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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諱)는 약전(若銓), 자는 천전(天全)이며, 누호(樓號)는 일성(一星), 재호(齋號)는 매심(每心)이며, 섬으로 유배(流配)된 뒤의 호는 손암(巽菴)이니, 손(巽)은 입(入)의 뜻이다. 압해 정씨(押海丁氏)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에서부터 현달(顯達)하기 시작하여 계속 대를 이어가며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으나, 이 뒤로는 가운(家運)이 쇠하고 비색하여 3대가 모두 포의로 평생을 마치었다. 휘 도태(道泰)와 휘 항신(恒愼)은 진사(進士)를 하였고, 항신이 휘 지해(志諧)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조부이시다.
선고(先考) 휘 재원(載遠)은 음사(蔭仕)로 여러 고을의 군수를 지내다가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별세하였다. 아들 5형제를 두셨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선비(先妣)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덕렬(德烈)의 따님으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시다.
공은 건륭(乾隆) 무인년 3월 1일에 마현(馬峴) 사택에서 태어났는데 선비의 꿈에 아들 셋을 얻었으므로 아명(兒名)을 삼웅(三雄)이라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자란 뒤에는 더욱 기걸(奇傑)하였다. 서울의 젊은 사류(士類)들과 교유(交遊)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高尙)히 가져 이윤하(李潤夏)ㆍ이승훈(李承薰)ㆍ김원성(金源星) 등과 굳은 친분을 맺고, 성옹(星翁) 이익(李瀷)의 학문을 전수(傳授) 받아 주자(朱子)를 붙좇고 도학(道學)의 근원을 찾아 공자(孔子)에까지 거슬러 가서 읍양(揖讓)하며 학문을 강론(講論)하고 탁마(琢磨)하여 서로 더불어 덕을 쌓고 학업(學業)을 닦았다.
얼마 뒤에는 다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走魚寺)에 임시로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ㆍ권상학(權相學)ㆍ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規程)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正午)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莊嚴)하고 각공(恪恭)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공은 이와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심유(沈浟)를 빈(賓)으로 불러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 백여 명이 모두,
“삼대(三代)의 의문(儀文)이 찬란하게 다시 밝혀졌다.”
하였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계묘년 가을에 경의(經義)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과거(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대과(大科)는 나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이벽(李檗)과 종유(從遊)하여 역수(曆數)의 설을 듣고는 기하(幾何)의 근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는데, 마침내 서교(西敎)의 설을 듣고는 매우 좋아하였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다. 경술년 여름 금상(今上)의 탄생으로 증광별시(增廣別試)가 행해지자 공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길이 없다.”
하고, 드디어 대책(對策)을 지어가지고 과장(科場)에 들어갔다. 당시 책문(策問)은 오행(五行)에 대한 것이었는데, 공의 대책이 1등으로 뽑혔고, 회시(會試)에서도 대책으로 합격하였다. 급제(及第)로 성명이 발표된 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선보(選補)되었는데, 대신(大臣)의 초계(抄啓)로 인하여 공을 다시 규장각(奎章閣)에 소속시켜 월과(月課)케 하였다. 이때 나는 이미 기유년에 선발되어 반열(班列)이 공의 위에 있었다. 겨울이 되자 상께서,
“형이 아우 밑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하시고, 규장각 월과를 그만두게 하셨다.
공은 일이 없어 한가할 때면 날마다 한치응(韓致應)ㆍ윤영희(尹永僖)ㆍ이유수(李儒修)ㆍ윤지눌(尹持訥) 등과 즐겁게 지냈다. 을묘년 가을에 박장설(朴長卨)이 목만중의 사주(使嗾)를 받아 상소하여 이 가환을 공격하기를,
“이가환이 주시관(主試官)으로 발책(發策 문제를 내는 것)하여 선비를 뽑을 때 해원(解元 장원(壯元)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정약전(丁若銓)을 가리킴)의 대책(對策)은 오로지 서설(西說)을 주장하여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만들었는데도 가환이 이를 1등으로 뽑았으니 이는 은밀히 저의 문도(門徒)를 구제한 것입니다.”
하였다. 말 뜻이 매우 과격하므로 상이 시권(試券 시험지)을 들이라 하여 한번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오행을 사행으로 만들었다는 대책의 시권을 한번 사정(査正)하지 않을 수 없어 오늘 임헌공령(臨軒功令)에 실려 있는 것을 가져다가 상하의 글귀를 몇 차례에 걸쳐 자세히 보니, 애당초 공격하는 자의 말과 비슷한 곳도 없었다. 처음에 오행을 말하고 다음에 금목(金木) 이행(二行)을 말하였으며 또 다음에 수화토(水火土) 삼행(三行)을 말하고, 또 다음에 토(土)가 사행에 기왕(寄旺)하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오행을 거듭 말하여 결론을 지었다. 오행을 이행과 삼행으로 갈라서 말하였으니, 망발(妄發)이라 한다면 가하다. 하지만 당나라의 일행(一行)의 경우, 동서양의 문물이 서로 통하지 않던 시대임에도 800년에 하루 차이가 나던 《대연력(大衍曆)》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그렇다면 일행(一行)의 이름을 사학(邪學)의 범주에 넣고, 일행의 역법을 또한 서양의 법이라고 해도 되겠는가? 이 한 건은 특히나 몹시도 터무니없다고 할 수 있으니, 식견이 있는 선비라면 절로 금방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며칠 뒤 나를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내보내시며 전교하기를,
“저가 만약 눈으로 성인(聖人) 비방하는 글을 보지 않고 귀로 경(經)에 어긋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무죄(無罪)이다. 그리고 저의 형도 그런 말과 글을 듣고 보았다면 어떻게 과거에 올랐겠는가?”
하셨으니, 이는 중씨(仲氏)의 죄를 벗겨 주시려는 말씀이다. 상은 이 한마디 말씀으로 우리 형제를 살려 주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로 인하여 불우하고 등용되지 못하였다.
정사년 가을에 나는 곡산 도호(谷山都護)가 되어 나갔으나, 공은 여전히 불우하니 상께서 특별히 생각하시어 공을 친정사관(親政史官)으로 6품에 올려 주시고, 다시 전조(銓曹)에 명하여 공을 조용(調用)하라 하시니, 공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
하시고, 무오년 겨울에 공에게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게 하셨으니 공에 대한 총애가 옅지 않았다. 기미년 여름에 대사간(大司諫) 신헌조(申獻朝)가 조정에서 공을 논박하고자 하다가 엄명으로 파출(罷出)되긴 했으나, 이때부터 더욱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다음해에 상이 승하하시니, 그 다음해 신유년 봄에 화(禍)가 일어나 나도 대계(臺啓)로 인하여 하옥(下獄)되고 공도 체포되었다. 대책(對策)의 일로 신문(訊問)하고 추고(推考)하였으나 옥사(獄事)가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대비(大妃)의 작처(酌處)를 입었다. 옥의(獄議 판결문(判決文))에,
“정약전(丁若銓)이 처음에는 서교(西敎)에 빠졌으나 종당에는 뉘우친 것이 약용(若鏞)과 같고, 지난 을묘년 있었던 흉비(凶秘)한 일은 저가 전해 들은 데 불과할 뿐 참견한 흔적이 없으며, 또 약종(若鍾)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 중씨(仲氏 약전)와 계씨(季氏 약용)가 서학(西學)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으니, 약전이 뉘우치고 깨달은 것은 의심할 것 없을 듯하다. 그러나 처음에 서교에 빠져 바르지 못한 사설(邪說)을 널리 퍼뜨린 죄는 완전히 용서하기 어렵다.”
하고, 또,
“처음에는 비록 미혹되고 빠졌으나 중간에는 잘못을 고치고 뉘우쳤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문적(文籍)이 있으니, 차율(次律)을 시행(施行)하라.”
하고, 공을 신지도(薪智島)로, 나를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시켰다.
이해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어 도천(滔天)의 흉계(凶計)가 담긴 황심(黃沁)의 백서(帛書)가 발견되자,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모의하기를,
“봄에 있었던 옥사(獄事) 때에 비록 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죽어 장사지낼 곳도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자신들이 직접 대계(臺啓)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당로자(當路者)를 공동(恐動 위험한 말로 겁주는 것)하여 상소ㆍ발계(發啓)하게 하여, 약전과 약용을 다시 잡아들여 국문하고, 이치훈(李致薰)ㆍ이학규(李學逵)ㆍ이관기(李寬基)ㆍ신여권(申與權)도 함께 잡아들이기를 청하였으니, 그 뜻은 오로지 나를 죽이는 데 있었다. 그들이,
“저 여섯 사람은 역적과 매우 가까운 인척(姻戚)이니, 그 흉계(凶計)를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니, 재신(宰臣) 정일환(鄭日煥)이,
“저들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도 나오지 않았고 흉서(凶書 백서(帛書))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반드시 알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말로써 그들을 얽어 넣어서야 되겠는가?”
하였고, 상신(相臣) 심환지(沈煥之)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봄 옥사 때 이미 작처(酌處)가 내려졌는데도 이기경(李基慶) 등이 그 처분을 거두고 다시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니, 심환지가 이들의 계사(啓辭)를 윤허하기를 청하여 여섯 사람을 잡아들였다. 이것이 이른바 동옥(冬獄)인데, 사건을 조사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이때 벗 윤영희(尹永僖)가 우리 형제의 생사(生死)를 알려고 대사간 박 장설의 집으로 탐문하러 갔더니, 마침 이때 홍희운이 왔으므로 윤영희는 옆방으로 숨었다. 홍희운이 성질을 내며 주인 박장설에게,
“천 사람을 죽인들 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니 박 장설이
“사람의 생사는 본인에게 달린 것이어서 저가 살 짓을 하면 살고 저가 죽을 짓을 하면 죽는 것이니, 저가 죽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저를 죽인단 말이오.”
하였다. 희운은 나를 죽일 논의(論議)를 하도록 권하였으나 박장설은 듣지 않았다. 이튿날 또 대비(大妃)의 작처(酌處)를 입었다. 옥의(獄議)에,
“자지(慈旨 대비(大妃)의 전교(傳敎))를 받들매 덕의(德意)가 매우 넓으시어 역적 황사영 흉서에의 관련 여부로써 살리고 죽이는 한계를 분명히 지시(指示)하셨으니, 신들은 머리를 조아려 자지를 읽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흠모와 감동으로 급급히 자지를 받들어 따랐을 뿐 감히 복심(覆審)과 논란(論難)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약전 형제는 황사영의 흉서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모두 감사(減死)하소서.”
하고, 드디어 공을 흑산도(黑山島)에 유배하고 나를 강진현(康津縣)에 유배하였다. 우리 형제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귀양길을 떠나 나주(羅州)의 성북(城北)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손을 잡고 서로 헤어져 각기 배소(配所)로 갔으니, 이때가 신유년 11월 하순이었다.
서로 헤어진 16년 뒤인 병자년 6월 6일에 내흑산(內黑山) 우이보(牛耳堡)에서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치셨으니, 아! 슬프다. 공은 섬으로 귀양온 뒤부터 더욱 술을 많이 마시고 오랑캐 같은 섬 사람들과 친구를 하고 다시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으니, 섬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간간이 우이보에서 흑산도로 나와, 내가 방면(放免)의 은혜를 입었으나 또 대계(臺啓)로 인하여 정지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
하고, 우이보로 돌아가려 하니, 흑산도의 호걸(豪傑)들이 들고 일어나서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은 은밀히 우이보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타 첩(妾)과 두 아들을 싣고 우이보를 향해 떠났다. 이튿날 아침 공이 떠난 것을 안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와서 공을 빼앗아 흑산도로 돌아가니, 공도 어찌할 수 없었다.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공이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왔으나, 이때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형제의 상봉을 저지하니 금부(禁府)에서도 관문(關文)을 보내지 않았다. 공이 우이보에서 나를 3년 동안이나 기다렸으나 내가 끝내 오지 않으니 공은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그 뒤 3년 만에 율정(栗亭)의 길로 운구(運柩)하여 돌아왔으니, 악인들의 불선한 행위가 이와 같았다.
내가 강진(康津) 다산(茶山)에 있을 때 흑산도와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곳이었으나 그 거리는 수백리 떨어져 있으므로 자주 편지로써 문안하였다. 나의 《역전(易箋)》이 완성되어 공에게 보냈더니, 이를 보시고 공은,
“세 성인의 마음속 은미한 뜻이 오늘날에 와서 다시 찬란히 밝아졌다.”
하였고, 얼마 뒤 다시 초고를 고쳐 보냈더니, 공은,
“지난번 《역전》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샛별이라면 이번 원고는 중천(中天)에 밝은 태양(太陽)이다.”
하였다. 《예전(禮箋)》이 완성되자, 공은,
“정리(整理)되고 다듬어진 것이 마치 장탕(張湯)이 옥사(獄事)를 다스린 것과 같아 드러나지 않은 실정이 없다.”
하고, 《악서(樂書)》가 완성되자, 공은,
“2천 년 동안이나 계속된 긴 밤의 꿈속에서 헤매던 악(樂)이 지금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양률(陽律)과 음려(陰呂)는 각각 짝을 맞추되 천(天 양(陽))을 3, 지(地 음(陰))를 2로 해야 마땅하니, 이를테면 황종(黃鐘)의 길이 8촌 1푼의 ⅓을 빼고난 나머지 5촌 4푼이 대려(大呂)이고, 대주(大蔟)의 길이 7촌 8푼의 ⅓을 빼고난 나머지 5촌 2푼이 협종(夾鐘)이고,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니, 십이율(十二律)을 형세에 따라 순서를 정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내가 공의 말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바꾸지 못할 확론(確論)이었다. 따라서 이미 썼던 원고를 모두 버리고 공의 말대로 다시 원고를 작성하였다. 그러고 보니 《의례(儀禮)》 정현(庭縣)의 순서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와 《국어(國語)》ㆍ《좌전(左傳)》의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數)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이 완성되자 공은,
“주자(朱子)는 ‘사청(辭聽)ㆍ색청(色聽)하여 문권(文券)을 두루 상고하고 질제(質劑 계약서 또는 어음)를 살피면 송사하는 자가 변명을 하지 못한다.’했다.”
하였다. 사서설(四書說)은 공이 대략 훑어보았으나 모두 공의 인정을 받았고, 그런 뒤 다시 박학(博學)하고 다문(多聞)한 선비들에게 두루 보여 시정(是正)을 받았다. 아, 동복(同腹) 형제이면서 지기(知己)가 된 분으로는 세상에 오직 공 한 사람뿐인데, 공이 돌아가신 7년 동안 나만이 홀로 쓸쓸히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공은 찬술(撰述)에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저서(著書)가 많지 않고 《논어난(論語難)》 2권, 《역간(易柬)》 1권, 《자산어보(玆山魚譜)》 2권, 《송정사의(松政私議)》 1권만이 있는데, 이는 모두 해중(海中)에서 지은 것이다. 배(配)는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사서(司書) 서구(敍九)의 따님이고 총재(冢宰) 수현(壽賢)의 후손이시다. 아들 학초(學樵) 하나를 두었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경(經)을 연구하였으나 장가들고 나서 요절하였고, 딸 하나는 민사검(閔思儉)에게 시집갔다. 공의 첩(妾)이 학소(學蘇)와 학매(學枚) 형제를 낳았다. 공의 관[柩]은 나주(羅州)에서 옮겨와 충주(忠州) 하담(荷潭)에 있는 선영(先塋)의 동쪽 고총(古塚) 옆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인가(人家)가 총총하고 / 纍纍之叢
땅도 농사짓기에 알맞으니 / 地又宜耕
쟁기로 갈게 되면 / 犂刃攸觸
이 명(銘)이 먼저 드러나리 / 先獲我銘
이곳은 철인의 유골이 묻힌 곳이니 / 是固哲人之骨
드러나게도 말고 손대지도 말라 / 毋暴毋嬰
일찍이 주공ㆍ공자를 사모하여 / 夙慕姬孔
우리들과는 벗도 하지 않았으나 / 友不我與
비천한 무리들과 교유하며 / 游乎祿祿
고관(高官)을 대하듯 하였도다 / 待以刀俎
조정에 들어갔으나 / 翶翔乎朝廷
막혀서 서용되지 못하고 / 閼而弗敍
마침내 불운(不運)을 만나 / 遂遭顚躋
섬으로 유배되니 / 竄于海苫
정통하고 슬기로운 지식을 / 精知慧識
묵묵히 마음 깊이 간직했도다 / 黙焉內斂
이곳이 선영의 고장이라 / 是唯先人之域
멀리서 와서 장사지냈도다 / 遙遙來窆
부 한화
지난 무술년 겨울 아버님께서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계실 때 나는 손암(巽菴)과 함께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讀書)하여 40일 만에 《맹자(孟子)》 한 질(秩)을 다 마쳤는데,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공에게서 적잖이 인가(印可)받았다. 공은 찬물로 양치질하고 눈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매양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의 군민(君民)으로 만들 뜻이 있음을 말하였다.
임인년 가을에 우리 형제는 윤모(尹某)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고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봄 백중계(伯仲季) 삼형제가 함께 감시(監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나만이 급제하였다. 그해 가을에 손암이 감시에 장원(壯元)하고 이어 또 높은 성적으로 회시에 급제하였으므로 영광스럽게 열상(洌上)으로 돌아와서 좌랑(佐郞) 목만중(睦萬中), 교리(校理) 오대익(吳大益), 장령(掌令) 윤필병(尹弼秉), 교리 이정운(李鼎運)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성대하게 노니,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갑진년 4월 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와 《칠극(七克)》 등 몇 권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신해년 겨울부터 나라에서 더욱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맺은 것은 풀기 어려운 것이어서 화(禍)가 닥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골육(骨肉)을 서로 해쳐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받아들여 천륜(天倫)에 부끄럼없이 하는 것만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공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주-D001] 초계(抄啓) : 인재(人材)를 뽑아 상주(上奏)하는 것.[주-D002] 800년에 …… 오류 : 일단 원문대로 번역하였으나, 이 부분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낙하굉(落下閎)이 《태초력(太初曆)》을 만들고 나서 “이 역법은 훗날 하루의 오차가 날 것인데, 800년 후의 성인이 나서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한 내용을 원문에서 잘못 인용한 듯하다. 《隋書 卷78》[주-D003]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정조 때 채홍원ㆍ정약전 등이 명을 받들어 영남 출신의 인물 4백 50여 명의 약전(略傳)을 기록한 책. 10권 10책.[주-D004] 작처(酌處) : 죄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결(處決)하는 것.[주-D005] 황심(黃沁)의 백서(帛書) :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이 북경에 있는 주교(主敎)에게 국내의 천주교도 박해의 시말과 그 대책을 황심의 이름으로 흰 명주에 기록한 밀서(密書). 황사영은 정약현(丁若鉉)의 사위로 처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청 나라에서 들어온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고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제천(堤川) 주론(舟論) 옹기 만드는 마을에 숨어 있었다. 이때 극렬 신자 황심(黃沁)과 연락이 닿아 위기에 놓인 천주교를 구할 방책을 상의하여 조선 교회의 박해받는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는 내용의 백서(帛書)를 황심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서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하려 하였는데 발각되어 이들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 백서 속에는 우리나라를 청 나라에 소속시켜 청 나라의 감독을 받게 할 것과, 배[船] 수백 척과 서양 군대 5, 6만으로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해 보내어 선교를 돕게 하라는 등의 말들이 쓰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