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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독생자에게 내 인생을 뺏기는 기쁨>의 줄거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 내게 주신 독생자 가지기 한 가지만을 평생토록 하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내가 가진 독생자는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내 인생을 자취 없이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왜 빼앗는다고 할까요? 내가 내 인생을 위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에게 내 인생을 뺏기는 기쁨
(요한복음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독생자에게 내 인생을 뺏기는 기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독생자에게 내 인생을 뺏기는 기쁨”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올바른 반응이란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신 독생자를 평생 동안 가지는 것입니다. 독생자만 가지고 살겠다는 결심이 곧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독생자를 가지는 것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어떤 사건 속에 있든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의 존재감과 비중이 나의 의식에서 언제나 1등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의식이 독생자 예수님을 1등 존재감과 1등 비중으로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러한 독생자 가지기를 평생 동안 유지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식에서 독생자를 첫 번째 존재감과 비중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의식하는 것이 곧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식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어둠 속에 묻히게 됩니다. 첫 번째로 보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일 때에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건과 대상은 의식의 어둠 속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생자를 가지게 될 경우에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본문은 내가 가진 독생자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가진다면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 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생을 빼앗긴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인생을 맡아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맡김과 빼앗김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맡김은 곧 위탁입니다. 이는 곧 여전히 인생의 주권이 나에게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생에 대해서 여전히 바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바람을 고려하시고 응답하시며 이끌어나가시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가질 때에 나타나는 일은 맡김이 아닌 빼앗김입니다. 빼앗김에 바람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주권의 흔적 자체가 말끔히 없어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한일합방을 이루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인생을 합방하시고 주권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인생에 대해 조금도 관여할 여지가 남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나의 인생을 당신 마음대로 하시려고 송두리째 빼앗아 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독생자 가지기의 의미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독생자를 가질 때에 나의 인생은 예수님께 빼앗기게 됨으로써 나는 인생에 대해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인생을 예수님께 송두리째 빼앗긴 모범적 예로 세례 요한을 제시합니다. 30절을 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내용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의 마지막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인생이 어떻게 예수님께 빼앗기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 인생을 빼앗기게 될 때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기쁨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말이 나온 배경에는 예수님의 물세례가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물세례의 사역을 빼앗기는 근심과 불안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제자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대답을 “사사로운 개인의 입장을 초월해서 구원의 대의를 위한 희생과 자기부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결코 세례 요한의 대인배 다운 면모를 드러내고자 기록된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온전히 완성되고 성취되는 것이지 쇠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잘 준비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바통을 이어받으시고 이후의 사역을 수행하시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준비사역을 잘 완수한 것이고 예수님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수행하심으로써 두 분이 윈윈(win-win)하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누구의 사역도 쇠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주를 할 때 첫 번째 주자가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바통을 넘겨주는 일은 없습니다. 열심히 달려서 두 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준 다음에는 “나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라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 주자가 흥하여 1등을 하게 되면 나도 1등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준비를 했고, 그 준비를 토대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경기를 힘을 합쳐 승리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역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아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은 시쳇말로 업종이 같은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이 겹치는 것에 대해 걱정했지만 실제로는 사역의 내용 자체가 달랐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된 내용은 물세례였습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회개입니다. 다만 특정한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인격 자체에 대한 존재의 회개입니다. 죄악 된 인격이 통째로 죽어야 함을 가리키는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세례 요한이 구분하고 있었던 점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핵심내용이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사역과는 차별화되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독생자 예수님을 가지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또한 빼앗아 가십니다. 내가 예수님께 인생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빼앗아 가십니다. 나의 인생임에도 일언반구 개입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본문에 얽혀있는 오해를 하나 풀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어지는 4장 1~2절을 보면 이와는 상반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은 물세례가 아니었고 실제로 공관복음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주셨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세례 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로부터 본문의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세례 주는 것을 허락하셨기에, 세례 요한도 물세례를 주고 예수님도 물세례를 주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선발 주자고 예수님은 후발 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례 요한의 제자와 한 유대인 사이에서 정결예식에 대한 변론이 벌어졌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 중에 어느 쪽이 권세가 있고 정당한가에 대한 다툼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사역이 쇠퇴한다고 느끼고 근심하며 걱정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받으러 가는 것에 시기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이 상황에 대해 그려지는 큰 그림을 보자면 구도가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본연의 사역도 아닌데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사역의 김을 빼버리시고 물세례 사역의 의미를 빼앗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에 발끈하게 됩니다. 스승께서 그리스도로 인정한 사람이 어떻게 스승의 사역을 빼앗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26절에서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푸념하였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죄악 된 인격이 통째로 죽어야 한다는 회개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역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인격이 십자가에서 죽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허락하신 사실을 요한은 왜 기록한 것일까요? 이것은 세례 요한을 위한 일입니다.
24절을 보면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죽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씀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독생자로서 창조에 직접 가담하신 전능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예비하신 세례 요한의 갸륵한 사랑과 정성을 아시고도 투옥된 채로 목 베어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이도록 명한 것은 헤롯 안디바 왕이었으나 그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결국 세례 요한을 죽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세례 요한에게서 물세례 사역을 빼면 세례 요한의 인생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유일한 존재의미인 물세례를 빼앗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고 그대로 죽게 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의 인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우리 눈앞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표면적으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로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빼앗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목숨까지도 빼앗으십니다. 이것만 보자면 세례 요한의 기쁨의 고백은 패배자의 자기합리화처럼 들릴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자기 인생에 대해 조금도 주권적 의식을 가질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의 존재감과 비중을 첫 번째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진 독생자가 하시는 일은 나의 인생을 맡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빼앗아 가십니다. 인생에서 나의 주권을 박탈하십니다. 감옥에 갇혀서 참수를 당할지라도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고 걱정하고 염려할 자격조차 없게 만드십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장님보다 독생자 예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독생자를 가지면 예수님께서는 사장님 앞에서 나의 역할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십니다. 사장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의 어떤 주권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해나가십니다. 사장님과의 관계에서 나의 인생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완전히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배우자 앞에서도 독생자를 가져야만 합니다. 배우자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 예수님의 존재감과 비중을 먼저 의식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배우자에 대해 가지는 역할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배우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나와 의논하지 않으십니다. 의논할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로서 역할 자체를 예수님께서 송두리째 빼앗아 가십니다.
의식에서 독생자를 가지는 믿음을 유지해가면 예수님께서는 역할을 해야 하는 모든 관계에서 나의 역할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십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나의 몸은 살아있지만 인격의 자취를 없애버리십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기는 평생 독생자 가지기입니다. 내가 가지게 된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내 인생을 빼앗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인생은 관계와 역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물과도 관계가 있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역할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물세례를 주는 역할을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독생자를 가질 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역할을 다 빼앗고 강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몸이 살아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관계와 역할에 대해 나의 생각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바람이 개입할 여지를 조금도 두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독생자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보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이 좋아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보자면 나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송두리째 강탈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바늘 끝만큼도 나의 인생에 대해 내가 가지는 소원이나 바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라고 하는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하는 마음이고 독생자를 가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독생자가 하시는 일이란 내 인생을 빼앗아 가시는 일이라니 다소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한 가정에서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아들입니다. 그런데 나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를 몰아내고 남편 역할을 하고 아버지 역할을 하고 아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보면 화가 날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이 겪었던 상황이 이와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례 요한 본인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물세례가 전부였지만 예수님께 물세례는 당신의 역할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역할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렇게 역할을 빼앗기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내가 가정에서 남편입니다. 그런데 독생자를 가짐으로써 예수님께서 나의 역할을 빼앗아서 남편 역할을 해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남편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나의 소원과 바람은 눈곱만큼도 반영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이라도 내 생각과 바람을 반영하신다면 빼앗김이 아닌 위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있던 나의 모든 역할이 독생자 예수님에 의해서 송두리째 강탈되어 버리는 것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바로 기쁨입니다.
기쁨이 무엇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기쁨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삶은 불가능했습니다. 내가 주권적으로 모든 관계에 대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관계마다 주어진 역할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그동안 기쁨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나의 역할을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역할이라는 면에서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라는 인격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면 알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러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을 빼앗겨야 진정한 기쁨이 주어집니다. 인생에 대한 나의 주권적 바람과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인생이 없어져야 나의 인격에 기쁨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며 주권적 흔적을 남기려 하는 동안에는 세례 요한이 느끼는 기쁨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결코 가식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대인배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의식으로 예수님을 붙듦으로써 인격 속에 독생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누구도 아닌 독생자 예수님께 인생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더는 세례 요한의 인생에 자신의 바람이나 소원은 반영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하늘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빼앗겨 본 자만이 하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독생자 가지기가 운명임을 알았다면 인생이 독생자께 송두리째 빼앗기리라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 때 독생자 가지기라는 사실과 박자가 맞고 호흡이 맞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인생에 대해 주권자의 꼬리를 달기 원한다면 예수님과 박자를 맞출 수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은연중에, 암암리에, 살짝이라도 바라고 소원하고 생각하면서 인생에 반영되기를 바란다면 세례 요한이 느끼고 있는 기쁨은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인생이 송두리째 강탈당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생자 가지기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다만 독생자를 가졌을 때는 독생자 예수님께 인생을 강탈당하게 됩니다. 나의 인생에서 인격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과 바람이 이루어져야만 기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인생을 강탈당하게 되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하늘의 이상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 기쁨에 의아해하며 깜짝 놀라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렇게 역설적일 수가 있겠나 싶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주권적으로 붙잡고 기쁨을 추구하던 삶이 송두리째 빼앗기고서야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독생자 가지기의 역설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체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