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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손에 그립감 좋은 도구 되기>의 줄거리 :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의 손에 미디안을 넘겨주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미디안을 향한 계획을 기드온을 손에 쥐시고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실시간 지시를 따라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손에 쥐시는 도구로 사용하심을 뜻합니다. 이때 하나님 손이 느끼는 그립감이 중요합니다. 나를 쥐신 손에 이물감이 없이 쾌적감 밀착감 안정감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봅니다.
하나님 손에 그립감 좋은 도구 되기
(사사기 7:9~14)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손에 그립감 좋은 도구 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그립감은 주로 스포츠 용구에 많이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탁구 라켓, 배드민턴 라켓, 테니스 라켓, 골프 클럽 같은 용구들은 손에 쥐는 느낌인 그립감을 강조합니다. 안정감이 있고 쾌적하고 밀착감이 있어야 운동의 효과가 잘 나타나기 때문에 그립감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실시간 지시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시간 지시를 하실 때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내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지시가 내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면 사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손에 쥐시고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머릿속 기억장치 속에 저장되어 있는 습관, 상식, 지식, 경험 등에 대한 기억을 꺼내서 답을 내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억장치 속에 저장된 것을 동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시간 지시를 받아서 살게 되면, 기억장치 속에 저장된 것으로 살던 나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사는 나 사이에는 굉장히 간격이 큽니다. 기억장치 속에 저장된 것으로 살던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살아오던 나를 쥐신다면 그립감이 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나를 도구로 쥐셨을 때 어색함이나 불편함이 없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쥐실 때의 그립감을 조절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좀 특이합니다. 이제 기드온은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의 미디안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기드온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바위 위에 무교병과 염소 새끼로 끓인 국을 붓게 하고 지팡이 끝을 내밀어 불이 붙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여호와의 사자임을 확증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양털만 마르는 표징을 통해서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무찌르실 것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의 마음에는 아직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없애도록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잠행하게 하십니다. 이때 기드온은 우연히 미디안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커다란 보리떡 한 덩어리가 장막을 쳐서 다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보리떡은 기드온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 미디안을 무찌를 것이라는 해몽을 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기드온은 이 이야기를 듣자 두려움 없이 돌아가서 삼백 용사를 거느리고 미디안을 무찌릅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앞서 여러 표징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왜 두려움을 갖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두려움을 없앨 방법을 가르쳐주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이물감이 없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사기 6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한편 본문 9절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공통점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 넘겨주실 때 미디안을 손에 쥐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치시고 압제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손에 쥐심으로써 미디안을 치게 하십니다. 이처럼 두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손에 쥐셨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한편, 차이점도 있습니다. 미디안을 손에 쥐시고 이스라엘을 치실 때는 미디안과 하나님 사이에 인격적인 교감과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을 손에 쥐시고 미디안을 치실 때는 개별적으로 기드온을 만나시고 인격적인 교감과 교제를 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손에 쥐셨을 때는 마치 길거리에서 몽둥이 하나를 줍는 것처럼 미디안을 쥐시고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치신 후에는 몽둥이를 버리십니다. 미디안은 이처럼 용도에 맞게 사용하시고 버리십니다. 반면 기드온을 손에 쥐실 때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인격적으로 교감하십니다. 교감을 통해서 완전히 당신 손에 밀착되고 쾌적하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그립감 있는 도구로 만드십니다.
탁구 선수가 라켓을 새로 사면 코르크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쥐어보며 지극 정성으로 깎습니다. 자기 손에 밀착되고 안정되고 쾌적하게 느껴지는 그립감을 만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의 손에 들린 탁구 라켓과 같았습니다. 한 번 쓰고 버릴 길거리에서 주운 몽둥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손에 쥐시고 가지시려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 기드온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쥐시기에 뭔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을 쥐시고 미디안을 치시려고 하는 데 불편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불편함의 내용이란 기드온의 마음속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려움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세 번씩이나 표징을 보여주셨음에도 미디안을 치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대신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기드온을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가게 하셔서, 미디안 사람들의 꿈과 해몽을 듣게 하십니다. 기드온이나 삼백 용사가 꿈을 꾸었다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바람의 표현일 수 있었기에 신빙성이 적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디안 사람들이 기드온에 의해서 자신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해석하는 것을 듣게 하심으로써 기드온의 두려움을 없애주십니다.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십삼만 오천 명 안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관통해서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드온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을 무찌르시리라는 계획안으로 편안하게 들어가 머물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은 불편함으로 나타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을 무찌르시리라는 사실이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이루시려는 일에 대해서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쥐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쥐실 때의 그립감이 전혀 편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시적으로 쓰고 버리는 몽둥이 같으면 상관없지만 하나님은 여생 동안 이루어질 크고 작은 계획을 세워두셨습니다. 모든 인생의 순간에 나에게 지시하심으로써 내가 그 지시를 따라 움직여 뜻을 이루어 나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름이란 곧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탁구 선수나 테니스 선수의 라켓처럼 그립감이 좋아야만 합니다. 한번 쓰고 버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쥐시기에 불편함을 드렸던 기드온 마음의 두려움은 왜 생겼던 것일까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들었을 때 이로부터 이루어질 일이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고 두려워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서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대단한 일이 정말로 이루어질까?’라고 느낀다면 하나님은 편안하게 손에 쥐시고 뜻을 이루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을 무찌르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쓸 수 있는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는 일상적인 일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고 대단한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손에 쥐여서 도구로 쓰이려면 하나님께서 일상적인 느낌으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나도 일상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이 이루어진 후에도 내 손끝에서 대단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며 마음이 묶여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려면 하나님과 같은 시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설령 내가 든 지팡이로 홍해가 갈라지더라도 대단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든 지팡이로 홍해가 갈라진 것에 대해 대단한 일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에 묶였다면 이후로 다른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은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두려움은 복합적입니다.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을 무찔러야 합니다. 기드온의 머릿속 기억장치 안에는 상식이 들어 있고, 습관이 들어 있고, 경험이 들어 있고, 지식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습관에도, 상식에도, 경험에도, 지식에도 삼백 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을 무찌르는 전쟁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다. 십삼만 오천 명이라는 대상은 어색하고, 낯설고, 부담스럽고, 처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낯섦과 어색함과 미지의 세계라는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기드온 마음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상식과 습관과 경험과 지식으로 기억되어 있는 데이터로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생긴 두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두려움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가서 적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하심으로써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하던 십삼만 오천 명이라는 대상도 이미 하나님의 계획으로 온전히 관통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두려움을 떨치고 불안감을 떨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실시간 지시를 받아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제일 방해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머릿속 기억장치 속에 있는 습관과 상식과 경험과 지식입니다. 이것들과 상충하는 일이 일어날 때는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가야 하고 접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해야 하기에 낯설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억장치 속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살던 허물을 완전히 벗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지시하시는 일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쥐실 때 그립감이 아주 편안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내 마음에 어색하고, 내 마음에 낯설고, 내 의식에서 불안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쥐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살펴보며 세상에 대한 죽음의 적용 범위를 아주 세밀하게 계속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말을 할 때, 그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은 이런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내용이란 우리 기억장치 속에 들어있는 습관, 상식, 경험, 지식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어떤 지시를 내리셔도 그 지시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삼아 손에 쥐시고 뜻을 수행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테니스를 쳤는데, 실력은 제일 없었는데도 회장을 했습니다. 테니스를 치는 분들을 보면 자주 눈에 띄는 장면이 있습니다. 테니스 라켓의 손잡이에 감겨있는 테이프를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쥐어보기를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두려움을 나무라지 않으신 것이 이러한 과정과도 같습니다. 기드온은 평생을 기억장치 속에 들어있는 습관과 상식과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일은 그 기억 속의 습관을 초월하고, 상식을 넘어서고, 경험과 지식을 벗어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기드온 속에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일이 이루어질까? 이렇게 대단한 일이 과연 내 손에서 이루어질까?’라는 식으로 느끼면 하나님도 기드온을 쥐시기에 불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도구로 삼으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생활화할 때 이 점도 공략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가만히 봅니다. 지금 내 머릿속 기억장치 속에 들어있는 습관, 지식, 상식, 경험 같은 것들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함 없이, 하나님을 의식함 없이, 내 생각이 돌아가고 있다면 내 머릿속 기억장치 속 데이터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습관, 상식, 지식, 경험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생각하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내 머릿속 기억장치에 들어 있는 데이터는 하나님이 쓰셔야 합니다. 내가 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일 때,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도구로 사용하실 때는 끊임없는 교통을 위하여 언어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억되어 있는 지식과 경험과 상식과 습관들을 동원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교감이 이루어지고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을 위해서 기억장치 속 데이터들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시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 없이 진행될 수는 없습니다. 한순간도 하나님의 뜻이 없는 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순간에 다 내가 행동해야 되고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내 삶에서 끊임없이 내가 움직여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지시가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 지시 중에 몇 개를 받아들였을까요? 못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은 있고, 하나님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뜻에 대한 지시를 못 받아들였던 것일까요? 우리가 십자가에서 내 기억장치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릿속 기억장치 속에는 상식이 기억되어 있고, 습관이 기억되어 있고, 경험과 지식이 기억되어 있습니다. 그 기억장치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체 AI와 다를 바 없습니다. 생체 AI는 백번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없습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과 실시간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어야 합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도구로 삼아 움직이시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기드온이 두려움이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쥐실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그립감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는 내 기억장치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시간 지시는 끊임없이 기억된 내용들과 상치하고, 충돌하고, 익숙하지 않고,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장치 속에 있는 습관과 상식과 지식과 경험에 대해서 죽으면 그때그때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지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졌을 때 내 기억장치 속에 있는 것들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 죽음이 세밀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냥 눈앞의 대상에 대해서만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성경 말씀이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적용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일들에 대해 대단한 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대단하다는 느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단하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마음이 묶이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나를 통해 이루어진 눈에 보이는 대단한 일에 마음이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는 세상일 중에 대단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나에게도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나를 편하게 쥐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느끼시는 일을 나는 대단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를 생각해 봅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와!’하고 놀랐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으면 큰 자리 하나 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오순절 사건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 40년 동안 걷지 못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애인이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니 이것을 본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행각에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숭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12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했습니다. 40년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기에 이것은 충분히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와!’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내 기억장치 속 데이터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도구로 사용된 사람의 특징은 40여 년을 꼼짝 못하고 구걸하던 장애인을 일으켜서 걷고 뛰는 것조차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삼아 이 세상에서 일으키시는 일 중에 대단하게 여겨지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은 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단한 일이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 기억장치 속에 저장된 기준들 때문입니다. 상식을 벗어나고, 습관을 벗어나고, 지식과 경험 밖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기억장치 속 데이터에 대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둘째로 하나님만이 대단하게 여겨지고 날마다 새롭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마주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약속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마주하기를 쉬지 않으면 하나님은 날마다 대단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단하게 느껴지면 그 대단한 분이 어떤 일을 해도 마땅한 것이지 대단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 대단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단하게 못 느낀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5살 어린이가 피아노를 무척 잘 치면 대단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쇼팽 콩쿠르에서 1등 한 사람이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감동적인 연주를 한다는 식으로 표현할지언정 대단하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대단하다고 느낀다면 하나님을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작게 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단하게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이루실 일 중에 대단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단하게 여겨야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단하다고 느끼는 상태라면 하나님께 나는 그립감이 안 좋은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을 못 이루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일만 이루셨다 하면 대단하게 여기며 그 일에 붙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물러야 하고, 하나님 마주하기를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려면 하나님을 항상 마주해야 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려면 하나님을 쉬지 않고 마주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려면 하나님을 범사에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면 날마다 하나님만이 대단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대단하게 느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나를 쥐실 때의 그립감이 쾌적함과 안정감과 밀착도가 너무너무 최적의 상태가 되는 도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로 죽음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나를 도구로 쥐실 때, 그립감이 최적의 상태인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