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모금
요즘 한 노인을 돌보고 있다. 고령의 말기 암 환자다.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어간다. 지난주에 걷던 거리를 이번 주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어제 삼키던 음식을 오늘은 몇 숟가락 겨우 넘긴다. 혼자 몸을 일으키고, 씻고, 대소변을 가리는 그 모든 당연했던 일들을 이제는 완전히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은 또렷하시다. 말씀도 잘하고 사리판단도 분명하다. 지나온 삶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또박또박 재생한다. 몸은 침상에 누워 있으나 이야기 속에서는 여전히 걷고, 큰소리치고, 좌중을 압도한다. 그러다가 문득 의아한 듯 묻는다. 이따금, 아니 하루에도 서너 번은 되풀이되는 일이다.
“아니, 왜 이런 병이 다 들었을까잉?”
자신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무슨 이런 일이 있느냐는 듯 심히 황당하고 못마땅한 표정이다. 어정쩡하게 굳어버린 내 궁색한 틈으로 그새 다음 말이 이어진다.
“존일에 어서 죽어야지. 아, 요렇게 살아서 뭐할 거이냐잉.”
노인의 눈빛 속에 당혹과 분노, 수치와 낭패, 미련과 체념, 염치와 송구 따위가 한꺼번에 엉켜 든다. 평생을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살았건만 이제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처지라니. 몸이 감옥이 되어버린 것인지, 몸에 삶을 억류당한 것인지. 노인의 목소리가 난파선처럼 뒤틀린다. 말은 허공을 표류하다 이내 침묵에 잠긴다.
그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은 뜻밖에도 갈증이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길고 건조한 한숨 끝에 노인이 마른 입술을 옴싹거린다.
“나 물 한 모금….”
나 또한 시소를 탄다. ‘어서 죽어야지’와 ‘물 한 모금’ 사이.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과 아직 무언가를 원하는 몸, 당연하게 가졌던 것과 더는 가질 수 없는 것, 가장 원하는 것과 가장 피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자꾸만 균형을 잃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삶의 끝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오히려 그 두 마음을 함께 품게 되는지도 모른다. 바짝 붙어 앉아 서로 덜덜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있는 것인지도.
한 생의 마감은 그렇게 깔끔하거나 단정하거나 매끄럽지 않다. 그 모든 것을 생략하고 ‘한순간’에 맞이하는 평온한 해탈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갑자기, 고통 없이, 잠자는 듯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때도 있으니까.
그러나, 보통의 현실은 하루가 삼 년이다. 더디고 거칠고 막막한 항해가 있을 뿐 홀연한 죽음 같은 건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아늑한 착각일 뿐 대부분의 죽음은 뼈마디가 마르고, 목구멍이 타들어 가며, 마지막 숨 한 조각까지 끌어모아야 하는 지독히 끈질긴 몸의 노동이다.
노인의 마른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고, 작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지금 노인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병마의 고통보다 한평생 구축해 온 자신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거대한 상실감일 것이다. 온전히 ‘나’를 살아내는 몸이었으나 더는 ‘나’를 따르지 않는 몸. 배반한 몸, 허락도 없이 침범당한 몸, 통증과 수치와 무력으로 자존을 잃어버린 몸, 상실당한 몸.
삶은 결국 몸의 일이다. 먹고 자고 걷고 만지는 그 행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우주를 세운다. 정신이 아무리 찬란하게 과거를 누벼도, 신체라는 기둥이 허하고 약해지면 세계는 이내 비틀거리게 마련이다. 노인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탱하고 통제해 왔다는 삶의 주권일 것이다. 내 뜻대로 움직여주던 몸이 어느 날 철저한 타자가 되어 나를 옥죄는 굴레가 될 때, 인간이 느끼는 그 황망한 무력감을 어찌해야 할까. 그 고통, 그 슬픔을.
창가 너머로 사위어가는 햇살이 노인의 메마른 다리 위로 내려앉는다. 나는 비워진 물컵을 거두어 잡는다. 노인의 바다는 이토록 거칠고, 막막하며,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갈증으로 여울진 곳이다. 언젠가 나 역시 그 아득한 시소 위에 올라 몸을 잃어가며 삶과 죽음 사이의 파도를 마주하게 되리라.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노인이 마침내 그 바다를 무사히 건너갈 때까지, 작은 온기를 보태주는 것뿐이다. 곁에서 가만히 손잡아 주는 일뿐.
첫댓글 지난 합평회 내용을 반영하여 글을 수정했습니다.
제목을 <노인의 바다>에서 <물 한 모금>으로 바꾸고, 문장도 약간 손봤습니다.
여전히 미흡한 글이지만, 이를 동력 삼아 다음 글로 나아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