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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타락은 종교를 떠남이 아닌 택함이다>의 줄거리 :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이 절대로 다시금 구원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락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만 보자면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하신 경고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이름을 말하는 종교를 버리고 떠나면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마주하는 대신에 종교로 들어감이 타락이라는 말씀입니다.
타락은 종교를 떠남이 아닌 택함이다
(히브리서 5:11~6:8)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5장 11~14절까지는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이 말씀을 받아서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유의할 부분은 4~6절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을 ‘타락은 종교를 떠남이 아닌 택함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종교를 버리는 것이 타락이 아니라 종교를 택하는 것이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을 나누기 전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제가 종교나 기독교 종교에 대해 특별히 앙심을 품을 계기가 있었기에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종교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종합해 보자면 종교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구원받을 수 없는 타락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저의 사견이 아니라 본문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기독교 종교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고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를 찾아야만 합니다. 이 시대에 앞서서 깨달은 바 되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모든 신앙인에게는 운명과 같은 하늘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 현장에서 진정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되찾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되찾는다는 것은 16세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다시 개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게 해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주어진 생활 현장 속에서 충실한 십자가 생활화를 함으로써 전체이자 하나뿐인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교회가 찾아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구원받지 못할 선민의 타락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선민이란 겉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고 천국의 실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선민들이 구원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자면 그 이유는 종교를 택함이고 종교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이 된 상태에서 돌이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상황에 따라 그리스도인 됨을 지키지 못하고 유대 종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에는 종교라는 말은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의 내용에서 종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믿던 그리스도는 지금과 같은 종교의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종교에서 유대 종교로 되돌아가는 형태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배교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고 이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조직이나 교리나 이론 혹은 종교의식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 전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던 사람들이 박해 등의 이유로 종교를 택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구원받을 수 없는 타락이라고 규정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예수님을 붙잡던 삶을 포기하고 종교를 택했을 때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게 됩니다.
예수님 믿음에 대한 핵심은 생활 현장에서 예수님과의 동일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관계된 영적 사실들을 현실로 삼는 것입니다. 영적 사실들을 현실로 삼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척 중요한 내용이기에 다시 한번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마치 출생의 비밀과도 같습니다. 알고 보니 재벌가의 3세임이 밝혀졌다면 어떨까요? 갑자기 삶에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집도 바뀌고 차도 바뀌고 사회적 시선도 바뀌고 직급도 바뀌고 수입도 바뀌고 돈 씀씀이도 바뀔 것입니다. ‘이게 꿈일까? 현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이와 닮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재벌 3세도 대단한데 조물주의 2세가 된 셈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변화가 생활 현장에서 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현실이 된다는 것은 조물주의 2세다운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서부터 떨어져 나가 타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영적 사실들을 현실로 삼지 않고, 종교의 조직이나 교리 혹은 의식에 의존하기 시작한다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게 됩니다. 종교로 돌아가는 것이 왜 타락이고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에 대해서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5장 1~10절을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으로 언급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위대함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7장 1절부터 10장 18절까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5장 11절부터 6장 전체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의 중간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에 빠지는 일이 무엇인지가 언급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을 중단하고 유대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을 타락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종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기독교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뉩니다. 예배당 조직의 기독교 종교와 성당 조직의 기독교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러한 조직으로서의 종교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생활 현장 속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로마의 박해가 심해졌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 종교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한편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애초에 기독교 종교에 속해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를 감동시키신 성령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주후 67~7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게 된 당시 사람들은 실제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기를 포기하고 종교로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상황이 반대입니다. 우리는 본래 속해있던 기독교 종교를 버리고 실제 생활 현장으로 돌아가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히브리서 기자를 감동시키신 의도에 맞추어서 우리가 취해야 될 행동입니다.
히브리서가 쓰인 당시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을 버렸습니다. 이들은 유대 종교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미 속해 있는 기독교 종교로부터 탈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종교를 버리고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적 사실들을 실제 현실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영적 사실과 생활 현장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단계를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초등학생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초등학교에서 배우던 모든 과정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배운 모든 것이 잊히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 배운 구구단은 중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도 쓰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서도 쓰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신앙의 첫 번째 단계이지만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도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보를 버리라 함은 초보 단계를 완전히 내 것으로 삼고 그 이상의 진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1절 하반절에서 2절을 보면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생활 속에서 영적 사실들을 붙잡는 십자가 생활화를 터로 삼았다면 그 위에서 발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면 종교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성의 주인이심을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행실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존재감에 눌려서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해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사장님께 잘 보이려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이러한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또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 언급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의 세례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세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세례는 정결 예식입니다. 겉을 깨끗하게 함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세례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없이 죽은 행실을 하던 내가 죽고 새로 태어남을 상징합니다. 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의 안수는 주된 취지가 아론이 후손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주는 것처럼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무엇인가를 승계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안수란 하늘이 인간을 접촉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안수를 받고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에게 안수를 받았지만 여기에는 하늘이 접촉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막연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심판 또한 유대 종교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심판이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이 이유입니다.
이처럼 유대 종교인들은 가장 기본적이고 초보적인 차이를 알 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엄연한 차이를 인정하던 사람들조차 이전의 유대 종교로 돌아가려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선택을 하는 자들에게 다시는 구원이 주어질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4~6절을 보면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 빛을 받았다는 것은 그동안 전혀 몰랐던 예수님과 연관되어 드러나는 영적 사실들에 대한 비밀들을 알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기존에는 직접 성전에 가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림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내 마음이 직접 하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관계에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또한 천국이 지금부터 나의 처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까지 몰랐던 이러한 영적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됨으로써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렇게 몰랐던 영적 사실들이 드러난 상태를 한 번 빛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를 내 것으로 삼게 되었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늘의 은사는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십자가 사건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란 예수님께서 선하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이러한 영적 사실들을 실제로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영적 사실을 맛보고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영적 사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은 너무나 감격스럽고 좋습니다. 그러나 내게 감격을 안겨준 영적 사실들을 생활 속으로 가지고 나가 현실로 삼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의 힘이 강력하게 내 안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종교로 타락하는 과정을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까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현실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 현장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이 현실이 됩니다. 내 말과 행동은 성령님에 의해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이 됩니다. 이것은 모두 내게 감격을 안겨준 영적 사실들입니다.
다만 이러한 영적 사실들은 생활 현장에서도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박해를 비롯한 몸으로 접하는 일들로 인해 좌절합니다. 그럼에도 영적 사실들은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현실로 삼는 대신 다른 방편을 마련합니다. 영적 사실들을 생활 현장에서 현실로 만드는 대신에 이론으로 체계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지식체계로써 교리를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종교이고 종교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종교로 돌아가게 되면 몇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영적 사실들을 현실로 삼지 않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만을 현실로 삼아도 영적 사실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영적 사실들을 이론과 교리의 세계 속에 묶어 둡니다. 그럴 때 영적 사실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실들만을 현실로 삼고 살던 이전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이 세상에서 현실로 느끼는 것들 중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이론 체계에 묶어둔 영적 사실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서 더 잘 이룰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종교로 타락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구원은 절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종교는 절대로 하나님을 현실로 만나게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영적 사실을 현실로 삼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종교는 필요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직접 하나님을 현실로 삼게 되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악몽입니다.
종교는 이론과 교리에 하나님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종교에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실들을 안겨주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현실로 삼지 못하게 합니다. 이로부터 종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을 현실로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영적 사실들을 생활 현장에서 현실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과 비교하자면 종교는 구원을 막아버리는 영적 타락의 장소입니다. 차라리 종교인이 아니라면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받아들일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종교를 받아들이면 이론 안에 갇힌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을 가졌다고 착각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가졌다고 믿기에 종교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만약 히브리서가 기록된 67년부터 70년 이전까지의 시대에 이미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종교의 형태를 갖추었다면 어땠을까요?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삼는 대신 지금과 같은 예배당과 성당 중심의 종교를 이루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유대 종교로 넘어가는 사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313년에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합니다. 이 시대가 되면 유대교로 넘어가려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넘어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종교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초보 단계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독교 종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들 또한 기독교 종교인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만 언급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를 마친 후에도 종교 이야기는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실들에 얽혀있는 진리를 이야기했을 때 종교를 빠져나올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무섭습니다. 영적인 사실들을 생활 속에서 현실로 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고, 천국은 내 마음이 지금 올라가서 거해야 될 처소라는 영적 사실들을 내 삶의 환경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돈 없고, 건강 안 좋고, 자녀들이 문제고, 남편이 별 볼 일 없고, 아내는 바가지 긁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를 둘러싸고 계심이 현실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 천국에 가야 한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이 영적인 사실들을 현실로 삼지 않고 이론 체계로 묶습니다. 종교인이 되어야 이론 체계에 묶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을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생활 현장에서는 여전히 이 세상 사실들이 현실인 채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인이 되었기에 이론적으로 제공되는 하나님과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고 구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인이 타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 없는 사람보다 더 심각한 타락이 종교인에게서 일어납니다.
히브리서에서 거듭 이야기되고 있는 경고의 취지를 굳건히 붙잡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사실들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권자이시라는 사실들을 내 생활 속에서 현실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도 훼손됨 없이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이기에 뼈와 살처럼 되어버린 종교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깨우침을 주시고 실제로 이끌어 주셨는지 말로 다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러한 은총을 받은 자들로서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을 가장 우선적인 현실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는 일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