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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행 지 : 팔공기맥 10차(갈현~합수점) 경북 구미시, 상주시, 의성군.
산 행 일 : 2024. 06. 22.(토)
산행코스 : 갈현(2차선 도로) ~ 342.7봉 ~ 387봉 ~ 367봉 ~ 343봉 ~ 383봉 ~ 장자봉(422.1m) ~ 십령/열재 ~ 435봉 ~ 446봉 ~ 만경산(499m) ~ 279봉 ~ 만경산입구/무명고개 ~ 171봉 ~ 생송고개/주선고개(90m, 912번 지방도) ~ 방지고개 ~ 산불감시초소(170m) ~ 182봉 ~ 굿고개 ~ 191봉 ~ 227봉 ~ 195봉 ~ 솔티(성황당) ~ 토봉(284.9m) ~ 192봉 ~ 새티고개 ~ 합수점 + 우물교 (기맥 산행 16km + 우물교까지 1.7km = 17.7km, 8시간 30분 소요)
산행참석 : 20 백두.
▶ 즐산팀은 구미시 도개면 동산마을에서 만경산으로 접속하여 우물교까지 12km 산행.
<참고사항>
- 등로는 다소 거친 편으로 갈현~십령 구간은 작은 봉우리가 연이어지고,
- 이후 만경산 오름길은 급경사에 등로도 뚜렷하지 않아 주의가 필요해 보이며,
- 만경산 이후 구간은 구릉지를 넘나드는 구간으로 등로가 뚜렷한 편이나,
- 능선구분이 애매한 곳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며 굿고개~토봉 구간은 잡목이 심하다.
- 우려와 달리 대체로 등로가 뚜렷한 편이어서 여름철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산행할 수 있겠다.
<산행지도>
지리산을 간다고 하기에 따라나섰는데 하필 그것이 백두대간 첫번째 산행이 되었고, 그렇게 한번 두번 산행을 이어가다 보니 백두대간은 물론 9정맥에 이어 이제 9기맥의 마지막 산행을 앞두게 되었는데, 그간 세월도 많이 흘러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 이제 마루금 산행 한 자락이 무척이나 힘에 부치게 되었다. 마음이야 우리의 산하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는 지맥도 걸어보고 싶지만, 이제 을지문덕 장군의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라는 충고에 따라 족함을 알고 물러섬이 현명한 길이라 여겨 이번 9기맥의 마지막 산행을 끝으로 마루금 산행은 접고 둘레길 트레킹을 진행하기로 한다.
여름철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마루금 산행을 마무리하려고 장마철임에도 팔공기맥 마지막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런데 산행일에 전국적으로 비가 예보되어 사뭇 걱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지방과 달리 경북 내륙지방은 오전 10시경에 3mm 정도의 비만 예보가 되어서 그 정도는 오히려 더위를 식혀주기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배낭을 메고 양재로 향한다.
양재에서 산행 버스를 탈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는데, 영등포소방서 건너편 타임스퀘어에서 밤 11시에 출발한 버스가 매번 15분 만에 서초구민회관 앞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거리가 15km쯤 되니 시속 100km로 오면 가능은 한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언젠가 영등포에서 한번 탑승해서 그 미스터리의 정체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2주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며 마악 도착한 산행버스에 올라,
산행 출발지인 갈현 구천면 쪽의 산행 들머리 입구에 도착한 버스에서 한 시간여의 단잠을 더 청하다가 일어나, 만경산 아래 동산마을에서 출발하는 즐산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배낭을 들고 버스에서 내려 산행 준비를 하고,
한밤중이라 수플이 우거진 구천면 쪽의 등산로 입구를 찾을 수가 없어서 구미 쪽으로 100여 미터 이동하여, 갈현 고갯마루 낙석방지 철망이 끝나는 지점의 기맥꾼들이 이용하는 들머리에서,
<갈현(葛峴, 220m)>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와 의성군 구천면 장국리(국수골)를 잇는 12번 군도가 지나는 곳으로, 2차선 포장도로가 나있지만 차량 통행은 뜸한 편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칡이 많아 갈현이라 불렸다고 한다. 현지인들은 갈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미시 도개면 도로표시판 직전 들머리인 시멘트옹벽을 오르며 팔공기맥 마지막 종주길에 나선다.
가파른 절개지 사면을 비스듬히 올라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진 능선에 접속하여서는 좌측 능선 오름길을 따르면,
지난번 청화산에서 갈현으로 내려섰던 유순한 등로와는 달리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다가,
바위지대를 만나 작은 암릉을 오르고,
좌측 낙동강 일선대교 방향으로 도개면 도개리의 불빛이 제법 큰 도회지의 야경인듯 보이더니,
다소 완만해진 능선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석축이 둘러진 예천임공 묘를 지나면,
삼각점과 '준.희'님의 산패가 걸린 342.7봉에 도착하여 좌틀하여 내려서게 된다.
<342.7봉>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와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와 장국리의 경계에 자리한 능선 봉우리다. 정상에는 삼각점(안계 463)과 '준.희'님의 '팔공지맥 342.7m' 산패와 '반바지'란 분의 '화산 342.7m' 코팅지가 걸려있다. 그런데 인근 주민들은 청화산을 '화산'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봉우리는 달리 부르는 이름이 없는데, 이곳에 걸린 '화산'이라는 코팅지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10여 년 전에 왔을 때는 없던 「화산」이라는 산패를 누가 언제쯤부터 내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옛 지리서나 지도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하여 힘들게 걸어 놓았을 터인데, 그 근거자료를 인터넷에서라도 찾아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342.7봉에서 완만하게 이어지는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내려서다가,
작은 봉우리를 살짝 우회하여 지나면,
다시 완만한 능선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또다시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는 제법 가파르게 내려서고,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들어서면,
다시 육산 능선에 바위들이 나타나며 짧은 암릉을 지나 오르게 되는데,
좌측 도개면 방향으로 문암산 능선쯤이 건너다 보이더니,
좌측은 구미시 도개면이 계속되지만 우측이 의성군 구천면에서 단밀면으로 바뀌는 삼면봉(387m)에 올라서도 좌틀하여 진행하여야 하지만,
무심코 뚜렷한 등로가 이어진 직진의 정수사와 할배들 산소가 있는 구천면 장국리 방향의 지능선으로 잠시 알바를 가다가 산꾼의 이상한 느낌에 발길을 돌려 387봉으로 돌아나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쉼을 한다.
목만 살짝 축인 짧은 쉼을 뒤로하고 387봉에서 직좌틀하여 급경사 내림길로 내려서다가,
나무로 좌측을 막아놓은 Y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애기장수의 공깃돌같은 바위들이 흩어진 안부를 지나,
잔돌들이 흩어진 봉우리와 잡목이 빼곡한 봉우리를 연속으로 넘어,
밋밋한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들어서서,
작은 암릉봉을 좌회하여 지나는데,
사위가 밝아오며 좌측 소나무 가지 사이로 문암산쯤이 가늠되고,
< 문암산(文岩山, 366.1m)>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에 위치한 산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역사적 전설과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인근의 소주병산(286.1m), 용산(84.6m), 어령동산(65.1m) 등과 함께 산행코스로 지역 주민들과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산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당진현감 정방준(鄭邦俊)이 의병을 모아 출전한 후 왜병이 쳐들어오니 정방준의 처 변씨(卞氏)가 문암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왜적이 숨은 곳을 알고 뒤쫓아와 변씨는 치마폭에 혈서를 써서 던지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정절을 지켰다. 이에 나라에서는 변씨를 숙부(淑婦)·정부(貞婦)라 하고 혈서를 쓴 치마폭이 떨어진 자리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 하나의 전설은 마을에 사는 무남독녀가 옆집 총각을 남몰래 짝사랑하여 매일 문암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 남자와 만나게 해달라고 정성을 들였으나 허사로 돌아가자 산꼭대기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곳에는 깎아낸 듯한 절벽이 생겼는데, 그 절벽은 그녀가 떨어지면서 생긴 것이라 전해진다.
가을이면 송이가 많을듯한 소나무숲 능선을 따르다가,
제법 가팔라진 오름길을 따라 암릉 봉우리로 오르면,
좌측 도개면 신곡리의 문암산 방향 갈림봉인 367봉에 도착하여, 이정표의 장자봉(→1.2km)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문암산 갈림봉에서 살짝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는 등로로 들어서서,
가이드 로프까지 매여진 급내림길을 내려가는데,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 할 장자봉과 만경산이 건너다 보이고,
제법 높고 까탈스런 바위 암릉을 매여진 밧줄에 의지하여 내려서서,
잡목까지 빼곡한 소나무숲길을 내려서면,
잘록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름길을 오르게 되고,
좌측 도개면 신곡리 쪽이 깎아지른 절벽인 암릉 가장자리로 이어진 등로를 오르는데,
새벽안개로 흐릿한 낙동강이 가늠되고,
좌후방으로는 문암산도 뚜렷이 조망되더니,
별 특징 없는 암릉 봉우리인 343봉을 지난다.
다소 평탄해진 소나무 능선길을 따르는데,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며 새벽안개에 어슴프레 모습을 드러내는 낙동강이 눈길을 끌고,
가야 할 장자봉 방향으로 소나무 고사목이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올라,
밋밋한 암릉 봉우리를 지나고,
짧은 암릉을 내려서서,
완만한 능선 오름길을 따르는데 우측으로 안계평야를 가로지르는 위천이 가늠되고,
암릉으로 오르지 말고 우회하라는 밧줄을 따라 암릉을 우회하여 지나,
소나무가 자라난 바위 암릉길을 오르면,
장자봉의 전위봉쯤인 383봉을 지나게 된다.
383봉을 뒤로하고 잡목들의 태클이 심해진 능선 내림길을 따라 다소 가파르게 내려서다가,
좌.우로 길흔적이 있는 장자봉 직전 안부를 지나 가파른 오름길로 들어서서,
오래되어 빛이 바랜 로프가 매인 암릉을 오르면,
좌측 문수사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이내 아담한 정상석 뒤로 '준.희'님과 '새마포산악회'의 산패가 걸린 장자봉에 도착하여 10여 분의 쉼을 한다.
<장자봉(莊子峰, 421.5m)>
경북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와 의성군 구천면 용곡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어지럽게 자란 나무와 잡풀만 가득하다. 장자봉의 유래를 보면, 예전에 어느 선비가 이곳 정상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꿈에 중국의 대학자인 장자가 나타나서 이곳을 장자봉(莊子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답자의 산행기에는 정상에 삼각점이 있다고 해서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장자봉을 뒤로하고 거칠지만 완만한 내림길을 따르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만경산이 건너다 보이고,
어린 소나무와 잡목들이 빼곡하지만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진 능선길을 내려서다가,
우측 지능선 분기점인 등로에 나무가 가로 놓여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고,
옛 속담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바로 그 굽은 소나무를 지나서,
소나무숲 능선길을 잠시 더 내려서면,
꾀나 넓은 안부에 묵묘가 있고 좌.우로 길흔적이 희미해져 가는 십령/열재를 지나게 된다.
<십령/열재(十嶺)>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동산리와 의성군 단밀면 위중리를 잇는 옛고개로, 옛날 이 고개에 도둑과 짐승이 횡행하여 열 사람이 같이 넘어야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하여 열재라 불렸는데, 한자 표기로 십령(十嶺)이 되었다. 고갯마루 나뭇가지에 ‘팔공지맥/여기가 심령입니다./'준ㆍ희’ 표지판이 걸려 있는데, 심령은 십령의 오기인 듯하다. 좌.우로 길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개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꽤나 오래된 듯하다.
<십령(十嶺)에 얽힌 이야기>
조선말기 동학란 때 사회가 한창 불안하여 도처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니 관군은 이를 토벌하러 나섰고, 그 틈을 타서 도적떼들이 우글거렸기에 외진 산길을 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곳 열재(십령)도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여 한 두 사람이 재를 넘기는 위험하여 열사람 이상이 모여서 넘었다고 해서 열재(십령)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변음 되어 심령이라 발음되기도 한다.
조선말기 어느해 3월 말쯤의 보리고개에 60이 넘은 노인이 9살의 손자를 데리고 도개에서 의성 쪽으로 고개를 넘고 있는데, 산속에서 바람소린지 사람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자세히 들으니 분명 사람소리였다. 젊은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데 상투를 튼 남자가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발버둥이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남편이 몇날 며칠을 굶어 눈이 뒤집혀 아기를 고기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했다. 손자가 우리가 싸가지고 가는 떡을 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일부를 나누어 주고 가는데 손자의 말이 너무 기특하고 배고픈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떡을 전부 다 주었다. 자기들은 너무 굶주려 이 고개 넘어 의성땅에 사는 친지들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소판돈을 주고 가자고 한다.
소판돈을 주고 가는 조손(祖孫)에게 젊은 남녀는 어디사는 누구냐고 알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그 조손은 그냥 길을 떠났다. 이 노인은 성이 조씨(趙氏)로 이 고장에서 꽤나 잘 살았으며 널리 보시공덕을 많이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손자는 어느덧 30이란 나이를 먹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거늘 조씨가(趙氏家)도 살림이 기울어 생계가 어려웠다.
열재에서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이 지역에서 노(魯)부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 열재에서 도움을 받았던 그 은인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인을 찾기위해 지난날 구원을 받았던 십령(열재) 아래에 주막을 내고 술을 파는 게 아니라 이 고개를 넘는 과객들에게 쉬어가게 하고 술을 무료로 제공하였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달이가고 해가가고 몇해가 지나도 그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봄철도 지나고 초여름의 긴긴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덥수룩한 나그네가 지나간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차림은 궁색하였으나 기품은 있어 보였다. 들어와서 좀 쉬어가라고 청하는 부인의 말에 “말씀은 고마우나 해는 지는데 갈길이 바쁘다” 하면서 그냥 가려고 한다. 부인의 재삼 간청에 “돈이 없으니 술 먹을 형편이 못된다”라고 하였다. 다시 간청하는 부인의 말에 나그네는 발길을 돌려서 주막집에 들러서 쉬기로 한다. 후히 대접을 하고 어느 손님에게나 마찬가지로 지난날의 얘기를 하면서 은인을 찾게 해달라고 한다.
물끄러미 듣고 있던 나그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있다가 20년 전 9살 때의 기억을 더듬어 얘기를 하니, 초로의 부인은 젊은이를 와락 껴안으며 그리도 목메이던 은인을 찾았다. 지난날 죽음의 경지에서 구출해 준 은인을 잊지 못하여 이곳에 주막을 차리게 된 동기까지 이야기한다. 조씨도 지난날 화려했던 가세가 기울고 어렵게 살아가는 지금의 심정을 이야기하니 주막집 내외는 의논하여 조씨를 크게 도와서 보답의 기회를 찾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산의 노씨와 의성의 조씨는 그 후손들도 친형제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십령 중턱에는 조그만 집한채가 문짝이 떨어져 나간채로 있다고 한다.
희미한 길흔적을 더듬어 몇 기의 묘지를 차례로 지나,
점점 거칠고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오르다가,
쓰러진 나무와 잔돌들이 흘러내리는 가팔라진 경사로를 오르면,
쌓은 연유가 궁금증을 돋우는 돌축대도 지나게 되고,
뚜렷한 등로가 사라진 자리에 희미한 족적이 사방으로 흩어진 급경사를 조심스레 오르다가,
까다로운 절벽을 우회하여 올라서면,
다시금 완만해진 능선으로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좌측 만경산 통신탑봉(470m)에서 이어오는 주능선 등로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우리가 걸어온 십령 방향으로 ‘용암동열재’라 표시된 이정표가 서 있는데 '용암동 열재'로 뛰어서 읽어야 한다.
도개면 사람들은 좌측 주능선에 자리한 통신탑봉을 만경산이라 부르는데, 오늘 새벽 도개면 동산리에서 출발한 우리 즐산팀들은 임도를 따라 통신탑봉으로 올라서, 주능선길을 따라 이곳 갈림길에서 기맥길에 접속하였을 터이고, 이정표의 ‘용암동열재’는 '용암동 열재/십령'를 말한다.
평지 수준의 완만하고 널찍한 등로를 따라,
별반 봉우리라는 느낌이 없는 446봉을 지나고,
널찍하고 편평한 등로를 따라 안부 같지 않은 안부를 지나 오름길로 접어들어,
차츰 가팔라지는 등로 우측으로 용암마을과 새터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다소 가팔라지는 오름길을 잠시 더 오르면,
만경산 정상 헬기장 아래에 있는 육각 정자에 도착하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아침식사를 하고 만경산 정상 인증을 하기로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정표와 자그마한 정상석, 그리고 그 옆에 「소원성취 타임캡슐(서기 3000년 1월 1일 개봉)」을 묻은 오석 표지석이 있는 만경산 정상에서,
<만경산(萬景山, 499m)>
경북 구미시 도개면과 의성군 단밀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팔공기맥의 마지막 산이다. 산이 높고 경치가 좋은데다가, '산에 오르면 저 멀리 낙동강을 비롯한 사방의 일만가지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 하여 만경산(萬景山)이라 불린다고 한다. 만경산은 단밀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낙동강의 장엄하고 도도한 흐름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계평야와 위천, 구미의 냉산과 금오산, 상주의 나각산과 갑장산 등 사방의 여러 고을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지금은 정상 주변의 나무들이 자라나 주변 조망이 많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몇 해 전까지도 정상에 서면 그야말로 일망무제였다.
1617년 간행된 「상산지(商山誌)」에서는 만경산을 만악산(萬嶽山)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넓은 반석과 높은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하며 옛 성터의 흔적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만경산을 오르다 보면 등산로를 따라 돌로 쌓은 석축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이 기록에 신빙성이 있는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상주)」에 "만악산(萬嶽山)은 단밀현(丹密縣) 남쪽에 있으며 주(州) 북쪽 47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해동지도(선산)」에 '만경산(萬頃山)', 「해동지도(상주)」에 '만경산(萬景山)'으로 표기되고 있어 '악(嶽)'에서 '경(頃)', '경(景)'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만경사(万景寺)'가 기록되어 있어 만경산에 있던 사찰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국지명총람」에는 "만경산 : 선산군 도개면 동산동, 신곡동과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 위중동에 걸쳐 있는 산"과 같은 문헌의 단밀면 생송리 기록에 "만경광산(萬景鑛山) : 만경산 상봉에 있는 금광 (중략) 만경약수(萬景藥水) : 만경광산 밑에 있는 약수"라는 내용을 산의 구체적인 위치와 함께 '만경'을 전부 지명소로 하는 파생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다.
만경산 정상에 서면 물길따라 말없이 흐르는 위천과 낙동강 줄기를 조망할 수 있는데,
조선개국 이후 초하루와 보름마다 산마루에 올라 깊은 한을 품고 예전 수도였던 개경(開京)을 바라보던 이가 있어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때 불렀다 하는데, 당시에 산 위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던 이는 아주신씨(鵝洲申氏) 의성 입향조가 되는 판도판서(判圖判書)겸 군기시사(軍器寺事)로 종 2품에 해당하던 관직에 이르렀으나 당개(唐介)에 버금간다 하던 공의 충성된 절의로 고려조가 막을 내리게 되자 낙남(落南)하여 아들과 은거하고자 이곳으로 오게 된 신윤유(申允濡)이다. 그의 한(恨)은 그가 바라보던 강물들이 강줄기를 따라 바다로 흘러가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 속으로 묻혀 버렸으나 그의 절의는 길이 남을 일이다.
만경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4대강 사업의 산물인 낙단보(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소재)가 나타나고, 기맥길은 숲길입구(주차장)/시치골 방향으로 이어지고,
<낙정리>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낙정나루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였다. 옛날 이곳에는 주막과 숙소가 즐비한 곳이었다고 한다. 낙정리 일대는 낙동강 경제사에 큰 비중을 차지한 곳이었는데, 저 멀리 남해바다에서 올라온 소금, 수산물과 경상도 지방 관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들이 이곳 낙정나루에 집결하였다. 이를 말하듯 낙정리에 위치한 낙동역은 역에선 보기 드물게 참(站: 조선시대 대형 숙박시설)이 설치됐고, 490명이나 되는 역리(역 종사원)가 근무했다고 한다. 낙정리 인근에는 소금을 저장, 관리하는 염창도 있었다고 한다.
<관수루(觀水樓)>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낙동강 삼대 누각의 하나이다. 절경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관수루는 낙정(洛井) 나루의 바로 옆 북쪽 층암절벽에 위치한다. 관수루가 위치한 낙정마을은 태백, 일월, 팔공산, 낙동, 위수강(위천)이라 불리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신령스런 정기가 모여든다. 관수루는 수려한 주위환경을 배경으로 동.서.남.북을 왕래하는 큰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강 서안인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에 있었으나 동안인 이곳으로 옮겨져 중건되었다.
고려시대에 세워져 1734년(영조 10)에 상주 목사 김태연(金泰衍)이 다시 세워 현판하고 1843년(현종 9)에 다시 수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넘어져 유실되었으나 1889년 양도학(梁道鶴)의 특지로 복원되었다. 고려조(高麗朝)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대표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이황(李滉, 1501~1570) 등이 지은 15편의 시가와 권상일(權相一, 1679~1760), 유주목(柳疇睦, 1813∼1872) 등의 중수기문이 있었다. 후에 신현택(申鉉澤) 군수의 중건기문, 신사 하서룡(進士 河瑞龍)의 상량문, 강재기(康在璣)의 중건상량문이 추가되었다.
<낙단보(洛丹洑)>
경상북도 상주시와 의성군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에 '4대강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보(洑)로, 상주시와 의성군 일대에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를 확보하고 낙동강 하천정비를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와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야생초화원, 자갈침수못이 조성된 생태공원이 있다. 2009년 11월에 착공되었으며 공사비 1,845억 원이 투입되어 2011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총길이는 286m로 144.4m인 고정보와 141.6m인 가동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3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보의 높이는 11.5m이며 저수 용량은 3,430만 톤이다. 보의 좌안에는 통합관리센터와 1,500kw급의 소수력 발전기 2기가 설치되어 연간 1,472만kwh의 전기를 생산한다. 보의 위로는 길이 141.6m의 공도교가 설치되어 있다.
낙단보를 공사하는 중에 고려 전기 때 제작된 마애불 좌상이 발견되었으며 일명 낙단보 마애불로 불리는 마애불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제432호로 지정되었다. 인근에 낙단교, 낙단대교, 낙동강대교, 상주낙동강교가 있다.
백두산우회의 만경산 정상 인증을 남긴다.
정상 북서쪽 방향의 전망데크에서 웃자란 나뭇가지 위로 살짝 보이는 낙동강 낙단보와 그 우측 팔공기맥의 끝자락인 두물머리쯤을 가늠해 보고는 전망데크 우측의 숲길입구 방향 등로로 들어서면,
처음부터 통나무 계단과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가파른 내림길이 이어지다가,
조망이 트이며 좌측 상주 낙동면 방향으로는 팔공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쯤도 가늠되고,
<만경산 하산길에서 바라본 낙동강(落東江)>
낙동강은 태백시 황지천에서 발원하여 영남지역 땅을 골고루 적신 뒤 부산 을숙도를 거쳐서 남해바다로 빠져나간다. 본류의 총길이는 521.5km(1300리)로 한반도에서 압록강에 이어 2번째로 긴 강이다. 낙동강의 유역 면적은 2만 3817㎢로 남한 전체의 24%를 차지한다. 상류에선 안동의 반변천을 비롯한 여러 지류가 합쳐지고 상주시 함창읍 부근에서 내성천, 영강을 받아들인다. 또 상주 남쪽에서 위천, 구미시 선산읍 부근에서 감천, 대구 부근에서 금호강, 경남 합천군에서 황강, 창녕에서 남강을 합친다. 이어 동쪽으로 흐름을 바꿔 밀양시 삼랑진읍 부근에서 밀양강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 하구언에 도달한다.
삼국시대에 불렸던 원래의 이름은 ‘황산강’이었다. 황산은 경남 양산시 물금읍에 있던 옛 나루터의 이름이다. 고려, 조선시대에 들어서 ‘낙수’, ‘가야진’, ‘낙동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다산 정약용은「아방강역고」에서 “낙동이라 함은 가락의 동쪽”이라 했고 이긍익의「연려실기술」은 “낙동은 상주의 동쪽”이라고 기술했다.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내륙 물류의 중심이었던 상주시 낙동면 낙동나루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이다. 당시 영남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을 낙동강 물길을 이용, 낙동나루까지 싣고 온 뒤 육로로 문경을 넘어 충주에서 다시 남한강 물길로 한양까지 운반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인조 때에 끊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고대 중국의 고사를 들어 나라에 변고가 생길 조짐이라는 말이 돌았다. 반면 여름에는 자주 범람해 낙동강을 접한 각 고을에 홍수피해를 남겼다. 조선시대에도 낙동강은 갈수기에 물이 부족하고 장마철에는 물이 넘쳐 치수하기 어려운 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4대강 정비사업으로 사계절 강물이 흐르고 홍수도 어느정도 제어되고 있다.
우측 동쪽 방향으로는 위천이 흐르는 안계평야가 연무에 어슴프레 내려다 보인다.
<만경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북 의성군 안계평야>
위천을 보듬고 있는 안계평야는 영천 금호평야, 경주 안강평야와 더불어 경북지역의 3대 곡창지 중에 하나인 곳이다. 단밀지역은 과거 진한계열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의 도읍지로 우리나라 미작(米作)의 기원이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시작되었기에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의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가 당시 축조되면서 이 지역에도 고대(古代) 저수지로 대제지(大堤池)가 축조되었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고 있는데, 만경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안계평야가 국내에서도 미곡의 주생산지로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이자 부족국가시대부터 번영을 이루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들(안계평야)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의성의 젖줄인 위천 덕분에 이곳 안계평야는 예전부터 곡창 지대였다고 한다. 의성의 쌀 재배면적은 1만 1천668ha이며 이는 경북지역 재배면적의 9%를 차지한다고 한다. 풍부한 수량과 최적의 기후조건 덕에 ‘의로운 쌀’과 ‘의성 황토쌀’ 등의 브랜드가 있고 미곡처리장도 5개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땅이 넓은 들(평야)은 예로부터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곳 안계평야는 그 옛날 삼국이 영토 다툼이 치열할 때 보물단지였다. 신라는 의성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서 의성에 뿌리를 둔 조문국(지금 금성면 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을 멸망시켰다. 신라는 안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남하하는 고구려, 동진하는 백제 등과 안계들 넘어 예천 삼강, 문경새재 등지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후삼국의 견훤과 고려의 태조 왕건 역시 안계들을 차지하기 위해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안계들은 평상시에 나라의 살림살이였고 유사시엔 군수물자의 보고였던 것이다.
계속되는 급경사 내림길을 따라,
만경산에서 300m 내려섰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가드로프까지 설치된 지그제그 나무계단길을 내려서면,
가파르던 내림길이 완마해지며 밋밋한 안부를 지나,
지능선 분기봉인 270봉쯤을 우회하여 지나게 되고,
다시 주능선에 접속하여 멧돼지 찜질방쯤을 지나면,
만경산 정상에서 0.8km 내려왔다는 빛바랜 이정표와 작은 돌탑이 나타나며,
완만하고 잘 정비된 등로가 이어진다.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 이정표와 벤치 그리고 더욱 과잉이라는 느낌의 가드로프까지 설치된 등로를 따르면,
등로 좌측에 정자와 체육시설이 있는 만경산 등산로 입구 쉼터를 지나게 되는데,
좌틀하여 이어지는 등산로입구 방향 정규 등로를 두고 직진의 희미한 능선길로 잠시 진행하면,
좌측은 생송리와 만경산 북쪽 기슭의 천은사로 이어지고 우측은 위중리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되는데,
우측 생송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도 912번 지방도가 지나는 주선고개로 갈 수 있지만, 기맥 능선길도 잘 나있어서 도로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이어진 임도 들머리로 들어서서 기맥 능선길을 따라 진행하기로 한다.
임도 들머리에서 잠시 여장을 정비하고 능선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뒤돌아서 본 만경산이 연무에 희미하게 흐려져 있어서 잠시 후면 비가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따르던 임도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묘지를 지나는 수레길로 오르다가,
봉우리 직전에서 잡목이 들어찬 봉우리로 오르지 않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우회길을 따르면,
헬기장이 있는 170봉 서쪽의 묘지를 지나서,
이내 170봉 넘어서 오는 능선길에 접속하여 좌측 수렛길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는데,
능선 우측에 자리한 묘지로 인해 조망이 트이며 안계평야와 구천면 방향이 연무에 희미하게 보이고,
외송이라는 품종의 소나무가 빼곡한 숲으로 이어진 편안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면,
능선 임도를 가로지르는 농업용 수로를 건너게 되고,
이내 912번 지방도가 지나는 주선고개/생송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주선고개/생송고개>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와 주선리 사이의 고개지점으로 단밀면소재지에서 낙단보가 있는 낙정리로 이어지는 912번 지방도가 지난다. 주선고개나 생송고개라는 지명은 주민들이 쓰는 지명이 아닌 기맥꾼들이 편의상 부르는 이름으로 보인다.
도로 건너편의 시멘트포장 농로로 진행하면 바로 방지고개로 갈 수 있지만,
'주선고개' 코팅지가 걸린 나무둥치 옆 산길로 들어서서 능선 숲길을 더듬어 오르다가,
거친 능선길을 벗어나 능선 우측의 개간지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묘지길을 따라 오르고,
우측 지능선 분기점쯤에서 숲으로 들며 직좌틀하여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내려서면,
이내 쌍분묘지를 지나,
시멘트포장 농로가 지나는 방지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방지고개>
단밀면 생송리 912번 지방도로에서 단밀면 서재리로 이어지는 농로가 지나는 고개지점으로, 개념도에 방지고개로 표시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앞서 갔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170봉 오름길에서 우측 위중리 방향으로 알바를 다녀왔다며 912번 지방도에서 농로를 따라 도착하여 함께 낙동기맥의 종착지인 새띠를 향해 기맥길로 들어서면,
우측의 잘 단장된 묘지가 눈길을 끌고,
직진의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산불감시초소봉을 좌회하여 진행해도 되지만,
표지기가 한두개 걸린 우측 숲으로 들어 능선 숲길을 오르면,
이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170봉에 오르게 되는데,
주변 조망을 살피려 산불감시탑으로 올랐으나 짙어진 연무로 시야가 흐려져 있어서,
낡아서 허물어질듯한 산불감시초소를 내려와 다시 임도에 접속하여 잠시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흐려지는 날씨에 잠깐의 쉼으로 힘을 내어 널널한 소나무 숲 임도를 따르다가,
좌측 사면의 묘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두고 우측 숲길로 들면,
180봉쯤을 우회하여 지나게 되고,
다시 능선안부로 합류하여서는 뚜렷한 등로가 직진의 180봉쯤으로 오르지 않고 좌틀하여 이어지는데,
기맥길이 능선을 벗어나는 듯하여 혼란스럽지만 지도의 등고선을 자세히 보면 좌틀하여 진행이 맞는 듯하고,
기맥길이 골짜기로 이어진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잠시 진행하다 보면,
우측 봉우리와 등로 사이로 새로운 골짜기가 생겨나며 따르는 등로가 기맥길임을 짐작케 하지만,
등로가 능선 구분이 어려운 평탄한 지대로 이어져 일말의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이에,
잡목숲에서 불쑥 망주석이 나타나지만 상석은 보이는데 봉분은 보이지 않고,
굿고개 절개지에소 뚜렷한 등로를 따라 우측으로 내려서서,
굿고개를 지나는 도로에서 이어진 임도에 접속하여 우측의 철대문이 설치된 묘지를 두고 좌틀하여 내려가면,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굿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굿고개>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송상 마을과 세제리 기동 마을을 잇는 고개로, 콘크리트 포장 농로가 지난다.
굿고개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10여 미터 이동하여 들머리인 우측 철망문을 열고 들어서면,
꾀나 널찍한 수레길이 이어지다가,
근년에 개통된 당진영덕고속도로 상부쯤을 지나고,
유인 연안이씨 묘에서 좌측 사면으로 들어 197.7봉을 좌회하여 진행하게 되는데,
우측 197.7봉 사면이 꾀나 가파르고 높아보이고,
이내 다시 능선길에 접속하는 듯하지만,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주변 지형이 평탄하여 어디가 능선인지조차 구분이 어렵고,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진행하다가 가끔씩 나타나는 표지기에 확신을 얻으며 진행하다가,
좌측으로 지능선이 분기하는 191봉쯤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하면,
길흔적은 물론 능선 구분조차 어려운 숲길이 이어지는데,
만약 GPS의 도움 없이 지도만으로 진행한다면 지형 파악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이다.
모처럼 제방 둑처럼 생긴 능선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르다가,
우측으로 조망이 트인 잡목숲에서 길없는 직진의 능선을 두고 직좌틀하여 희미한 족적을 따르면,
빼곡한 잡목터널 등로를 오르게 되고,
우전방 잡목숲 위로 가야 할 토봉으로 이어진 'Z'자 형태의 능선을 어림짐작하며,
잠시 더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220봉쯤을 지나고,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231봉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진행한다.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다가,
안부를 지나 잠시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서 다시 편평해진 능선길을 따르면,
지능선 분기봉인 190봉쯤에 도착하여 직좌틀하여 내려가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우의를 착용하고 잠시 더 내려서면,
시멘트포장도로가 지나는 '솔티'를 지나게 되는데,
만경산 아래에서 출발한 즐산팀은 이곳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버스가 기다리는 우물2리로 진행했다고 한다.
<솔티고개>
경북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와 팔등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최근에 포장된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지난다. 솔티란 이 지역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松)이고 티(峙)는 고개 개념이라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의 송치(松峙)를 솔티라 부르는 건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무릅쓰고 솔티재 들머리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다가올 무더위에 대한 준비로 땀흘리기를 연습하고 있는 듯한 자그마한 정상석이 기다리는 兎峰(토봉)에 도착하니,
'준.희'님의 '팔공지맥 ▲284.9m' 산패와 수많은 표지기들이 지난했던 팔공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에 올랐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토봉(兎峰, 284.9m)>
경북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다.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토끼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쉰등이라고도 한다.
낙동강과 위천의 이수(二水)가 합류하고 속리산, 일월산, 팔공산 등 삼산(三山)의 지맥이 한곳에 모인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일대를 일컬어 이수삼산(二水三山)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봉황성을 중심으로 낙동강과 위천이 좌.우로 흘러내려 동.서.남면이 강이고, 북쪽은 영양의 일월산이 내려와 비봉산이 되었고, 강 건너 서쪽의 나각산은 속리산이 동남으로 200리를 뻗어나가다가 멈춰서면서 솟아올랐고, 동쪽의 토봉(일명:쉰등)은 팔공산이 군위에서 위천과 나란히 북으로 흘러내려 끝을 맺은 지역으로 한마디로 강은 대강(大江)이고 산은 모두 명산(名山)이다.
봉황성은 봉황대 북쪽에서 동으로 위천 절벽까지 건너막은 토성으로 성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쌓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봉황성 절벽에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다는 전설이 담긴 양처사굴이, 북쪽의 낙동강 동면에는 층암절벽 천인대가 솟아있고 연하여 토진벼루, 물양절벽이 있으며, 하류에는 쉰등, 골벼루, 뒤뛰미절벽, 관수루절벽 등이 저마다 높고 낮고 길고 짧게 일품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팔공기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토봉 정상 인증.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토봉 나무그늘에 앉아 지난했던 팔공기맥은 물론 9기맥의 마지막 걸음을 남겨두고 옛일을 회상이라도 해 보련만, 늘 그러하듯이 지금도 비가 내리는 현실과 맞닥뜨려서는 마지막 남은 걸음을 서둘지 않을 수가 없고,
암릉의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좌측으로 낙동강과 위천 물줄기가 내려다 보이겠지만 흐린 날씨로 아쉽기만 하고,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 생송리 방향 등로 갈림길을 지나서,
낙엽이 수북이 덮인 나무계단을 오르면,
최근에 세운 듯한 이정표와 벤치가 있는 190봉쯤에 도착하여,
잦아든 빗줄기에 배낭을 내리고 우장을 배낭에 갈무리한다.
이제 기맥의 종점에 가까워진 상태라 조금씩 내리는 빗물에도 아랑곳 않고 임도 수준의 등로를 따라,
좌측 절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위천 강물이 합쳐진 낙동강물을 바라보며,
밋밋한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가면,
우물2리에서 새띠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지나는 새띠고개에 도착한다.
<새띠고개>
경북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于物里)에 있는 고개로, 우물2리 마을과 위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두물머리 지점의 새띠마을을 잇는 도로가 지난다. 고갯마루 나무둥치에는 '팔공지맥, 여기가 새띠고개입니다' 라는 '준·희'님의 팻말이 걸려있고, 이정목(→의성 경계 2.0km, ←수암 종택 2.9km)이 세워져 있다.
우물교에서 새띠고개를 넘어 두물머리로 이어지는 도로는 폭이 좁아 버스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산행 버스는 우물2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곳 새띠고개에서 좌측 위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까지 진행하여 팔공기맥 종주를 완성하고 다시 돌아나와 우측 도로를 따라 우물2리로 가야 한다. 따라서 이곳도 '금방 돌아나올 것을 왜 가냐'고 묻는 것은 산꾼에게 '왜 산에 오르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새띠고개에서 좌측 포장도로를 따라서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향하면,
위천 강변의 취수장에서 급좌틀하여 새띠마을로 들어서고,
<새띠마을>
새띠 마을은 상주시 중동면 우물1리에 속하는데, 이 우물리(于物里)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명당지다. 즉,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고, 속리산에서 이어진 나각산 줄기와 팔공산에서 이어진 토봉의 줄기, 일월산에서 이어진 비봉산의 줄기가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이수삼산의 명당지라고 한다. 새띠는 임진왜란 후에 성산 이씨와 남원 양씨가 정착하였으며, 이곳 합수점의 넓은 강변에 옛날에 모래를 많이 쌓았다 하여 사대(沙帶)라고 불렀으며 또한 이곳이 잡목의 밀림지대인 관계로 새떼가 많이 모여 부락민들이 새떼골이라 부르던 것이 새띠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은 떠나버리고 경목제(敬睦濟)라는 현판을 단 제실만이 덩그렇게 지키고 있는 새띠마을을 지나,
여름 비에 더욱 짙어진 녹색의 논 가운데로 우틀하여 두물머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마침내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합수점이 내려다 보이는 두물머리에 도착하여,
팔공기맥 종주를 마감함과 동시에, 백두산우회 9기맥 종주의 마지막 걸음을 완성한다.
<위천(渭川)>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학암리에서 발원하여 의성군 비안면, 구천면, 안계면, 단밀면, 단북면, 다인면을 거쳐 흐르다가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유로연장 110.7㎞. 매봉 남사면의 여러 골짜기에 물이 모여 서남쪽으로 흘러 삼국유사면의 중심부를 뚫고 화수리에 이르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의흥면 중심부를 북서류한다. 이 일대에서는 하곡평야가 넓어져 수서리에는 잘 정리된 논이 하천을 따라 넓게 전개된다. 우보면 미성리·이화리 부근에서 북류해 오는 물을 합쳐 유로를 서쪽으로 바꾼다. 효령면 병수리에서는 남쪽에서 흘러오는 남천(南川)을 합하여 북쪽으로 꺾여 군위읍 중앙을 북류한다. 이 일대에서 하곡평야는 더욱 넓어져 군위읍이 발달하였으며 넓은 경지도 발달한다. 소보면에 이르면 산지를 감입곡류하여 유로를 북쪽으로 바꾼다. 소보면에서 곡정천(谷亭川)을 합하여 크게 곡류하면서 의성군의 구천면과 비안면의 경계를 이루며 서북쪽으로 흘러 단북면 남쪽에 가장 넓은 평야를 만들고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위천은 경상북도 내륙의 젖줄이 되며 하곡에는 많은 취락과 농경지가 발달한다.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상주>
한 지역에서 3국의 왕을 배출한 곳이 상주다. 역사적으로 한 지역에서 국왕을 수명내지 수십명을 배출한 곳은 많다. 고도 경주가 그렇고, 고려의 개성과 조선의 한양이 있다. 하지만 한 고을에서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곳은 바로 이곳 상주이다. 고대의 사벌국과 함창 고령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사람이라고 한다. 상주는 경주, 개성, 한양과 함께 왕의 역사를 가진 곳이라는 의미다.
위천과 낙동강 합수점에서 팔공지맥 종주 인증.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인내하며 살아온 인생의 막바지에서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한 느낌으로 발길을 돌려,
또다시 뭔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거리를 찾아야 할 것이지만 일단은 앞서간 분들이 기다리는 버스가 있는 우물2리를 향해,
잠시 전에 내려섰던 새띠고개로 되올라 우물교로 향하여,
새띠고개를 내려서면,
좌측으로 낙동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잔잔한 위천의 모습이 사뭇 들뜬 산꾼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고,
<위천(渭川)>
경상북도 청송, 영천, 군위 경계인 군위군(軍威郡) 고로면에서 발원해 의흥`우보면을 지나 효령에서는 팔공산에서 발원한 남천과 합류해 군위읍 소보면을 거쳐 의성군(義城) 땅인 비안면 옥연리로 흘러든다. 이 물길은 다시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에서 발원해 가음·금성·봉양(도리원)을 거쳐온 쌍계천과 비안면 쌍계리에서 합류한 후 안계평야를 지나 상주시 중동면 새띠마을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유로(流路)의 길이는 110.7km이다.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이수는 낙동강과 위천(渭川)을 의미한다.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 일대에서 발원한 위천은 군위읍과 소보면, 의성군 비안면을 거쳐 우물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낙동강과 위천은 서로 만나서 땅을 'T'자로 가른다.
앞쪽으로 위천의 마지막 교량인 우물교가 보이더니,
우측으로는 우물2리의 '수암종택'이 시야에 들어오고,
<수암 종택(修巖宗宅 )>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있는 풍산 류씨 우천파(遇川派)의 종택으로, 1700년대 중기에 건축하였는데 이강정사(二江精舍) 또는 우천세가(遇川世家)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 ‘ㅁ’자형 몸채와 ‘ㄴ’자형 녹사청(祿使廳), ‘一’자형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내 우물교 앞에서 도착한 버스에 올라,
상주시내의 상주농협목욕탕에서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명실상감한우플라자에서 백두산우회 팔공기맥 종주와 아울러 9기맥 완주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새로운 꿈과 의미를 찾아 귀갓길에 오른다.
"인류는 지구에서 태어났지만 이것이 지구에서 죽어야 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난해했지만 몇 번을 돌려보기 한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대사가 새로이 기억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는 바다를 노저어 가는 탐험가들이다.
언제 배가 뒤집어져 끝장날지 모르지만, 저기 수평선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뭔가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