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히브리서의 ‘매운맛’ 경고
부제: 사람을 살리는 설교인가, 죽이는 주문인가?
https://youtube.com/shorts/ztAw6UloSEk
가슴 서늘한 경고
히브리서를 읽다 보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구절을 만납니다.
“한번 빛을 받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 6:4-6)
이 서늘한 경고 앞에서 초기 교회는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배교자를 다시 받아줄 것인가, 아니면 영구히 퇴출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규칙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의인들의 요새인가, 아니면 회복을 꿈꾸는 죄인들의 병원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었죠.
필러의 통찰 - 설교라는 뜨거운 장르]
에이미 필러(Amy Peeler)는 히브리서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정교하게 구성된 ‘설교’라는 점을 강력하게 역설합니다. 설교는 법전이 아닙니다.
노련한 설교자는 청중을 깨우기 위해 때로 ‘매운맛’ 언어를 사용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여기서 포기하면 끝장이다!”라고 소리치는 코치의 외침은, 선수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결승선까지 완주시키려는 절박한 사랑의 역설입니다. 히브리서의 경고를 문자 그대로 박제해 사람을 정죄하는 데 쓰는 것은, 설교자의 심장을 오해하는 가장 어리석은 길입니다.
한국 교회의 병폐가 낳은 ‘주문의 신앙’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구원파적 사고’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히브리서 10장 10절 같은 구절을 성경 속의 ‘주문’이나 ‘확정 판결문’처럼 암기하며 살아갑니다. “이미 거룩함을 얻었으니 이제 죄와 상관없다”는 안일함이죠.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우리 교회의 아픈 과거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유교적 권위주의와 율법주의에 찌들어 신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과거 한국 교회의 연약함이, 그 반동으로 이런 ‘기형적인 확신’을 낳은 것입니다. 과거의 신앙 선배들이 왜 피를 흘리면서까지 죄와 싸웠는지(히 12:4), 그 치열한 야성은 거세한 채 달콤한 문자에만 집착하게 된 것이죠.
양극단의 인식지체현상 - 사회의 장애물이 된 종교
놀랍게도 우리 시대에는 이 양극단이 공존합니다.
- 한쪽은 여전히 율법의 공포에 매몰되어 정죄의 칼을 휘두르고,
- 다른 한쪽은 방종의 착각에 빠져 삶의 투쟁을 포기합니다.
저는 이것을 ‘인식지체현상(Cognitive Lag)’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시대는 생명과 평화의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데, 신앙인들은 과거의 상처와 오해에 갇혀 발목이 잡혀 있습니다. 이렇게 박제된 신앙은 시대의 등불이 되기는커녕, 사회가 나아가는 길의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전쟁광을 지지하면서도 자신들이 가장 거룩하다고 착각하는 광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한 거룩한 긴장
히브리서 기자가 “떠내려갈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한 이유는 우리를 감옥에 가두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과 멀어질까 봐 느끼는 거룩한 긴장감’입니다.
구원을 단지 ‘천국행 확정 판결’이라는 사건으로 본다면 이 경고는 공포가 되겠지만, 구원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가는 ‘장대한 회복의 여정’으로 본다면 이 경고는 여행자를 깨우는 고마운 경보음이 됩니다.
여러분, 문자의 날카로운 칼날 뒤에 숨겨진 ‘목자의 심장’을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공동체는 누구를 향해 문을 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죄하는 바리새인입니까, 아니면 함께 아파하며 걷는 구도자입니까?
에이미 필러와 함께하는 이 여덟 번째 여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살리는 ‘진짜 설교’를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