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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복음에 빚진 자(2)
-부제: 죄의 빚 탕감에 대하여
본문<롬1:14~15>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지난주에 ‘복음에 빚진 자’를 나누었지만 내용이 많아서 오늘 두 번째 시간을 갖겠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빚졌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야말로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할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구원 받은 자이기에 고백하는 말이지요? 결국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자라는 뜻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기에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털끝만큼도 없던 바울을, 유대교에 빠져 미쳐있던 그 바울을 복음에 미치게 만들었다는 것일까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탄과 신비함으로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갈1:15절을 보면 바울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여기서 택정과 은혜로의 부르심에 대해 언급합니다. 만일 택함이 없었다면 바울은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다가 지옥가야 할 운명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사건이 일어난 것은 창세전에 이미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살지라도 택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찾아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르심 여기에도 은혜가 또 작동 됩니다. 만일 택정함을 입었다 해도 인간 자신이 무슨 수로 하나님을 찾아 진리의 길로 들어서겠습니까? 바울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바른 길인 줄 알고 교회를 핍박하고 진멸하는데 앞장섰던 하나님의 원수 노릇만 했지 않습니까?
따라서 택정을 받았어도 일일이 하나님이 사건과 안배 속에서 그를 찾아 끌어내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IX) 안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택정함과 은혜로의 부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그 하나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곧 자신의 운명적 사명이라고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롬5: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라는 말입니다. 바울도 우리도 다 그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택정함과 은혜로의 부르심을 통해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가 다 복음에 빚진 자 맞지요? 우리 역시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우리나 처음에는 모두 율법에 매여 율법 신앙을 추구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차니까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의 제사장으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때에 맞추어 율법에서 복음으로 돌아서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처음에는 사람의 본성에 따라 율법 행함에 가치를 두고 율법을 가르치다가 때가 차서 복음의 전도자로 바꿔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잘 나타내는 곳이 눅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입니다. 눅16장 앞서서 눅15장을 참고로 보면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내용, 그리고 잃었던 은전 한 드라크마 찾는 내용, 세 번째로 돌아온 둘째 아들 탕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략 살펴보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스스로 주인을 찾아 올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웅덩이에 빠졌거나 가시 울타리에 걸렸거나 해서 무리에서 이탈된 상태였기에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주인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여기저기 사방팔방 다 뒤져서 찾았기에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동네에 와서 이웃을 불러 잔치를 했답니다. 세상에 빠져 살던 죄인을 마침내 찾아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기쁨을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택정과 부르심이 작동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크마는 발도 없고 눈도 귀도 없는 무생물입니다. 전적으로 주인의 노고에 의해 찾아져야 합니다. 우리 죄인의 영적인 현주소가 그와 같이 죄로 죽은 자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선을 행하지도 못하는 무생물처럼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택정함과 은혜로의 부르심이 작동됩니다.
돌아온 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죄만 잔뜩 진 자입니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허랑방탕하여 쫄딱 망해서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차에 불현듯 아버지 집이 생각납니다. 이 불현듯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입니다. 우리 안에 생각까지 간섭해서 아버지 집이 그리워지게 하시는 것이지요. 여기서 큰 아들은 율법에 가치를 둔 바리새인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 탕자는 택함 받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거지가 된 탕자는 자기 의가 제로가 된 상태입니다. 아버지를 만나서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세요.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껴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힙니다. 십자가 피로 만든 구원의 옷이지요.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네가 천국의 상속자란 뜻이고 새신을 신가는 것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가 주는 메시지가 뭘까요? 자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죄와 실패로 얼룩진 탕자..도저히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면 다 외부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 자신이 한 일이 전혀 없는 불가능한 존재에게 구원이 거저 선물로 주어지는 게 십자가 은혜인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눅16장의 불의한 청지기가 이어집니다. 결국 복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눅16:1~17> 먼저 8절까지 봉독..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참으로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배임과 횡령을 저지른 불의한 종을 주인이 지혜롭다고 칭찬하니 보통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구원의 비의가 숨겨져 있으니 이것을 깨닫는 자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고도 오묘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입니다.
위의 본문을 해석하는 실마리는 말미(14절 이하)에 있습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바리새인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운을 뗍니다. 그리고 15절에서 그 돈(재물)을 잘못 사용하면, 사람들에게 높임 받게 되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미움을 받게 된다고 힌트를 줍니다. 그렇다면 돈(재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어서 16절에 설명을 해주고 있지요. 율법과 복음에 관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과 복음은 사람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책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율법과 복음의 역할에 대해 간단히 살펴봅니다. 잘 알다시피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줄 착각했습니다. 즉, 사람의 행위를 통해 의를 만들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려고 했지요. 그러나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죄인으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인지라 죄인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됩니다. 따라서 죄인은 자신의 행위로 선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의 의 말고 다른 의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입니다. 줄여서 믿음의 의(혹은 믿음의 법)라고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데 이를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중보자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대치되는 말이 불의입니다. 불의란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난 죄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기준을 정한 선악 개념은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구스인이 피부를 희게 할 수 없듯이 인간 기준으로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악일뿐이지요. 따라서 인간 세상에서는 ‘의 혹은 불의’ 개념이 존재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불의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대신하는 일체의 사람의 율법 행함을 가치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람의 행위로 말씀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것과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해서 선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불의입니다(여기서 조심할 부분은 신자가 말씀을 지키는 것과 혹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나 선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하자는 것임).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떠한 사람의 행함으로 힘쓰고 애써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와 선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사고체계를 불의라고 합니다.
갈5:4절에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질타합니다. 율법 행함을 가치로 삼으면 십자가 피 공로가 허사가 되기 때문에 악이고 멸망입니다.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주인과 청지기를 살펴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하고 청지기는 말씀을 맡은 사역자들이지요. 그러므로 등장되는 재물은 율법말씀을 상징합니다. 율법의 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지요. 율법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 순종 불가능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인간이 어떻게 지킬 수 있나요? 육신을 가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합니다. 선악과의 유혹이 무엇이던가요? 뱀이 미혹한 말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꼬드김이었지요. 천연적인 자연인은 선악과를 먹기 전부터 이미 자기사랑으로 조성된 존재입니다. 그것을 폭로시키려고 하나님이 뱀을 보내서 선악과로 유인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아사랑의 실존이 어떻게 다른 신을 두지 않겠습니까?
신은 마음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신은 자신이요, 둘째 신은 애인이요, 다음은 자식이요, 돈이요, 성공출세, 부귀영화가 줄을 잇습니다. 그 누구도 십계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제1계명을 어기면 줄줄이 다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잘 아시는 창조주이시기에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첫 번째 돌판(계명)은 깨뜨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두 번째 율법을 주셨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두 번째의 율법은 용서와 긍휼의 법입니다. 모세로 비유된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담보된 사랑의 법입니다. 사람의 행위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그리스도가 순종하신 의로운 삶과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해 주시겠다는 언약이, 두 번째 주신 율법 속에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 언약 또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자와 긍휼의 마음으로 자기백성들을 대하시지만, 종교의 세계에서는 항상 눈먼 소경인 율법의 종들이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맞이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대로 엄격히 지킬 것을 강요하며 매질을 하고 닦달하지요. 그러나 누가 율법조항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요? 온 백성에게 무거운 죄짐을 지워 절망 가운데로 몰아가지요.
이러한 현상을 본문 1절에서 주인의 것을 허비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허비란 용법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안타까워서 해고를 통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선생 중에서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해 복음을 깨닫고 돌이키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은 자들이지요. 처음에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복음을 발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 숨은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고 돌이켜서 오직 예수의 십자가 은혜만 자랑하며 전하는 자가 되어 율법에 묶여서 신음하던 자들을 복음으로 해방시키고 풀어줍니다(5~7절에서 여러 빚들을 감해주는 것으로 비유). 이렇게 율법 행위의 의가 아니라 복음(믿음의 의)을 전합니다.
‘8절~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소문을 접한 주인(하나님)은 함박웃음이 벌어진다. 청지기가 비로소 주인의 뜻에 맞는 사역을 하기 때문에 칭찬이 이어집니다. 해고는 없던 일이 되고 오히려 지혜롭다는 평가를 얻게 됩니다. 8절에서 빛의 아들들이란 반어법입니다. 자칭 의롭다고 여기고 빛이라고 여기는 율법선생(바리새인)들을 빗대서 하는 말이고, 이 세대의 아들들이란 늦게 철든 복음의 제사장(청지기)들을 말합니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여기서 불의의 재물은 무엇일까요? 율법 행함을 가치로 여기는 종교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삽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 행함을 자신의 자산과 재물로 여긴다는 말이지요. 이들의 시각으로는 복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이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예수의 십자가를 대속의 공로로 모든 죄를 탕감해서 구원해 준다는 믿음의 법을 수긍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시각으로는 복음이야말로 불의이며 불법입니다. 역설적 화법이지요. 복음을 율법에 거슬리는 불의의 법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문학의 장르에는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이 있지요. 이 중에서 최고로 함축된 표현을 구사하는 장르가 시입니다. 시는 응축된 언어로 많은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반어법과 역설, 반전, 풍자와 해학, 냉소 등은 특히 시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기법들이 시가서에 해당되는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에 많이 등장합니다. 물론 선지서나 성경 전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요.
(반어법 예: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심. -역사 속에서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며 온갖 험악한 생을 살았지만, 에서는 평탄한 생을 살았음, 말1장~ 반문)
따라서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복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행위의 의를 붙잡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주님의 친구가 아니라 종입니다. 종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이 들려질 때, 율법적 가치체계를 버리고 은혜와 긍휼의 복음으로 아들의 영을 영접해야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요15:12~1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자의 입에서는 은혜가 나갑니다. 은혜와 사랑은 받아 누리는 자에게서 흘러넘치는 것이지 억지춘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들을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지극히 작은 것이란 복음(말씀의 본 뜻)을 뜻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사람 자신의 할 일은 하나도 없고 주님이 하신 공로만 붙잡으면 된다는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하등의 가치가 없는 말도 안 되는 파렴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작은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상식적으로 동의가 안 되는 비논리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참 되고 큰 것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큰 것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11절~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의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복음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에게 영생의 몫을 주겠느냐는 반문이지요. 구원은 사람이 그 어떠한 행위로도 따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요.
‘13절~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두 주인은 율법(재물)과 복음(하나님)을 말합니다. 신자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 믿게 되지요. 자기의 행위를 의지해서 구원을 따낼 것인지, 아니면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을 것인지...논리상 둘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법(영)을 담는 그릇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담든지, 생명의 성령의 법(복음)을 담든지...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이 좋아하는 돈이란~ 액면대로의 율법을 말합니다(해학적 표현). 하나님 말씀을 누가 더 잘 지키느냐가 그들의 신앙이지요. 그 행함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세계에서 차등과 서열이 생깁니다. 작금의 기독교가 그 길을 답습하고 있지요. 십일조와 새벽기도를 철저히 지키면 좋은 신앙으로 간주됩니다. 교회에서의 권위가 이런데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열심과 정성이 힘이요 자산이요 재물이지요.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어 보이는 바리새인은 유대인들의 추앙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이 세상의 명예나 자산과 똑같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맘몬신이지요.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이란, 신앙을 빙자하여 율법행위로 조성된 서열의 맨 윗자리에 앉아 자신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성경의 고발입니다. 언제든 매시대마다 행위를 내세워 신앙을 자랑하면, 사람 중에는 높임을 받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여 진다는 말씀이지요. 온 평생 죽어라고 신앙을 해 왔지만 그 결국은 영벌에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자기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썩은 동아줄을 잡은 것이지요. 행위로 의를 삼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방점을 두고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눅16: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란 누구일까요? 한 부자는 옳지 않은 청지기처럼 복음으로 돌아와 백성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더니 비웃던 돈을 좋아한다는 바리새인을 말합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는 양 상석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사는 교만한 태도를 빗대서 날마다 자색 옷을 입고 잔치하는 모습으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들의 가르침에 영혼이 병들고 몸에 종기가 나서 헌데를 핥는다고 비유합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무엇일까요? 율법 세계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어 내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인 십자가 복음입니다. 나사로는 율법 속에 감추인 그 복음을 생명으로 사모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들이 헌데를 핥는다는 표현은 뭘까요? 개는 사56:10절을 보면 ‘이 파수꾼들은 다 소경이요 무지해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요 탐욕이 심하여 자기 이득만 도모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이라.’고 폭로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종교지도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랍니다.
개는 외부인이 오면 짖어야 하는데 왜 짖지 못해요? 분별력이 없어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몰라서 성경을 문자로 보고 다 아멘이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이들의 특징이 복 빌어주고 복채 받기를 좋아해서 탐욕과 지각이 없는 목자(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율법 행함을 외면하고 오직 복음만을 생명으로 삼고 사는 태도를 문제 삼고 그것을 비난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개가 헌데를 핥는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둘 다 죽어 부자는 음부로 떨어졌지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는데, 이 말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복음만을 전하는 자냐 아니면 율법 행함을 가치로 여겨 전하는 자냐가 생사를 가늠하는 관건이 됩니다. 전하는 자도 그것을 듣는 자도 생사를 함께하는 공동 운명체이지요. 이를 마24장 끝에서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이라고 말하면서 마25장으로 가면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모두 복음에 대한 내용인데 달란트 비유만 보면~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는데 종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맡기고 떠났다가 오랜 후에 다시 와서 회계를 합니다. 그동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하여 갑절이나 이윤을 남겨 칭찬을 듣지만,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땅에 묻어 두었다가 본전만 되돌려 주자 주인에게 엄한 질책과 함께 심판에 처해지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난다는 말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다는 말이고, 오랜 후라는 온다는 말은 주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여기서 달란트란 복음을 뜻하는데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복음을 깨달은 정도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깨달은 만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는 만큼만 전하면 되는 것이지 완전히 다 알 때까지 입을 열지 않겠다는 발상을 한다면 교만입니다.
여기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이 구별됩니다. 복음을 알고 전하는 자냐, 복음의 가치를 몰라서 땅에 묻어 두는 자냐로 갈립니다. 갑절이나 이윤을 남긴 자들에게는 주인이 칭찬하기를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일이란 아까 눅16: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라고 말한 그 ‘작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세상이 볼 때에 아주 하찮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작 복음의 가치를 아는 자는 복음이 가장 크고 놀랍고 고귀한 보배 중의 보배인 것을 압니다. ‘세상에~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을.. 매일 죄만 토해내는 이 무가치한 무지랭이를..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죄를 십자가 피로 용서하사 의롭다고 여겨 주시고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시다니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하며 감격과 감사 속에서 찬송만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부러 계획을 세워 전도를 한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접한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 곧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밭인 택한 자들에게 때로는 복음의 씨를 심는 일로 때로는 물주는 일을 하는 것이 곧 주님의 동역자(고전3:9)로 참예해서 자신처럼 복음에 감격하는 자들을 얻게 될 때의 그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배로 장사했다고 말하는 것이지 수많은 자들을 전도했다는 산술적 용어가 아닙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소원이 뭡니까?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이 십자가로 나타났는데, 그 십자가 은혜를 아는 자를 얻는 게 하나님의 기쁨이고 바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무슨 특별한 업적과 성과를 쌓거나 반듯한 삶을 살아내는 게 아니라, 오직 그 십자가 사랑에 취해서 감사와 찬송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가 삶 속에서 그 은혜를 높이고 찬양하는 그 자체가 주님과 함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이 복음의 가치를 모릅니다. 즉 복음을 지식으로 건성으로 듣고 알고 있기 때문에 감격도 감사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 자신의 주소가 저주의 자리인 줄을 몰라서이지요. 즉 자신이 태생적인 죄인이라서 도저히 구원을 이루어 낼 재간이 없기에 오는 절망감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건성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말도 상투적으로 내 뱉는 말이고 십자가 은혜도 말은 하지만 감격이 없습니다. 이런 형국을 빗대서 땅에 묻어 두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받은 은혜가 없으니 전할 수가 없습니다. 감격이 없는데 무얼 전합니까? 설사 교회 다니라고 의무감으로 전도를 했어도 생명이 없으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그저 무미건조한 종교인 일뿐이지요. 주님의 재림 때에 지옥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결국 택하심과 은혜로의 부르심이 없는 자는 그 사랑을 받지 못해 멸망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빚졌습니까? 그럼 바울이나 눅16장의 옳지 않던 청지기처럼 율법에서 돌이켜 복음의 그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아니 그 사랑 안에서 터를 잡고 기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이 그 사랑에 감염되어 같이 복음에 참예하여 기쁨을 같이 나누고 누리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사랑을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