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를 왕으로 세우신 징조들>의 줄거리 :
사울은 선견자 사무엘이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 첫 번째 왕으로 지목한 사실이 아직도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상황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울의 현실 인식 사이에 커다란 갭이 있습니다. 이제 이 갭을 없애고 사울이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수용하도록 하시려는 목적으로 세 가지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사람 왕이신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도 왕이라서, 이 세 가지 징조는 곧 우리 각자를 향하여 주시는 징조이기도 합니다.
나를 왕으로 세우신 징조들
(사무엘상 10:1~4)
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사무엘은 사울이 만날 세 가지 사건을 말해줍니다. 이 사건들은 사울의 왕 됨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알려주시는 징조입니다. 그중에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나를 왕으로 세우신 징조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왕이 될 것에 대한 계획의 징조를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내가 왕으로 세움 받는 징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왕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듯이 왕으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란 이 세상 안에서 듣는 자가 아니라 말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 왕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는 예수님의 몸은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음이란 내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 몸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승천하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처럼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남은 내 몸과 연결된 지정의언행은 세상을 향해 말하는 왕의 위치에서 움직여야만 합니다. 내 몸이란 이 땅에 계시다 올라가신 예수님 몸의 대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내 마음을 담고 하늘에 계시기에, 내 마음이 없는 몸은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여 공생애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왕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왕이라는 의식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음이란 내가 이 땅에서 듣는 자가 아니라 말하는 왕으로서 사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다만 사울처럼 내가 왕이라는 생각을 하기에는 우리의 현실 인식이 부족합니다. ‘내 현실을 둘러보면 왕과는 정반대의 가장 별 볼 일 없는 자리에서 겨우겨우 살고 있는데 무슨 왕이라는 것이지?’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계획과 사울의 현실 인식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리를 좁히시기 위해 세 가지 징조를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번 시간에는 두 가지 징조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 징조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 세상을 왕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첫 번째 징조를 봅니다. 이제 사무엘을 떠난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성읍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누구냐는 것이 아닌 이들이 전하는 소식입니다. 이들은 사울에게 아버지가 이미 암나귀들을 찾았으며 오히려 아들을 걱정한다고 전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얼핏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에 징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암나귀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을 느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겠다고 온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암나귀들 대신 선견자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사울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암나귀들은 하나님이 나의 발걸음을 선견자 사무엘에게 이끄시기 위한 미끼였구나!’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의도성을 강하게 느끼며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만난 이들은 사울의 집안을 아는 동네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울아, 어디에 갔던 것이냐? 암나귀들은 이미 돌아왔으나 너희 아버지는 너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얼핏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려고 한다는 사실에 대한 현실 인식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세 가지 징조를 제시하시는데, 이를 통해서 사울은 아주 강력한 하나님의 의도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울은 ‘나는 암나귀들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선견자 사무엘을 만났다. 이러한 사건들이 정말로 나를 왕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온 일들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어떤 레위인의 아내를 윤간하여 죽인 것으로 인해 벌어진 내전으로 림몬 바위로 피신한 6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겨우 600명으로 다시 시작한 가장 작은 지파였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치욕적인 악행을 저지른 지파에 속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이러한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기에 ‘왕은 무슨 왕이냐?’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언급한 징조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소름이 끼치도록 느끼게 됩니다.
첫 번째 징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울이 두 사람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장소는 라헬의 묘실 곁이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인 베냐민을 낳다가 길에서 죽었습니다. 사울이 두 사람을 만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최근에 극심한 악행을 저질러 전멸의 위기에서 기사회생한 가장 미약한 지파였습니다. 이 베냐민 지파의 조상이 태어난 장소가 바로 라헬의 묘실 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835년 뒤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기 베냐민 속에 이미 사울에 대한 계획을 넣어두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 징조는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은 라헬의 묘실 곁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강하게 느낍니다.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약한 지파였기에,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울에게 이미 835년 전에 베냐민이 태어날 때 사울을 왕으로 삼으실 계획을 수립하셨음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의도성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저는 태 씨입니다. 태 씨는 고구려가 망하자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대조영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태승철이 태어날 것도 계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계획하고 뜻하셨다는 것이 도대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봅니다. 20살 성인이 된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백지를 한 장 주시면서 ‘네가 원하는 인생을 그림 그려보아라. 그러면 내가 들어주겠다. 네가 아직 세상 경험이 없으니 너를 사랑하고 네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다 모아서 그들의 의견을 들어도 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인간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경험과 사랑을 총동원해서 나의 앞으로의 인생을 그림 그립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려두신 그림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하심과 주권을 마음대로 활용하셔서 그려두신 그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 그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너의 인생을 삼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그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설령 지구상 80억 인구가 나를 사랑해서 그들의 지혜를 다 동원하여 그림을 그렸을지라도, 저는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리신 그림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단 한 사람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제2의 나, 제3의 나는 없습니다. 단 하나뿐인 나를 그림 그리실 때는 당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총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최고의 그림을 그려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최고로 그림 그려놓으셨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왕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고의 인생 그림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으로 좋고 나쁨을 따집니다. 하나님의 그림은 세상 가치 기준에서 최고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과 주권으로 최고의 그림을 그려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태어나서 하나님의 그림과 무관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 파괴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최고로 그림 그려놓으신 인생을 끝없이 강등시켜 나갑니다. 결국, 죄와 저주에 찌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이란 자기 파괴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그림 그려놓으신 내 인생을 파괴하고 망가뜨립니다. 그럼으로써 최고의 그림을 가장 저열하고 가장 보기 흉한 인생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들의 삶입니다.
이로부터 왕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신 유일한 최고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왕입니다. 왕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느끼는 최고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왕의 권한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이 동원된 최고의 그림이 그려져 있기에 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와 저주에 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삶의 본질은 자기 파괴가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고로 그려진 내 인생을 파괴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고 사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징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의해 최고로 그려진 인생의 그림을 파괴하는 죄와 저주의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내가 왕으로 세움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최고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는 최고의 그림인 왕으로서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 결과 자기 파괴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사건이 나의 사건으로 믿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 삶에서 십자가 사건을 한시도 놓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신 최고의 인생 그림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죄와 저주에 찌든 채 살고 있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 죽음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내 사건으로 붙잡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겨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죄와 저주에 찌든 자들 중에서 나를 왕으로 택하시고 세우셨음을 증명하는 징조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믿어집니까?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겠다고 기를 쓰고 있다면 잘 되든 잘 안되든 그 자체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왕으로 세우셨다는 증거입니다. 왕으로 세우신 자가 아니라면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죄와 저주에 찌든 나를 죽이고,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최고의 그림이 완성되게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징조를 봅니다. 첫 번째 징조에 이어서 두 번째 징조도 참 이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왜 이러한 사건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울은 왕과는 거리가 먼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용함에 있어서, 벧엘로 제사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떡 두 덩어리를 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또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당시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전쟁에서 실로에 있던 성막은 파괴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벧엘로 제사를 드리러 갑니다. 벧엘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던 곳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졌습니다.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을 위한 번제를 드리기 위해 염소 새끼 세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제사의 절차를 보면 염소 새끼를 번제로 드릴 때는 반드시 소제와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전제를 곁들여야 했습니다. 소제는 곡식의 가루로 드리는 제사인데 가루는 쉽게 날아가기에 반죽을 해서 덩어리로 만들어 넓게 펴서 번철에 굽든지 물에 삶든지 해서 드렸습니다. 그렇게 준비한 소제의 세 덩어리 중에서 두 덩어리를 사울에게 주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알려면 소제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번제는 죄와 저주에 찌든 내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용도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로 드려지는 희생제물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한편, 소제는 곡식을 고운 가루로 빻아서 드리는 제사로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의 존재로 사는 삶은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느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곡식을 가루로 빻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가루로 만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1년, 3년 이렇게 뭉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식 속에서 ‘일주일 동안은 무엇을 해야지. 1년 동안 무엇을 이루어야지.’라는 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소제는 내 인생의 시간에 대해 임의로 뜻과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간짜리 계획, 하루 동안의 계획, 한 달 동안의 계획, 1년, 3년, 10년의 계획으로 의식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곡식을 가루로 빻듯이 나는 시간을 덩어리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하나님만을 의식합니다. 모든 순간을 1년 단위, 2년 단위, 며칠 단위로 끊어서 의식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의식하며 마음을 드립니다. 그럴 때 내 인생을 뭉쳐서 시간 단위로 계획과 뜻을 세워 이끌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은 곡식을 빻은 가루와 같습니다. 나의 시간이 가루인 것을 인정하고, 나는 매 순간 하나님만을 향해 갑니다. 그럴 때 곡식 가루를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게 하신 소제의 의미처럼,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을 하루 단위, 일주일 단위, 1년 단위로 묶어서 계획과 뜻을 세우시며 내 삶을 이끌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소제의 떡 덩어리 세 개 중에 두 개를 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소제는 지금 하나님을 의식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소제를 위한 떡을 사울이 받았다는 것은 이제 사울을 왕으로 세울 자로서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민 나라의 왕은 세상 나라의 왕들과는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하여 임의대로 백성을 통치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하여 세우신 계획을 왕에게 집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면 왕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받들어서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럼으로써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가닿도록 하는 것이 선민 나라의 왕입니다.
떡 두 덩이를 사울에게 주었다는 것에는 본래 하나님만 의식해야 하는 백성이 이제 사울을 의식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백성이 사울을 바라보고, 사울의 말을 듣고, 사울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하나님이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제 백성이 너의 말을 들으면 나의 말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말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너는 임의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선민의 왕은 백성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갖고 계신 뜻은 왕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마찬가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고 뜻을 받기가 어려우니까 보이는 왕을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에 대한 주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뜻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왕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백성에게 흘려보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이란 먹기 어려운 약을 쉽게 먹게 하는 당의정의 역할을 합니다.
쓴 가루약을 그대로 먹기 힘들기에 캡슐에 담든지 당의정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약을 먹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왕이라는 당의정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보이는 왕을 신경 써도 좋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선언인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의 완성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예표로 삼아 예수님이 왕으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사람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예수님만 신경 씁니다. 그렇게 예수님만 신경 쓰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만나고, 하나님의 계획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만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곧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예수님께 신경을 쓰고, 예수님만 붙잡으면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몸이 있던 자리에 내 몸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내 마음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니까 내 몸이 이 땅에 남아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내가 왕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사울이 백성들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사울을 바라보고 듣고 신경 쓰고 마음을 줍니다. 그러면 백성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마음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사울이 중간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 이어져야 할 백성의 관심과 백성의 신경 씀과 백성의 시간과 백성의 마음을 가로채는 것이 됩니다.
첫 번째 징조가 가리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두 번째 징조는 왕 됨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인 사울을 만나듯이, 사람들은 나를 만날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나를 신경 쓰고, 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로 인해 시간을 쓰게 됩니다. 이럴 때 내가 왕이라는 징조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상대하는 사람 앞에서 죄와 저주에 찌든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속으로 계속해서 인정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사람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나를 통해서 가닿고 이어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징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을 만날 때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나의 의견, 나의 생각, 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은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만 드려집니다. 그 상태에서 내 언행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사람을 만나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나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셨다는 징조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징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 징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나를 최고의 인생으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찌든 나는 살면 살수록 하나님이 그리신 최고의 그림을 파괴해 나갑니다. 최고의 인생이기에 왕의 인생입니다. 내가 그러한 왕으로 세움 받았다는 징조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내가 스스로 삶을 생각하고, 삶에서 좋은 것을 결정하고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를 예수님 십자가로 죽이지 못해 안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 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당의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향해 갖고 계시는 뜻과 계획이 나를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나는 시간 동안에는 나에게 신경을 쓰고, 나를 의식하고, 나에게 마음을 뺏기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은 내가 그 사람의 마음과 신경과 시간을 가로채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왕으로 세우신 징조인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내가 너를 향하여 왕이 되도록 하는 계획과 의도를 갖고 있다.’라는 사실을 징조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징조를 받아들임으로써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인생인 왕,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왕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