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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우숙(鄭君雨肅)이 나를 따라 교유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그의 종조부의 편지와 함께 그 부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6대조 참판공의 장례를 모신 지 어언 백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묘도(墓道)에 비갈(碑碣)이 없으니, 어리고 몽매한 후손들을 경계시킬 수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곧 그대에게는 존고모가 되시니 우리 집안을 잘 아는 자로 말하면 응당 그대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께서 참판공의 묘갈명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그 행장(行狀)을 살펴보았던바, 공은 휘가 내주(來周)이고 자는 내중(來仲)이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본래 고려 때로부터 망족(望族)이었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성종(成宗) 때에 명신(名臣)으로 이조 판서 익혜공(翼惠公) 휘 난종(蘭宗)이 있었으며, 그분의 아들 휘 광보(光輔)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를 지냈고, 다시 3대를 전하여 별제 휘 상신(象信)에 이르러서 휘 회원(恢遠)을 낳았다. 휘 회원은 군수를 지냈는데 공에게는 바로 증조부가 된다. 공의 할아버지는 휘가 지명(之明)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휘가 유창(有昌)인데 진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바, 이처럼 양대가 추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공이 귀하게 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김제해(金濟海)의 딸이다. 그런데 참판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중형(仲兄) 통덕랑공이 그 막내아들에게 명하여 후사로 들어가도록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공인 것이다. 통덕랑공은 휘가 유린(有隣)이고, 배위(配位)는 연안 김씨(延安金氏)인데 찰방 김진(金縝)의 딸이다.
공은 숙종 경신년(1680, 숙종6) 3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소꿉놀이를 할 때에 벌써 글자를 알아서 옹알거렸는데, 다섯 살 때에 통덕랑공이 세상을 떠나자 형이 그의 어리고 외로운 처지를 가엾게 여겨서 글을 읽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은 여전히 외진 곳에서 혼자서 글을 외웠다. 뒤에 성동(成童)이 되자 운강(雲岡)이 상서(李尙書)가 공을 보고 훌륭한 인재라고 여겨서 그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갑신년(1704, 숙종30)의 감제(柑製)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다음 해인 을유년의 전시(殿試)에 부시(赴試)하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 내직(內職)으로는 승문원 정자, 성균관 전적,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좌랑, 병조ㆍ형조의 참판을 지냈는데, 병조에서는 특히 참지를 지내고 참판을 두 번이나 역임했으며, 장례원의 판결사와 한성부의 좌윤을 거치고 승정원에 들어가서는 동부승지로부터 시작하여 우승지까지 지냈다. 그리고 외직(外職)으로는 강원도와 황해도의 좌막(佐幕 비장(裨將))을 지내고, 무안 현감(務安縣監)과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낸 다음 지부(知府 부사(府使))를 일곱 군데나 역임하였다. 곧 내직을 거쳐서 영해(寧海)로 나갔다가 이어서 동래(東萊)로 옮기고 북청(北靑)으로 옮겼으며, 승지를 거쳐 경반(卿班)들을 따라 나가서 풍덕(豊德)에 이어 남양(南陽)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는 강계(江界)와 강릉(江陵) 고을을 각각 거듭 제수를 받기도 했는데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시 안주(安州)ㆍ파주(坡州)ㆍ홍주(洪州) 세 고을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안주로부터 돌아온 뒤 곧 이어서 사명(使命)을 받들게 되었는데, 곧 호좌(湖左 전라도)에서 겸대(兼臺 겸임 대관)로서 그 곳 시험을 관장하였으며 경차관(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검전(檢田)을 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겸대(兼帶)한 벼슬은 지제교, 동지의금부사, 부총관 등이다. 그리고 그 자계(資階)로 말하면 갑진년(1724, 경종4)에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병진년(1736, 영조12)에 특별히 가선대부에 제수되었다. 이상은 곧 그간에 공이 지낸 벼슬들의 이력(履歷)의 대강이다.
무안(務安)에 있을 때는 큰 흉년을 만났지만 기민(饑民)들을 구제하고 요역(徭役)을 탕감해 주어서 백성들이 그 덕택에 온전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파주(坡州)에서 또 큰 흉년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에는 상소로 진황(賑荒)에 대한 대책을 건의한 결과 온전히 살아난 백성들이 무안에서의 구휼 때보다 더 많았다.
동래(東萊)에 있을 때에는 역관(譯官)을 단속하고 왜관(倭館)의 빗장을 엄중히 단속하였으며, 공사(公事)가 아닌 사사로운 접촉은 허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왜인(倭人)을 불러 대접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왜인들 중에 예절을 지키지 않는 자가 있었으므로 이를 준절히 따지고 역왜(譯倭)를 훈계하였다. 그랬더니 이들이 두려워서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였다. 해마다 나라에서 왜인들에게 주는 쌀이 수만 석이나 되었는데, 부(府)에서는 관례적으로 이를 한 해를 앞당겨서 미리 저축을 해 두고는 그 사이를 이용하여 이를 민간에 흩어 주었다가 거두어들이면서 이자를 취하여 자용(資用)으로 쓰고 있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잘못된 관례를 따를 수는 없는 일이다. 목민관이 되어 거기서 이익을 노린다고 한다면, 그것이 될 일이겠는가.” 하고는, 모두 창고에 그대로 비축해 두었다가 기한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를 산급(散給)하였다.
북청(北靑) 고을에서는 백성이 절도사를 찔러 상해를 입힌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임금이 그 곳에 보낼 수령을 선발하게 되었는데, 선부(選部)에서 승지들을 아울러서 의망(擬望)에 올렸던바 결국 공이 임명되었다. 대저 임금의 의중(意中)에는 이미 그 부촉(咐囑)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고을에 부임한 뒤에는 안핵사(按覈使)와 더불어 분란을 일으킨 자들을 찾아 내고 괴수와 추종자를 구분해서 법에 따라 처단하였다. 또 학재(學齋)를 지어서 ‘삼락재(三樂齋)’라고 편액을 건 다음 자신의 봉급을 덜어서 그 이식을 취하여 제생(諸生)들의 양도(糧道)로 삼았으며, 그들에게 구두(句讀)를 가르치고 글짓기를 과업으로 부과하였다. 이러구러 한 해가 지나자 크게 문풍(文風)이 일어났다.
홍주(洪州)에 있을 때는 자신의 봉전(俸錢)을 털어서 전임 수령을 위해 그 흠포(欠逋)를 갚아 주었으며, 너무 오래 되어 근거를 밝힐 수가 없는 것은 조정에 청하여 견감(駑減)하여 주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여덟 명의 수령을 거치면서도 미적미적 미루기만 하여 말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되어 왔던 모든 고질들을 말끔히 혁파함으로써 완결지어 버렸다. 이상은 공이 정사에서 시행하고 조치한 것들의 대략이다.경술년(1730, 영조6)에 우승지로 입대(入對)를 했는데, 이 때 주리고 곤궁한 경기도의 백성들에 대해 충분하게 구제할 것을 청하였던바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을묘년(1735, 영조11)에는 상소를 올려서 북청 고을의 백성들에 대한 참상을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국토를 보장(保障)하는 일로 말하건대 그것이 비록 성지(城池)를 튼튼히 하고 갑병(甲兵)을 강고히 하는 일에 달려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인화(人和)보다 더 큰 일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연히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제거하고 그들의 세렴(稅斂)을 가벼이 하여 인화를 얻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목민관이라고 하는 자들이 다들 악착같이 남김없이 긁어들이기만 하고 노예처럼 부려먹기만 하니, 이러다가 만일 급한 사변이라도 당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목숨을 바쳐서 싸울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전하께서 지금 백성들을 걱정하시는 정성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곧 본원(本源)의 바탕에대한 공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마음에서부터 일어나서 정령(政令)으로 발하는 조처에 지성(至誠)과 측달(惻怛)함이 모자라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전하께서는 호령을 발하고 명령을 시행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지성스러움을 다하여야 할 것인바, 그리하여 저 팔로(八路)의 생령(生靈)들로 하여금 다들한결같이 위에서 내려주는 은택을 입을 수 있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또 신유년(1741, 영조17)에는 병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말씀을 올리기를,
“지금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는 다만 문지(門地)와 유품(流品)에 따라 들어서 쓸 뿐, 재능과 인품에서 얼마나 영걸(英傑)한 자가 있는지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는 곧 묻혀 있는 인재를 진발(振拔)하여 쓰는 본래의 뜻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하였던바, 상이 그의 근직(謹直)함을 가상히 여겨 호피(虎皮)를 내려서 공을 격려하였다. 이상은 곧 공의 평소의 언론에 대한 대강이다.
대저 공이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40여 년이 되는 동안에 외관(外官)으로 지낸 것이 무려 태반이었다. 그런데 공이 다스린 백성들로 말하면 이들은 다들 그 덕을 칭송하는 빗돌을 세우고 화상(畫像)을 걸어서 잊지 못하는 마음을 기탁하였다. 그리하여 어사(御史)나 관찰사(觀察使)가 더러는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서 그의유임을 청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의 치적(治績)을 들어서 포창(褒彰)을 청하기도 하였는바, 그간에 공의 품계(品階)가 승진된 것은 모두 이런 일에 기인한 것이었다.
상이 언젠가 국사가 없는 한가로운 시간에 공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임금이 수령에게 술을 내린 사례가 있는가?”
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구차(寇泚)에게 술을 내렸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 또한 경에게 술을 내리겠다. 경은 이를 다 마셔야 할 것이다.”
하자, 연신(筵臣) 조현명(趙顯命)과 이종성(李宗城)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그가 다스리기를 잘 한데다가 청백(淸白)함에 있어서도 뭇 신하들이 능히 따를 수 없을 정도일 뿐만아니라, 지금 늙어서 머리가 이미 희었음에도 계속 글읽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연달아 석 잔을 내렸다. 공은 본래 술을 못하였지만, 이 날은 감격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다가 그만 술에 취해서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그러자 상이 명하여 공을 부축해서 직려(直廬 직숙하는 곳)로 보내도록 하였다. 공이 임금으로부터 지우(知遇)를 받음이 실로 이와 같았으며, 같은 조정의 신하들로부터도 이와 같이 추중(推重)을 받았던 것이다.
공은 호귀(豪貴)한 자들과의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공무의 여가에는 언제나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글을 읽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가난한 선비나 하는 일인 줄로 알았는데 현달(顯達)한 자도 역시 이런 일을 합니까?” 하자,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벼슬을 한다고 해서 어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기에 미처 봉록(俸祿)으로써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가슴아파하였다. 그리고 형을 매우 지성껏 섬겼는데, 세상을 떠나자 형을 위해 후사(後嗣)를 골라서 세워 주었으며, 토지와 노비들을 나누어 주었으되 자신은 그 중에서 가장 못한 것들만을 가지면서 말하기를, “나는 봉록을 받고 있으니 토지의 수입을 대신할 수 있다.” 하였다.
공은 본래 사리에 통달하고 민첩한데다 특히 기억력이 좋아서 비록 시골 구석의 미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번 그 이름을 듣기만 하면 이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집안 살림의 남고 모자람 또한 무엇이든 이를두루 살펴서 챙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기민(飢民)을 구제할 때면 장부(帳簿)를 들여다보지 않고도그 허실(虛實) 여부를 남김없이 구별하여 알았다. 언젠가 영암(靈巖)에 있을 때의 일인데 어떤 백성이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러자 공이 보고 당장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무안(務安)의 어부(漁夫)이다.” 하였다. 그래서 물어 보니 사실이었다. 그리고 영해(寧海)에 사는 백성이 북청(北靑) 땅을 지나다가 공을 만났는데, 공은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한번 보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난 자들이었다.
공이 지은 시문은 전아(典雅)하여 법도가 있었으며, 더욱이 예문(禮文)에 공력을 쏟은 끝에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의절(儀節)을 모으고 이를 편술(編述)하여 가문을 지켜 가는 법식(法式)으로 삼았다. 공은 일찍부터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한 말씀들을 애독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한 번 머리를 숙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처세하고 행신(行身)하는 신조이다.” 하였다.
인물의 선악과 조정의 득실에 대하여 일찍이 이를 입에 담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비록 세상의 광경(光景)이 각박하게 변하고 허다한 세태의 변고가 있었지만, 어떤 지탄(指彈)이나 평판도 공에게는 미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태도에 대해 혹시 공에게 위엄이 부족하지 않은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공은 괘념하지 않았다.
영조 을축년(1745, 영조21) 3월 22일에 공이 세상을 떠나니, 그 수가 66세였다. 예(禮)에 따라 조정에서는 부의(賻儀)를 내리고 치제(致祭)하였다. 철원(鐵原)의 공장동(公長洞) 국사봉(國師峯) 경좌(庚坐)의 언덕에장사를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전배(前配)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곧 이운강(李雲岡)의 딸인데, 이운강은 그 휘가 인징(麟徵)으로 관찰사를 지낸 이창정(李昌庭)의 손자이다. 부인은 정숙하고 안존하여 종당(宗黨)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계해년(1683, 숙종9) 9월 15일에 태어나서 을미년(1715, 숙종41)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공의 묘소 왼쪽에 합부(合祔)하였다. 후배(後配)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조태세(趙泰世)의 딸이다.
공은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이 없어 종증조형(從曾祖兄 삼종형) 참봉 정경주(鄭經周)의 아들 기서(箕瑞)를 데려다 양자로 삼았는데 진사를 하였으며, 딸은 주부를 지낸 신문현(申文顯)에게 시집갔다. 기서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언석(彦錫)으로 진사를 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대저 당론(黨論)이란 것이 이 세상의 고질이 된 이후로는 사대부들이 조정에 나아가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벼슬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좁아진데다 사사로운 연줄에 매달리는 버릇이 굳어졌고 보면, 게걸스레 자리만을 탐하여 노리는 자들이 자기와 다른 자가 있기만 하면 극력 배척하였으되 이를 배척하는 데 오히려 자신의 모든 힘을 있는 대로 다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였으므로, 그 결과 뛰어난 재능과 웅대한 식견(識見)을 가진 자들이 청요(淸要)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하고 말았다. 또 강약(强弱)의 형세가 성립되어서 울분과 불만의 기운이 충만하게 되었고 보면, 맹꽁이같이 깽깽거리는 비루(鄙陋)한 소인들이 도리어 자기들을 스스로 청의(淸議 바른 논리)라고 끌어다 붙이되 어떻게 하면 더욱 극렬하게 몰아붙일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였으므로, 그 결과 행동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는 자들은 오히려 욕을 먹고 추궁을 당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공의 재식(才識)이나 언행(言行)으로 말하면 무슨 직분인들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 있겠으며, 거기 어디에 비난받을 만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정작 이 사람에게 억눌려서 한갓 장부나 정리하는 말단의 직책에 머리를 굽히고, 저 사람에게 헐뜯겨서 언제나 트집만 잡히는 몸이되고 말았다. 그러나 저 따위 세속의 득실과 훼예(毁譽) 같은 것이야말로 모두 한갓 외부적인 것들일 뿐이니, 그런 것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후세의 사람들로서 공을 관찰하는 자들은 응당 그 시대가 과연 어떠한 시대였는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아,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 재능을 시험하여 본 것이 / 有試其才
치우쳐서 온전하지 못하더라 / 俾偏不咸
그분의 행적을 헐뜯는 말이 / 有訾其跡
담박하여 짜지가 않다는구나 / 謂淡不醎
무엇을 가리며 무엇을 구제하리오 / 奚擇奚恤
다만 입을 굳게 닫았을 뿐이었네 / 惟口之緘
거기서 오로지 지킨 것이 있으니 / 惟厥有守
굽어보고 쳐다봐도 부끄럼이 없어라 / 俯仰無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