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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초한 내가 언젠가 선군(先君)을 모시고 식사를 할 때의 일이다. 이 때 선군께서 척연(戚然)히 슬퍼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복을 타지 못하고 태어나 부모의 품을 면하기도 전에 그만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중모(仲母) 정 숙인(鄭淑人)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되었으므로 어린 시절 일 년 동안을 바깥에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아버지께서 공무(公務)로 집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사실 계부(季父)께서 나를 길러서 가르치셨다. 내가 혹시 글을 읽어 터득함이 있으면 계부께서 기뻐서 칭찬을 하였으며, 내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장난질을 하면 거듭거듭 비유를 들어 순순히 타이르셨으되 결코 무섭게 성을 내시는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 엄함을 알지 못하였다. 어디를 나가시면 금방 따라 나섰는데, 역시 돌아보고 웃으시면서 이를 금하지 않았다. 내가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 먹고 있었는데 이를 보신 계부께서는 못 본 척하고 지나치셨다가 내가 내려온 뒤에 조용히 불러서 꾸짖기를, ‘어떻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을 가지고 그처럼 위험한 데를 올라간단 말이냐. 방금 내가 급히 너를 부르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네가 놀라서 떨어질까 염려해서였다.’ 하셨다. 이처럼 모든 좌와(坐臥)와 기거(起居) 등 일상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그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셨으며 또 절도에 맞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자세히 살펴보시고 조심하도록 하였다.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켜 만져 주시고 잠이 들면 안아다가 이불을 덮어 주셨다. 더욱이 음식에 마음을 써서, 밥이나 국은 그 그릇을 만져 보고 식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였으며, 상한 고기나 생선의 가시 등은 반드시 젓가락으로 가려 주셨다. 또 틈틈이 《소학(小學)》에 인용된 여러 글들 가운데 음식의 예절에 관하여 밝힌 것들을 두서너 구절씩 외워 그 뜻을 풀어서 일러 주셨는데, 매 끼니 때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끼니 때가 되면 항상 계부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 슬프구나. 내가 어찌 계부님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도 오직 계부님의 덕택이며, 어린 것을 깨우쳐 주신 것도 또한 계부님의 덕택이다. 그러니 어찌 계부님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셨는데, 말씀을 마치자 두 뺨에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또 말씀하기를, “하늘의 이치란 참 알 수가 없다. 이처럼 효우(孝友)하고 자량(慈良)하신 계부님이시니만큼 당연히 복록(福祿)과 경사(慶事)를 누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만 수명과 지위를 누리지 못하시고, 게다가 그 하나인 아들마저 자식이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니 내가 이를 말하지 않으면 뒷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 수가 있겠느냐. 내가 일찍이 이에 대한 사행(事行)을 갖추고 이를 새겨 그 묘소에 묻으려 하였는데, 아직까지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부디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그리고는 평소에 듣고 보신 것들을 대략 열거하여 일러 주셨다. 그러면서 또 묵묵히 무엇을 생각하시면서도 잘 생각이 안 나시는 듯한 모습을 하셨는데, 이 불초한 나는 감히 자세한 것을 여쭙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지금 그 명하신 것을 그대로 하지도 못하였다.
이러구러 몇 년이 지나서 선군께서 그만 나를 버리고 돌아가셨는데, 그로부터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내가 병이 났다가 잠깐 기운이 돌아오자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말하기를, “아, 선군께서 명하신 종조부님의 산소에 묘명(墓銘)을 새겨 묻는 일을 어찌 더 늦출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선군께서 당시에 열거하여 일러 주시던 말씀을 생각해 보니 이미 그 열에 여섯 일곱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오로지 이 불초(不肖)한 자의 죄일 따름이다. 그래서 마침내 선군께서 말씀해 주신 것과 함께 이 불초한 자가 사사로이 듣고 본 것들을 가지고 이에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다음과 같이 서문을 쓴다.
공은 휘가 공병(公秉)이고 자는 의칙(懿則)인데, 성균관 진사 증(贈) 이조 참판 휘 광교(廣敎)의 아들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 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으로부터 비로소 크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종선(種善)이 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시호가 양경(良景)이고, 휘 계전(季甸)이 영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시호가 문열(文烈)이며, 휘 우(堣)는 이조 참의를 지냈다. 그리고 봉화 현감(奉化縣監) 휘 장윤(長潤)과 수원 판관(水原判官) 휘 치(穉)를 지나서 휘 지번(之蕃)에 이르러서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냈으며, 휘 산해(山海)는 영의정을 지내고, 휘 경전(慶全)은 좌참찬을 지내고, 휘 구(久)는 예문관 검열을 지냈는데, 공에게는 모두 8대 이상이 된다. 그리고 성균관 진사 휘 상빈(尙賓), 의령 현감(宜寧縣監) 휘 운근(雲根), 병조 정랑 휘 덕운(德運)에 전해졌으며, 이분이 휘 성(宬)을 낳아서 지극한 행실과 은밀한 덕이 있었으나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공은 곧 그 현손이 된다. 증조는 휘가 수일(秀逸)인데 동부승지이며, 조부는 휘가 우명(宇溟)으로 성균관 생원을 하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진사공의 초취(初娶)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인데 정언 심박(沈璞)의 딸이고, 재취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조채(趙採)의 딸이며, 삼취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성화진(成華鎭)의 딸인데 아들 셋을 낳았는바, 맏이는 병조 참판 휘 종병(宗秉)이고, 둘째는 천안 군수(天安郡守) 휘 승정(承正)이며, 막내가 바로 공이다.
공은 병인년(1806, 순조6) 12월 14일에 태어나서 계축년(1853, 철종4)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향년이 48세이다. 처음에 예산(禮山)의 대지동(大枝洞) 한곡(閒谷)의 선영(先塋)에 안장하였다가, 나중에 갈촌(葛村) 남쪽 정좌(丁坐)의 언덕으로 옮겼는데, 구묘(舊墓)와의 거리가 몇 리도 되지 않는다.
공은 어릴 때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서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진사공이 본래 준엄(峻嚴)해서 집안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곧장 제재하여 용서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이를 공손하게 받들어 따라서 그 언동(言動)이 단 한 가지도 그 뜻에 합치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진사공은 공을 무던히도 사랑하여 일찍이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었다. 두 분 형과 더불어 우애가 독실하여 언제나 화기애애하였으며, 혹시 꾸짖는 일이라도 있으면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직지사(直指使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언젠가 참판공의 행실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 집 서쪽에 있는 참대밭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밤중에 발소리를 죽인 채 문 밖에 이르러서 훔쳐보기를 사흘 밤을 하였다. 그리하여 실제 행동이 전에 듣던 소문과 어긋나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드디어 효우(孝友)와 시례(詩禮)로써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형제 세 사람이 모두 글을 읽고 도(道)를 강론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일이 없었으며 또한 다른 말도 없었다. 그 형만이 홀로 어진 것이 아니라 두 동생들도 모두 어질도다.” 하였다. 참판공이 밖에 나가 벼슬할 때에 공이 대신 집안 일을 건사하였는데, 매우 급하여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감히 마음대로 하는 법이 없었으며, 반드시 편지로 고하여 명을 받은 뒤에 이를 시행하였다.
종족(宗族) 간에 화목하였으며, 후진들을 가르쳐 인도함에 있어서는 그 지혜롭고 어리석음을 막론하고 모두 맡기는 과업(課業)에 일정한 과정(課程)이 있었다. 그리고 누가 상사(喪事)를 당하면 비록 그자가 소원(疏遠)하거나 비천(卑賤)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찾아가서 문상(問喪)을 하였다. 친구나 손님들을 대함에 서로 화협(和協)하였으나 무람없지는 않았으며, 입으로 남들의 잘못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노복(奴僕)들이 조심성이 없는 경우가 있으면 따뜻이 타일러서 스스로 뉘우쳐 고치게 할 뿐 갑자기 이를 성색(聲色)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공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이 마침 고을의 장날이었다. 이 날 장에 가던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는 서로 길에서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사람이 그만 세상을 떠났구나.” 하였으니, 공이 사람들을 깊이 감화시킨 바가 대개 이와 같았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행랑채에 바짝 다붙어 있는 마당의 나무를 베어 버리려고 했을 때 선비(先妣)께서 이를 말리시면서 말씀하기를, “베지 말라. 이 나무는 작은시아버님께서 심으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말씀하기를, 공은 조상을 모시는 일에 정성스러워서 동산의 과수(果樹)는 대부분 손수 심으신 것들이며, 그 과일이 익을 때를 기다려서는 반드시 이를 손수 따서 갈무리하곤 하였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기를, “너희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래서 조석의 끼니를 겨우 진사공에게만 올리고, 공의 형제분들에게는 모두 밥주발이 빈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뚜껑을 덮어서 상에 놓아 두고는 진사공이 이를 보고 다들 밥이 있다고 안심하시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진사공이 식사가 끝나면 두 분 형이 물러가시면서 공에게 그 대궁을 먹으라고 했는데, 공은 이를 먹으려 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함께 먹어야 한다고 사양하였다. 이 때문에 결국 대궁이 그대로 남곤 하였다.” 하셨다.
집안에 보관해 오는 옛 달력들이 자꾸만 쌓여서 매우 많아졌는데, 그것은 모두 선세(先世)의 일들을 기록한 일록(日錄)들이었다. 그 중에는 공이 기록한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모두 조야(朝野)의 사서(史書)들 중에 여기저기 보이는 조상의 유사(遺事)들을 일일이 뽑아서 적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두 분 형님에 관련되는 것이면 아무리 한만(閒漫)한 것이라도 일일이 기록하고 빠뜨린 것이 없었으며, 두 분 형수(兄嫂)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는바, 돌아가시기 열흘이 채 안 되는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일을 중지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 효우(孝友)가 곧 천성에 근원하였으며, 그 정력이 또한 남들보다 탁월하였음을 알 만하다 하겠다.
배위(配位)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한영하(韓永夏)의 딸이다. 단정하고 성실하여 부인의 법도가 있었으며, 며느리로서 유순하고 동기로서 화목하고 어머니로서 자애로워 사랑이 모든 자녀들에게 미쳤다. 그리고 공의 내행(內行)도 이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가 많다고 한다. 기사년(1809, 순조9) 11월 29일에 태어나서 신미년(1871, 고종8)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나니 수가 63세였다.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재순(在順)은 모습이 깨끗하고 정신이 빼어나 글재주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스물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종형인 부정(副正) 현직(顯稙)의 아들 상규(庠珪)를 취해서 양자를 삼았다. 부정은 군수공(郡守公)의 아들이다. 상규는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맏이는 영구(寧求)이며, 다음은 아직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았는데 내 동생 병규(丙珪)의 양자가 되었다. 딸 맏이는 정호석(鄭鎬晳)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영구의 아들 하나도 역시 어리다.
아, 슬프다. 선군(先君)께서 이 불초(不肖)에게 말씀하실 때에, 특히 그 받으신 바 은애(恩愛)를 들어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에 대한 보답을 하지 못하신 것이 아쉬워서 이를 표양(表揚)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대저 공이 형의 아들을 마치 자식처럼 대한 것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머니가 없음을 가엾게 여겨서 그처럼 특별히 사랑하였을 것이니, 그것은 응당 당연히 그리 해야 할 일이었다 하겠다. 또 선군(先君)의 처지로 말한다면 제부(諸父 여러 백숙부)에게 어떤 훌륭한 점이 있을 경우 이를 일컫는 것은 그 역시 당연한 직분인 것이다. 어찌 단지 자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고마워서 보답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대저 도의(道義)가 피폐하고 질박함이 사라진 이후로 인의(仁義)의 가르침이 그만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로부터 베풂을 받게 되는 아랫사람들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것은 다만 그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인 것이며, 특별히 나를 생각해서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한다. 이 때문에 섬기는 자들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자들은 가끔 이해 관계를 따져 사랑을 베풀고 당연히 해야 할 바에 대해서는 정작 나태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만 익숙해져서 마침내 저 하늘이 정한 윤리 질서마저 민멸되어서 순조롭지 않으니, 만약 지금 성인(聖人)이 계신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세상을 염려하는 걱정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생각건대 베푸는 자들은 그러한 정성에다 자신들의 사적인 계산을 끼워 넣지 않고, 이를 받는 자들 또한 자신만이 그러한 혜택을 받은 것으로 여겨서 이에 대해 보답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옳은 일이라 할 것이다.《시경(詩經)》육아(蓼莪)의 시에 말하기를, “그 은덕을 갚고자 한다면 저 하늘처럼 끝이 없을 것이다.[欲報之德 昊天罔極]” 하였다. 자식이 그 부모에 대해서마저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였거늘, 하물며 아무리 가까운 살붙이라고 하더라도 그 어버이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차이가 없을 수 없는 제부(諸父)로서 어버이 노릇을 한 경우이겠는가. 이 점이 바로 선군(先君)께서 그처럼 한결같이 잊지 못해하시던 까닭이며, 내가 이에 대해 더욱 정중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제오륜은 양심을 속였건만/ 第五倫之矯也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훌륭하다 하고 / 而世以爲賢
등백도는 차마 못 할 일 하였건만/ 鄧伯道之忍也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다 그를 가엾게 여기네 / 而人莫不憐
대개 사람들이 그 조카에 대하여 / 蓋人於兄弟之子
독실하지 못한 자는 많고 독실한 자는 드물기에 / 不能篤者多而能篤者少
잘한 일을 기리고 지나친 점을 꾸짖지 않는 것이라오 / 故與其能而不責之其偏也
공은 특별하고 이상한 행동이 있는 것도 아니요 당연히 할 일을 다했을 뿐이지만 / 若公則無奇特詭異之行惟盡其所當然
또 사람들이 능히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네 / 而又非夫人所能然
그러니 족히 인륜을 도타이 하는 법도가 되지 않겠으며 / 其無足爲敦倫之軌
저 완악한 자를 경계하는 비결이 되지 않겠는가 / 而警頑之詮耶
선인께서 명이 있으셨으매 / 先人有命
소자가 이에 기술하는 바라네 / 小子述焉
[주-D001] 제오륜은……속였건만 : 제오륜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공정하기로 소문이 났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그에게 “공 같은 사람도 사심(私心)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조카가 병들었을 때는 하룻밤에 열 번이나 가 보았지만 잠을 편히 잤고, 아들이 병들었을 때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지만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小學 善行》[주-D002] 등백도는……하였건만 : 백도는 진(晉)나라 등유(鄧攸)의 자(字)이다. 그는 석륵(石勒)의 난리를 피하여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도망을 가다가, 위험한 고비를 만나 둘을 모두 데리고 달아날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안고 도망했다. 그런데 그 뒤 결국 아들을 갖지 못하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다.《小學 善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