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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투자로써 헌금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의 줄거리 :
헌금이 이익을 위한 정당한 투자일 수 있는 경우가 있을까요? 물론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헌금은 본질적으로 미래의 이익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예정하심 안에서 헌금을 미래의 이익을 위한 투자로 하도록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사명이 예정하심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투자로써 헌금하도록 예정된 사람들
(빌립보서 4:10~2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투자로써 헌금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은 헌금이 투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의미의 투자는 아닙니다. 투자란 미래의 이윤 창출을 위해서 사용되는 자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허락하셨기에 틀림없이 이익이 창출될 수밖에 없는 투자로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물로 번역된 헬라어 도마(δόμα)는 생일 선물이나 결혼기념일 선물이 아닌 생계를 위한 필수품을 가리킵니다. 또 유익, 풍성한, 열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들을 보면 당시의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 헌금을 보낸 사실과 연관하여 굳이 상업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너희의 선교 헌금이 일종의 투자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해가 없도록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서 말하는 풍성한 열매란 돈을 많이 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헌금을 투자로 생각하는 일에 대해 경계해왔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돈으로 헌금을 할 수밖에 없기에, 헌금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헌금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도에서 유익이나 풍성한 열매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상업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빌립보 교인들의 선교 헌금은 일종의 투자였음을 비유적으로 알려줍니다. 다만 그로부터 얻어지는 유익은 투자한 돈을 이익금으로 회수하듯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이란 바로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유익이자 열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열매가 빌립보 교인들의 것도 된다는 것이 바로 제목에서 말씀드린 ‘투자로써 헌금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헌금과 연관된 말씀입니다. 다만 헌금과 연관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신앙적 법칙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 ‘헌금을 하면 몇십 배, 몇백 배로 축복을 받는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본문의 주제는 헌금이 아닌 주안에서 이루어진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교제라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빌립보 교회가 갖고 있던 특별한 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미 바울이 사도가 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인들 또한 창세 전에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하여 예정하신 가운데 헌금하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다만 예정과 택함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처럼 사역자를 위하여 선교헌금을 못 한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거나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부담과 책임에서 제외되었기에 오히려 자유롭고 기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일반적인 헌금의 법칙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예정 가운데 택함을 받아서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교제에는 다른 모든 교회들과 공통점도 있으며 오직 빌립보 교회만이 갖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특별한 점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주 안에 있음이 강조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과 관계하고 있었고, 빌립보 교인들 또한 주 안에서 사도 바울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비결은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부활하여 주안에 거하고 있는데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전달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는 표현으로부터 빌립보 교인들의 선교 헌금이 한동안 중단되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서 헌금을 중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위하여 선교 헌금을 하고 싶었지만 헌금을 전달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시점이 57년입니다. 전도 여행 끝 무렵에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로마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군영 안에 구금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후 재판이 시작되었고 사도 바울은 2년이 넘도록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신청하였고 60년도 말경이 되어서야 로마로 호송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구금되어 있던 약 3년의 기간 동안 빌립보 교회는 후원금을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호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선교 헌금을 보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염두에 두고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라고 말하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떼어서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지만 잠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생계를 염려하여 헌금을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행여나 그런 마음은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자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에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14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는 마치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께서 저에게 헌금을 하셨는데 제가 ‘헌금을 잘 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장면을 상상해보시면 다소 어색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기에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좀 어색할 수 있습니다.
15~16절을 보면 괴로움에 참여하였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이어집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2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1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인 후원은 빌립보 교회가 유일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와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 정도 체류하며 교회를 세우는데, 이때 빌립보 교회로부터 두 번의 헌금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두 번이나 스스로 벌어서 선교에 필요한 비용들을 충당했다는 언급이 이루어집니다. 빌립보 교회는 데살로니가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스스로 벌어 선교비를 충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번이나 헌금을 보내옵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 바울이 굶을까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며, 사도 바울과 안면이 있기 때문에 체면상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의 선교 헌금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있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이러한 지속적 헌금은 빌립보 교회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교회들이 헌금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8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다만 빌립보 교회처럼 지속적 헌금을 했던 교회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한 번씩 헌금을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이 이야기를 하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예 헌금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14절의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는 말씀에 이와 같은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괴로워했다는 말이 참 이상합니다. 빌립보서는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서신입니다. 바로 앞의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쁨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이 괴로움을 언급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괴로움이란 단순히 선교 사역 중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이나 박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1장 23~24절을 보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으로부터 사도 바울이 진심으로 좋게 여겼던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허망한 일이나 막연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것도 사실이고, 그리스도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 것도 사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가 가장 좋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늘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괴로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하늘의 좋음을 알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반드시 이루어질 바람이었기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 자체를 괴로움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더 좋고 확실한 기쁨이 되는 하늘에 지금 당장 갈 수 없는 괴로움을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억누르고 극복하고 이기면서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나 빌립보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하늘로 가지 못하는 이유도 사명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복음 안에 세우는 사명이 있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던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괴로움에 참여하였음을 참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사도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세워나가는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참여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을 위한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태어나 살게 된 사도 바울을 택하셔서 사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좋음을 알게 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나라가 훨씬 더 좋음을 깨달았음에도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사명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괴로움에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을 통하여 참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이라는 예정 속에 함께 묶여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빌립보 교회만이 사도 바울에게 지속적인 선교 후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스스로 일을 하여 선교 자금을 충당하고 있었음을 알면서도 두 번씩이나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 바울을 걱정해서 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일이었습니다. 17절을 보면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헌금하는 것이 상업적으로 투자했을 때 이윤을 많이 거두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의 사명을 통해 이루시는 모든 열매가 너희에게도 열매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읽다 보면 특이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사업의 투자자를 모을 때 아무나 받지 않고 골라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위해 아무나 선교 후원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는 느낌이 듭니다. 막힌 사람들은 그저 돈이 굳어서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나 헌금을 할 수 없도록 막으신 후에 빌립보 교회만을 택하신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개인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헌금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치하여 후원했다는 점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심지어 빌립보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중에도 넘치는 하늘 기쁨을 갖도록 허락해주십니다. 이 넘치는 하늘 기쁨은 빌립보 교회만의 특혜라면 특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에 참여하도록 예정하시고 택하신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에 대해 18절에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왜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아빠가 아이에게 돈을 쥐여줘서 아빠의 생일 선물을 사 오라고 합니다. 아빠의 돈으로 산 선물이니 아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아이가 사 온 선물을 기뻐하고 칭찬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과 가운데서 헌금을 하게 하셨습니다. 극심한 가난이 마음에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은 스스로를 제시하시고 기쁨을 갖게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누리는 특혜는 은근히 샘이 날 정도입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은 선교 헌금을 하면 이런저런 복을 받는다는 법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헌금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마음을 붙잡고 계시지 않는다면 할 수도 없는 헌금입니다.
또 특혜에 관한 말씀은 19절에서도 계속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있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 제시하시리라는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만 빛나는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처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늘 기쁨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기쁨으로 헌금을 했더니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합니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헌금을 했으면 생활 속에서 쓸 것들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 교인 중에 A라는 성도가 있는데 집이 무척 가난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하나님은 A라는 성도의 일상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신 계획이 있습니다. A가 오늘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까지 하나님의 계획안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A가 가난한 가운데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안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계획하신 일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헌금하느라 돈이 모자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인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헌금을 했지만, 하나님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계획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지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다 이루어질 만큼 돈이 주어질 것이고, 그 외의 것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쓸 것 안 쓰고, 마실 것 안 마시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마시고 쓰고 입고, 할 모든 것은 고스란히 이루어지면서 헌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삼국시대보다 더 이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성도와 사도 간의 헌금 이야기는 오해가 될 수 있고 껄끄러운 소재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영적인 진실을 담아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늘 기쁨을 누리는 빌립보 교인들이라면 이만한 영적인 진실은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받아야 될 메시지를 잘 분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정하사 택하심을 받아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하늘 기쁨을 알게 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삶을 괴로움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사명 때문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이 이 사명을 후원하며 참여하는 것도 예정 가운데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빌립보 교인이 나 자신이라고 느껴진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을 위하여 헌금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그 일이 무엇이든지 빌립보 교인들이 누리던 특혜가 여러분에게 밝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정하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획들을 위하여 헌금하실 수 있도록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대하여 빌립보 교인들과 같은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샘이 나는 심정으로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