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지리산 태극유람 9차(대성골) 경남 하동군. 산 행 일 : 2020. 06. 13.(토) 산행코스 : 의신 ~ 벽소령 ~ 덕평봉 ~ 칠선봉 ~ 영신봉 ~ 세석대피소 ~ 음양샘 ~ 대성골 ~ 의신 (20km, 10간 소요) 산행참가 : 19백두.
<산행지도>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백두산우회 정기산행을 6월부터 재개하기로 함에 따라 첫 산행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사실 산행이 중단되기 전에는 영산기맥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거친 영산기맥은 여름철 산행지로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고, 다른 한강기맥을 비롯한 기맥길은 업다운이 심하여 세 달 동안이나 산행을 중단하였다가 다시 시작하는 산행지로는 적당하지 않아 보여서, 지리산을 찾아 더위도 피하고 체력도 점검하는 기회를 갖기로 했다. 지리산 태극유람 산행을 진행하면서 별반 특징이 없어서 미루어 두었던 벽소령~새석 구간을, 길지만 평이한 대성골과 연계하여 진행하자는 창병씨의 제안에 따라 의신을 기점으로 벽소령에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따라 세석까지 간 다음 지리산 남부능선에서 대성골로 접어들어 다시 의신으로 원점회귀하는 산행을 하기로 했다.
헌데 산행을 공고하고 나서 5일 전까지만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이 보였는데, 갑자기 일기예보가 바뀌어 비가 예보되었고, 급거 비가 오지 않을 다른 산행지를 물색해 보았으나 전국에 걸쳐 어디에도 맑을 것으로 예보된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나 가관인 것은 초기에 20~30mm 정도였던 예상 강수량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더니 산행 이틀 전에는 예보기관에 따라 적게는 60mm에서 많게는 140mm까지의 폭우가 내릴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때는 뒤풀이 식당도 예약을 하였고, 마땅한 다른 대안도 찾기 힘들어서 혹여 폭우가 내리게 되면 지리산 의신계곡과 대성골 계곡의 '물구경이나 하지 뭐' 라는 심정으로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한다.
기상청의 예보가 맞는 것인지 지리산으로 향하는 내내 버스는 빗속을 뚫고 달려야 했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 때문인지 버스는 예상보다 한시간쯤 늦은 4시 40분에 지리산 의신마을 지리산역사관 앞에 도착했고, 바로 비옷을 갖춰 입으며 우중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의신마을 지리산역사관 앞마당에 도착한 버스에서 우장을 갖추고 버스를 나서니 내리던 빗줄기가 한결 가늘어져 있다.
<대성리 의신마을> ‘화개면지’에 따르면 의신은 대성리의 중심 마을로 화개에서도 사찰이 가장 많았던 불교의 요람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의신사’ 혹은 의신의 암자에서 도를 닦은 ‘의신조사’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의신 윗마을 삼정은 삼각등, 말안장터 등 ‘세 곳의 길지가 있어 이곳에 묘를 쓰면 세 사람의 정승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삼정 혹은 삼점이 되었다 한다. 삼정에는 벽소령 등산로 말고도 빗점골, 왼골, 사태골, 절골 등의 샛길이 주능선까지 이어지는데 그중 빗점골은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지리산역사관 모습.
<지리산역사관> 하동군이 6.25 전쟁을 전후한 지리산의 격전지 루트를 관광 자원화하고 국가 안보교육의 장으로 활용키 위해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 대지 500여 평에 건평 45평 정도로 건립하였다. 역사관 내에는 50년대 이전 화전민들의 생활용품 40여 종, 관련 자료 판넬 10개, 빨치산 관련자료 전시판넬 4개 디오라마(전투장면 모형)군 홍보자료 및 특산품 관광유적기 전시판넬 8종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이 자리한 의신마을 동쪽의 대성골은 지리산 주능선 남쪽 아래에 깊은 계곡과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고, 한국전쟁 시 빨치산을 토벌한 격전지로써 남부군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아지트이자 사살의 현장이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쫓겨 대성골로 모이면서 수많은 빨치산들이 불벼락을 맞고 죽어간 곳으로, 빨치산들의 한이 맺힌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인 곳이며, 독립운동가들이 지리산에 숨어 살기도 했는가 하면 농민운동인 동학운동이 혁명적으로 벌어지기도 한 곳으로, 식민지 치하에서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안식처를 제공해 준 명산 지리산은 애국자들의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준 한민족 삶의 현장이다.
내리던 빗줄기는 그치고 부슬비만 흩날리는 의신마을을 출발하여 벽소령을 향해 산행을 시작한다.
좌측 의신계곡으로 '서산대사 명상바위'가 보인다.
<서산대사 명상바위> 조선시대 명승이자 임진왜란의 승장이기도 했던 서산대사(1520~1604)께서 출가지인 원통암과 출가한 이후 수도하였던 철굴암까지 왕래하면서 신선의 경지에 버금가는 선경에 매료되어 자주 머물렀던 장소라고 한다. 특히 서산대사가 선(禪) 사상의 정수였던 <선가귀감>과 더불어 도(道) 사상의 결정체였던 <도가귀감>을 이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하철굴암에서 집필하였는데, 바로 이곳 명상바위에서 명상하면서 그 이치에 맞는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참고로 서산대사는 16세 때 의신마을 원통암에서 출가하였는데, 이 명상바위 위에서 '화개동 입산시'를 짓고 읊으면서 출가의 결심을 다졌다고 한다.
<지리산 서산대사길> 신흥사가 있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마을을 연결하는 걷기 길이다.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머물면서 오갔던 옛길로, 대성골과 연계하여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명품 트레킹 코스다. 의신마을은 16세기 꺼져가던 조선불교의 불씨를 되살린 청허 휴정대사(서산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는 곳인데, 특히 서산대사가 수도를 하였다는 ‘능인암’이 대성골 가는 길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리산 대성골에 자리한 대성마을은 이제 단 두 가구가 살고 있으며, 의신마을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민박을 치며, 산채비빔밥 등 음식물과 고로쇠 수액 등을 팔고 있다.
의신계곡을 끼고 삼정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벽소령으로 향하는 백두들.
간밤에 내린 비로 의신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한결 크게 들려오는데,
만약 기상청의 예보대로 150mm가 더 내린다면 저리 순해 보이는 계곡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일이다.
벽소령에서 이어지 지계곡을 건너 빗점으로 진행하면,
벽소령 가는 길의 마지막 마을인 삼정마을이 나온다.
벽소령을 깃점으로 북쪽 자락에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삼정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벽소령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각각 '삼정'이란 똑같은 이름의 동네가 있는 셈이다. 북쪽 마천면의 삼정은 음정, 양정, 하정이 합쳐진 이름이고, 화개면의 삼정은 대성리에 속한 작은 마을의 하나이다.
몇 채의 인가가 있는 삼정마을로 들어서서 벽소령 방향 등산로 입구로 향하는데,
담벼락 옆에 세워놓은 이정표에는 벽소령까지 4.1km라 적혀있는데, 삼정마을에서 초반 1km는 가파른 산길이고, 이어서 옛 임도길을 편안히 따르다가 마지막 1km를 급하게 치고 오르면 벽소령에 도착하게 된다고 한다.
삼정마을을 통과하여 벽소령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는데, 기상특보로 등산로를 통제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통제'라는 말은 권력자들이 목적에 따라 제한을 하는 것이기에, 국공파들이 알아서들 잘 통제하리라 믿으며 산행 들머리로 거리낌 없이 들어선다.
좌측 벽소령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다가,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나오자 우장을 정비하자며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이제 더 이상 비가 내릴 것 같아 보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기상청의 예보 탓인지 우장을 한층 여미기만 한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며 입은 우의로 땀범벅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우장을 벗는다.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1km 정도 오르니, 거짓말처럼 우측 사면으로 이어진 임도 수준의 편안한 길이 나오며 이곳이 '코재'라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옛 지도에 지방도로 표시되어 있던 이 길은 옛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군사용으로 만들어졌던 도로였다. 화개에서 벽소령(지금의 벽소령대피소가 있는 곳이 아닌 주능선을 따라 동쪽 천왕봉 방향 1km 지점 덕평봉 직전의 안부)을 넘어 함양군 마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는데, 이후로 방치되어 일부만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한때 이 길도 성삼재를 오르는 도로처럼 만들려고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생태환경 보전을 위해 취소된 게 아닌가 짐직한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한동안 우측 사면을 따라 이어진 옛 도로를 따르게 되어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잠시 전까지 내린 비로 유월의 초록이 더욱 싱그러운 편안한 등로를 걷는다. 그런데 폰카를 비닐팩에 넣어 놓은 상태라서 모든 사진이 흐리게 보인다.
옛 군사용 임도를 따르는 등로는 일부 구간의 석축이나 절개지 흔적을 제외한다면, 한때는 이곳이 도로였다는 것을 눈치채기가 힘들것 같다. 내용을 모르는 산객이라면 그냥 원래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조성한 등로로 생각하기 쉽게 굴러내린 낙석과 산사태로 도로의 흔적이 많이 지워져 있고, 심지어는 도로 위로 자라난 나무들이 지리산에 세겨진 동족상잔의 아픈 과거를 빠르게 지우며 원시의 모습으로 보이게끔 한다.
또한 옛 임도를 따라가는 등로는 업다운도 없어서 편안한 숨소리에 모든 감각이 주변 연초록 환경에 맞추어진다.
사면을 따라 편안히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는데, 계곡을 흐르는 거친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며 널찍하게 이어지던 등로의 막다른 지점이 나오며 벽소령까지 1km 정도 남았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도로를 두고 곧바로 벽소령대피소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길을 따르게 됨에 따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을 축인다.
벽소령으로 곧바로 오르는 가파르고 좁아진 등로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계곡물이 큰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고,
등로는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커다라 나무가 등로 위로 쓰러져 있는 곳을 우회하여 지나고,
비 온 뒤라 그런지 민달팽이가 돌계단을 오르고 있어서 밟지 않도록 주의하여 지난다.
계곡 물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오른 지점에서,
계곡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건너는 교량을 건너고,
이제는 계곡을 좌측에 두고 돌계단길을 따라 오르는데,
경사도는 예상보다는 다소간 완만하다는 느낌이다.
등로를 덮고 있던 나무들이 사라지며 주변 조망이 시야에 들어오는 지점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벽소령 대피소가 멀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아차, 하마터면 이 넘을 밟을 뻔했다. 모양은 지렁이처럼 생겼는데, 처음 보는 선충이다.
우측으로 설산습지 방향 갈림길이 나오며 벽소령대피소 건물이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
<벽소령(碧宵嶺, 1,350m)>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하동군 화개면 경계에 있는 지리산의 고개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약 45㎞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능선의 중간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옛날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과 하동군 화개면을 이어주던 중요한 교통로였지만, 지금은 등산객들이나 오고 가는 잊혀진 고개로, 벽소령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형제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임걸령~노고단이, 동쪽으로는 덕평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 등의 지리산 주봉우리가 이어진다. 벽소령이란 지명은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매우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이므로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벽소령의 달 풍경을 일컫는 벽소명월(碧霄明月)은 지리산 십경 중 제4경으로,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고 한다. 혹여 나중에 한가로운 날이 있으면 벽소령 대피소에 묵으며 시리도록 차가운 달의 느낌이 뭔지를 느껴봐야겠다.
<지리 10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 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으로,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반야봉에서 보는 낙조로,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예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 데 쓰이던 고개로,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 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 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돌아본 삼정마을 방향.
우측 가야 할 덕평봉 방향 조망.
기상예비특보로 등로가 통제되어서 그런지, 늘 북적이던 대피소 앞에는 우리 일행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상황이라 이채롭게 느껴지는 한가로운 데이블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빨치산과 벽소령> 때는 1952년 1월, 지리산 일대에서 날치던 빨치산들은 천왕봉, 촛대봉에서 토벌대에 밀려 벽소령 아래 대성골로 밀려들었다. 이때를 기해 토벌군은 야포와 비행기 폭격으로 이들을 섬멸하였으니, 죽은 자가 300여 명, 포로된 자가 250여 명으로 빨치산의 반 이상이 괴멸되었다. 여기서 살아 도망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반기를 든 방준표, 박영발 등에 의해 실권을 잃은 채 이듬해인 1953년 9월 벽소령 아래 빗점골에서 사살되었고, 방준표도 1954년 1월 남덕유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박영발 또한 뱀사골에서 포위되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빨치산이란 비정규 유격대를 뜻하는 러시아어 'partizan'에서 온 말이라 한다. 이들은 6.25가 발발하자 남노당계 행동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궐기하고, 북한군 패잔병, 아무것도 모르는 노동자 농민들을 꾀어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의 최후만큼 철저히 배신당하고 쫓긴 비참한 생(生)도 없을 것이다. 목숨 바쳐 북(北)을 위해 싸운 이들은 휴전협정 과정에서 북(北)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휴전협정 과정에서 북(北)은 이들을 위해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철저히 이용하고 소모품으로 버려진 것이다. 그 후 이들은 지리산을 헤매는 위험한 산짐승에 지나지 않았고, 토벌군에게는 제거해야 할 위험한 잔당들이었으니, 아무런 희망도 없이 쫓기는 이들의 배신감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1955년 4월 1일,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은 정부는 지리산 입산금지를 해제하였고, 이때부터 삶의 터전을 삼는 이들과 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지리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빨치산이란 단어가 국민의 뇌리에서 잊혀진 1963년 11월 어느 날,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산청군 삼장면(천왕봉 동쪽마을)에서 마지막 빨치산 이홍이 사살, 정순덕 체포 기사였다. 정순덕은 산으로 간 남편을 찾으러 산으로 갔다가 공비가 되었다. 빨치산으로 산짐승처럼 10여 년을 살고, 체포 후 20여년을 감옥에서 살다가 출소하여, 아픈 몸을 끌며 1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한 인간으로 무슨 이런 개 같은 운명도 있는지, 그 또한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치부해 버려도 되는 것일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한가로운 벽소령대피소 앞마당에서 널찍하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아침식사를 하는데,
국공파가 나타나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막아두었던 주능선 등산로를 개방한다. 식사를 하고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의신마을로 내려가려 했는데, 마침 기상특보가 해제되어 세석 방향으로의 예정했던 능선산행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의신마을로 되돌아 가야 한다며 느긋하게 시작하던 아침식사를 주능선 등로가 개방되며 서둘러 마치고, 벽소령 기념사진이라도 남기자는 말에 반만 모인다.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어쩔 수 없다는데, 낸들 뭐 어쩌겠는가!
벽소령대피소를 뒤로하고 세석 방향 주능선 등로로 들어서니, 이제까지 오르던 너덜길과는 달리 잘 닦여진 우마차길 같은 편안한 길이 이어지고,
진행방향 좌측으로는 기암절벽이고 길은 축대를 쌓아 다듬어 놓았는데, 옛날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부터 이 축대가 궁금했다. 도대체 1400m가 넘는 이 고지대에 뭣하러 축대를 쌓았을까. 돌아보면 이 축대도 1950년대 초 공비토벌을 위해 낸 작전도로용 축대인 것이다. 함양 쪽 마천에서 벽소령으로 오르다가 길이 가팔라 동쪽(덕평봉 쪽)으로 틀어 안부에 오르고, 여기서부터 축대를 쌓아 벽소령까지 길을 내고, 다시 벽소령을 넘으면 길이 가팔라 동으로 길을 다듬은 후 빗점골을 지나 쌍계사, 화개장터로 내려 가게 길을 뚫었던 것이다.
이제 차량은 다니지 않고 등산로로 쓰일 뿐인 이 길은, 좌우로 삼각봉과 덕평봉 가는 길목으로 ‘피의 능선’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빨치산 토벌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 우리가 지나가는 지리주능선 벽소령 구간이 ‘피의 능선’인 것이다. 50여년 전 그 시절의 내력을 알고 있을 이 길은 신록만 푸를 뿐 말이 없다.
작전도로가 동쪽 안부로 올라온 지점(신벽소령, 작은 벽소령)에 닿는다. 잠시 널찍하니 편평한 공터인데, 옛날 이곳에서 길은 방향을 틀어 ‘음정’으로 내려가는 지점이다. 음정으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지도에는 1426봉으로 표시되어 있는 무명봉이 있다. 이 봉우리의 꽃이 아름다워 빨치산들은 ‘꽃대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시 돌 많은 길로 접어드니 우전방으로 덕평봉(德坪峰)이 가늠된다. 종주길은 다행스럽게도 덕평봉에 오르지 않고 우회해 간다. 그러다 보니 몇차례의 지리산 종주에도 한번도 덕평봉에 올라 본 일이 없다. 덕평봉에서 내려다보는 지리산 남쪽 연봉들도 좋다는데, 언젠가는 홀로이 찾아와 마음먹고 올라 보아야겠다.
평이한 덕평봉 오름길에 잠시 걸음을 멈추어 목을 축이고는,
덕평봉 우회길로 들어선다.
<덕평봉 (德坪峰, 1,520.9m)>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지리산 주능선의 한 봉우리다. 지리산 주능선은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연하봉·촛대봉·칠선봉을 지나 덕평봉에 이르며 다시 형제봉으로 향한다. 덕평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지맥은 오송산으로 이어지는데, 그 능선을 경계로 동쪽으로 덕평봉과 오송산의 계류가 모여 한신계곡을 이룬다. 덕평봉과 오송산 능선의 서사면 기슭에는 골짜기를 따라 양정·음정·하정 등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덕평봉의 남사면으로는 덕평골이 있으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 등이 입지 하였다. 하동의 주요 관련 지리지와 군현 지도에는 덕평봉이 나타나지 않아 지명의 유래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정상부가 '각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한다. 1930년대의 지리산 유산기에는 '덕평(德坪)'이 나오는데, 1934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정기(鄭琦, 1879~1950)는 산행 중에 덕평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에 적고 있다.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에도 덕평이 나오는데, "1934년 4월 1일에 백무촌(白武村)을 떠나 직치(直峙)를 거쳐 덕평(德坪)을 찾았다. 길은 점점 넓어진다. 평평한 곳에는 비록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더라도 종종 인가가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덕평에는 일제강점기 때까지 3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덕평은 화개·세석 등과 함께 지리산 청학동의 한 장소로도 지목된 바 있다. 선비샘 아래에 상덕평과 하덕평이 있고, 천우동(天羽洞)이라는 새김글이 남아 있어 이곳이 청학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예부터 있었다고 한다.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에도 덕평의 청학동 관련 내용이 있다.
덕평봉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선비샘에 닿는다.
지리산 주능선의 가운데쯤에 자리한 선비샘에는 전설이 얽혀 있다.
첫번째 전설은 한 노인에 얽힌 전설인데, 덕평봉 아래 상덕평마을에 벼슬을 못하고 가난한 선비(일설에는 화전민)가 살았다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온 이 노인이 돌아가시자, 효자 아들은 돌아가셔서나마 대접을 받으시라고 선비샘 위에 묘를 썼다. 선비샘이 깊다 보니 이 샘에 오는 이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물을 뜰 수가 없었다. 이 노인은 돌아가셔서야 비로소 모든 이가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위에 계실 수 있는 선비가 되었다. 그런데 무정한 요새 사람들이 축대를 쌓고 파이프를 꽂아 놓으니, 무릎 꿇을 일도 고개 숙일 일도 없어져 버렸다. 혹여 선비샘을 찾는 유정한 산꾼들이 있다면, 선비샘에서는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물 받아 드시면 어떠시겠는가!
두번째 전설은 임걸년(林傑年) 이야기다. 임걸령에 자리 잡은 임걸년은 선비샘에 와서 자주 놀았었던지, 이곳에서 의신 쪽으로 내려가는 곳의 공터가 임걸년이 배타고 놀았다는 ‘임걸년못’ 자리라는 전설이 있다. 또 임걸년이 애마(愛馬)를 시험하기 위해 선비샘에서 세석 쪽을 향하여 활을 쏜 일이 있었다 한다. 말을 타고 힘껏 달려가 보니 화살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고, 화살 하나 못 따라잡는 말이 무슨 말이란 말이냐 하며 화가 난 임걸년은 말의 목을 베어 버렸는데, 잠시 후 화살이 날아왔다. 이런 화살과 말의 이야기는 주인공만 바뀔 뿐 우리나라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와 같은 전설을 남길 수 있는 임걸년이었다면 적어도 똘마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마무도 무릎을 꿇고 물을 받는 사람이 없네, 무정한 백두들!
저 위쪽에 선비의 무덤이 있으려나?
오늘 백두들의 정기 능선 산행에 처음으로 참여하신 Miss ~님과,
배낭 담당 전소장님.
지리주능선을 독차지한 백두들이 한가로운 선비샘에서의 휴식을 뒤로하니,
이내 남쪽 덕평골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선비샘전망대가 나오는데,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비가 씻겨놓은 지리산 주능선은 더움 푸르름을 짙게 하고,
벽소령과 세석의 중간지점쯤의 이정표를 지나,
돌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서서는,
덕평봉과 칠선봉의 사이의 편평한 안부 쯤을 지난다.
이제는 세석이 훨씬 가깝다는 이정표가 나오며,
앞쪽 칠선봉 방향의 주능선이 구름에 가려 조망이 없다.
칠선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나나나고,
칠선봉 직전의 전망바위봉에 도착한다.
구름에 가린 조망 대신에 조망안내판으로 이곳이 칠선봉 직전쯤으로 짐작한다.
역시나 마음의 눈으로 보면 칠선봉뿐만 아니라 천왕봉도 보인다고..ㅉㅉ
전망봉에서 마음의 눈을 떠 보려고 노력하는 백두들!
칠선봉으로 향하는 등로에는 눈개승마가 어여쁜 꽃을 피어 놓았고,
칠선봉의 암봉으로 보이는 암봉을 우회하여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이어가면,
칠선봉이라 적힌 이정표가 불쑥 나타난다.
<칠선봉(七仙峰, 1,576m)> 북쪽으로는 백무동계곡이, 남쪽으로 대성골이 관찰되는 위치로, 봉우리 자체가 암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천왕봉과 제석봉이 가까운 거리로 보이고 날씨가 좋을 때는 연하봉과의 사이에 있는 장터목산장까지 보인다. 일곱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다고 해서 칠선봉이라 부른다.
한동안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지더니 영신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데크목 계단이 나타나며,
좌전방으로 구름 걷히는 지리산 자락의 모습이 신비롭다.
가파른 데크목 계단을 올라서니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암릉길이 나타나고,
영신봉을 우회하는 등로를 편안히 따르는데, 이 지점이 영신봉(靈神峰) 우회 지점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불쑥 나타난다.
<영신봉(靈神峰, 1,651.9m)>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분기하는 봉우리로, 서쪽으로 칠선봉(1,576m)·삼각고지(1,470m), 동쪽으로 촛대봉(1,703.7m)·천왕봉(1,915m), 남쪽으로 삼신봉(1,284m)과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진다. 남쪽 비탈면에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 큰세개골·대성계곡, 북쪽 비탈면에 함양군 마천면의 한신계곡이 있다.
영신봉에서 분기한 낙남정맥 능선에 자리한 영신봉 이정표.
주변이 철쭉과 구상나무 군락지인 이곳 영신봉(靈神峰)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는 이 등성이가 10여년 전 걸었던 낙남정맥(洛南正脈) 능선이다. 낙남정맥은 이 곳 영신봉에서 분기하여 하동의 동쪽으로 뻗어 내려 낙동강의 하류까지 이어진다.
또한 삼신봉까지 낙남정맥과 나란히 하는 지리산 남부능선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픔과 애환이 숱하게 서려있는 곳이다. 특히 이념갈등의 비극적 상흔은 지리의 어느 곳보다 더 심한 상흔으로 남았다. 1951년 12월 2천여 명에 이르는 이영회부대의 빨치산들이 군경토벌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숨어 들어간 골짜기도, 또 그 이듬해 1월 마지막 토벌작전을 위해 화력공세가 10여일 동안 퍼부어진 곳도 이 능선 좌우의 거림골과 대성골이었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역시 부근의 지계곡인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망실공비 정순덕이 겨우 목숨을 부지해 최후의 빨치산으로 남게 된 계기가 된 곳도 이쪽의 골짝(거림골)이었다. 그래서 남부능선은 가슴으로 걸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데, 오늘처럼 구름으로 덮인 상황에서야 가슴으로 걸을 밖에는..!
<이현상(李鉉相, 1906~1953)> 북한의 남부군 빨치산 총수 이현상은 1905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중아고등 보통학교 재학 때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가했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 뒤 조선공산당과 고려 공산청년회 산하 학생부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했다. 반일 동맹휴학을 주도한 바 있고 일제의 대규모 공산당 검거 때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출옥하여 박현영 김상용 등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가 8ㆍ15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공산당이 남조선 노동당에 개편된 뒤 연락부장 등의 요직을 맡아 활동하다가 남한에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했다. 1948년 북조선 노동당의 결정에 따라 다시 남한으로 내려와 지리산으로 들어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 투쟁을 일삼았다. 1951년 북한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조직적인 남부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각 도당 유격대를 남부군사령부에 소속시키는 등 조직적인 투쟁을 해오다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 합수내 너달강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의문의 총탄에 의해 사살됐다. 당시 나이는 48세였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크게 보면 군 토벌대와 경찰토벌대에 의해, 또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치산에 의해 사살 등 세 가지 설이 현재까지 나돌고 있다. 이후 그를 사살한 공적을 두고 남한에서는 법정 다툼까지 벌어지기도 했는데, 법원은 경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남한에서는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백두들도 이 땅에 서린 아픔을 아는지 묵묵히 걸음을 뗄 뿐이다!
영신봉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앞쪽으로 구름에 싸인 촛대봉이 가늠되고,
주변에 심겨진 구상나무의 멋진 자태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긴다.
돌아본 영신봉 모습.
통신 중계기탑이 있는 암릉 직전에 우측 세석대피소 방향 갈림길로 들어서서,
세석대피소 옆을 통과하여 내려서게 되고,
거림과 남부능선으로 이어지는 등로 좌측에 셈터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쪽으로 세석고원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세석대피소를 내려서는 백두들.
주변에 식재된 구상나무가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이곳 세석에서 거림 갈림길을 지나 남부능선의 음양샘까지는 한국의 걷기좋은길 10선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언제 걸어도 멋진 길이다.
길은 완만하며 우거진 나무가 뜨거운 태양볕을 가려주고,
주변 숲에 웃자란 풀들은 걷는 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준다.
또한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의 안부인 세석에서 능선으로 다시 붙은 사면길이라서 군데군데 예쁜 물길도 만난다.
좌측으로 거림 방향 갈림길이 있다는 이정표가 불쑥 나타나고,
우리는 직진의 의신마을, 청학동 방향으로 진행하면,
걷는 이를 즐겁게 하는 포근한 사면길이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좀 더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며 싱그러운 숲길을 걷노라면, 갑자기 돌제단과 음양수가 있는 남부능선에 접속하게 된다.
남부능선의 커다란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음양샘물을 마시며, 여유롭게 한담을 나누며 쉼을 한다. 참고로 우측에서 흐르는 물이 음샘, 좌측에서 흐르는 물이 양샘이라 한다.
<음양수> 세석에서 사면을 따라 남부능선 방향으로 2km가량 가면 음양샘이란 곳이 있다. 바위 사이에서 샘이 솟는 석간수다. 사시사철 넉넉한 수량을 자랑하는데, 이곳이 바로 화전민들이 살던 곳으로 10여 가구가 넘는 화전민들이 마을을 형성했었다 한다. 음양샘이 화전마을이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돌절구다. 책상만한 바위에 원통형의 구멍을 파서 절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음양수 샘은 그 신비함에 옛부터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물로 인식되어 왔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음양의 조화로 흘러내리는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음양샘 주위에 몰려들어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옛날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 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 버렸고,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음양수 이정표.
음양샘을 배경으로 '파이팅'을 외치고는 대성골을 향해 남부능선으로 길을 잡는다.
남부능선 등로도 유순하게 이어지다가는,
가끔씩 숲 속에서 기암이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맑은 날에 올라서면 멋진 조망을 즐겼을 전망바위도 우회하여 지나면,
이내 삼신봉 방향 갈림길에 도착하여 우측 의신마을 방향의 대성골로 접어든다.
옛날 삼신봉 방향 남부능선을 걸을 때는 의신마을 갈림길이라 불렀는데, 같은 장소를 의신마을 방향 대성골로 진행하면서는 삼신봉 갈림길이라 칭하게 된다.
<지리산 대성골> 대성골은 지리산의 영신봉과 칠선봉의 남쪽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합류하여 크고 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며 화계천으로 흘러서 섬진강을 타고 남해 바다로 흐른다. 대성골이라는 이름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물이 모여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화계동천 계곡 중에서 가장 긴 계곡이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수많은 골짜기 중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 대성골은 포위당한 빨치산 최후의 격전지였다. 한국전쟁 막바지 빨치산이 대성골에서 최후의 격전을 치렀는데, 빨치산이 마지막까지 숨어 있었을 정도로 골이 깊다. 대성골은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속하는데, 화개장터에서 화계천을 따라 오르면 쌍계사가 있고, 쌍계사에서도 계곡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야 대성골이 나온다. 계곡 맨 안쪽에 숨은 협곡의 기암절벽, 우렁차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지리산 최고의 오지임을 증명한다. 1953년 9월 토벌대는 빨치산을 섬멸하기 위해 대성골 아랫마을 의신에 모였다. 토벌대는 대성골로 가는 도로만 터 놓은 채 다른 도로는 다 차단하고는 열흘간 총공세를 펼쳤고, 이 대성골 전투에서 빨치산 1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가던 1951년 11월, 지리산과 전남북 산악지대에서 후방을 교란하던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백선엽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며 남원에 지휘소를 두게 된다. 육군 수도사단과 8사단 등으로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는 1951년 12월 2일부터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라는 이름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4차례에 걸쳐 실시한다. 이 중 1952년 1월 중순에 있었던 제3기 작전에서 대성골로 몰려든 빨치산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토벌작전이 전개된다. 이때 경남도당의 빨치산부대(57사단)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고, 총사령관 이현상이 이끌던 남부군도 괴멸 상태에 이르게 된다.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던 이태는 그의 수기 ‘남부군’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궤멸하는 남부군 - 남부군 최악의 날' ‘세석고원의 서쪽 가장자리이자 대성골의 막다른 끝이 되는 칠선봉 아래에 이르렀을 때, 대열은 수를 알 수 없는 국군부대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중략) 산이 무너지는 듯한 포화 소리, 교차되는 예광탄, 수류탄의 작렬음, 피아의 함성소리가 한 시간 가까이 고원의 밤공기를 뒤흔드는 동안 바위 벼랑 밑에서 예비대격으로 대기하고 있었다.(중략) 탈출구는 바위 벼랑 밑을 따라 대성골을 이루는 계곡 밖에 없었다’ 또한 경남도당 57사단에서 활동하던 최후의 망실공비 정순덕도 포화로 대성골이 밤낮없이 5일 동안 불타올라 바위틈새에서 선 채로 버텼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이태는 지리산 산자락을 전전하다가 2개월 뒤 산청군 거림에서 토벌대에 붙잡히게 된다.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인 영신대가 있고, 수많은 선승들의 수도처이기도 했던 대성골의 산자락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렇듯 이념투쟁의 공간이 되어 빨치산에게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빨치산> 우리나라 빨치산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야산대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에 나선 것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 이후부터다. 남로당 간부로 평양에 머물며 모스크바 유학을 준비하던 이현상은 여순사건 소식을 듣고 급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여순사건은 남로당 지휘부의 지시 없이 현지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때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던 반군은 진압군이 출동하자 곧 패퇴했고 여순사건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패주병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던 남로당원들을 규합해서 빨치산을 조직했다. 이현상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는 이현상을 지원하기 위해 인민유격대를 차례로 남파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인민유격대는 모조리 토벌되면서 지리산 빨치산들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런데 가물가물하던 불씨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불타올랐다. 토벌대에 쫓겨 덕유산을 헤매던 이현상은 그곳에서 북한군이 이미 서울을 점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조국해방의 그날이 온 것인가. 용기백배한 빨치산들은 인민군 부대로 달려갔고, 무장을 새로 지급받고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활발하게 유격전을 전개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국토완정의 대업을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전세가 일시에 역전된 것이다. 1951년 11월 29일에 시작된 쥐잡기작전은 1952년 3월 14일부로 종결됐다. 100여 일에 걸친 작전이 종료되면서 남부군은 피살 7000여 명에 포로 6000여 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러면서 남부군은 후방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에서 지역의 치안을 교란하는 존재로 의미가 격하됐다. 그렇지만 남부군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갔고 지리산에서는 총성이 그치질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정전협상에서 자신들의 북송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실망해야 했다. 국토완정의 꿈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오지의 주민들도 갈수록 비우호적이었다. 남은 희망은 북으로 돌아가는 것. 당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을 것이다. 빨치산들은 그 희망 하나로 힘든 현실을 참아냈다. 빨치산이 되려면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총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그리고 얼어 죽을 각오의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했건만, 지리산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했고 그렇게 민족의 아픔만 아로새긴 채 빨치산은 사라져 갔다.
남부능선에서 급경사의 거친 등로를 따라 대성골로 내려선다.
대성골 주민이었을까! 이렇게 깊고 깊은 산중에서 오래된 묵묘를 만난다.
길게 이어지는 산죽 지대도 내려서고,
우측으로 음양수샘골을 두고 급경사의 바위길도 내려서다가,
잠시 음양수샘골 계곡 옆에서 다리의 긴장을 풀어준다.
다소 완만해진 내림길을 잠시 더 내려서니, 우측으로 큰새개골(네이버 지도에는 세계골로 표기)이 나타나고,
제법 큰 물줄기를 자랑하는 큰새개골 모습.
큰새개골은 칠선봉과 영신봉 사이의 골짜기로 상류에는 지리산 제일이라는 대성폭소가 있고, 물줄기는 아래로 흘러 칠선봉에서 흘러내리는 작은새개골과 합류하여 대성계곡을 이루게 된다. 네이버 지도에는 '세계골'이라 표시되어 있고, 어떤 기록에는 '세개골'로 표기되어 있어서 고증을 통한 통일이 필요해 보인다.
큰새개골로 내려서는 백두들.
큰새개골을 건너는 철교(큰새개교)를 건넌다.
큰새개교에서 본 하류 모습.
큰새개골 상류 모습.
큰새개골을 우측에 두고 사면을 따라 내려서는데, 대성골의 상류 지계곡인 큰새개골의 규모가 여는 산의 큰 계곡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다.
칠선봉 남서 사면에서 흘러내리는 작은새개골을 건너는 작은새개교. 이곳에서 큰새개골은 작은새개골과 합쳐저서 대성골을 이루게 된다.
작은새개교에서 본 상류 모습.
작은새개교 아래 모습.
하류 대성골 방향 조망.
작은새개교를 건너 대성골로 접어드니, 등로는 수레길 수준의 널찍한 사면길로 편안하게 이어진다.
원대성 쉼터에 도착하는데, 등로 우측 위쪽에 원대성 마을 터가 있다.
쉼터에서 쉬자는 제안에도 그냥 가자고 길을 재촉하는 부총무님!
그렇게 편안한 사면길을 따라 다소간 지루하게 내려서니 대성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현재 대성마을에는 두 가구가 민박과 식당을 하면서, 약초와 고로쇠 수액 채취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혹시 지리산 대성골에 갈 일이 있거들랑~~
거대한 바위 옆을 지나는데 혹여나 미끄러져 내리지나 않을까..ㅉㅉ
백두들의 입에서 '대성골이 왜 이리 길어!'라는 이야기가 절로 나오는 즈음에..
낙석방지용 시설물이 있는 언덕길도 지나게 되고,
가도 가도 끝이 없을 듯이 보이는 대성골에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그래도 길이 좋으니 그냥 걸을 밖에는!
드디어 대성골이 의신계곡과 합쳐져 이루는 화계천 골짜기가 보이고,
마침내 의신마을 세석 탐방로 입구에 도착한다.
길고 긴 산행길이 끝나간다는 안도감에 지쳐있던 얼굴에 화기가 돈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서는데, 좌전방으로 의신마을이 내려다 보이더니,
항일투사 30인의 묘지를 지난다.
의신마을 벽소령 방향 들머리로 알려진 벽소령산장 앞마당을 나오니,
의신마을 중앙 도로에 도착한다.
버스가 의신마을 아래 500m 지점의 주차장에 있다고 하여, 지친 다리를 끌고서 찻길을 따라 내려간다.
500m가 왜 이리 이렇게나 먼 길일지는 미처 몰랐다며 투덜거리는 사이에,
의신마을 주차장 옆에 기다리던 버스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감한다.
구례로 이동하여 땀을 닦고는, 지난해 한번 들렀던 동아식당에서,
푸짐하고 여유로운 뒤풀이 시간을 갖는다.
오랜만에 장거리 정기산행에 맛난 술과 음식으로 푸짐한 뒤풀이까지 마치니 '세상에 또 부러울 것이 뫠 있으랴'며~~.
오늘 걸은 지리산의 의신계곡과 대성골은 동족과 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눈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여러 종류의 다툼 중에서 형제간의 다툼이, 여러 가지 전쟁 중에서 동족 간의 전쟁이 가장 치열하고 비극적이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도록 할 일이다!
|
첫댓글 정말 오랫만에 멋진 산행과 역사기행을 하였습니다. 길고 힘든 산행임에도 표정들이 매우 밝네요..수고하셨습니다.
항상 이대장의 자세한 역사적 설명에 감탄하며 자 - 알 감상했습니다. 지리산은 푸근한 어머니품 같은 산이라고들 하는데 우리 역사속에서는 또 이런 아픈 사실이 서려있기도 하지요. 우중에 촬영에 이런 고증까지 해서 산행기 올리는 이대장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