 자신의 힘을 그 지역에 쏟아부었다. 지중해 세계의 다른 도시들과 민족들에게까지 로마가 자신의 세력을 무자비하게 확대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을 우월한 민족, 즉 "제국의 백성"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열등하기 때문에 우월한 민족의 지배가 필요하다고 간주했다. 그들은 시리아인과 유대인 같은 일부 민족은 기본적으로 자주성이 없고 굴종적이라서 노예로 만드는 것 말고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고 여겼다.1) 로마 자체는 어쨌든 세계적인 패권을 쟁취하기로 운명지어져 있었다. 문명의 횃불이 고대 트로이로부터 로마로 전달되었다(베르길리우스의 Aeneid를 보라). 로마는 신들의 은총을 받았고 역사는 예정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로마는 도로, 수로, 로마의 법률 같은 자신의 문명의 혜택을 타민족에게 가져다줄 사명을 지녔다.
기원전 1세기 초엽에 이르러,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역에 걸쳐 지배적인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 장군들은 제국의 주요 도시에서의 소비를 위해 곡물과 다른 물건들의 유통에 대한 더 큰 통제권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군사 원정을 하여 근동으로부터의 로마의 공급선을 공격하고 있었던 강도들/해적들(latrones, 오늘날의 정치적 용어로는 "테러리스트들")을 무차별 진압했다. 로마 장군들의 잔인한 동방 정복은 로마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단계를 가져왔다. 키케로와 다른 정치적 웅변가들은 군사 원정을 위한 더 폭넓은 지지를 얻으려고 대중의 물질적 이기심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지휘관들은 정치적 지배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로마 주민들과 팽창하는 제국의 도시의 지배층에게 "평화와 번영"을 제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복의 산물들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경제적 착취를 시작했다.
로마가 팽창한 이 새로운 국면에서 한 주요 단계는 기원전 64-63년 로마의 위대한 장군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한 것이다. 그의 군대는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나 파괴없이 신속히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의 도시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 제도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뽐냈으며, 대제사장을 유대와 갈릴리의 꼭두각시 정부로서 원래 자리에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로마인들은 정복된 사람들에게 굴욕의 척도와 세입원 둘 모두로서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 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내전을 포함해서, 자신의 근동 지배에 대한 심각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 지역을 재정복하려는 군사 원정의 과정에서, 로마는 유프라테스강 전역에서 한 군대의 상실을 포함해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그곳에서, 제국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 군대는 복수심에 불타는 재정복의 원정들에서 특히 잔인해졌다. 민족들을 겁주어 굴복시키려는 의도를 띤 조치들로서, 그들은 마을들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고, 그리고 수백 명의 반란자들을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시"효과를 내려고 길가에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 원정들 중 하나에서, 카시우스 장군은 수천 명의 갈릴리 사람들을 막달라(Magdala)와 그 주변에서 대량 학살했다(삼만 명이라는 요세푸스의 숫자는 과장이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과 보스니아에서의 최근의 대량 학살 여파로, 우리는 그러한 대학살이 살아남은 주민들에게-이 경우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리고 아마도 예수의 다른 추종자들이) 살았던 마을에서- 남기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다.2)
예속 통치자들
반항적인 갈릴리와 유대 사람들을 더 빈틈없이 통제하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 원로원의 다른 지도자들은 젊고 호전적인 실력자인 헤롯을 이두메,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전역을 통치하는 왕으로 앉혔다.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고서도, 헤롯이 자신이 통치하도록 임명받은 민족들을 진압하는 데는 3년이 걸렸다. 그 후, 이 무자비한 왕은 요새, 수비대, 첩자라는 광범위한 안전장치로 사람들을 계속해서 빈틈없이 통제했다. 주로 대규모 "발전" 프로그램 덕분에, 그는 재빨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군사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지명을 가진 모든 도시들과 같은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자신의 안전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난공불락의 요새들뿐만 아니라 몇몇 제국의 성전들도 세웠다. 물론, 그러한 "발전"은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마을들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한의 자원 착취가 필요했다.
헤롯이 죽은 후, 로마인들은 제국의 궁전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그의 아들 안티파스를 갈릴리외 베레아 지역의 통치자로 삼았다. 거대한 "발전" 프로그램들을 계속하면서, 그는 20년 안에 갈릴리의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에 두 개의 수도를 건축했다. 또다시 그러한 야심에 찬 프로젝트들은 굉장한 세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직접 갈릴리에 자리잡고 통치한 덕분에 거의 모든 촌락을 지배적인 도시들로부터 쉽게 감독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세금 징수는 훨씬 더 효율적이 되었다.
헤롯과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국가를 제국의 질서에서의 한 기본적인 제도로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설명된 대로, 성전 국가는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체제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졌는데, 이것은 현대의 해석에서 종종 언급되지 않는 세부 사항이다.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십일조와 봉헌물로 그들 자신의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스 1:3)을 섬길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또한 그 지역을 통치하면서 제국의 황실에 조공을 바친 제사장 귀족정치를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그들 이전의 헬레니즘 제국들처럼, 로마인들과 그들에게 예속된 왕인 헤롯은 성전 국가를 제국의 통치 수단으로서 유지했다. 헤롯은 성전 구역을 웅장한 헬레니즘-로마 스타일로 거대하게 확장하고 재건축하는 야심에 찬 대규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헤롯 성전은 로마제국 세계의 위대한 경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제사장들의 주된 기능이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드리는 희생제사와 함께, 그들은 로마와 로마 황제를 위해서도 제물을 바쳤다. 헤롯은 성전 문 위에 커다란 로마제국의 독수리를 세웠다.
헤롯이 죽은 후, 로마인들이 로마의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를 표면상 강요했을 때, 헤롯이 임명한 네 개의 대제사장 가문이 유대 사회를 관리하는 자리에 앉혀졌다. 현직의 대제사장은 이 네 가문 중에서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되었는데, 사실상 총독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대제사장 귀족들은 일반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로마에 바칠 조공을 수집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특권을 채우려고 그들의 힘 있는 지위를 이용했다. 그들이 분명히 기원후 1세기 동안 성전 바로 서쪽에 있는 예루살렘의 이 지역에 더욱더 사치스런 대저택들을 지었다는 것을 고고학자들은 발견했다. 헤롯의 왕권과 로마 총독들과 수비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성전 국가는 유대에서 로마제국 통치의 얼굴이었다.
헤롯과 대제사장의 통치와 나란히, 로마의 정복과 조공의 영향은 농민들, 즉 사회의 90% 이상을 차지하면서 경제적 기초를 형성한 농민들에게 가혹했을 것이다. 위에서 주목했듯이, 로마의 정복과 재정복의 잔인성은 집단적 트라우마라는 자국을 남겼다. 로마에 바치는 조공의 요구와 십일조와 봉헌물에 덧붙여 성전과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세금은 농민 생산자들의 경제적 압력을 극적으로 차츰 증가시켰는데, 그들이 생계는 기껏해야 계속해서 밑바닥을 맴돌았다. 다양한 층의 통치자들의 복합적인 요구들이 수십 년 쌓이자, 마을의 많은 가정들은 점점 더 빚을 지게 되었고, 자기네 가족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을 잃었다. 가정들의 빈곤화는 그러한 농경 사회의 기본적인 사회적 형태인 촌락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했다. 바로 이것들이 예수가 복음서들에서 언급하는 악화되는 상황들이다: 빈곤화, 굷주림, 채무가 그것이다.
저항과 보복
예수의 사명과 그가 촉진한 운동(들)에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은 폭넓은 반응을 보이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영향을 주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생애는 역사적으로 로마인들과 그들에게 예속된 통치자들 모두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 봉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헤롯이 기원전 4년 죽었을 때, 대중적 봉기들이 갈릴리, 유대, 트랜스요르단 같은 그의 통치 영역의 모든 주요 지역에서 분출했다. 사람들은 최소한도 일시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로마와 예루살렘의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는데, 유대의 일부 지역에서는 3년 동안이나 반란을 이어갔다(요세푸스, War 2.55-65; Ant, 17.271-285). 로마의 재정복은 잔인했는데, 1세대 전에 막달라 주변에서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트라우마의 자국을 남겼다. 로마 군대는 마을들을 불태웠고, 아마도 예수의 고향 마을이었을 나사렛(마태 2:23; 누가 2:39, 51)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사람들을 더욱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굴복시키려고, 그들은 약 2천 명의 반란 지도자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War 2.66-75; Ant, 17.286-95).
다시금 예수의 선교 후 30년 정도 지난 후, 둔감하거나 거만한 로마 총독들에 의한 다수의 도발과 대제사장 가문들의 약탈적인 관행들 후에, 광범위한 반란이 분출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로마인들을 그 도시로부터 성공적으로 몰아냈다. 시골에서 갈릴리와 유대 마을 사람들은 다시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다(War 2.405-654). 큰 반란에 대한 로마의 반응은 훨씬 더 체계적이고 파괴적이었다(War 3: 5-6). 그들은 갈릴리와 유대 북서쪽에서 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수만 명을 대량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그 성벽들과 요새화된 성전 구역에서 로마 군대의 힘에 의해 더 잘 저항할 수 있었다. 그 도시에 대한 장기적인 포위 공격 동안, 로마인들은 내부 반란자들을 겁주려고 수백 명의 저항자들을 정기적으로 십자가에 처형했다(War 5:449-51). 로마인들이 마침내 성벽을 돌파했을 때, 그들은 도시와 성전을 똑같이 파괴했다. 그들이 로마로 압송한 많은 죄수들 중에 대중적 메시아이며 반란 지도자인 시몬 바 기오라(Simon bar Giora)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를 유대인들과 갈릴리 사람들의 반란에 대한 로마의 위대한 승리를 경축하는 의기양양한 행진에서 예식적으로("유대인들의 왕"으로서) 처형했다(War 7.132-55).
기원전 4년과 기원후 66-70년의 폭동들 사이에서, 농민들과 예루살렘 주민뿐만 아니라 서기관 집단들도 통치자들에게 되풀이해 항의했는데, 농민들은 몇몇 저항운동과 갱신운동을 전개했다. 이 항의들 중 많은 것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왕권 아래 있는 계약적인 삶의 원리들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독립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로마인들이 이스라엘의 계약 원리들을 범하고 행한 도발들에 대한 항의였다. 본디오 빌라도가 신성한 상(像)들로 장식된 군대 깃발을 휘날리는 로마 군대를 예루살렘 안으로 보냈을 때,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가이샤랴의 한 스타디움에서 빌라도와 맞섰는데, 만일 그 깃발들을 철수시키지 않으려면 자신들을 차라리 순교자로 만들라고 감히 도전했다(요세푸스, Ant, 17.55-59). 성전 안에 그 자신의 흉상을 설치하라는 칼리굴라 황제이 명령에 응수하여, 한 무리의 잘 훈련된 갈릴리 농민들은 곡식 심기를 거부하면서(따라서, 아무런 곡물도 생산하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Ant, 18.261-99), 농민 대중의 대규모 "동맹파업"을 벌였다.
로마제국의 지배와 계속 대결한 가장 생생한 실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축제 때 파라오 아래의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매년 경축하는 것이었다. 해방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이 고조될 것을 예상하면서, 로마 총독들은 로마 군인들을 성전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꼭대기에 배치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지속적인 정복을 도발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1세기 중엽으로 향하던 어느 해에 유월절 군중들의 항의가 분출했는데, 로마 총독은 군대를 성전 안마당에 모여 있는 순례자들 위에 배치했다(요세푸스, War 2.223-27; Ant, 20.106-12).
예수와 그의 운동과 비교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대중 운동들, 즉 두 가지 독특하게 이스라엘다운 사회적 형태를 띤 대중 운동들이었다. 이 운동들은 사람들 사이에 출현한 지도력과 조직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사회적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민족 형성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본떴는지를 보여준다. 헤롯이 죽었을 때 분출한 폭동들에서, 농민들은 자신들 중의 하나를 "왕"으로 선포했는데, 그는 그들을 이끌어 헤롯의 요새들과 로마 보급 창고들을 급습했다고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말한다(War, 2.55-65; Ant, 17.271-85). 이 운동들과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젊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의 해방에서 그들을 이끌 왕으로 "삼았던" 기억을 본떴음이 분명하다. 제1차 유대 반란에서 시몬 바 기오라가 이끌었던 운동과 바 코크바 발란은 동일한 형태를 취했는데, 그것들은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었다. 더욱이 1세기 중엽, 몇몇 농민 운동은 드다(Theudas)나 "이집트 출신의 한 유대인" 같은 예언자들을 중심으로 연합했는데, 그들은 모세가 지도한 출애굽이나 여호수아가 이끈 땅 점령을 본뜬 새로운 해방 행동들을 기대하는 추종자들을 이끌었다(요세푸스, War, 2.259-62; Ant, 169-71; 행 5:36). 이 모든 운동들은 또다시 로마군대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진압되었다.
경제적으로 대제사장의 귀족정치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자들과 교사들의 집단들도 로마의 통치 혹은 로마 통치를 위한 대제사장의 협력에 항의했다. 헤롯이 드러누워 죽어가고 있었을때, 예루살렘의 두 저명한 교사는 제자들을 고무시켜 성전 문에 장식된 로마의 황금 독수리를 넘어뜨리게 했다. 함축적으로 더 심각한 것은, 10년 뒤 로마인들이 한 로마 총독의 직접 지배를 강요했을 때, 교사인 감라의 유다와 바리새파 사람인 사독이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운동을 조직했는데, 로마인들은 이 운동을 반란과 똑같다고 여겼다(요세푸스, Ant, 18.4-10, 23-25). 더욱 불길하게는 50년 뒤, 이 반체제 지식인들의 후계자들이 테러리스트 집단인 시카리(Sicarii)를 조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단도로 무장한 사람들"은 로마의 통치에 긴밀히 협력하는 대제사장들을 암살했다(War, 2.254-57).(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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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람의 나귀; ㄱ. 근현대사에서 한민족에 대해 제국주의자들은 똑같이 말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근대 제국주의의 원조격인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의 말을 들어보자.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1894-97)
1) 비숍 여사는 1894-97년, 네 차례 한국을 여행한 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씀
2) 그녀는 한국 문제점으로, 국가시스템 붕괴/ 관료 부패/ 기생충같은 양반계급 지적함
3) 상류층은 부조리에 마비된 채 무위도식, 출세길이 막힌 중간층은 에너지발산 없음
4) 전문 직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위계층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일한다고 묘사함
5) 비숍여사는 한국인이 가장 열등한 민족이고, 그들의 상황이 가망 없다고 판단!
ㄴ. 해방전후 점령군으로서 38선 이남을 접수한 미제의 행동대장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조선반도를 핵무덤으로 만들려고 획책했던 저 잔인무도한 맥아더의 말을 들어보자.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1947)
1) 한국인은 일본인과 달리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돼있지 않음
2) 한국인에겐 권위적이고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함
ㄷ. 마지막으로 1980년 8월 전두환 등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지지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의 들쥐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존 애덤스 위컴 2세(1980.8.8)
“한국민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
2. 발람의 나귀; 일제시대 신사참배로 식민지 지배체제에 영합하고도 회개치 아니하고, 해방정국에서는 점령군으로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에 또다시 영합하여 미제를 '해방군'이라 '구세주'라 부르던 그대, 기doG교 종미주의자들여, 저 잔인무도한 미군정의 계획된 양민 학살을 진정 모르는가,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가?
1950년 한국전쟁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 목록(총 120건)
서울 용산구 미군폭격 (1950년 7월 3일, 60여 명 사상,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서울 서빙고 미군폭격 (1950년 9월 4일, 주민 다수,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서울 마포구 미군폭격 (1950년 9월 6일, 100여 명 사상,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서울 성북동 학살 (1950년 9월 30일, 30명 사망(서울 전차 노동자), 제보) 서울 망우리 미군폭격 (1950년 12월 31일, 수십 명 사망, 제보) 인천 미군폭격 (1950년 8월 5일, 다수 사망,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인천 금곡동 학살 (1950년 9월 16일(인천상륙작전 다음 날), 2천 700여 명 사망, 전민특위 공동백서·제보·증언) 인천 춘의도 학살 (1953년 5월 20일(음력 4월 8일), 다수 사망, 증언) 강화 길상면 선두리 미군 기총사격 학살 (1950년 9월 16일, 3명 사망 외,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김포 미군폭격 (1951년 1.4후퇴 당시, 300여 명 사망, 한국일보(1999. 12. 30)) 양주 쇠목마을 미군폭격 (1951년 4월, 10여 명 사망, 전민특위 백서) 연천 미군폭격 (1950년, 15명 사망, 전민특위 백서)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학살 (1950년 2월, 주민 다수 사망, 제보) 남양주 진접면 미군폭격 (1951년 2월 10일, 5명 사망·2명 부상,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남양주 일패동 미군폭격 (1951년 2월 20일, 6명 사망·초가집 전소,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안양 미군폭격 (1951년 1월 9일, 300여 명 사망(피난민), 제보) 성남 분당 미군폭격 (1950년 여름 무렵, 피난민 다수, 제보) 이천 율면 미군폭격 (1953년 무렵, 마을주민 다수 사망, 제보) 화성 안효리 미군폭격 (1950년 12월 6일, 가족 3명 사망·가옥 16동 전소,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수원 뒷고지 미군폭격 (1950년 7월, 80-100명 사망(국군),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수원 병점 미군 기총사격 (1952년 5월, 2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용인 풍덕천리 미군 기총사격 학살 (1951년 1월 12일, 1회 난사시 20-30여 명 사망, 한국일보(1999년 12월 30일),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용인 죽전리 미군 기총사격 학살 (1951년 1월 15일, 사망 17명·부상 3명,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용인 지곡리·보라리 미군폭격 (1951년 1월 26일, 다수 사망, 수지읍지(2002)) 춘천 미군폭격 (1950년 6월 27일, 주민 다수 사망·가옥 파괴,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춘천형무소 학살 (1950년, 2명 사망, 증언) 홍천 미군폭격 (한국전쟁 기간 중, 다수 사망, 제보) 고성 미국폭격 (1951년 1.4 후퇴 당시, 12명 사망·1명 부상,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주문진-삼척 미국폭격 (1950년 7월 2일-6일, 다수 희생,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강릉 연곡면 미국폭격 (1951년 1월, 사망 1명·가옥 전소, 증언) 평창 하4리 미군폭격 (1951년 1월 16일, 2명 사망·다수 부상,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1951년 1월 20일, 360명 사망, 미 국립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의 CIA문건, 오연호『노근리 그 후』,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옥천 노루목재 미군폭격 (1950년 10월 5일(음 8월 24일), 36명 사상, 2003 충북지역실태조사보고서) 옥천 청산시장 미군폭격 (1950년 10월 5일(음 8월 24일), 다수 사망, 옥천신문) 영동 임계리·무득리 미군폭격 (1950년 7월 22일, 2천 명, 제보) 영동 양강면 묘동리 학살 (1950년 7월 23일, 3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영동 노근리 학살 (1950년 7월 26일-29일, 248명 사망(400여 명 주장), 한미합동조사, 미군 문서, AP 보도 등) 영동 양강먄 지촌리 학살 (1950년 7월, 다수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서산 대산리 미군폭격 (한국전쟁 기간 중, 다수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예산 신주리 미군폭격 (1950년 9월 5일, 3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접수목록) 아산 둔포 미국폭격 (1951년 1월 15일 경, 300여 명 사망, 한국경제(1999년 12월 29일)) 아산 온양온천 미군폭격 (1950년 7월 10일부터 얼마동안, 온양 온천 일대 잿더미, 온양시지(1989)) 천안 소정리 등 미군폭격 (1950년 7월 초순, 잿더미·인명피해 미상,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공주 월하리 미군의 학살 (1950년 7월 5일, 7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서천 대산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20일, 수십 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서천 판교면 미군 기총소사 학살 (1950년 9월 10일, 50여 명 사상, 뉴스서천(1999. 10-11))논산 시가지 미군폭격 (1950년 7월 22일, 1000여 호 민가 폐허, 신경득『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금산 철산리 미군폭격 (1950년 7월 5일, 50명 사망, 증언) 금산읍, 추산면 미군폭격 (1950년 7월 22일, 다수 사망, 금산군지(1987)) 금산 중도리 미군폭격 (1950년 9월 30일, 다수 사망, 금산군지(1987)) 대전 유성 미군폭격 (1950년 7월 말, 주민·피난민 50여 명 사망·10여 명 부상, 한국경제신문, 국민일보) 김천 남면 미군폭격 (1950년 7월 25일, 16명(농소면, 남면 주민),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김천 감천 미군폭격 (1950년 9월 29일, 4명 사망·3명 부상·마을 전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대구경북 증언 조사 자료집』) 상주 모서면 미군폭격 (1950년 9월 25일(음 8월 14일), 다수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예천 가동 미군폭격 (1950년 7월 1일, 가족 3명 사망·아들 부상,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예천 산성리 미군폭격 (1951년 1월 19일(음 12월 12일), 48명 사망·90명 부상 등, 오연호『노근리 그 후』,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예천군 의정보고, 미국립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의 CIA문건,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예천 진평리 미군폭격 (1951년 1월 19일(음 12월 12일), 30명 사망·15명 부상 등, 오연호『노근리 그 후』,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예천군 의정보고, 미국립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의 CIA문건,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영주 봉현면 미군폭격 (1951년 1월 19일, 10명 사망·10명 부상,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울진 산포3리 미군폭격 (1950년 7월-8월 수십 명 사망(국군 포함),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안동 풍산읍 미군폭격 (1950년 여름, 20여 명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영덕 기암리 미군폭격 (1950년 7월 초, 주민·가축 몰살, 전민특위 공동백서) 청송 현동면 미군폭격 (1950년 8월 10일·21일·25일, 수십 명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의성 제오리 미군폭격 (1951년 2월 1일, 2월 4일 20여 명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구미 미군폭격 (1950년 8월 3일, 5-6명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구미 사창마을 미군폭격 (1950년 8월 16일, 130여 명 사망, 오연호『노근리 그 후』,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선산 송림동 미군폭격 (1950년 8월 31일, 38명 사망, 전민특위 공동백서) 구미 금정동 미군 기총사격 학살 (1950년 9월 15일, 사망 18명·중상 1명,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구미 선산동 학살 (1950년 9월, 28명, 제보) 칠곡 왜관교 폭파 (1950년 8월 3일, 수십에서 수백 명,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AP통신(미군 증언)) 칠곡 왜관읍 미군폭격 (1950년 8월 7일 즈음, 13명 이상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고령 고령교 폭파 (1950년 8월 3일, 수백 명 사망(피난민),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AP통신(미군 증언)) 고령 우곡면 미군폭격 (1950년 9월 1일, 30여 명 사망(15명 내외),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경주 다산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5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경주 동방동 미군사격 학살 (1950년 12월 24일, 다수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포항 흥해읍 흥안리 미군폭격 (1950년 7월 19명 사망, 부상 2명,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포항 흥해읍 북송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16일(음 7월3일), 32명 사망·2명 부상,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포항 송골계곡 미군 함포사격 (1950년 9월 1일(음 7월 19일), 100여 명 이상 사상(400명 주장 있음), 태평양함대 소속 구축함 해이븐(DD 727 De Haven)호의 전투일지(War Diary),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부산일보) 포항 청하면 월포리 미군폭격 (1950년 9월 5일(음 7월 23일), 다수 사망,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포항 청하면 이가리 미군폭격 (1950년 9월 8일(음 7월 26일), 50여 명 사망·다수 부상,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포항 송라면 광천리 미군폭격 (1950년 9월 23일(음 8월 12일), 40여 명 사망·6명 부상, 경북도의회특위보고서(2000),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포항 흥해읍 북송리 2차 폭격 (1950년 9월 23일, 1명 사망·6명 부상,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독도 미군폭격 (1948년 6월 8일 외(1947년 4월 경, 1952년 9월 15일, 1952년 9월 22일), 150-300여 명 사망(강원도, 울릉도에서 온 어민), 오연호『노근리 그 후』,『한국 근세 30년사』, 마크 S. 로브모「1948년 6월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심층적 연구」) 거창읍 미군 기총사격 학살 (1950년 7월 25일(음 6월 11일), 6명 사망·다수 부상, 거창군의회 조사보고서(2003)) 합천 덕곡면 미군폭격 (1950년 여름, 율지리 95채 중 93채 전소·사망자 미상,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조사보고서(2004), 합천군지) 하동 학예면 미군폭격 (1952년 1월 19일, 2천여 명 사망, 전민특위 공동백서) 진주 반성면 미군폭격 (1950년 7월-8월(추정), 10여 명 사망, 전민특위 공동백서) 진주 명석면 오미리 미군폭격 (1950년 7월말, 1명 사망·7명 부상(시목마을 피난민), 전민특위 공동백서, 명석면지) 진주 주약동 약골 미군폭격 (1950년 8월 3일, 40-50명 사망·수십 명 부상, 전민특위 공동백서, 경남일보(1999년 12월 31일)) 진주 수곡면 원당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6일, 7명 사망, 전민특위 공동백서,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진주 금산면 미군 기총사격 학살 (1950년 가을, 3-4명 사망(피난민), 전민특위 공동백서) 사천 곤명면 마곡리 미군폭격 (1950년 7월 31일, 13명 사망·8명 부상, 전민특위 공동백서) 사천 곤명면 조장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1일(혹은 2일), 54명 사망·47명 부상, 오연호『노근리 그 후』, 전민특위 공동백서) 마산 곡안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11일, 83명 사망, 오연호『노근리 그 후』, BBC "kill `em all") 마산 진목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7일, 5명 사망, 경남도대책위) 마산 진북면 이목리 학살 (1950년 8월 9일, 13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마산 신장면 미군폭격 (1950년 8월 초, 83명 사망, 증언) 함안 장지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20일, 170여 명 사망·100여 명 부상, 오연호『노근리 그 후』) 함안 수곡리·박곡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20일·27일, 수십 명 사상, 증언) 함안 유현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100여 명 사망, 증언) 함안 원북터널 미군폭격 (1950년 8월, 100여 명 사망·다수 부상, 증언) 함안 토현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20일, 다수 부상, 증언) 함안 가야읍 미군폭격 (1950년, 4명 사망·290여 채 가옥 전소, 증언) 의령 화정면 보천마을 미군폭격 (1950년 8월 11일·13일·15일·17일, 22명 사망·6명 부상, 증언) 의령 만천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1명 사망·10여 명 부상, 증언) 의령 용덕면 미군폭격 (1950년 8월 22일, 33명 사망·30명 부상·가옥 100여 채 전소, 오연호『노근리 그 후』) 의령 부림면 단원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12-13명 사망, 증언) 의령 지정면 마산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피난민 일가 몰살, 증언) 창원 북면 피난민 학살 (한국전쟁 기간 중, 피난민 60명 사망, 김기진 『국민보도연맹』) 창원 이목리 학살 (1950년 8월 9일, 10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창녕 어초리 미군폭격 (1950년 8월 초, 60여 명 사망·20여 명 부상, 오연호『노근리 그 후』) 창녕 남지읍 미군폭격 (한국전쟁 기간 중, 다수 사망, 남지읍지) 익산역 폭격 (1950년 7월 12일, 350여 명 사망, 오연호『노근리 그 후』, 익산시의회보고서, '진상') 김제역 미군폭격 (한국전쟁 기간 중, 다수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전주 우전면 미군 기총소사 학살 (1950년, 4-5명 사망, 제보) 여수 안도리 이아포 학살 (1950년 8월 3일, 250-300명 사망, 남면미군학살사건 자료집) 여수 두룩여.여자만 미군폭격 (1950년 8월 초·1950년 8월 7일, 10여 사망(어민)·12명 사망, 남면미군학살사건 자료집·남면미군학살사건 자료집) 순천 풍덕동 미군폭격 (1950년 7월 25일, 4명 사망, 국방부 민간인학살 사건접수 목록) 광산 두산마을 미군폭격 (1950년 8월 2일, 수십여 명 사망, 전민특위 공동백서) 화순탄광 노동자 학살 (1946년 8월 15일~1951년, 7-8명 사망·100여 명 부상(30명 사망·500여 명 부상), 오연호『노근리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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