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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믿음과 그 이름 믿음의 차이>의 줄거리 :
예수님을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만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고 믿지 않음과 예수님 이름을 부르면서 믿기까지 하는 것은 정말 작은 차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의 차이는 실제로 엄청납니다.
예수님 믿음과 그 이름 믿음의 차이
(요한1서 5:13~21)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요한일서의 모든 말씀의 핵심이자 사도 요한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도 등장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이름을 믿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으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그 이름을 실제로 믿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구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고 믿지 않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되 그 이름을 믿는 것에는 마음에서 생긴 소원의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그 이름을 부를 때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서 생기는 소원이 다 아버지의 뜻이 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속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15절을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느니라’라는 말에는 사도 요한의 체험이 담겨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인간적으로 우리에 비해 특별히 잘난 점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을 뿐인데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소원과 바람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서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는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구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 또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막연한 바람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미 주기도를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이 기도에는 내가 생각하고 뜻하는 바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생기는 이런 담대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시작하며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독립된 인격을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말씀’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와 연관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생각이 밖으로 나온 것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란 하나님의 생각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참조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피조의 세계에 빛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여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안에 있던 생각이 예수님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생각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스스로는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이로부터 아버지의 생각이 온전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만 보고 계시면서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통째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빛을 만드시겠다고 생각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생각을 받아들이셨고, 그렇게 받아들인 생각은 성령을 통하여 실제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창조 사역은 바로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일체되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몸과 관련되어 진행되는 삶의 영역에 대해 아버지의 뜻이 전달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에게는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있고 부모도 있고 형제자매도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는 또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영역에는 언제나 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내 삶의 영역에 대해서 아버지가 갖고 계신 생각을 다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가 내 삶에 대해 생각하신 것을 입 밖으로 내놓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 생각을 모두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생각을 제일 좋아하기에 빼앗아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버지 생각을 받아들이실 때, 내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몸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내 삶에 관한 아버지의 생각은 전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내 삶에 대해서는 나의 지정의에 아버지의 뜻이 전달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 삶을 보시며 생각을 갖고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내 마음은 그러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 안으로 들어온 내 삶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이 나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 안으로 내려와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삼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위로부터 난 자’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우리의 지정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소원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앞서 살펴본 5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라고 하였고, 5절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과는 내용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사도 요한은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던 것일까요?
이러한 차이점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이름의 왕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안에 담고 있는 이름들이 다르고 그 이름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존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의식에 이름을 떠올림과 함께 기억 속에 저장된 실제 자동차라는 대상이 떠오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내부구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사물의 이름, 사람의 이름을 비롯한 수많은 이름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마다 기억 속에는 나의 주관적인 판단과 느낌으로 채색되고 옷 입혀진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식에 그 이름을 떠올릴 때 그 이름에 해당하는 존재가 같이 불려 나오면서 내 마음은 그 존재에 반응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나에게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원수가 있습니다. 평소에 홍길동의 이름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홍길동의 이름을 의식하면 이로부터 나의 주관적인 평가가 담긴 홍길동이라는 존재가 기억 속에서 불려 나오게 됩니다. 내 기억에서 불려 나온 홍길동은 너무나 싫고 밉고 짜증나는 사람입니다. 나의 주관적 느낌과 판단으로 홍길동이라는 사람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상에 마음이 가 닿게 되면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똑같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에 대해 홍길동의 애인은 생각하는 바가 전혀 다를 것입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의식에서 떠올릴 때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과 느낌 속에서 따듯한 사람, 만나면 즐거운 사람, 보고 싶은 사람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의식에 떠오름과 동시에 기억 속에 담겨있던 주관적 판단이 포함된 인물이 불려 나옵니다. 똑같은 홍길동이라도 원수에게는 싫은 사람이지만 애인에게는 기분이 좋아지고 보고 싶은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들어있고 그 이름에 해당하는 존재가 수없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들은 전부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과 느낌으로 그림 그려져 있고 옷 입혀져 있고 채색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객관적인 관점에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모릅니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자동차라도 사람마다 갖는 의미가 다릅니다.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과 느낌으로 채색해 놓은 자동차라는 대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동차와 연관된 생각은 다 틀린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내려다보시며 나와 자동차와의 관계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림 그려놓은 관계가 아니라면 전부 잘못된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기억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서운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전부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과 느낌을 가지고 예수님을 옷 입히고 있습니다. 불상 앞에 절하던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불상 자리에 예수님을 놓을 뿐입니다. 남자에 대해 나쁜 경험을 갖고 있는 여성이라면 예수님을 남자 자리에 놓고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늘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돈 벌게 해주시는 물주의 자리에 놓습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천태만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 점을 고쳐주고자 요한일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예수님을 가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영지주의자들,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들이 언급되는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예수상을 기억 속에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구조란 예수님의 이름을 의식에서 떠올림으로써, 그 이름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기억에서 불러내고 그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불어넣음으로써 잘못된 예수님을 기억하게 한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며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 우리가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더라도 객관적으로 상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사람을 주관적인 판단의 기준을 갖고 그림을 그리며 옷을 입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옷을 입힌 그 사람의 모습대로 마음은 반응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괜찮다고 생각하면 마음에서 좋아함이 생기고, 이 사람은 별로라고 생각하면 마음에서 꺼림이 생깁니다. 실제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눈에 안 보일 때라도 이름을 떠올림으로써 주관적인 생각으로 만든 그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나는 모든 반응이 오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 하나님이 보시는 객관적인 반응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에 착안하여 이러한 상황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수많은 이름이 기억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 혹은 책을 통해 배운 지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들은 이름으로 정의되고 그 대상들은 기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름이 의식에 떠오르면 기억 속에 담겨있는 존재가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리면 대부분은 마지막으로 만날 때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이 떠오르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첫인상을 기억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동네 교회에서 집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집사람에게는 동생이 있는데 처음 본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지금은 그 처남도 환갑이 넘었습니다. 청주에서 제일 큰 교회에서 수석 장로님으로 치과 병원 원장입니다. 그런데 저는 처남의 이름을 떠올리면 처음 봤을 때 중학생 꼬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한 기억을 지우려고 의도적으로 애를 쓸 정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불려 나오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류가 많은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기억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 마음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의미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로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의식에 떠올렸을 때 그 이름이 불러내는 기억 속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이란 그분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 또한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십자가 생활화가 반드시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내 기억 속에 저장되는 예수님은 사도들이 전한 증언 속에 계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와 하나 되셔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내게서 다시 재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속에 너무나 많은 이름들이 기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들에 의해서 불려 나오는 존재들에게 잠깐이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자동차라는 이름을 잠깐 떠올릴 때 ‘이런 차는 참 좋겠다. 이런 차는 얼마나 비쌀까?’라고 하며 마음이 잠깐이라도 반응했다면 그 순간에는 자동차의 이름을 믿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란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자녀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 자녀의 이름이 불러내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녀의 객관적인 모습이 아닌 착각입니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부모가 자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에서는 여전히 자녀에 대한 확고한 상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마음이 붙으면 바람이 생깁니다. 자녀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고, 저렇게 했으면 좋겠고, 취직을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녀의 이름을 믿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름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알면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지 다른 이름을 믿는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떠올릴 때 그 이름이 불러내는 존재에 마음을 붙이게 된다면 그것에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것이 내게 어떤 좋음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에게 마음을 붙이게 됩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의식에 떠오를 때마다 그 이름이 불러내는 존재에 대해 싫든 좋든 마음이 가 닿아서 반응을 일으킵니다. 바늘 끝만 한 구멍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마음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몰입할 영적 기운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16절에서 이러한 상태를 멸망에 이르지 않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로 기억합니다. 계속해서 마음속에 기억된 이름이 의식에 떠오를 때마다 마음을 붙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나님을 당신으로 바라보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아버지의 존재감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좋음으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상태는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름을 통해 믿음이 온전하게 이루어져야 구원과 생명이 주어집니다. 내 속에 기억되는 모든 이름이 의식의 전면에 나올 때마다 그 이름은 기억 속에서 존재를 불러냅니다. 그것들에게 다 반응하는 동안에는 온전한 믿음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좋은 쪽으로 반응하든 나쁜 쪽으로 반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존재에게 마음을 드리지 않고 다른 이름들이 불러내는 존재에 마음이 가 닿고 기운이 다 빠집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망에 이를 죄는 아니나 죄를 짓고 있음에는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망에 이를 죄의 상태는 예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으로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완전히 끊어진 상태의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 생활화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개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의 존재를 기억하면서 다른 이름들에 의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의식 속에 기억되고 있는 수많은 이름의 존재들에 대해서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붙임으로써 믿고 있습니까?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이름이 의식에 떠올랐을 때 그 이름이 불러내는 기억 속의 존재에 마음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이해할 때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합니다. 거짓에 파묻힌 예수님을 버리고 제자들의 증언 속에 담겨있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대상은 자동차의 이름일 수도 있고 배우자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반응하는 대상이 내가 믿는 이름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문제인 이유는 대상이 잘못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시는 대로 나도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면 부부가 60년을 살았더라도 단 한 번도 진짜 아내의 모습, 진짜 남편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채 끝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야 내가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진실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적절하고 합당하고 알맞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나타나는 반응 또한 전부 오류입니다. 내 속의 의식이 이름으로 불러내는 기억 속의 존재는 모두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에 의해 채색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객관적 존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만든 존재이기에 그것에 대한 반응 또한 다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르고 멋지게 살고 싶으시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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