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士大夫)와 사녀(士女)의 난초 향
- 최승범 「한란(寒蘭)」, 김철교 「추백소」 읽기
1. 난초의 멋과 향
사군자의 사전적 의미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 등 네 가지 식물을 일컫는 말로 고결함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화제(畫題)’다. 매화는 이른 봄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난초는 사람의 발길 이 드문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피운다. 국화는 늦은 가을에 흰 서리를 머리에 이고 자태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대나무는 비바람에도 꺾이지 아니하고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이 생기를 잃지 않는다. 어려운 환경을 무릅쓰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고결한 향기를 피우는 매난국죽의 특징을 군자(君子), 즉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사군자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이러한 매난국죽의 특징을 그림으로, 시의 소재로 즐겨 사용하였는데,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서서 시문(詩文)에 등장했다. 대나무는 『시경(詩經)』에, 난초는 굴원(屈原)의 시 「이소(離騷)」에, 국화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매화는 임포(林逋)의 시에서 만날 수 있다.
난초는 동양란과 서양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동양란은 중국, 우리나라, 대만, 일본 등지에 자생하는, 춘란과 한란이 있다. 동양란은 서양란보다 색채도 화려하지 못하고 크기도 작지만 대부분 청초한 아름다움과 그윽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많은 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는 깊은 산중을 떠나 우리 주위에서 고결한 자태로 위로를 주고 있다.
2. 최승범 「한란(寒蘭)」 읽기
옥빛 꽃봉으로
해맑게 부풀더니
한 송이 또 한 송이
눈결에 또 한 송이
벙긋이
벙근 아침은
천하 온통
내 것일레
마음 들뜨지 말라
차분하라 잔잔하라
눈맞춤 눈을 돌려
책장을 펼쳐 들자
방 가득
옥빛 향기 일어
마음 다시
들썩이네
최승범, 「한란(寒蘭)」, 『천지에서』(문학아카데미, 1994), 전문
김재홍 교수는 이 시에 대한 해설에서, “시인은 어느 날 아침 벙그는 난초 꽃망울에서 "한 송이 또 한 송이/ 눈결에 또 한 송이/ 벙긋이/ 벙근 아침은/ 천하 온통/ 내 것일레"와 같이 마치 천하를 얻은 듯 큰 기쁨을 느끼고 있군요. 난꽃 한 송이에서 생명 탄생의 기쁨을 느끼고 우주의 숨결을 읽어 내면서 영원을 바라보는 행복감에 젖어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비의 기품은 절제와 은근한 멋에서 찾아지는 법, 스스로를 "마음 들뜨지 말라/ 차분하라 잔잔하란"고 타이르면서 더욱 마음을 비우고 맑게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군요. 그러나 어디 꼭 그렇게만 될 것인지요? 새로 피어나는 꽃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난향은 암향으로 떠돌면서 "방 가득/ 옥빛 향기 일어/ 마음 다시/ 들썩이네"와 같이 시인을 새삼스럽게 생명감, 생의 약동에 젖어 들게 만드는 것이네요.”(김재홍, 『작은 들꽃이 보고 싶을 때』, 문학수첩, 2003)라고 쓰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으랴. 최승범 시인은 한란처럼 살다가 가신 전북문단, 나아가 한국문단의 큰 별이셨다.
3. 김철교 「추백소」 읽기
초가을 달밤 꽃대궁에서
하얀 하늘 날개를 편다
몸짓으로 피워내는 언어송이
음계를 만들어 날아오르고
붓끝으로 날 세워 그려낸
가을여인
품속에서 숨어나오는
풋풋한 살내음
- 김철교, 「추백소(秋白素)」, 『내가 그리는 그림』(시선사, 2022), 전문.
이 시에서는 난을 치는 중년 여인이 잠시 붓을 내려놓고, 창가의 난 화분 건너편 초가을 하늘을 넘겨다 보고 있다. 환한 달빛이, 젊은 시절을 숙성시킨 의연한 모습의 여인을 방문한 것이다. 초록빛이 도는 노란 색의 꽃과, 부드러운 그러나 견고한 난초잎이 어울려 은은한 시와 그림을 이루고 있다.
정갈한 옷을 단정히 입은 중년의 여인이 꽃을 바라보고 있고, 들릴 듯 말 듯 여인의 콧노래에 따라 꽃대궁에 달린 꽃잎들이 마치 하얀 나비처럼 춤을 추며 고요한 음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난초의 은은한 향기는 여인의 살내음과 섞여 더욱 감미롭지 않은가.
최승범의 「한란(寒蘭)」에서는 사대부(士大夫)의 모습이, 김철교의 「추백소(秋白素)」에서는 사녀(士女)의 자태가 난초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