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버트 존슨의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 변혁의 메타 차원
의식에 대한 관심의 계보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서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를 거쳐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내면작업에 이르는 여정은 단순한 지적 탐구가 아니다. 이것은 의식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근본적 전환이다. 봄이 물리학자로서 암묵적 질서와 명시적 질서를 탐구하며 의식과 물질의 분리 불가능성을 말했다면, 호킨스는 의식의 수준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보며 각 단계의 에너지를 매핑했다. 그리고 존슨은 융 심리학의 전통에서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투사를 다루며 무의식을 의식의 빛으로 가져오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의식을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 과정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진화하는 장(field)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식 자체를 관찰하고 작업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을 의식한다’는 메타 인식의 차원이다.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의 본질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은 이중의 움직임이다. 첫 번째 의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이고, 두 번째 의식은 그 경험을 관찰하는 자각이다. 예를 들어 분노를 느낄 때, 첫 번째 의식은 “나는 화가 났다”이다. 두 번째 의식은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이다. 이 미묘한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첫 번째 의식은 경험과 동일시된 상태이다. 나는 분노이다. 분노가 나를 지배한다. 두 번째 의식은 경험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선 자각이다. 나는 분노를 경험하는 존재이지만, 분노 그 자체는 아니다. 이 거리두기, 이 틈새에서 자유가 시작된다.
의식을 의식하는 것은 곧 자기반영(self-reflection)의 능력이다. 하지만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존재론적 자각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느낀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가 의식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넘어, “나는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 고로 나는 생각 이상이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봄의 암묵적 질서와 의식
데이비드 봄은 양자물리학의 통찰을 의식 이해에 적용했다. 그는 우주를 두 차원으로 구분했다. 명시적 질서(explicate order)는 우리가 보고 측정하고 경험하는 펼쳐진 세계이다. 시간, 공간, 개별 사물들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암묵적 질서(implicate order)는 모든 것이 접혀져 있는, 분리되지 않은 전체성의 차원이다.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은 이 암묵적 질서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명시적 질서에 갇혀 있다. 나와 너, 주체와 객체, 과거와 미래로 분리된 세계이다. 하지만 의식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이 분리가 명시적 차원의 현상일 뿐이며,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한다.
봄 이 말한 “대화(dialogue)“는 이 암묵적 질서로의 접근 방법이다. 진정한 대화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의식의 흐름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각자의 가정, 선입견, 사고 패턴을 의식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집단적 의식을 형성하는지 관찰한다. 이것은 개인의 의식을 의식하는 것을 넘어, 집단적 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다.
회복적 서클에서 드라마 외상치료로의 여정에서 봄의 통찰은 중요하다. 관계 대화는 개별 의식들이 만나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내면 대화는 그 장을 내면화하여, 내 안의 다양한 부분들이 하나의 의식 장에서 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은 하나의 전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다.
호킨스의 의식 지도와 에너지 수준
데이비드 호킨스는 의식을 측정 가능한 에너지 장으로 보았다. 그의 의식 지도(Map of Consciousness)는 수치심(20)에서 깨달음(700-1000)까지의 스펙트럼을 제시한다. 각 수준은 특정한 감정, 세계관, 생명력을 가진다. 200 이하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의식 상태이고, 200 이상은 에너지를 생성하는 상태이다. 200이 바로 용기의 수준이며, 희생자 의식에서 창조자 의식으로의 전환점이다.
호킨스의 핵심 기여는 의식이 단순한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에너지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근육 테스트를 통해 진실과 거짓, 높은 의식과 낮은 의식을 구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의식이 실재하는 힘이라는 인식이다.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은 호킨스의 틀에서 보면, 자신이 어떤 의식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분노(150)에 있는가, 자부심(175)에 있는가, 수용(350)에 있는가?” 이 자각만으로도 의식 상승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자각 자체가 더 높은 의식 수준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외상치료의 맥락에서 호킨스의 지도는 유용한 네비게이션 도구이다. 외상은 의식을 낮은 수준에 고착시킨다. 수치심, 죄책감, 무기력의 덫이다. 치유는 의식의 상승이다. 하지만 이것은 긍정적 사고로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낮은 의식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의식하고 인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역설적이게도, 수치심을 완전히 의식할 때,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존슨의 내면작업과 무의식의 의식화
로버트 존슨의 내면작업은 융의 개별화 과정을 실천적 방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림자 작업, 꿈 작업, 적극적 상상, 투사 철회 등의 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의 빛으로 가져온다. 융의 유명한 말처럼, “무의식적인 것은 운명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부분들은 외부 세계에 투사되어, 반복되는 패턴, 강박, 관계 문제로 나타난다.
내면작업의 핵심은 투사를 철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사에게서 느끼는 강렬한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상사의 행동 때문만이 아니라, 상사에게 투사된 나 자신의 그림자 때문일 수 있다. 내면작업은 이렇게 묻는다. “상사에게서 보는 이 특성이 사실은 내 안의 무엇인가?” 이 질문을 통해 투사는 철회되고, 그림자는 의식으로 통합된다.
존슨의 방법에서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네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투사를 인식한다. 외부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알아차린다. 둘째, 투사를 분리한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 아니라, 나의 투사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셋째, 투사된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되찾는다. “상대에게서 보는 이 특성이 사실은 내 안에 있다.” 넷째, 통합한다. 그 그림자 부분을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 전체가 의식의 확장이다. 무의식적이었던 것이 의식적이 되고, 부정되었던 것이 인정되며, 투사되었던 것이 통합된다. 존슨이 강조하는 것은 이 작업이 지적 이해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상징과 이미지로 말하기 때문에, 의식화 역시 상징적, 의례적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 적극적 상상에서 내면의 인물들과 대화하고, 꿈의 이미지를 그리고, 작은 의례를 통해 변화를 구체화한다.
의식의 의식이 가져오는 변혁
의식을 의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가져오는 변혁은 무엇인가?
첫째, 동일시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감정, 역할, 이야기와 동일시한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나는 피해자다.” 의식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이것들이 나의 일부이지 나 자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불안을 경험하는 존재이지, 불안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작은 틈새에서 자유가 시작된다.
IFS에서 말하는 참자기는 바로 이 의식하는 의식이다. 참자기는 내용이 아니라 용기(容器)이다. 모든 부분들을 담을 수 있는 의식의 공간이다. 포커싱에서 펠트센스와 친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나는 가슴의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것과 합쳐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의식한다.
둘째, 반응에서 응답으로의 전환이다. 의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자극에 대해 조건화된 패턴대로 반응한다. 빅터 프랭클의 유명한 말처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의식을 의식하는 것은 바로 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트라우마 치유에서 이것은 결정적이다. 외상은 의식을 압도하여 자동 반응 모드로 고착시킨다. 투쟁-도피-얼어붙음의 생존 반응이 현재 순간에 불필요하게 활성화된다. 치유는 이 자동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의식을 의식함으로써 가능하다. “아, 지금 내 몸이 위협 반응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아. 이것은 과거의 메아리일 뿐이야.”
셋째, 패턴의 인식과 변화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패턴은 반복된다. 같은 유형의 사람에게 끌리고, 같은 갈등을 겪고, 같은 실패를 경험한다. 존슨이 말하듯 “무의식적인 것은 운명이 된다.” 하지만 의식되는 순간, 패턴은 힘을 잃는다. 패턴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 패턴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며, 그 순간 패턴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 것이 내면작업의 핵심이다. 투사를 의식하면 투사는 철회된다. 그림자를 의식하면 그림자는 통합된다. 무의식적 동기를 의식하면 그 동기는 변형된다. 의식은 마치 빛과 같아서, 어둠에 비추어지는 순간 어둠은 사라진다.
넷째, 확장된 정체성으로의 개방이다. 일상적 의식은 좁다. 나는 내 이름, 내 몸, 내 이야기, 내 역할로 제한된 존재이다. 하지만 의식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이 경계가 허물어진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생각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나는 느끼는 존재일 뿐 아니라 느낌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여기서 영적 차원이 열린다. 봄의 암묵적 질서, 호킨스의 700 이상의 의식 수준, 융의 자기(Self)는 모두 이 확장된 정체성을 가리킨다. 나는 분리된 개인을 넘어 우주적 의식의 한 표현이다. 물결이 바다와 분리된 것이 아니듯, 개별 의식은 우주 의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의식할 때, 근본적 전환이 일어난다.
다섯째, 공감과 연결의 깊어짐이다. 자신의 의식을 의식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의식도 의식할 수 있다. 상대방이 단순히 행동하는 객체가 아니라, 나처럼 의식하는 주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 이것이 진정한 공감의 기초이다.
회복적 서클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서클은 각자의 의식이 존중받고 들려지는 공간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를 의식하는 주체로 만날 때, 치유가 시작된다. 내면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내 안의 각 부분을 의식하는 주체로 대할 때, 내적 서클이 형성된다. 비판자 부분도, 두려워하는 부분도, 분노하는 부분도 각각 고유한 의식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는다.
의식의 의식과 치유의 역설
의식을 의식하는 것의 역설은, 그것이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노력을 놓을 때 일어난다. 무언가를 바꾸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의식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
포커싱에서 펠트센스는 강요할 수 없다. 그저 친절한 관심으로 기다릴 뿐이다. IFS에서 부분들은 강제로 변화시킬 수 없다. 참자기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의식할 때, 그들은 스스로 변한다. 존슨의 내면작업에서도 그림자는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 의식의 빛으로 비추어질 때, 자발적으로 통합된다.
칼 로저스가 말한 “받아들여질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원리가 여기 적용된다.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은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구나.” 이 단순한 자각, 이 비판단적 의식이 모든 치유의 기초이다.
드라마 외상치료에서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외상 생존자들은 자신의 반응을 부끄러워하고 억압한다. “왜 나는 아직도 이러지?”, “나는 약해.” 이 판단이 외상을 고착시킨다. 치유는 외상 반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내 몸이 과거의 위협에 반응하는 방식이구나. 이것은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해.”
의식의 의식과 집단적 차원
개인의 의식을 의식하는 것은 결국 집단적 의식의 의식화로 이어진다. 봄이 강조했듯, 우리의 사고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이다. 우리는 문화, 언어, 역사로 조건화된 집단적 의식 안에서 산다.
회복적 정의가 단순히 개인 간 갈등 해결을 넘어 사회적 변혁을 지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범죄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집단적 의식의 증상이다. 불평등, 억압, 소외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진정한 치유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내면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내 안의 그림자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적 그림자의 일부이다. 내가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들은 사회가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내 내면을 의식하는 것은 동시에 집단적 무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 작업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이다. 개인의 치유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집단적 치유의 한 부분이다. 한 사람이 의식을 확장할 때, 그것은 전체 의식 장에 영향을 미친다. 호킨스의 연구에 따르면, 높은 의식 수준의 한 사람은 수만 명의 낮은 의식을 상쇄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의식의 변화가 고립된 개인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맺으며: 의식의 진화로서의 치유
데이비드 봄, 데이비드 호킨스, 로버트 존슨을 관통하는 핵심은 의식이 진화한다는 것이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확장하고 깊어진다. 그리고 이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이 바로 ‘의식의 의식화’이다.
회복적 서클에서 드라마 외상치료로, 관계 대화에서 내면 대화로의 여정은 의식 진화의 구체적 경로이다. 외부 관계에서 배운 것을 내면 관계에 적용한다. 타인을 의식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자신을 의식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을 의식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의식 그 자체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의식을 의식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유이다. 조건화로부터의 자유, 무의식적 패턴으로부터의 자유, 동일시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분리의 환상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자유는 무책임한 방종이 아니라, 응답 능력(response-ability)의 증대이다. 더 많이 의식할수록, 더 창조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포커싱, IFS, 내면작업은 모두 이 의식의 의식화를 위한 도구이다. 몸을 의식하고, 부분들을 의식하고, 그림자를 의식한다. 그리고 점차 의식하는 그 의식 자체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이때 도구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의식은 스스로를 의식하며, 이것이 깨어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