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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장소 : 진양기맥 10차(막고개~용산치) 경남 진주시.
산행일시 : 2024. 05. 11.(토)
산행코스 : 막고개(1007번 도로) ~ 216봉 ~ 240.2봉 ~ 220.7봉 ~ 동향고개(도로) ~ 서낭재 ~ 208.3봉 ~ 내리실고개(33번 국도) ~ 월명암갈림길 ~ 427.9봉 ~ 장군봉(548m) ~ 집현산 부봉/진주 집현산(548m) ~ 집현산 3봉(526m) ~ 무너미고개 ~ 칠평산/삼면봉(563m) ~ 집현산(578.1m) 왕복 ~ 칠평산/삼면봉(563m) ~ 청현재(임도) ~ 326.9봉 ~ 송전탑 ~ 311.7봉 ~ 광제봉(347.1m) ~ 봉화대(419.8m) ~ 덕곡고개(임도) ~ 307.8봉 ~ 덕현치 ~ 302.3봉 ~ 203봉 ~ 242봉 ~ 놋종기먼당(265m) ~ 262.7봉 ~ 용산치(3번국도) (총 23.7km, 11시간 소요)
산행참석 : 13 백두.
▶ 즐산팀은 내리실고개에서 덕곡고개까지 13.4km 기맥 산행을 즐긴 후,
덕곡고개에서 좌측 덕곡마을로 이어지는 임도(1.8km)를 따라 하산. (총 15.2km)
<참고사항>
- 금번 구간은 진양기맥의 막바지를 향해 가면서 진주에서 가장 높은 집현산과 조선 세종 때에 세운 봉화대를 지나는 구간으로 높이에 비해 조망이 좋은 곳이 많은 구간이다.
- 막고개~내리실고개 구간은 낮은 구릉선 산지로 등로가 희미하고 개간지와 벌목지 등이 뒤섞여 등로가 불분명한 곳이 많으며 전체적으로 매우 거친 편이다.
- 33번 국도가 지나가는 내리실 고개에서 월명암 입구까지는 기맥 능선과 임도가 나란히 이어지므로 임도를 따라가도 되지만 능선 길도 그런대로 잘 나있는 편이다. 이후, 장군봉 오름길은 약 300여 미터의 고도를 올라야 하지만 능선 오름길이 완만한 편이고 등로도 신작로 수준이다.
이후 집현산과 봉화대를 지나 용산치 직전의 놋종기먼당까지는 등로가 양호하지만, 칠평산에서 청현으로 내려서는 내림길이 급경사여서 조심해야 하고, 가끔씩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알바를 주의해야 한다. 또한 302.3봉 내림길에서 따르던 등로를 두고 우측 숲으로 들면 나오는 신설임도 절개지는 꾀나 높아 내려서기가 만만치 않으므로 따르던 등로를 따라 좌측으로 우회해야 한다.
<산행지도>
산행 출발지인 막고개나 집현산 장군봉 오름길 시작지점인 내리실고개가 모두 해발 100m 내외의 낮은 고개이고, 장군봉이 547.2m 이므로 고도차가 347m 나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오르기는 어렵지 않다. 등로는 월명암 입구부터 칠평산(삼면봉) 구간과 이후 광제산 봉화대를 지나 덕곡고개까지는 길이 잘 나있다. 하지만 다른 곳은 여전히 잡목이 심하고 갈림길이 많아 알바위 위험이 있다. 또한 33번 국도가 지나가는 내리실고개에서 월명암 입구까지는 임도가 능선과 나란히 가므로 임도를 따라가도 되고 능선 길을 가도 되는데, 능선길도 그런대로 잘 나있는 편이다.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칠현산이라고도 불리는 집현산 주능선에 올라 좌측 능선을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집현산 5봉인 장군봉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150m 정도 떨어져 있고, 집현산 주능선을 따르다가 4봉인 부봉/진주집현산, 3봉인 526봉, 2봉인 칠평산에서 직진의 봉화대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우측으로 5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제1봉 집현산/산청집현산을 다녀오는데 20여 분 걸린다.
지난 산행에서 때이른 무더위와 거친 등로의 훼방으로 당초에 예정했던 내리실고개까지 진행하지 못하고 막고개에서 산행을 멈추었기에, 금번 산행에서 어디까지 진행할지를 놓고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산행에서 내리실고개까지 진행했더라면 용산치까지는 17km 남짓으로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을 터인데, 막고개에서 출발해야 하는 금번 산행에서 원래 예정하고 있었던 용산치까지 진행하려고 생각하니 산행 거리가 24km나 되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다음 산행인 진행기맥 마지막 구간에서 금년도 시산제를 거행하기로 예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이번 산행에서 용산치까지 진행하기로 하고 산행일 기온이 높지 않기를 기도하며 산행일을 기다린다.
예정하고 있는 산행일 진주 집현면의 최고 기온이 28도로 30도를 넘지 않는다는 일기예보에 다소간 우려를 누르러뜨리며 "약간의 바람이라도 불어와 준다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양재에서 산행버스에 오르는데, 지난번 산행이 힘들어서 그런지 버스에는 빈자리가 많이 보인다. 예전 같았으면 30km도 안 되는 산행이라며 회비 반환까지 거론하였을 터인데, 참으로 세월의 흐름이 야속하기만 하다.
내리실고개에서 출발하는 즐산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막고개에 막 도착한 버스에서 조용히 내려,
<막고개/먹고개/오방고개>
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와 오방리를 연결하는 100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폐업한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고 그 옆에는 부속건물이 있다. 우측 100m 거리에 미곡리 상미마을과 신촌마을로 들어가는 길 표시판과 포장도로가 있는데, 이 길이 망월산과 363봉 사이의 상미 저수지로 가는 길이다.
문닫은 휴게소 마당에서 검은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을 보며 산행 준비를 하고서는,
문닫은 휴게소와 부속건물 뒤편 절개지 우측 끝지점으로 이동하여,
표지기가 한두 개 걸린 절개지 우측 끝지점의 막고개 들머리로 들어서며 진양기맥 아홉 번째 산행을 시작한다.
제법 가파른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오르다가,
컨테이너 농막 좌측을 지나 밭 가장자리의 풀숲 사면을 오르면,
파란 저수조가 있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임도를 따라도 능선으로 오를 수 있지만,
정통파를 자처하는 우리는 기맥 능선인 파란 저수조 옆으로 이어진 직진의 능선 숲길로 들어서서,
가끔씩 나타나는 표지기에 힘을 얻어 잡목이 빼곡하여 등로 찾기가 어려운 거친 숲길을 따라,
선답자들의 흔적이 뚜렷한 216봉에 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장을 정비한다.
216봉부터는 제법 뚜렷한 길흔적이 이어지다가,
길흔적이 희미해지는 능선에 갑자기 나타난 '무단출입 금지' 경고판이 기맥길임을 확신케 하고,
잡목과 칡덩굴이 무성하여 지나기가 만만치 않은 곳도 헤쳐나가면,
우측이 밤나무 단지인 선명하고 뚜렷한 능선 등로가 이어지다가,
다시 거친 소나무숲길로 들어서서 '머리'를 연달아 외치며 완만한 능선길을 오르면,
지능선 분기점( 240.2m)이 나오는데 뚜렷한 직진의 등로를 두고 직우틀하여 진행해야 하는 곳으로,
우측 나뭇가지에 걸린 표지기를 보지 못하고 직진길로 들었다가 이내 되돌아와 진행방향 우측 기맥길로 진행한다.
거칠지만 오르내림이 크지 않은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흔적이 희미해져가는 묘지가 자리한 봉우리를 넘고,
우측 사면이 밤나무 단지로 조성된 능선길을 따르는데,
우측 미천면 안간리 방향으로 인가 불빛이 밤길을 가는 산꾼의 마음을 다독여 주고,
빼곡한 다복솔 구간을 헤쳐 오르다가 220.7봉 직전에서 직좌틀하여 남서방향으로 내려서면,
매실나무 과원 관리용 수레길에 접속하여 좌측 아래로 수렛길을 따르게 된다.
'Z'자로 내려가는 수레길을 따라도 되겠지만 좌측 나뭇가지에 걸린 표지기에 이끌려 지름길인 숲길로 내려가면,
다시 과원 관리용 농로에 내려서게 되고,
좌측 앞을 막아서는 철문을 좌측으로 돌아나가 계속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두준농원, 송암농장 표지판이 서 있는 동향고개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미천면 안간리 미곡·상미 마을 방향으로 약간 내려서다가,
<동향고개>
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와 좌측 향양리 동향동을 연결하는 2차선의 2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차량통행이 거의 없다시피 한 도로이다. 기맥길은 도로로 내려서 우측 안간리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좌측에 재령이씨 문중 만남의동산 표시석이 있는 임도로 들어서서 진행하게 된다.
좌측 '재령이씨 문중(載寧李氏 門中)/만남의동산' 표지석이 있는 시멘트포장 임도로 들어서며 기맥길을 이어간다.
동향고개 들머리에서 포장임도를 따르다가 '백무농장 출입금지' 경고판이 걸린 철문 안으로 들어서면 알바이고,
백무농장 철문 직전에서 우틀하여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가,
기맥능선쯤에서 희미한 길흔적이 있는 좌측 숲으로 들어서서,
재령이씨 납골묘 뒤편 거친 능선숲길로 올라,
146봉쯤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하게 되는데,
봉우리를 지난 지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을 축인다.
짧은 쉼을 뒤로하고 우측으로 밤나무 단지가 조성된 거친 능선길을 따르다가,
좌측으로 동향재에서 이어오는 임도가 내려다 보이는 서낭재를 지나고,
다소 거친 능선길을 따라 작은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는데,
우전방으로 집현산 동봉인 장군봉 방향으로 잠시 시야가 트이기도 하며,
쓰러진 나무들이 진행을 방해하는 거친 능선길을 따라 208.3봉을 좌회하여 지나고,
우측이 밤나무 단지로 조성된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서면,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이 가까워지며 우측 아래로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 내리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더니,
내리실고개 절개지 수로가 나타나는데 수로를 따라 내려가도 되지만,
내리실고개가 내려다 보이는 묘지 좌측으로 이어진 묘지길을 따라 내려가면,
절개지 수로 옆 통행용계단 입구 옆으로 4차선의 33번 국도가 지나는 내리실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내리실고개>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4차선의 33번 국도가 시원하게 뚫린 고개지점이다. 기맥길이 잘려서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기도 한다지만, 안전하게 도로를 건너기 위해 좌측으로 난 시멘트 임도를 따라 내려서서 내리곡교 아래로 난 도로를 따라 통과하여야 한다.
내리실고개를 지나는 4차선의 33번 국도를 통과하기 위해 좌측으로 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2차선의 1007번 지방도인 진산로에 접속하며 우측 33번 국도 내리곡교 아래를 통과하여,
도로 건너편 교통표지판 옆 숲으로 들어서서 내리실고개 들머리에서 이어오는 임도로 오른다.
내리실고개에서 출발한 즐산팀은 고갯마루에서 이어지는 임도가 아닌, 내리실 마을 앞 버스 정류소에서 월명암(←2.4km)을 향해 내리실 마을로 진행하다가, 갈림길에서 좌측 통신탑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올라, 숲길을 거쳐 내리실고개에서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임도에 접속하여서는 우측 임도를 따라 월명암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내리곡교를 통과하여 바로 길없는 경사지를 올라,
내리실고개에서 이어오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월명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임도는 급경사 사면을 'Z'자로 오르는데,
잠시 전에 지나온 내리실고개가 내려다 보이더니,
좌측 축대 위 숲으로 이어진 기맥능선 방향 숲길 들머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그냥 임도를 따라 월명암 방향으로 진행해도 되지만, 그리 험하지 않은 기맥길을 두고 편한 임도를 따르는 게 마뜩잖아 좌측 축대 위 묘지로 오르는 사다리를 올라 기맥능선길로 들어서면,
최근에 파묘한 흔적이 역력한 묘지를 통과하여 뒤편 숲으로 들어서게 되고,
묘지 뒤편 능선 숲으로 들어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오르다가,
첫번재 봉우리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자그만 능선 봉우리(249m)를 지나니,
우전방으로 가야 할 집현산 장군봉쯤이 가늠되고,
합천이공 내외 합장묘를 지나서,
작은 능선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는데,
많은 기맥꾼들이 우측의 임도를 따라 진행하는 탓인지 등로가 희미하고 거친 편이다.
우측 임도 방향으로 길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나,
거칠지만 완만한 오름길을 따라,
남쪽 방향 지능선 분기 봉우리에 올라 우측으로 휘어져 진행하면,
남쪽의 정수마을에서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임도에 내려서서 우측 월명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집현산 기슭의 월명암을 향해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르다가,
우측 내리실 마을과 내리실고개로 이어지는 임도 갈림길을 지나,
20여 미터 진행하다가 직진의 월명암 방향 도로를 두고 좌측 집현산 동봉 방향 임도로 좌틀하여 오르면,
<월명암(月明庵)>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작은 사찰로, 월명암 목조아미타여재좌상(晉州 月明庵 木造阿彌陀如來坐像)은 2010년 12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686호로 지정되었다. 월명암 인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복장발원문에 의하면 1612년에 수화승(首畵僧) 현진(玄真)이 학문(學文), 명은(明隱), 의능(義能), 태훈(太訓) 4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불상으로 함양 상련대 관음보살좌상과 동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련대 관음보살좌상에서 공덕주로 나오는 벽암 각성이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복장시주자로 나타나서 불상제작에 벽암 각성이 깊이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좌상의 전체적으로 동시 조성된 상련대 관세음보살좌상보다 넓은 어깨와 당당한 신체 비례를 보인다. 불상의 두부는 둥글고 높은 복발형으로 앞으로 살짝 숙이고 있다. 나발 사이에 둥근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간계주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상호는 갸름한 타원형으로 이마는 넓은 편이며 반개한 두 눈은 좌우로 길게 뻗어 있다. 호형을 그리며 내려오는 콧대는 콧등이 얇고 돌출되어 있으며, 작은 입술에는 미소를 짓고 있어 전반적으로 인자한 모습이다. 넓은 어깨에 가슴은 편평하여 양감 있고, 허리는 길며 아랫배는 살짝 부풀어 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올리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올려 자연스럽게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하체는 오른발을 위로 올린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무릎은 낮고 넓은 편이어서 안정적인 자세이다. 법의는 일반적인 이중착의법으로 착용하였으며, 승각기는 가슴까지 올려 일자로 표현하였다. 다리를 덮은 대의자락은 형식화된 4단의 부채모양의 주름이 길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표현은 동시대 조성된 상련대 관세음보살좌상과 유사하다.
월명암 아미타불좌상은 현존하는 현진작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현진작 불상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아울러 17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 불상양식의 편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내 '집현산 등산로'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따르던 임도를 두고 우측 장군봉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게 된다.
집현산 장군봉을 향해 어린 소나무가 빼곡한 호젓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잠시 대나무숲을 통과하여 올라,
'준.희'님의 산패가 걸린 427.9봉을 지나고,
<마룻금 산행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준.희'님의 산패>
'준.희'라는 분은 부산 국제신문 2대 산행대장을 지내신 최남준이란 분으로, <준>은 최남준 본인, <희>는 오래전에 작고한 부인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것으로, '준.희'로 이름으로 수많은 산 정상과 주요 지점에 이정표 역할을 하여 주고 있다. 특히 정맥이나 기맥, 지맥에 걸린 산패에 쏟는 정성은 존경스럽기 그지없고, 요즘은 후배 산꾼들에 의해서도 그 뜻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니 더욱 감사할 따름이다.
다시 소나무가 빼곡한 오름길을 따라 완만하게 고도를 높이는데,
숲이 안개로 들어차며 집현산 정상 조망에 대한 기대를 옅어지게 하더니,
좌측 집현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기맥길과 우측의 장군봉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기맥길에서 200여 미터 벗어나 있는 장군봉을 다녀올 요량으로 우측 사면 방향 지름길로 진행하면,
우측 월명암과 성불사 방향으로 이어질 듯 보이는 희미한 등로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잠시 더 급하지 않은 오름길을 올라 커다란 낙락장송이 지키고 있는 집현산 장군봉에 도착하니,
낮은 돌담을 두른 자연석 제단과 2개의 정상석이 있는 집현산 장군봉/동봉 정상부가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집현산 장군봉/동봉(547.2m)>
경남 진주시 생비랑면과 미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집현산의 일곱 봉우리 중에서 5번째 봉우리로, 장군봉으로 불리며 집현산 정상에 동쪽에 있어서 동봉이라고도 한다.
옛 고려시대의 한 선비가 집현면을 지나다가 험하고 웅장한 산세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내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요상한 산세를 본 일이 일찍이 없으며 용이 승천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혼잣말로 지껄이며 지나가는데, 마침 이곳은 가뭄과 수해 등으로 백성들은 찌들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차에 어린 꼬마가 선비가 지껄이는 말을 엿듣고는 선비를 붙잡고 이 지역의 우환이 왜 이런지 가르쳐 달라고 통사정했으나 뿌리치며 '이 지역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지금 벌을 받고 있다'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가뭄과 수해 등으로 농사는 안 되고 주민들은 병들어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계속적인 재난으로 고생을 하고 있던 차에 선비가 지나가던 시절의 어린 꼬마가 청년이 되어, 그 선비가 말한 것을 회상하면서 손뼉을 치고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읽으면서 바쁜 걸음으로 집현산으로 입산하였다. 청년은 집현산 구석구석을 헤매다가 큰 바위 옆에서 그때 그 선비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며 선비에게 본 면의 우환을 풀어주도록 울면서 호소하였다.
한동안을 계속 빌고 나니 밤이 되어 선비와 함께 바위 옆에서 잠자리도 같이 하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애걸하니 마침 선비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인즉 내가 바로 승천한 용인데 한가지의 미비한 점이 있어 이승으로 하강하여 도를 닦고 있다고 말하자 청년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선비는 승천 시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 지역의 주민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승천하는 용을 보라고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이승에서 고생을 하고 주민들은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우측 산봉우리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서는 굉장한 번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청년은 맥이 빠진 채 집으로 돌아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집현산 우측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하고 매일 등산하여 천지 신에게 빌었다. 하루하루의 세월이 흘려 100일이란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청년도 지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그 청년의 애절한 심정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계속 집현산에서 빌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나기가 대지를 적시자마자 병들은 농작물은 일시에 소생하고 병들은 주민은 회생하여 평온한 온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으며, 지금도 마을 주민의 우환이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집현산 정상 소나무 밑에서 비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장군봉 정상부 전경.
다시금 배낭을 메고서 집현산 장군봉 정상 인증을 남기고는,
장군봉을 뒤로하면,
이내 집현산 등산 안내도가 있는 기맥 등로 합류지점을 지나게 되고,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라 내려서면,
좌측 응석사(凝石寺) 방향 갈림길인 응석고개를 지나게 되고,
응석고개를 지나면서 수렛길 수준으로 넓어진 등로를 따라 밋밋한 봉우리를 지나,
돌무더기 흔적이 있는 안부인 아홉고개도 지나서,
제법 가팔라진 오름길을 오르면,
부봉 헬기장을 지나서,
이내 좌측 응석저수지 방향 갈림길 이정표와 무인 산불감시 카메라가 있고,
그 뒤편 팔각 정자에서 내리실고개에서 출발한 백두들이 기다리고 있는 진주 집현산(부봉)에 도착하니,
정자에는 아침식사를 마친 백두들이 동지섣달 꽃본듯이 반가이 맞아준다.
너무나 반가이 맞아주는 분들의 성원에 놀라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뭣에 홀린 듯이 지도를 보지도 않고 이곳을 집현산 갈림봉인 칠평산으로 착각하여 칠현정 한켠에 배낭을 벗어두고서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500여 미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집현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하고,
해맞이 제단 뒤에 있는 커다란 진주 집현산 / 집현산 부봉(546.7m) 정상석에서 인증을 남기고는,
<집현산 부봉/진주 집현산(集賢山, 546.7m)>
이곳 집현산 부봉은 삼면봉으로 좌측은 경남 진주시 집현면에서 명석면(鳴石面)으로 바뀌고, 우측은 산청군 생비량면에 걸쳐 있는데, 산청군은 이곳을 '집현산 부봉'이라 부르고, 진주시에서는 이 봉우리를 집현산이라 하고 있어서 진주 집현산이라고도 한다. 부봉은 집현산 일곱 봉우리 중에서 제4봉에 해당하며, 지나온 장군봉은 제5봉이다. 그리고 정상석과 또 다른 오석 정상석의 고도 표시는 이곳 부봉의 높이(546.7m)가 아닌 집현산 제1봉인 산청 집현산(572m)의 고도를 표시하고 있다. 집현산 부봉을 진주 사람들은 진주 집현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부봉, 진주 집현산 등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약간은 혼란스럽다.
집현면(集賢面)은 집현산(集賢山)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집현산(集賢山)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도 보이는데, 집현면(集賢面)이 집현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기록은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韓國地名總攬)과 건설부 국립지리원의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 상의 집현산(集賢山)은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또 단성현(丹城縣)에서도 보이는데 덕유산으로부터 왔다'라고 적혀 있다. (集賢山在州北四十里 亦見丹城縣 來自德裕山) 진양지(晋陽誌)의 산천(山川)란에도 집현산(集賢山)은 높이가 572.2m로 '덕유산(德裕山)의 일맥이 동으로 달려와서 사굴산이 되고, 사굴산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이어져 이 산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배낭을 벗어두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기맥 능선에서 500여 미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집현산 정상을 향하는데, 평탄하다던 등로가 급하게 고도를 낮추기에 지도를 꺼내어 보니 잠시 전에 지난 봉우리가 칠평산이 아닌 집현산 부봉으로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칠평산 방향의 기맥능선으로,
이 길은 배낭을 두고 갈 게 아니라 메고 가야 하는 길임을 확이한고는 바로 발길을 돌려,
다시 부봉으로 돌아와 구름이 옅어진 주변 조망을 한번 더 카메라에 담고는,
벗어두었던 배낭을 다시 메며 잠시의 알바를 마감하고서,
다시금 배낭을 멘 채 알바 기념 진주 집현산 인증을 남긴다.
잠시 전에 갔다가 돌아왔던 기맥 능선길을 다시 따라 내려가다가,
다른 분들에게 두고 온 배낭을 부탁하고서 기다리던 분들과 다시 만나,
잠시 더 내려서다가 안부를 지나서 오르면,
사각 정자가 있는 오봉삼거리라 표시된 집현산 제3봉(526m)에 올라 우측(북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서게 되는데,
사각정자 바로 옆에는 이곳 제3봉인 526봉을 오봉삼거리로 표시한 이정표가 걸려있다.
굵은 소나무와 활엽수가 혼재된 숲길을 제법 길게 내려서서,
벤치와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 안부인 무너미재(430m)를 지나고,
<무너미재(430m)>
진주시 명석면과 산청군 생비량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쉼터 벤치와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집현산 주능선에 둘러싸인 도리 한덤이골과 대둔마을을 지나 생비량면 소재지로 이어지는데,
생비량면의 유래를 보면,
옛날 생비량 어느 산 중턱에 절이 하나 있었다. 그 절의 비량이란 덕망 있는 스님이 있어 신도들이 많이 따랐으며, 주민 교화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으므로 도승(道僧)으로 일컬어졌다. 때가 되어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자 주민들은 “스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며 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비량 스님은 입적하고 말았으며 스님의 입적을 애석히 여기고 이를 그리워한 나머지, 스님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영혼은 우리 곁에 살아 있을 것이란 믿음과 염원으로 ‘비량(比良)’스님의 이름자 앞에 '생(生)' 자를 붙여 지명을 생비량(生比良)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비량 스님께서 “내가 죽은 후에 지명을 생비량이라고 부르면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란 유언을 함에 따라 주민들이 그에 따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칠현산을 향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자그마한 돌탑 앞에 정상석이 자리한 집현산 제2봉인 칠평산(563m) 정상에 도착하는데,
<칠평산(七坪山, 563m)>
진주시와 산청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집현산의 일곱 봉우리 중에서 제2봉으로, 집현산 일곱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제1봉인 산청 집현산이 이곳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칠평산'이란 이름은 정상이 7평(七坪)이라고 하여 칠평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하며, 산신령이 거처하는 산이라고 해도 7평이면 족하다고 하여 칠평산(七坪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우측으로 5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제1봉인 산청 집현산을 다녀와서 광제봉 방향으로 기맥길을 이어가게 되는 갈림봉이다.
배낭을 벗어 칠평산 정상 돌탑에 기대어 놓고 칠평산 인증을 남기고는,
집현산 최고봉인 산청 집형산으로 향하다가 우측 도치샘 방향 갈림길 안부를 지나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고,
바위 암릉을 좌회하여 집현산 정상 이정표가 나타나는 지점에서 돌아서면,
바위 암릉 위에 정상석과 데크목 전망대가 자리한 산청 집현산(577m)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집현산(集賢山, 577m)>
진주시와 산청군의 경계를 이루며 진주시의 명석면, 집현면, 미천면, 산청군의 생비량면, 신안면을 품고 있는 산이다. 집현산은 현자들이 모이는 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하며, 산신령이 거처하는 산이라고 해도 7평이면 족하다고 하여 칠평산(七坪山)이라고도 불렸으며, 봉우리가 일곱이라고 칠봉산 혹은 칠성산으로도 불렸다. 집현산 일곱 봉우리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로 행정구역상 산청군 생비량면에 있어서 자존심 강한 진주 사람들은 진주시 집현면에 있는 부봉을 '진주 집현산'으로 부른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고 데크목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지만 주위에 나무가 울창하여 동쪽 장군봉 방향만 살짝 보일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주)에 "집현산은 주(州)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 편에도 나온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진양지」에 "집현산은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덕유산(德裕山)의 일맥(一脈)이 동쪽으로 달려와서 자굴산(闍崛山)이 되고 자굴산의 한 가닥이 서쪽으로 구부려와서 이 산이 되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단성)에 "집현산(集賢山)은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고 진주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여지도서(보유)」(단성)에서는 "집현산은 의령 자굴산에서 맥이 와서 청현촌(靑峴村)의 주맥이 되었다."라고 산의 내맥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집현산은 산청군 생비량면에 최고봉(577m)을 두고 산청군 신안면~진주 명석면~집현면~미천면을 돌아서 7개의 봉우리를 맺고 다시 생비량면으로 치닫는다. 제1봉 집현산(577m) ~ 제2봉 칠평산/삼면봉(563m) ~ 제3봉 오봉삼거리(526m) ~ 제4봉 진주 집현산/부봉(572m) ~ 제5봉 장군봉(549m) ~ 제6봉 구시봉(530m) ~ 제7봉 까치봉(530m)이 말발굽 모양의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집현산 정상 데크목 전망대에서 본 서쪽 신안면 방향.
서북쪽 까치봉과 장군봉 방향.
동쪽 장군봉 방향.
집현산 정상 데크목 전망대에서 잠시 한담을 즐기다가,
정체불명의 기념사진도 담아보고,
집현산 일곱 봉우리 중에서 최고봉인 산청 집현산 정상 인증을 남기고는,
칠평산을 향해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와,
칠평산 정상 돌탑에 기대어 놓았던 배낭을 메고 덕곡고개까지만 진행하는 분들과 헤어져 광제산 봉수대로 향한다.
집현산을 뒤로하고 광재산을 향해 집현산 주능선 등로를 벗어나자 다소 거칠지만 완만한 등로가 잠시 이어지다가,
호조참의를 지낸 분의 묘지를 지나서,
우측 신안면 청현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로프까지 설치된 급경사를 내려서게 되는데,
칠평산에서 청현재까지 1km의 짧은 거리에 고도를 300m 이상 낮추어야 하기에 로프 구간과 'Z'자 구간을 연속으로 내려서자,
다소 완만해진 능선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송전탑 아래를 지나는데 송전탑 뒤편 멀리로 산청의 웅석봉과 둔철산 그리고 황매산쯤이 아련히 조망되고,
뚜렷한 등로를 따라 잠시 더 내려서면 시멘트포장 광제산로가 지나는 청현재(청고개)에 내려선다.
<청현재/청고개>
경남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서 산청군 신안면 청현리를 잇는 1006번 지방도인 광제산로가 지나는 고개로, 옛날에는 이곳이 진주로 가는 대로였으므로 하루에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넘나들었다고 하여 천고개라고도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김준민 장군이 이끄는 500여 군사가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진군하다가 이곳 청고개에서 왜군과 접전을 벌여 격퇴한 역사적인 장소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인 임진년(1592년) 10월 9일 김준민 장군이 이끄는 500여 명의 군사가 진주성을 구하기 위하여 진군하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렀다. 500여 군사가 이동하다가 보니 뜻밖에 이곳 산청군 지역의 청현, 오동, 정태, 단성 일대에서 왜적들이 마을마다 약탈질을 하는데, 불을 질러 연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이에 김준민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왜적들을 휩쓸었다. 또한 군관 윤경남 등이 장수가 적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외치면서 뛰어드니 500여 군사가 일시에 함성을 지르고 내달아 돌진했다. 왜적들이 죽림 속을 빠져나가 달아나다가 강을 건너서 대항하기 이르렀는데, 우리 군사와 강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고 포성이 진동하였다. 때마침 승군 의병장 신열이 승병을 이끌고 합세하여 사기가 더욱 충천하였다. 그리하여 왜적들이 퇴각하여 청고개를 넘어서면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어서 김준길 장군이 단성 쪽으로 향하여 거기서 약탈하는 왜적을 격퇴하고 창고에서 불타고 있는 곡식을 구했는데 자그마치 6,000여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단성의 적지골의 유래는 그때 생겨났다고 한다.
광제산 봉수대를 향해 청고개 들머리로 들어서는데,
등로 좌측에 '준.희'님의 '진양기맥을 종주하시는 산님들 힘힘힘 내세요!'란 격려문이 걸려있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삼각점(삼가 450)이 있는 326.9봉에 올라서게 되는데,
지금까지 산청군 신안면과 진주시 명석면을 가르며 서쪽으로 이어온 기맥길이 326.9봉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온전히 진주시 명석면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326.9봉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 내림길을 따르는데,
등로 좌측 아래로 임도가 내려다 보이더니,
잠시 뒤 임도로 내려섰다가,
이내 다시 우측 숲길로 들어서서,
작은 봉우리를 오르는데 좌후방으로 잠시 전에 내려선 집현산이 소나무 사이로 건너다 보이더니,
작은 봉우리(280m) 정상에 있는 육각 정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쉼을 한다.
짧아서 더욱 달콤했던 쉼을 뒤로하고 잠시 능선길을 따라 임도에 내려서서 우측 임도를 따르니,
도로 우측에 '진한국 부인 철성이씨 묘 입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잠시 더 임도를 따르는데 우측 숲으로 들라는 표기기가 걸려있지만,
작은 봉우리를 지나 다시 임도로 내려서야 하기에 그냥 따르던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 명석면 신기마을 방향 임도 갈림길을 지나는데 나무둥치에 반바지님의 '내율고개' 코팅지가 걸려있다.
<내율고개>
진주시 명석면 신기마을과 내율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 좌측 신기마을 방향 갈림길에서 직진의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우측의 내율마을로 이어지게 된다.
신기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나면 이내 좌측 숲으로 이어지는 광제산 등산로 들머리로 들어서게 되고,
잘 정비된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송전탑(#116)을 지나,
좌측 동전마을 방향 갈림길 이정표에서 우측 광제 봉수대 방향으로 진행하고,
이내 나오는 'Y'자 갈림길에서 좌측은 송전탑으로 이어지고 우측 오름길로 진행하면,
좌후방 송전탑 옆으로 잠시 전에 내려선 집현산이 조망된다.
그리 높지 않은 311.7봉을 좌회하여 지나 호젓한 소나무숲길을 따르다가,
광제산 봉수대가 1km 남았다는 표지판을 지나 계속하여 호젓한 소나무숲길을 따르면,
정상석은 고사하고 별다른 표식조차 없는 삼거리 갈림봉에 올라서는데 광제봉(廣濟峰, 347.1m)이다.
아마도 봉화대가 있는 광제산과 구별하기 위해 광제봉이란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송전탑(#113) 아래를 지나서 오르면,
홍지소류지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설치된 봉우리가 나오는데 앞서가던 서여사님이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좌측 직진의 능선길이 홍지소류지 방향이고 광제산은 우틀하여 내려서야 하는데, 갈림길 이정표가 실제 방향과 전혀 맞지 않게 표시되어 있어서 스마트폰 지도를 확인하지 않으면 알바하기 쉬운 곳이다.
희미한 홍지소류지 방향을 두고 우틀하여 뚜렷한 소나무숲길을 따르다가,
약샘이 좌측 200m 아래에 있다는 이정표가 있는 약샘삼거리 안부를 지나서 오르면,
봉수대가 자리한 광제산 정상부에 올라서는데,
덕곡고개 방향 기맥길은 우측 이정표의 명석면 사무소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광제산 정상에 자리한 봉수대를 둘러보며 잠시 쉬었다가 기맥길을 이어가기로 한다.
광제산 정상 전경.
<광제산(廣濟山, 420m)>
경남 진주시 명석면에 위치한 산이다. 명석면은 진주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청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보국충석"으로 널리 알려진 자웅석(雌雄石 도민속자료 제12호)의 애국 혼을 바탕으로 태동한 고장으로 자연생태계가 살아있는 아늑한 광제산 자락에 안겨 있어 진주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다.
광제산은 백두대간인 남덕유산에 뿌리를 두고 금원산, 황매산을 거쳐 집현산을 일구었고 두 줄기로 나뉘어 동쪽으로 달려 나간 진주시 비봉산과 함께 서쪽으로 부드러운 형상으로 뻗어나가 후덕한 봉우리를 이룬 산이다.
광제산봉수대 전경.
<진주 광제산봉수대 (晋州廣濟山烽燧臺)>
광제산 봉수대는 경남 진주시 명석면 덕곡리 산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7년 1월 30일에 진주시 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 세종대왕(재위기간 1418~1450)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부산 동래에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 중앙 봉수에 이른다. 광제산 봉수대는 전국의 5개 직봉 가운데 동래 다대포진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간봉으로 남쪽으로 남해 금산 → 창선 대방산 → 사천 각산 → 사천 안점 → 진주 망진산과 북쪽으로는 산청 신안 벽계봉수대 → 합천 금성산 → 충주 망이산으로 전달되었다.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기록상으로는 고려 중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진 고려 말로부터 조선 초기에 들어서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시야가 확 트인 산꼭대기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하나의 불꽃이나 연기〔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개,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개,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개,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개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이곳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중에서 동래 다대포(東萊多大浦)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제2봉수로에 속하는 곳이다. 이곳은 남으로 망진산(望晉山), 북으로 산청군 단성면의 입암산(笠岩山) 봉수와 서로 연결되었다. 불구덩이〔火口〕와 돌로 쌓은 축대 등 일부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북동쪽 좌측 집현산, 신기마을, 동전마을, 중간 진주 방어산, 월아산, 진주 시내, 망지산, 덕곡마을 조망.
남쪽 좌측 진주 시내, 관지 ·왕지 ·신촌마을, 덕곡마을, 사천 와룡산, 우측 진양호 방향.
남서쪽 좌로부터 사천 와룡산과 진주 시내, 중간 좌 진양호, 우측 지리산 천왕봉과 산청군 조망.
광제산 봉수대에서 본 조망 동영상(02"00")
진주 광제산 봉수대 인증.
떠날 시간에 되었기에 광제산 봉수대를 지키는 일은 산불감시인에게 맡기고,
덕곡고개를 향해 명석면사무소 방향 등로로 들어서면,
수레길 수준의 널찍한 등로는 대나무숲과 소나무숲 능선 내림길로 이어지다가,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외율마을과 덕곡리 토담마을을 잇는 임도가 지나는 덕곡고개에 내려서서,
좌측 임도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서 우측 능선 숲길로 오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는 즐산팀은 좌측 덕곡리 토담마을로 내려가 산행을 종료하게 된다.
아직 5km 정도나 더 가야 하는 용산치를 향해 덕곡고개 들머리로 들어서서,
좌측 아래 시멘트포장 임도는 덕곡리로, 그 위 비포장 임도는 우측 팔미리로 이어지는 임도가 내려다 보이는 능선길을 따르는데,
좌측 멀리로 진주의 월아산과 장군대산이 뚜렷이 조망되고,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278봉쯤을 좌회하여 지나고,
임도 수준의 널찍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좌측 명석면 덕곡리에서 우측 팔미마을로 이어지는 임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능선숲길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다시 제법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올라,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는 307.8봉을 넘고,
소나무숲 능선 내림길을 잠시 내려가다가,
사각정자가 있는 덕곡마을 갈림길에서 직진의 덕곡마을 방향 능선길을 두고 정자 우측 희미한 등로를 따르면,
이내 다시 등로는 뚜렷한 수레길 수준으로 바뀌더니,
능선 우측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임도와 만나는 안부(덕현치?, 226m)를 지나게 된다.
다시 호젓한 소나무숲 능선길을 올라,
돌멩이가 듬성듬성 드러난 298봉을 지나서 잠시 더 오르면,
'스파랜드 갈림길'이라 표시된 이정표가 있는 302.3봉 아래에서 따르던 직진의 명석면사무소로 이어지는 넓은 등산로를 두고 우틀하여 오르면, (길주의)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준.희’님의 산패가 걸려있는 302.3봉에 도착하여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쉼을 한다.
302.3봉을 뒤로하고 지금까지의 널찍한 등로와는 딴판인 희미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다가,
우측 사면에서 이어오는 수레길 등로에 접속하여 좌측 능선으로 이어진 넓은 등로를 따르면,
송전탑(#107)을 지나서 따르던 넓은 등로를 두고 좌측 숲으로 들어서야 하는 길주의 지점이 나오는데,
송전탑(#107) 지나며 우틀하여 숲으로 들어서면 신설 임도 절개지 상단에 서게 되는데 임도 절개지가 너무 높아 내려서기가 위험해 보여 발길을 되돌려 다시 넓은 등로로 되돌아나와,
따르던 넓은 등로를 따라 잠시 더 내려서면 우측 임도로 비스듬히 내려서는 통로가 나온다.
임도에 내려서서 절개지가 높아서 내려서지 못했던 우측의 기맥능선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임도가 지나는 기맥능선 아래의 안부 지점으로 이어갈 수 있는 좌측의 또다른 임도를 따라 진행하여,
기맥 능선과 나란히 이어지는 임도를 따르다가,
임도가 능선을 휘감아 돌아 능선 우측으로 이어지는 안부(덕현치?)에서 좌측 기맥능선으로 들어서는데,
전지가위를 들고 앞쪽에서 나타난 주민 한분이 발길을 돌려 우리와 함께 진행하게 된다.
안부까지 이어지던 수레길 수준의 등로와는 달리 진양기맥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거친 등로를 따라 오르다가,
자연석 축대가 있는 묘지를 지나고,
별다른 표식이 없는 능선봉우리인 203봉을 넘어서,
완만하지만 다소 거친 능선 등로를 따르다가 오래된 시멘트 석주가 세워져 있는 안부를 지나고,
다시 거친 오름길을 올라,
시멘트 석주가 자리한 지능선 갈림봉(227m)에서 좌측 능선으로 들어서면,
제법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완만하게 고도를 높여가는데,
누군가의 쉬어가자는 말에 배낭에 남은 마지막 물병을 꺼내어 함께 가는 현지인에게 건네며 한담을 나누는데,
명석면 오미마을에 사는 분으로 가끔씩 운동삼아 산행을 한다며 숲이 우거져 산행을 하기에 좋다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파묘터 흔적이 있는 242붕을 지나,
고만고만한 능선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고도를 높여 나가면,
아담한 돌탑과 정상석이 자리한 놋종기먼당(265m)에 도착하는데,
<놋종기먼당(265m)>
경남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와 용산리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봉우리로, 옛날 천지개벽 시에 온 천지가 다 물에 잠겼지만 이곳 산꼭대기만 물에 잠기지 않고 마치 놋종기만큼 남아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놋종기’란 놋그릇 즉, 유기로 만든 조그만 술잔과 같은 그릇 종류로 경상도에서는 ‘종지' 또는 '종재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먼당’이란 봉우리란 뜻으로, 놋그릇 술잔만한 봉우리 즉, '아주 작은 봉우리'란 뜻이다.
이 봉우리 중턱에는 청춘남녀가 사랑을 나눴다는 사랑바위가 있다고 하며, 정상에 서면 동남쪽으로 진주 8경 중의 하나인 월아산과 장군대산이 낙타등처럼 아련히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진양호와 대진고속도로 뒤로 지리산 능선이 한눈에 조망된다. 참고로, 진주8경은 진주 촉석루, 남강의암, 뒤벼리, 새벼리, 망진산 봉수대, 비봉산의 봄, 진양호 노을, 월아산 해돋이 등이다
남쪽 진주 방향으로 월산산과 장군대산이 그림인 듯 조망된다.
<놋종기 먼당에서 바라본 진주의 산그림>
지리산 아래에 자리한 진주는 안동못지않은 보수적인 고장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경상도 남쪽지역의 중심지로 경남도청이 있었던 곳이지만 일제강점기 부산이 커지면서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그 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진주는 예로부터 "조정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진주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인재가 많았으며, 특히 충신이 많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고려조 현종원년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남쪽으로 몽진하는 왕을 호위하던 중, 자신이 볼모가 되어 거란군을 물러나게 하고 그들의 병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을 외치며 죽어간 충절신 시랑공 하공진, 홍화진에서 거란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섬멸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은열공 강민첨 장군, 단종조 충절신 충장공 정분, 임진왜란 때 진주성대첩을 이룩한 김시민 목사와 진주민의 충성, 2차 진주성 싸움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순절한 7만 민·관·군과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충절, 구한말 서부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노응규 의병장과 의병들, 3.1운동 당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진주민들의 충절정신에 이르기까지 그 혼은 오늘에 이어져 진주인의 가슴속에는 「충절의 고장」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는 곳이 진주이다.
203봉 직전 임도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명석면 오미마을에 사는 분과 함께 놋종기먼당 인증을 남기는데, 자기 마을 근처에 어탕을 잘하는 곳이 있다며 함께 가자는 제안도 하지만, 우리는 용산치로 내려가야 하고 식당도 이미 예약해 놓은 상태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유쾌하신 오미마을 주민과 헤어져 더욱 거칠어진 등로를 따라 용산치로 향하는데,
우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진양호를 건너는 대평교가 조망되더니,
잠시 후 우측으로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는 진양호로 흘러드는 오미천이 보이며 그 위로 지나가는 대전통영간고속도로의 서현교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진양호 뒤쪽 멀리로는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능선이 아련히 시야에 들어오더니,
이내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262.7봉에 도착하여 힘든 여정을 이겨내었다는 가슴벅찬 인증을 남긴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용산치가 가까워지며 다음구간 걷게 될 기맥능선의 장아산쯤이 가늠되고,
희미해지는 족적을 더듬어 용산치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가 진양호를 건너 지리산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이 지친 산꾼의 가슴을 다시금 뛰게 하고,
멧돼지 목욕탕을 지나며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등로를 놓고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는 분들의 의구심을 고스란히 떠안고서 우측 사면 방향으로 진행하면,
우측 사면 방향으로 희미한 족적이 이어지더니,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는 3번 국도가 지나는 용산치에 도착한다.
<용산치/오미고개>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와 용산리를 잇는 고개로, 6차선의 3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산청에서 진주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좌측 용산리에서 보면 용산치요, 우측 오미리에서 보면 오미고개일 것인즉 인터넷 지도에는 용산치와 오미고개가 모두 표기되어 있다.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6차선 도로에 차량의 통행도 많아 무단횡단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이므로 우측 오미리 방향 300여 미터 지점에 있는 지하통로를 이용하는 게 무난해 보인다.
덕곡리에서 즐산팀을 태운채 기다리고 있어야 할 버스가 김전무의 요청으로 미리 주차공간이 없는 용산치로 이동하는 바람에 용산치를 지나쳐 오미마을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연락이 와,
우측 오미마을 방향으로 지하차도를 지나고,
오미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오르며 진양기맥 열번째 산행을 마무리 한다.
『오미리(五美里)란 지명은 마을 서북쪽에 가재 형국의 등혈인 오무형(鰲舞形)의 명산이 있어 오미리(鰲尾里)라 부르다가 오미리(五美里)가 된 것이라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도내고개를 넘어 함양 산청 가는 길과, 시목(柹木)∙석티고개를 넘어 덕산으로 가는 길, 서재∙가화를 거쳐 사천만으로 가는 길, 진주로 가는 네 갈래의 길이 교차되는 곳이어서 네거리로 불렸다. 그때는 이곳이 명석면에서 제일 번잡한 곳으로 길손들이 쉬어가는 주막도 많았고, 지금의 경찰지서인 주재소(駐在所)도 여기에 있었다.』 (네이버 오미리 지명유래)
가성비는 물론 시설도 깨끗한 단성문화복지회관 목욕탕에서 땀을 씻고,
산청군 신안면의 타짜오리하우스로 이동하여,
맛난 오리불고기로 푸짐한 뒤풀이 시간을 즐기고는,
다음 산행으로 진양기맥 종주를 마무리하게 된다는 아쉬운 마음으로 귀경길에 오른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삶은 살으셨던 할머니께서,
그리도 어렵게 살아온 삶조차 미소를 머금고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헤치곤 했었는데...,
잡목과 가시나무 그리고 대책없는 넝쿨이 막아서는 진양기맥을 걸어와 그 대미를 앞두게 되니,
옛날 할머니의 이야기에 실려온 미소의 의미가 새삼 떠오른다.
첫댓글 내리실고개에서 덕곡마을로 하산을 했는데,막고개~용산치 전구간을 눈으로 산행을 했습니다.즐감했습니다.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