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다섯 남자
무더운 여름에 북한의 가을산을 본다. 단풍이 참 곱다. 산 아래 민가도 몇 채 보인다. 집을 감싸고 있는 밭의 푸른빛이 선명하다. 산과 산 사이에 놓인 비포장 황톳길에도 눈길이 간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저 멀리 흑백의 산너울이 보인다.
사진 속 장소가 강원도라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남한의 강원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저곳은 북한 쪽 강원도 천내군의 모습이다. 여름이어서 서늘한 기운이 그리운가보다. 자꾸 가을산의 풍경에 눈이 간다.
북한 강원도 천내군 두류산의 모습 ⓒ로저 셰퍼드
여기 역시 북한 강원도 천내군의 두류산이다. 양강도의 두류산과 이름만 같은 뿐 산세는 많이 다르다. 군인처럼 보이는 저 북한 산림청 직원은 어디를 바라보는 걸까? 아래 사진 역시 강원도 세포고원의 한 풍경이다. 가을빛과 산 모양은 남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만, 도로의 농기구는 여기가 북한이란 걸 말해준다.
어디를 봐도 잘 뚫린 고속도로, 교각, 높은 빌딩은 보이지 않는다.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게 없다. 북한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지? 관광으로라도 북한 땅을 밟을 수 없는 처지이면서 괜한 상상을 해본다.
북한에서 길 잃기, 남북 백두대간을 종주한 로저 셰퍼드(49. 뉴질랜드)에겐 상상 속 일이 아니다. 현실이다. 로저는 북한에서 길을 잃은 적이 많다. 늘 북한 쪽 안내원과 함께 다녔는데도 그랬다. 2012년 7월, 고대산을 떠나 함경남도 덕성군에 있는 천산대봉으로 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함경남도 신흥군의 한 농촌마을 풍경 ⓒ로저 셰퍼드
"스마트폰, GPS도 없잖아. 게다가 내가 가져간 지도는 2008년 남한에서 만든 북한지도였다고. 북한 곳곳을 잘 아는 운전기사 한명수마저 헤매는데..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
로저의 표정은 심각했으나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북한 남자 네 명과 뉴질랜드 남자가 남한에서 제작한 북한 지도를 펼쳐 놓고, 북한에서 길을 찾다니. 오히려 쉽게 길을 찾는 게 이상한 일 아닐까?
로저 일행은 천산대봉으로 향하는 산길을 찾지 못한 채 일단 도로에서 점심을 지어 먹었다. 요즘처럼 더운 날이어서 밥을 먹자 졸음이 몰려왔다. 다섯 남자(황승철, 황철영, 한명수, 김성민, 로저)는 일단 낮잠을 자기로 합의했다. 길을 잃고도 이토록 태평할 수 있다니, 놀랍다.
한 시간쯤 잤을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기쁜 마음에 로저는 누구보다 먼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길 잃은 네 남자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로저의 기쁜 마음과 달리 북한의 낯선 남자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산속에서 갑자기 백인 남자가 튀어나오니 얼마나 놀랐겠어. 아마 그가 태어나 처음 만난 백인이었을거야. 다행히, 나와 함께 자던 북한 주민을 확인하고 안심하더라고."
조선-뉴질랜드친선협회에서 일하는 황철영도 갑자기 나타난 주민을 보고 좋아했다. 그가 주민에게 다가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손으로 이쪽저쪽 방향을 가리키는 모습을 보니 길을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잠시 뒤 황철영이 돌아왔다.
"천산대봉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런 지명을 들어본 적도 없다는데."
모두 한숨을 터트렸다. 이제는 결단을 해야 할 시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도 전진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캠핑을 할 것인가. 길 잃은 '베스트 드라이버' 한명수는 캠핑을 하자고 제안했다. 모두 동의했다. 아직 고생을 덜한 걸까? 로저는 그 날의 기억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예상 못한 노숙이었지만, 바람이 안 불어 따뜻하게 밤을 보냈어. 자유롭고 야생에 있는 기분을 만끽했다니까! 동료, 불, 소박한 음식과 술, 우리의 철마(차), 나일론으로 된 집(텐트), 그리고 밤 하늘의 수많은 별.. 뭐가 더 필요해?"
천산대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능선 ⓒ로저 셰퍼드
길가에서 캠핑을 한 다섯 남자는 다음날 오전 5시 30분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 번 희귀한 풍경이 벌어졌다. 북한 남자 넷과 저 멀리 뉴질랜드에서 온 로저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남한이 제작한 북한 지도를 펼쳤다.
"어디로 갈까?"
"글쎄.."
"지도에 왜 길이 자세히 표시 안 돼 있지?"
"남조선에서 만들었잖아!"
"답답하네.."
황철영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로저, 당신 남조선 백두대간 종주했다며! 그럼 산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녀! 그냥 당신이 앞장 서. 그럼 우리가 따를게."
결국 '남조선 산 좀 다녔다'는 로저가 나섰다. 황철영과 북한 쪽 안내원 김성민이 그의 뒤를 따랐다. 조선-뉴질랜드친선협회에서 일하는 황승철과 한명수는 현장에 남기로 했다.
로저는 자신의 산악인 감을 살려 방향을 잡고 걸었다. 다행히 그 감각이 배신하지 않았다. 몇 시간을 헤맨 끝에 산길을 찾았다. 이젠 길을 따라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 천산대봉 정상에 닿을 듯했다. 하지만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정상까지는 산길을 따라 약 두 시간을 더 걸어야 했다.
"고생해서 겨우 올라갔는데, 정말 실망했어.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 산에 운무가 잔뜩 끼었거든. 시원하게 펼쳐진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 무거운 장비를 모두 챙겨 갔는데.. 내가 원하는 풍경이 아니더라고."
대신 로저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분명한 거대한 소나무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제는 산에서 내려가야 할 시간. 로저 일행은 서둘렀다.
어느새 흐른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굵은 소나기여서 속옷까지 모두 젖었다. '북한 인민' 황승철과 김성민은 웃통을 벗은 채 걷기도 했다. 그들의 모습이 자유롭게 보였다. 등산 시작부터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비에 젖은 황철영, 로저 셰퍼드, 김성민 ⓒ로저 셰퍼드
온몸이 젖은 채 돌아왔더니, 한명수와 황승철은 따뜻한 미역국을 끓여 놓았다. 소주도 한 병 땄다. 뜨거운 국과 술이 들어가자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로저 일행은 여전히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몰랐다. 이럴 때 길은 하나다.
"그냥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갑시다."
누군가의 제안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시 비가 쏟아져 다른 방법은 없었다. 후퇴도 때로는 용기 있는 선택 아닌가.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산길을 달려, 겨우 비바람을 막아줄 숙소를 찾았다.
1박 2일 동안 '남조선이 만든 지도'를 들고 헤맨 다섯 남자는 금방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금방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코 고는 소리가 시작됐다. 범인은 황철영이다. 곧이어 누군가가 잠꼬대를 시작했다. 로저는 속으로 '설마 남조선 지도를 욕하는 건 아니겠지..'하며 어둠 속에서 슬쩍 웃었다.
밤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비바람 소리도 짙어졌다. 귀곡산장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뭔가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거대한 산을 흔드는 비바람 소리에 로저는 귀와 마음을 맡겼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