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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영주동 중앙시장 입구에 있는 옛 영주역 터 표지석. 1941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영주역은 1973년 지금의 휴천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33년간 숱한 사연을 남겼다. |
1940년, 영주면은 읍이 되었다.
집들은 낮았다.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마을을 만들었고 양철 슬레이트 지붕과 기와지붕, 관공서 건물과 2층의 적산가옥이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철탄산 아래 영주초등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신사 참배가 이루어졌다. 거리에는 소달구지가 지나가고, 등짐을 진 허리가 굽은 사람이 지나가고, 때로 자전거가 지나갔다. 너나없이 꾀죄죄한 아이들은 천둥벌거숭이로 뛰어다녔고, 그들을 가르며 가끔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먼 곳으로 멀어져갔다.
시가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원당천에는 둑 안팎으로 세탁이나 염색 일을 하는 초가가 많았다. 서천은 영주의 시가지 서쪽을 구불구불 흘렀다. 왕버들 그림자가 일렁이는 천변에는 세상의 모든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냇바닥이 높아 수해가 잦았고, 굽이쳐 소용돌이치던 쪽박소에는 아이들을 끌어당기는 귀신이 산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서천은 영주 사람들의 젖줄이었다.
냇가에는 빨래하는 아낙이 신산한 날들을 물길에 흘려보냈고, 물가의 모래밭에서는 조무래기들의 결투가 벌어지곤 했다. 멱 감고 고두질하던 어느 여름날, 첨벙 튀어 오른 물방울이 반짝 빛나던 그때, 고막을 쩌렁 울리는 기적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에, 기차는 기적소리보다 먼저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941년, 안동∼영주 간 중앙선의 개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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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월 영주 전역을 휩쓴 대홍수는 그해 동아일보 10대뉴스로 선정될 만큼 피해가 막심했다. 철길이 휘어질 정도로 홍수 피해가 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소장이 영주를 찾아 수해복구를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
#1 영주역
영주동 시대 (1941~73)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한반도의 자원 수탈과 수송을 위해 남북을 종관하는 중앙선 철도를 부설했다. 철로는 서천 물길을 따라 놓였다. 당시 영주역(현 중앙시장)은 영주에서 가장 큰 길이던 중앙통 가까이에 세워져 1941년 7월1일(1941년 6월2일 조선총독부관보 고시 801호)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역사는 일자형 평면에 십자형의 박공지붕을 올렸는데 정면 출입구 쪽이 삼각의 박공으로 솟아 그 기세가 꽤 높았다. 역 광장 쪽 출입구에는 작은 차양이 매달려 있고, 철로 쪽 출입구에는 기둥을 세운 차양이 길고 넓게 나있었다. 역사 안 대합실에는 나무 의자가 빙 둘러져 있고, 자세히 보면 조금씩 모양이 다른 사각의 미닫이창이 햇살을 들이고 있었다.
역 마당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몇 그루의 수양버들이 휘영청 늘어져 지게꾼이며 리어카꾼에게 휴식처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나무 그늘 속에 주저앉아 담배 연기를 뿜으며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철탄산 자락에는 철도 직원을 위한 일본식 관사가 들어서 ‘관사골’이라 불렸다. 역 앞에서부터 삼각지(현재 분수대)에 이르는 길에는 대폿집, 식당, 여인숙이 다닥다닥 붙어 늘어서 역전통을 이루었고, 중앙통의 포목전, 옹기전, 나무전, 싸전 등으로 이뤄진 육전(六廛)거리와 이어졌다.
역 옆의 후미진 골목에는 요염한 여인네들이 모여들어 사창가를 이루었다. 기차를 타고 오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던 그녀들의 거리는 요염함을 파는 ‘염매(艶賣)시장’이라 불렸다.
기찻길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철로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못이 달아나지 않게 침을 탁 뱉은 뒤 철길 둑 아래 엎드려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납작해진 대못은 작고 훌륭한 손칼이 되었다. 그것으로 개구리 뒷다리를 잘랐고, 칡뿌리를 캐어 입 주위가 시커멓게 되도록 씹었다.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으려 뜨겁게 달아오른 철로에 귀를 대었던 녀석은 한 계절이 지나도록 진물이 흐르는 귀를 싸매고 다녀야 했다.
한편, 계속되는 중국과의 전쟁에 사기가 떨어진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장기화로 전쟁 물자 확보에 다급해진 일본은 경북 내륙의 풍부한 임산물과 광산물의 수송을 위해 1944년 영주~춘양 간 영춘 철로 부설에 착수했다.
경북 북부의 주민들은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철로 부설공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영춘 철도는 영주~내성(지금의 봉화)간이 완공되어 시운전을 개시할 무렵 중단됐다. 그리고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일본인이 버리고 간 역전통의 적산가옥에는 고추시장이 들어섰고, 중앙통에는 어물전과 채소전이 들어서면서 거리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정부는 삼척지역의 탄전개발에 따른 무연탄 물동량의 급증에 따라 중단되었던 영춘선 건설을 재개, 1949년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으로 확대해 공사를 시작한다.
당초 미 극동군사령부는 정부 수립 8개월밖에 안된 신생국가의 철도 사업 추진을 반대했다. 일본 방송에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사라며 비판했지만 착공 10개월 만인 50년 3월, 영주~내성 간 14.1㎞구간이 개통되었다.
하지만 영암선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그해 6월, 공사는 중단된다.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영주역 부근은 아수라장이었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피란민의 움막이 모여 수용소골을 형성했고, 하천 옆과 기찻길 옆에도 하코방(판잣집)이 지어졌다. 인민군이 들이닥쳤고, 일제강점기 신사가 있던 신사골에서는 주민들을 총살하는 총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53년 전쟁은 끝이 났다. 50년대 후반까지 서천교 아래에는 인민군이 버리고 간 소련제 탱크가 방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탱크의 녹 쓴 캐터필러를 뜯어내 엿과 바꿔 먹곤 했다. 서천의 모래밭에 인민군이 묻어 놓은 포탄을 파내어 돌멩이로 두들기다 목숨을 잃은 아이도 여럿이었다.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했고 질기게 굶주렸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난 그해 영주역은 사무관역으로 승격했다. 9월에는 중단했던 영암선 건설이 재개되었고 55년 12월 영주와 철암을 잇는 84.4㎞가 완공되었다. (영암선은 63년 철암선과 황지본선 및 동해북부선과 통합되어 영동선으로 명명되었다)
관사골의 집은 정부 소유로 철도청 직원과 역장 조역이 살았다. 철도청 고위간부나 역장 조역은 시멘트 집이었고 수장 급은 목제 건물이었는데 치열하게 경쟁이 높았다.
관사를 차지하기 위해 전임자가 떠나기도 전에 살림살이를 가져다 놓아 다툼도 잦았다. 그래도 반듯한 천장과 열고 닫을 수 있는 창문이 있는 관사골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축이었다.
역전통 삼각지 부근에는 극장이 생겨났다. 목조 2층 건물이었던 ‘영주극장’이었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지은 공회당 건물로 50년대 중반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57년에는 영주역에 불이 나 목조건물 1동을 몽땅 태운 사건도 있었다.
#2 영주를 휩쓴 대홍수
특별열차가 도착하다
1961년 5월16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 군사혁명을 통해 일어난 혁명정부였다. 그로부터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7월11일 아침, 영주 시내에는 새벽 3시경부터 내리던 비가 어느새 마당의 댓돌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침 준비를 하던 아낙은 노부모와 아이만 챙겨 업은 채 피신하기 시작했다. 빗물은 곧 툇마루를 넘고 문지방을 넘더니, 오전 8시 서천의 제방을 무너뜨렸고, 불과 30분 만에 시가지를 삼켜버렸다.
집이 무너져 내리고, 철길이 휘어지고, 두벌 논매기를 끝낸 들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몇 개의 지붕이 물 위에 떠 있었고 돼지와 닭, 개들이 물살에 떠내려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철탄산과 구성공원 등지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황톳물에 잠겨가는 마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대가 높았던 관사골은 홍수를 피할 수 있었다. (영주극장에 공연을 왔던 럭키 모닝의 미녀가수 박재란도 관사골 1호집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혁명정부는 수해복구에 달려들었다. 수해대책본부는 물에 잠긴 시가지의 긴급구호를 위해 오전 9시30분경 원당천 제방 둑 50m를 끊어 남산들(현 영주역) 방향으로 물길을 유도했다. 4시간30분 만인 오후 2시가 지날 무렵 시가지의 집들은 서서히 툇마루와 댓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전통 폭이 스무 자는 되었거든. 물 빠지고 나서는 길가에 옷과 이불, 그리고 곡식이며 장롱을 말린다고 다 늘어 놔 가지고 겨우 자전거 하나 지나갈까 그랬지. 그 냄새에 파리떼 하며 썩은 내가 진동을 했어.”
대홍수가 영주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며칠 뒤, 아직 물이 다 빠지지 않아 질척거리던 영주역 마당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곧 도착할 특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검은 연기를 뿜으며 열차가 멈춰 서고, 커다란 함성과 사람들이 흔드는 태극기의 물결 속에 한 사람이 내려섰다.
카키색 군복에 각진 군모, 그리고 까만 ‘라이방’을 쓴 작지만 다부진 사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이었다. 지프를 타고 폐허가 된 영주를 둘러보던 그는 제민루에서 건너편 정자 어름을 가로막고 있던 큰 산을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저길 자르지.”
그는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절마을 서편 객산(客山)을 잘라 서천을 직선으로 만드는 이른바 직강(直江)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