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도 바울을 버리고 예수 믿는 자>의 줄거리 :
예수님 버리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 종교가 감행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은 모든 기독 종교인들이 행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랑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버리고 예수 믿는 자
(디모데후서 1:15~18)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의 중심에는 사도 바울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버리고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지금의 튀르키예가 속한 소아시아 반도 서쪽을 가리킵니다. 에게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의 주요 행정구역의 한 곳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모두 이 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지역의 중앙쯤에 있는 에베소에서 무려 3년이나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이를 계기로 에베소 주변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3년이나 함께 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음을 언급합니다. 디모데후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버렸다는 것은 실제로 튀르키예 지역의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순교가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나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찾아와 소식을 전하고 시중을 들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통해 아시아 사람들이 로마에 방문하기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찾아온 아시아 사람 중에 아무도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가를 제외하고는 오네시보로가 유일하게 사도 바울을 방문한 에베소 출신자였는데 디모데후서가 기록되던 시점에는 오네시보로 또한 에베소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디모데후서가 기록된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순교가 확실시되던 상황이 디모데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오히려 디모데가 자기처럼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하게 되더라도 기꺼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7~8절을 보면 그러한 느낌이 두드러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박해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며, 박해를 당하면서도 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극도로 절제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피하거나 도망치라고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디모데는 물론이고 디모데후서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박해나 순교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내용의 말씀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도 바울을 버린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거명됩니다. 이들은 디모데도 잘 알고 있었던 에베소 사람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이들이 등 돌린 사건은 사도 바울과 디모데 모두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디모데후서 4장 19절을 보면 오네시보로에 대한 언급이 다시 한 번 나타나는데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의 교인들이 모일 때는 몇몇 가정에 모였을 것입니다. 오네시보로 또한 자기의 집을 형제들이 모이는 장소로 제공하는 가정 교회를 이루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을 잘 섬기고 도왔던 사람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주의 재림을 매우 가까운 일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사람이 죽는 날이 곧 주의 재림의 날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죽음은 곧 시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기에 만약 오늘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맞이할 때 1초도 흐르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과 연관하여 사도 바울 또한 순교가 임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가깝게 느꼈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임할 때 오네시보로에게 큰 긍휼과 자비를 베푸실 것을 바란다는 간구를 합니다.
다만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 출신의 교인들이 자신을 버린 사건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거짓 믿음과 사도 바울을 버리는 일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을 버린 것이 믿음을 버림과 동일하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버렸지만 사도 바울로부터 들은 십자가 복음은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정말 잘 받아들였다면 그 증거로 어떤 생활 현장에서든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시아 출신 사람이더라도 로마에 왔다면 로마라는 생활 현장에 대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몸은 아시아에 있든 로마에 있든 마음은 하늘로 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인 박해의 진원지로 가장 혹독하고 노골적인 박해가 시작되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우두머리 격으로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고 있었다면 이와 같은 박해 현장에서도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들은 로마를 방문하고서도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에게 인사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그 먼 아시아에서 출발하여 그리스 반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나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왔으면서 사도 바울을 보지도 않은 채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불모지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이 갇힌 로마까지 오고서도 만나기를 그만두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이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 이유는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지 못한 결과로 보았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다면 사도 바울을 만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본문을 보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으나 이러한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디모데에게도 이러한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네시보로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사도 바울을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부끄러움이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거부반응입니다. ‘내가 이렇게 비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드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감옥에 갇히고 순교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상황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에 로마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 바울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4장 10절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데마는 골로새서 4장 14절이나 빌레몬서 1장 24절 등에서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이 서신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 되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1차 투옥은 61~63년까지 이루어졌고 디모데후서가 기록된 2차 투옥은 67년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3~4년 사이에 놀랄만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1차 옥중 서신에 보면 사도 바울은 데마를 단순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동역자로까지 여겼던 데마가 2차 투옥 시점에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는 표현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사도 바울의 곁에는 오직 누가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부겔로와 허모게네나 데마처럼 사도 바울을 떠나갑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사도 바울의 언급대로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함이란 곧 세상에 대한 십자가 죽음을 중단하였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한 상태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 죽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대신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집사람과 함께 여목사님 부부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십자가 생활화가 인생의 답이자 모든 영적 문제의 답이라 믿으시며, 십자가 생활화에 매진하기 위해 애를 쓰는 분이셨습니다. 남편분도 목사님의 노력에 공감하며 같이 기도하며 목회를 돕고 계셨습니다. 제가 이분들과 말씀을 나누는 중에 문득 왜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한창 대화하는 중에 단도직입적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제 질문이 예상 밖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는 단정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목사님께서는 십자가 생활화의 궁극적 목적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또한 그 내용대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목사라면 십자가 생활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답이 나오는데 1초도 걸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시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자 합니다. 다만 이것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의 한 방편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형태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내 방식 대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으로 살면 더 잘살 수 있으리라는 바람이 존재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이비로 규정된 교단 중에도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곳이 있습니다. 그 사이비 교단에 속한 사람들의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의욕은 누구도 못 당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늘과의 연결은 끊겨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간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마에 대해 언급할 때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막연한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을 생각할 때 나를 먼저 볼 수 있으면 됩니다. 내 몸을 보면 몸 때문에 시작된 관계들이 보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고 교인들이 있고 동창들이 있고 제가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처럼 몸을 중심으로 일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관계가 형성됩니다. 막연하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이나 아프리카의 일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관계의 집합체가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십자가 생활화가 중단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아도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붙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마음대로 세상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십자가 생활화 또한 내 능력이 죽은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이 켜져서 이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의 목적은 결코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뒤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통해 역사하시고 살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아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데마의 전철을 밟는 이유는 결국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사도 바울을 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였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중단하게 되었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 바울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도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비롯한 자들은 사도 바울을 피하고 버리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에서는 하늘보다 이 세상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데마 같은 경우에는 사도 바울이 영향력 있는 선생이자 전도자로서 사역할 때는 동역자로 불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세상을 사랑함이었고 결국 사도 바울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 사랑이 십자가 생활화를 놓게 만들었고, 십자가 생활화의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을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는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저를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저를 버릴 때는 십자가 생활화도 버리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기에 십자가 생활화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을 버림과 복음을 버리는 것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교인들 중에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종교인들의 고질병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말 잘하는 목사를 찾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됩니다. 날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사도 바울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 조언하는 사도 바울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사도 바울을 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모습을 보고, 다른 선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도 바울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 또한 그중에 속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누가 하나님에 대해 말을 잘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신앙생활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마음을 보내는 일에 대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친해지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에 대해 말 잘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동안에는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거나 맘에 안 드는 점이 생기면 다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제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야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저에게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면 제가 십자가 생활화를 버리지 않는 한 저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이야기하는 저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저를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해가 임하자 이들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자 사도 바울을 떠납니다. 사도 바울의 2차 투옥은 1차 투옥 때와는 상황이 사뭇 달랐습니다. 풀려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1차 투옥된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소동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정부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기에 여전히 사도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도 바울의 권세가 여전하게 여겨졌기에 데마 같은 자들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2차 투옥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는 노골적이었고 사도 바울의 순교가 확실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역자로 여기던 데마조차 사도 바울을 떠나버립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의 상황을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도 바울의 서신은 십자가 생활화로 귀결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실제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 생활화와는 무관한 수많은 학자들이 2000년 역사 동안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해석하고 연구해왔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어불성설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 들었다면 십자가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십자가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로 산 이야기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러한 삶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부겔로와 허모게네나 데마처럼 사도 바울을 버리게 됩니다.
지금도 사도 바울을 버리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생활화가 진리이기에 우리도 그 십자가 생활화를 받아들여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로 기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버리듯이 십자가 복음방송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십자가 생활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각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 여러분을 버리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결국 십자가 생활화를 버리게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 했던 자들이 유대 종교라면, 사도 바울 없이 예수님을 믿으려는 자들이 현재의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친 기독교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지는 사도 바울에 대한 언급은 다 거짓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십자가로 살지 않으면서 아무리 로마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린도전후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디모데전후서에 대해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말은 장삿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목사님들 중에도 정작 십자가 생활화에는 무관심하면서 오직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말씀만 필요한 대로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만 따로 설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데마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데마는 사도 바울이 동역자라고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마는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했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을 사랑해서 사도 바울을 떠납니다.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도 바울을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사는 여러분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을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십자가 생활화의 화신이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버린다는 의미가 이렇게 연쇄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십자가 생활화의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목숨을 다한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버리는 사람들의 대열에 잠깐이라도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