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활 승리를 줍는 매복 전략>의 줄거리 :
선민은 십자가를 의지하여 고래 힘줄 같은 내 죄와 싸워 날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쟁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생활에 관한 한 선민은 승리를 쟁취하지 않습니다. 생활 승리는 줍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 승리를 줍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매복 전략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를 맞닥뜨리게 될 때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계획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매복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로 작동하게 하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매복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협공하는 법을 알아봅니다.
생활 승리를 줍는 매복 전략
(여호수아 8:1~35)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3.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여 매복하되 그 성읍에서 너무 멀리하지 말고 다 스스로 준비하라
5. 나와 나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올 것이라 그리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6. 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추격하며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거든
7.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
8. 너희가 그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였느니라 하고
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매복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쪽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에서 잤더라
본문 중심으로 <생활 승리를 줍는 매복 전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생활 속 승리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줍는 것입니다. 승리를 주우려면 매복 전략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내 속에서 끊임없이 활성화되고 있는 고래 힘줄 같은 죄악과 싸워 하나님을 쟁취해야 합니다. 죄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빗나가게 하는 죄의 체질과 싸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마주하여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싸워서 쟁취해야 할 대상입니다. 끊임없이 내 죄가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생활 속에서의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에 대한 승리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줍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매복 전략을 가르쳐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삶에서 아이 성의 전투를 문자 그대로 행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 난리가 났습니다만,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승리는 이러한 전쟁을 통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 성의 매복 전략은 상징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 내야 할 전략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통해서는 나와 하나님과 제3의 대상이 언제나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고정값이고, 제3의 대상은 계속 바뀌는 변수입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삼각구도 안에서 제3의 대상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확대경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최우선적이고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3의 대상이 나타나는 삼각구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한편, 아이 성은 삼각구도 전체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삼만 명의 군인을 차출합니다. 그중에서 전쟁 전날 밤에 오천 명을 미리 보내 매복시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에서 북서쪽 18킬로미터 지점입니다. 매복이 이루어진 곳은 아이 성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벧엘과 아이 성 사이의 골짜기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나머지 이만 오천 명을 이끌고 아이 성으로 진격했고 패배를 가장하여 싸우지도 않고 후퇴하여 도망합니다. 싸우다가 도망한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싸우지도 않고 도망했으니 계략임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아이 성 전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아이 성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들은 여호수아의 계략에 그대로 넘어갑니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생활 속에서 삼각구도로 이어지는 승리를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생활 속에서 승리를 주울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 대답은 바로 매복 전략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매복 전략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매사에 매복 전략을 수행한다는 의식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매복은 대단한 전략이 아닙니다. 인류가 전쟁을 하는 모든 곳에서 활용되는 보편적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이 성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전략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상징성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끄실 때 항상 사용하시는 전략이 매복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문제나 걱정거리가 있고 때로는 나를 해치려고 하는 대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 평강이 깨지는 상황이 생겼을 때는 매복 전략으로 승리를 주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 성 전투를 통해 이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매복시켜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를 맞닥뜨립니다. 이러한 모든 대상들 배후에는 매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전지전능하시며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입니다. 아버지의 계획이 문제의 배후에 매복돼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십니다. 내 생활 속에서 아버지의 계획이 매복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내가 무슨 문제를 만나든, 어떤 대적이 나를 괴롭히든, 어떤 걱정거리가 등장하든 우리가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전능하신 창조주로 살아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면서 내가 만나는 모든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에 대해 반드시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계획이 매복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매복되어 있다는 것은 그 계획의 전모를 아는 자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나도 모르고 이 세상에 아는 자가 아무도 없지만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 매복된 아버지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는 오히려 반길 대상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보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은 계획을 매복시키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매복 계획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합당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매복 전략이 실행될 때 어떤 내용일지 모릅니다.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당장은 모릅니다.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만나도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는 패턴은 같은 경우가 별로 없고 매번 다르게 나타나기에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에 대해 매복 계획을 갖고 계시고 실행하실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 매복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맞닥뜨리는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 중에 하나님의 계획이 매복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매복한 군인들이 일어나서 아이 성을 점령하듯이 하나님의 매복 전략이 실제로 활성화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협공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운명론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든지 무조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협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선민의 숙명이자 팔자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어떻게 협공을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협공의 첫 번째 단계는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아이 성으로 접근해 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단계가 필요합니다. 문제가 발생하고, 대적이 나를 해치려 하고, 걱정거리가 발생한 상황과 관련하여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이 아이 성에 접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를 싫어하여 마음에서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있음’이 ‘없음’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접근하는 것에는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의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 접근의 반대는 거부하고, 싫어하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그 있음이 없음이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가 없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있음이 객관적 사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있음이 된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를 거부하고 싫어한다는 것은 하나님 주권에 대한 거부입니다. 침 삼키는 순간에도 나를 잊지 않으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발생 자체를 싫어함이란 그 문제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뿌리치는 것이고, 스스로 삶에 대해서 주체가 되었음을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는 꼴입니다. 선민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계획하신다는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려면 아무리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일단 객관적으로 그것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하는 방식이 감사입니다. 그 일 자체는 싫지만 그 일 자체를 있게 하신 아버지의 주권을 향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어쨌든 아버지는 주권적으로 나를 향한 사랑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저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주권을 활용하신 결과가 지금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로 발생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곱씹어서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이 성에 접근하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아이 성으로의 접근은 문제의 있음을 뿌리치거나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십자가 생활화의 첫 단계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가 발생했을 때 그것들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문제를 거부하는 나를 거부하고 부인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 아버지가 전능하신 분으로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나는 무슨 뜻으로 그런 일이 있게 하셨는지 모르는 주제에 그것을 거부하려고 한다.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아버지의 사랑과 주권에서 나온 일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일어난 일인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거부하려고 한다. 진짜 문제는 대적이나 걱정거리가 아니라 바로 나다. 그 모든 것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있음을 믿자.’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적 계획에 의해서 발생한 일들을 싫어하며 삶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죄악 된 체질의 나입니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싫어하는 나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거부하는 나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생활화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 떨어짐이나 머리카락이 자라고 빠짐까지도 다 주관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내게 발생한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를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싫어하여 거부하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군을 끌고 아이 성에 접근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바입니다.
협공의 두 번째 단계는 손대지 않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사랑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뿌리치지 않고 접근했으면 절대로 손대면 안 됩니다.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어난 일들의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되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매복 전략의 작동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내가 해결하려는 태도입니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로 인해서 위협을 느낍니다. 그러면 직접 손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대적에 맞서려 하고, 걱정거리를 제거하려 합니다. 문제를 그대로 놔두고, 나를 해치려는 대적을 묵인하고, 걱정거리를 간과했다가는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면 무엇이든 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위협 때문에 문제에 직접 손을 대고, 대적에 응수하고, 걱정거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선민은 다릅니다.
선민은 절대로 손대지 않습니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가 하나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믿고, 객관적인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감사합니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접근했다면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립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이 거짓 패배하여 도망했던 것처럼, 문제로부터 마음의 등을 돌리고 도망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아이 성 전투의 전략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써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삼각구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는 평생 이 전략을 써먹고 승리를 주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에 접근했으면 내가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위협을 느끼는 마음을 이겨내고 문제를 등집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이 매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매복되어 있음을 믿기에 나는 도망갈 수 있습니다. 도망가서 하는 일은 여리고 성에서 한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과제로 삼는 것입니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 때문에 마음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매복되어 있음을 믿고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와서 내 의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과제로 삼습니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를 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하나님을 겨냥함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을 과제로 삼는 것입니다. 문제에 의해 마음에 위협감이 느껴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해도 위협감은 느껴집니다.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에 의해 느껴지는 위협감이 사라지려면 그것들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버지를 크게 가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여리고 성 사건이 가르쳐주는 삼각구도의 핵심입니다.
선민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는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하되, 그 기준은 눈앞에 나타난 문제나 걱정거리나 대적이 작게 느껴질 때까지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문제에 대해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위협이 느껴지는 문제로부터 부활 승천 우편으로 도망을 갑니다. 절대로 그 문제를 만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군이 등을 돌려 도망하자 그들이 패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문제의 발생 자체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인정하되, 절대로 문제에 손을 대서는 안 되고 ‘나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졌다.’라고 여기며 등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이 성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이 패배자가 되었음을 확인하듯이 그렇게 내가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문제가 위협적이기에 도망갑니다. 책임자로서 용감하고 성실하게 문제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내가 비겁한 패배자가 될 수 없다면 매복된 하나님의 계획이 활성화될 수 없습니다. 도망가서 하는 일은 하나님을 더 많이 갖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문제를 붙잡고 해결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닙니다. 의식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포착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 갖는 것을 마음의 과제로 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 전투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핵심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동안 매복되었던 하나님의 계획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삶에서 수없이 많은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들을 마주해 왔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매복되었다가 작동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매복된 하나님의 계획이 작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을까요? 문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심으로 계획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의 있음을 싫어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게 됩니다. 내가 문제에 접근하려 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매복된 계획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문제에 대한 계획은 포기되고 하나님은 나를 문제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에 대한 계획을 매복하시고 내게 문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의 사랑과 주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매복된 계획은 의미를 잃습니다. 이제 문제는 삶에서 만나는 문제나 대적이나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내가 문제가 된 상태입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스스로 문제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있음이면 안 되고 없음이어야 하고, 대적은 있음이면 안 되고 없음이어야 하고, 걱정거리는 있음이면 안 되고 없음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를 내가 주체로 움직이는 마당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체가 된 삶의 마당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에 삶은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된 위협에 쫓기고 있습니다. 어떡하든지 문제의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대적의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나를 문제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사랑이 가득 담긴 전능하신 계획이 매복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마음이 하늘로 도망가서 땅의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과제로 삼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삶을 문제의 연속으로 만드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포기하고 스스로 패배자임을 자처할 때까지 문제를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를 따르는 이스라엘군은 패배자를 자처해야 했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항상 패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문제에 대해서도 패배자가 되어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성으로 보였기에 여호수아는 처음에 3천 명만을 보내 승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3만 명을 보내면서도 패배자를 자처합니다. 삼천 명 대 삼만 명이라는 것은 그만큼 비중을 높게 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어떤 문제도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크다는 상황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할례받아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제라도 비겁한 패배자가 되어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도망이 끝이 아닙니다. 문제로부터 도망가서 하는 일이란 마음이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많이 갖는 것입니다. 문제의 위협감이 사라질 만큼 아버지를 많이 갖겠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매복된 계획을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전능하심과 사랑하심으로 주권적 계획을 세우시고 문제를 발생시키십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나는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예수님이 잠을 주무시듯이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사랑하시고, 주권자로서 문제가 발생했으면 본래대로라면 나는 전혀 그 문제 때문에 위협을 느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위협을 느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문제 앞에서 비겁한 패배자를 자처하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많이 갖습니다. 주권자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본래대로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 의해서 일어난 문제라면 내게 위협이 안 되는 것이 본래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진 죄악 된 상태였기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제 하늘로 도망가서 하는 일은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전능하신 아버지를 가짐으로써 문제가 위협으로 안 느껴지는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제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문제란 직접 해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를 갖게 하는 계기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기도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오는 위협을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꾸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심정에서 장사가 잘 안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포기하고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탈골 될 때까지 이러한 태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본래대로라면 우리가 그러한 태도로 기도해야 하는 일이란 문제의 해결이 아닌 하늘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쟁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땅에서의 승리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 앞에서 법궤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붙잡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집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도 그저 도망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망하던 상태에서 돌이켜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가 마주한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를 내리십니다. 그때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를 향해서 진격해 들어갑니다. 그럴 때 승리는 줍는 것이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쟁취하면 내 지정의언행은 아버지의 장갑이 됩니다. 그래서 내 생각 속에 아버지의 계획이 전달되고 그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움직이지 않더라도 상황이 정리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오는 계획이 매복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매복된 계획이 활성화되고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접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패배자임을 자인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과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아이 성 전투가 의미하는 바대로 나는 도망가서 하나님을 쟁취합니다. 문제와 대적과 걱정거리로 인한 위협이 마음에서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을 갖고자 기도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심으로 기도하되 내용은 문제 해결이 아닌 하나님을 갖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승리를 주워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땅의 문제에 대해, 대적에 대해, 걱정거리에 대한 승리는 줍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저를 미워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대적들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손가락 하나로도, 글자 하나로도 대적을 향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스스로 대적하고자 하지 않는 동안 대적은 저절로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했을 뿐입니다. 승리는 줍는 것입니다. 생활 속 승리는 줍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빗나가게 하는 죄악과 싸워 쟁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과 내가 고정값으로 관계하는 중에 제3의 대상이 변수로 이어집니다. 이때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시는 매복 전략이 100% 작동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 붙잡고 접근과 도망을 반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