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자신 안에서 세계의 영혼을 발견하고,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라.
그것이 진정한 관계이다.
삶은 거울과 같다. 삶에 미소 지으라.
그러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테니까.
관계는 곧 나를 비추는 거울: 퀴블러 로스와 케슬러의 영적 관계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의 저서 『인생 수업』에서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역설적인 지혜와 마주하게 된다. 특히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이라는 메시지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행위가 단순한 상호작용을 넘어 우리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영적인 성장의 통로임을 역설한다.
이 글은 3장,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 맨 앞에 나온 구절들 –위에 나온 문장-을 묵상하면서 엘리자베스와 데이비드의 호스피스 영성을 확인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서클 진행자들이자 회복적 정의/회복적 생활교육 활동가들인 나이들어감과 죽어감의 평화영성 참여자들에게 관계에 대한 대한 이슈를 다시 성찰하도록 준비되었다.
1. 관계의 본질: 텅 빈 공간과 지나가는 타인
관계를 위한 '텅 빈 공간'의 의미
"사람과의 관계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이 되라." 이 문장은 관계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을 제시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관계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려 한다. 그러나 퀴블러 로스와 케슬러는 이러한 모든 의도와 목적을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텅 빈 공간'은 소극적인 회피나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선입견, 판단, 고정관념, 그리고 나의 욕구로 가득 찬 마음을 철저하게 비워내는,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이다. 이는 마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흙을 빚어낸 후, 그릇의 본질인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같다. 이 비움 속에서야 비로소 온전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다.
서클과 데이비드 봄의 '비워있는 공간'
이러한 '텅 빈 공간'의 개념은 서클 실천가들에게 익숙한 '안전한 공간'과 맥을 같이한다. 서클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비판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청한다. 그 과정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참여자들의 내면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심리적, 영적 공간'을 창조한다. 이 공간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말한 '비워있는 공간(vacant space)' 개념과도 연결된다. 봄은 진정한 대화(Dialogue)는 참가자들이 각자의 의견과 믿음을 '잠정적으로 유보'하고, 공통의 '비워있는 공간'에서 생각과 관념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고 했다. 이처럼 텅 빈 공간은 비어 있음으로써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다른 사람이 지나가게 하라'는 영적 통찰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이 말은 상대방의 존재와 이야기가 나의 내면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스며들게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경청을 넘어선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그의 기쁨, 슬픔, 분노, 상처와 함께 나의 내면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는 행위이다. 이는 심리치유적으로는 '공감적 수용(empathic reception)'의 최고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경험'과 연결시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나가게 하라'는 가르침은 나의 경험이라는 필터를 잠시 치우고 상대의 서사를 오롯이 나의 내면에서 경험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실존적, 영적 의미
이러한 수용의 행위는 영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다. 모든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다른 사람이 지나가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 곧 그 안에 깃든 신적인 생명과 영혼이 나의 내면을 통과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교환이다. 텅 빈 공간이 된 내면에 상대의 이야기가 흐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영혼이 나를 방문하고, 나의 영혼과 조우하는 거룩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2. 관계의 목적: 자아 발견과 신적 조우
관계는 곧 나 자신과의 만남
"자신 안에서 세계의 영혼을 발견하고." 관계가 텅 빈 공간이 되어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타인의 존재는 나에게 거울이 되어, 그 안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영혼, 즉 세계의 영혼을 발견한다. 상대방의 고통과 기쁨, 실수와 성공을 깊이 들여다보며 우리는 그것이 나 자신의 내면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면가족체계(IFS)에서 우리는 '자기(Self)'라는 평화와 지혜의 중심에서 내면의 상처 입은 부분들(Parts)을 만나고 치유한다. 타인과의 깊은 관계는 내면의 부분을 만나게 하는 외적 촉매제가 된다.
세계의 영혼 발견의 의미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상대방의 상처가 나의 상처와 다르지 않고,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때,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보편적인 영혼의 파편이며, 개별적인 존재는 그 보편적 영혼이 다양한 모습으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이는 종교학적으로는 만유내재설(Panentheism)의 영성과 연결되며, 모든 존재 안에 신적인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감지하는 통찰이다.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다
"인간 안에서 신의 정신을 보라." 이 문장은 관계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적으로 정의한다. 이는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선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되었으며, 각자의 내면에 신성(divinity)을 품고 있다. 관계 속에서 텅 빈 공간이 되어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가 지닌 겉모습과 사회적 역할 너머에 있는 신의 정신을 만난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관계를 '타인과의 만남'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격상시킨다.
3. 관계의 역동: 삶은 거울과 같다
삶은 거울이라는 통찰
"삶은 거울과 같다." 이 문장은 관계의 역동성, 즉 '거울 효과'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관계에 투사하는 태도, 감정, 생각은 그대로 우리에게 반사되어 돌아온다. 내가 상대방에게 불신을 보내면 불신이 되돌아오고, 내가 비난의 말을 던지면 비난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먼저 사랑과 신뢰, 따뜻한 마음을 내보이면, 그 파동은 반드시 돌아온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선 존재론적 진실이다. 우리의 내면 상태가 곧 우리의 외적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삶에 미소 지으라는 능동적 행위
"삶에 미소 지으라." 이 가르침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능동적인 행위를 촉구한다. 우리는 외부 환경이 나에게 미소 짓기를 기다리는 대신, 먼저 내가 미소 지음으로써 관계의 거울에 긍정적인 파동을 투영해야 한다. 이 '미소'는 단순한 표정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 상대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의 태도, 그리고 내면의 평화를 담고 있는 영적인 행위이다. 삶에 미소 짓는다는 것은, 삶의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 존재의 근원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믿고 그것을 드러내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테니까
"그러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테니까." 이는 인과응보의 차원을 넘어선 영적인 약속이다. 내가 먼저 비워내고, 미소 짓고, 사랑할 때, 삶은 나에게 평화와 기쁨으로 반응한다. 이것은 외부적인 보상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가 외부에 투사되어 현실이 되는 경험이다. 관계 속에서 내가 먼저 텅 빈 공간이 될 때,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열고 그의 영혼이 나의 영혼과 만나게 된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순간들이 모여, 삶은 나에게 환한 미소로 응답한다. 이 미소는 곧 신의 사랑과 축복의 반영이며, 삶의 모든 순간이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퀴블러 로스와 케슬러는 관계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삶과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깊은 진실을 밝혀준다. '텅 빈 공간'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온전한 만남과 존재의 깊이를 담아내는 거룩한 그릇이다. 이 그릇을 통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발견하며, 모든 존재 안에 깃든 신의 정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짓는 미소는, 삶이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사랑의 약속이 된다.
4. 죽음과 관계의 영성
『인생 수업』의 관계론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들이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실존적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들의 관계 영성은 죽음에 대한 통찰을 근간으로 한다.
관계의 유한성 인식: 퀴블러 로스는 수많은 임종 환자들을 만나며 그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음은 관계의 유한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유한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여기'에서 맺는 관계의 소중함과 절박함을 깨닫게 된다. 죽음은 관계를 미루지 않고, 진심을 다해 맺도록 촉구하는 영적인 스승인 셈이다.
조건 없는 사랑의 훈련장으로서의 관계: 죽어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조건, 즉 명성, 재산, 성공 등을 놓게 된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붙들고자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퀴블러 로스는 이 '사랑'이 곧 조건 없는 수용이며, '텅 빈 공간'이 되는 훈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경지라고 말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서로의 존재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사랑만이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어감'을 통해 배우는 '관계 맺음': 퀴블러 로스의 5단계 모델(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은 죽어가는 사람의 내면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우리가 겪는 상실과 갈등의 과정을 이해하는 틀이기도 하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작은 '죽음'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관계의 단절, 신뢰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결국에는 그 현실을 수용하며 평화를 찾아가는 법을 배운다. 관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호스피스 영성과 관계: 호스피스 사역은 죽어가는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진솔하게 맺는 영적인 실천이 된다. 호스피스 봉사자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을 넘어, 환자의 마지막 여정을 동반하며 그들이 삶의 의미와 관계의 평화를 찾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봉사자는 '텅 빈 공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의 가치관이나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평안을 찾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호스피스 영성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는 가르침의 실제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퀴블러 로스와 케슬러의 『인생 수업』은 단순히 관계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를 통해 삶의 유한성과 관계의 본질을 깨닫고, 그 안에서 우리 존재의 영적인 깊이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관계 영성'의 교과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