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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의 열매가 되는 법>의 줄거리 :
무엇인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무엇인가 좋음을 바라는 욕구는 내 인격의 기본 구조입니다. 항상 작동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의식과 욕구는 마치 기다란 주머니와도 같아서 그 안에 의식하는 것과 욕구 하는 것을 담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담긴 것들은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서 빛이나 어둠으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그 외 모든 것은 어둠으로 작용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의 열매가 되는 법
(에베소서 5:8~21)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깜깜한 밤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면 빛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반딧불이처럼 움직이는 빛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본문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함은 말과 행동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까지도 변해야만 합니다. 내 주변 전체는 어두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발동되어 말과 행동이 나타날 때는 빛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본문의 내용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인격 구조와 관계된 표현입니다. 인격의 핵심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는 24시간 작동하는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반복해서 말씀드려왔습니다만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국 마음으로 맺어지는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에서는 있음을 느끼는 작용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말로 인지(認知) 작용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식의 작용은 선택적입니다. 어떤 대상을 강하게 의식할 때는 다른 대상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바다의 아름다움에 감탄해서 바다를 의식하는 동안에는 주변에 있는 나무는 의식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의식은 사실로 존재하는 것 중에서 존재의 무게감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대상을 붙잡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은 마치 존재감의 대상을 담고 있는 긴 주머니와도 같습니다. 주머니가 길다는 것은 그 대상에 의식이 닿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로부터 의식이 나가서 그 대상에 닿고 있고 그 대상의 존재감을 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욕구는 마음의 공백에서 나오는 채워지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마음은 공백이 있기에 채워지기 위해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라고 욕구합니다. 이 또한 선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수많은 대상이 있지만 그중에서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만을 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번 욕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욕구 또한 그 대상을 담고 있는 긴 주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중요한 것은 무엇이 최고로 큰 존재감의 대상이고, 최고로 큰 좋음의 대상이냐는 것입니다. 의식은 존재감이 최고로 크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닿게 되고 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욕구는 좋음이 최고로 크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닿게 되고 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담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는 등불처럼 빛을 내게 됩니다. 이것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빛의 자녀들처럼 행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의식과 욕구의 작용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24시간 작동하는 마음의 기능입니다.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하나님을 담고 있으면 빛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을 가장 크고 먼저 느낄 때 나로부터 하나님의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하나님의 빛이 비치게 되고, 이로부터 말과 행동도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두운 세상에서 빛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신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숭배의 본산지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상태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아데미 여신숭배자들이 마음에서 의식하고 욕구하던 일들이 부자 되고 형통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킵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에게는 돈이 가장 큰 존재감의 대상이었고 좋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돈을 담게 된 긴 주머니와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란 본래 빛을 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돈의 존재감을 제일 먼저 의식하고 돈이 제일 좋다고 욕구할 때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깜깜한 어둠에 덮이고 맙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말과 행동도 어둠에 덮인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더듬어 찾으려고 하는 암중모색(暗中摸索)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내 의식과 욕구의 긴 주머니가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지 못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음으로써 내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 안에는 세상 것이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이 가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의식과 욕구의 긴 주머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마음은 형광등처럼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내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빛 가운데 있으므로 말과 행동도 빛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두운 밤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면 빛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시게 됩니다.
빛의 자녀로 행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 내용이 9절에 이어집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드러날 수 있다면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무엇이냐가 다소 어렵습니다. 착함의 반대는 악함입니다. 의로움의 반대는 불의함입니다. 진실함의 반대는 거짓됨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말과 행동이 따로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해나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더라도 그 발생 근원에 따라 빛의 열매일 수도 있고 어둠의 열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발생 근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느냐에 따라 착하고 의롭고 진실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삼각형에 비유해보자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삼각형을 이루는 세 개의 꼭짓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사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생각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할까요? 아니면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될까요? 이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착한 일이며 빛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차를 보고 멋지다고 느껴서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악한 일이고 어둠의 열매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인격인 마음에는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의 주머니와 좋음을 느끼는 욕구의 주머니가 있습니다. 이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면 우리의 마음에서는 빛이 나게 됩니다. 이 빛 아래에서 자동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자동차를 담고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대상들이 담겨 있는 상태는 어둠의 열매이고 악함입니다. 이처럼 착함이란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서 유래되었고 어디에서 나오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의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를 사야겠다고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일 때 의로움이 됩니다. 착함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는가, 나에게서 나왔는가에 대한 유래를 보는 것이었다면, 의로움은 하나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함이란 자동차를 사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관점에서 판단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하나의 삼각형에 세 꼭짓점이 있듯이 다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어떤 측면에서든 어둠이 없기를 바라며 이렇게 구분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다못해 시장에 가서 생선 한 마리를 살 때도 그것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생각일 수도 있고,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생선을 먹겠다는 생각조차 어떤 면에서도 어둠이 끼어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착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이라면 의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에 맞아떨어지는 일이라면 진실한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의 어느 쪽을 보아도 어둠이 깃들지 않는 상태가 빛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의 열매가 되려면 말씀과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0절을 보면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마존테스(δοκιμάζοντες)는 실제 경험을 통해서 맞는지 틀리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란 우리가 이 길을 따르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연합해서 주님을 따라가게 되면 즉 인격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하나님께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의식의 주머니에 담게 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의 주머니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을 담게 되면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내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말과 행동 또한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의 빛 아래에서 나타나고, 이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세 가지 측면에 일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고,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부합하는 진실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실제로 삶에서 시험해보라고 요청합니다. 시험함으로써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의 증거는 평안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이 내게 평안과 기쁨으로 전이됨으로 확인됩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 기뻐하신다는 것은 곧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과 성령님도 기뻐하신다는 것이고,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였기에 영원 전부터 유지되어 온 그 기쁨과 평안이 내게로 전이되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이러한 기쁨과 평안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의 열매를 맺는 삶에서 삼위일체 속에 있는 영원한 기쁨이 주어지는가를 스스로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이 길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전이되는 기쁨과 평안을 확증할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이유는 들어서 알게 된 말씀을 다시 나에게 설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말씀 듣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찾아다니고 목사님들을 찾아다니지만 그저 듣기만 해서는 빛의 열매를 맺힐 수 없습니다. 들은 말씀에서 정말로 감동을 받았다면 실제 삶에서 말씀을 시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자신에게 설교하고,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함으로써 나의 인격의 핵심인 마음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의식의 주머니와 욕구의 주머니 안에 하나님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먹는 것이고 하나님을 버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영업부 직원들이 사장님과 전무님을 모시고 회의를 합니다. 사장님이 이야기를 할 때는 영업부 직원들의 의식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사장님이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써 성과를 올리고 승진할 수 있겠다는 욕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 자리를 떠나자 이제 의식의 존재감의 대상은 전무님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전무님도 할 말을 마치고 떠나면 부장인 나의 존재감이 영업부 직원들에게 의식됩니다. 사장님이나 전무님 앞에서의 나의 말과 행동과 직원들 앞에서의 나의 말과 행동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님이나 부장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나의 욕구는 부하직원들이 얼마나 잘 뛰어줌으로써 부장인 나의 실적을 높여갈 수 있느냐에 대한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의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기억하면서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함으로써 내 의식의 주머니를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채울 수 있고, 내 욕구의 주머니를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나의 의식의 주머니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일등인 상태를 만들고, 나의 욕구의 주머니 안에서 하나님의 좋음이 일등인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은 사장님을 의식하고 승진을 욕구하지만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어둠의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함의 관점에서 악한 일이며, 의로움의 관점에서 불의한 일이며, 진실함의 관점에서 거짓된 일입니다. 이것이 아데미 여신숭배가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 되기를 바라고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 틈에서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의 주머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욕구의 주머니에서 하나님의 좋음만을 느끼고자 할 때 이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은 빛의 열매가 됩니다.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관점에서 볼 때 어둠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홀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기도의 시간이 없으면 인격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의식의 긴 주머니와 욕구의 긴 주머니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한 시험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설교하고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도를 통해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를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인격 상태를 빛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 안에 이 세상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십자가로 벽을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실제로 빛의 열매가 맺히고 기쁨과 평안이 주어지는지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학교에 있든, 직장에 있든, 가정에 있든, 시장에 있든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세상이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하나님만이 들어와 계신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 생긴 기쁨이 나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내가 삼위 하나님과 사위일체로 연합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을 실제 삶에서 시험하고 느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강조드리지만 이 일은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내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에 담겨있던 세상 것들에 대해 죽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반드시 의식과 욕구의 긴 주머니의 끝을 하나님께 대고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상태에서 살 때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둠이 깃들지 않은 빛의 열매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선함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의로움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일치하는 진실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스스로 확증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타나는 기쁨과 평강이 내게도 전이됩니다.
빛의 열매를 스스로 확증할 수 있는 삶은 너무너무 멋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믿음의 삶임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함으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삶에서 말과 행동이 빛의 열매인 것을 확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으로 전이되는 경험을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격의 구조인 의식과 욕구의 주머니가 LED 전구처럼 하나님으로 밝게 빛나게 하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말과 행동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