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자(요그야카르타, 족자카르타)
마침내 인도네시아의 첮 여행지 족자에 도착했다.
호텔 무띠아라까지 택시를 이용했다.
무띠아라호텔에서 체크인 하는데 룸이 구관에 있어서 그 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에 베짜로 관광하지 않겠냐며 한 청년이 바짝 다가왔다.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서 바틱상점이 지금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일단 떨치려는 마음에서 샤워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샤워하고 방에서 창문을 통하여 아래쪽을 보니 그 때까지 이 친구 혼자에 호텔 현관앞에서 기다리고 있는거였다.
측은지심이 들어서 내려가서 바틱상점에 가 보자고 했다.
해는 이미 졌고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를 자전거 앞 좌석에 둘이 앉아서 가는데
장의기구를 파는 가게들이 있어서 무서워 지기 시작했다.
바틱점에 다달았을 때는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한 집만 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한국말로 돌아가자고 강경하게 말했다.
외국에 나가서도 강력한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때는 한국말을 써도 좋을 것 같았다.
저들 역시 말은 못 알아 들어도 표정으로 알아들을테니까..
호텔에 돌아와서 카운타에서 내일 관광일정을 짜는데 이 친구 들어와서 자기 형의 차를 이용하라고 했다.
차가 어떠냐고 했더니 내일 보고 좋지 않으면 이용안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내가 보기를 원하는 관광지를 알려 주었고 하루 비용은 우리 돈으로 약 45000원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족자에서 둘째날 아침 준비를 해서 내려 왔더니 차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카니발같이 생긴 일본차에 푹신한 소파 의자가 2열이 있어서 둘이 다니기에는 너무 과했다.
TV가 있었으며 안내인겸 기사는 영어와 일본어를 약간 구사했다.
므라삐화산(Gunung Merapi, 높이 2914m)
활화산으로 최근에 대폭발이 있어서 뉴스에 나기도 했다.
보로부두르사원
건립연대는 우리나라의 통일신라말 정도이고 잊혀진체 있다가 1814년에 영국인에 의해 밀림에서 발견되었다.
이 후 유네스코에 의해 1973년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198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미얀마의 바간의 불교 유적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더불어 세계 불교 3대 유적으로 취급된다.
현지인들이 복을 받기 위해 스투파 틈새로 팔을 넣어서 부처를 만지려고 하고 있다.
부처는 원래 스투파 안에 있는데 전시를 위해 스투파를 제거한 상태로 보인다.
건축 양식을 제외하고 부처만 보면 통일신라의 부처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특히 감실에 있는 부처상은 더욱 친근해 보인다.
사진을 올리지 않았지만 두상이 없는 부처가 많았는데 이스람 군의 침공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생애를 담은 부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지고 간 필름으로는 빙산의 일각도 촬영할 수 없었다.
스투파 뒤로 므라삐 화산이 보였다.
화산의 폭발에 의해 보르부드르가 1000여년 동안 잊혀졌던 것이 아닐가 싶었다.
문듯사원(Candi Mendut)
사원 안쪽을 들여다 보니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보였다.
순간 문가에 서 있던 관리인이 반사판을 비추니 석가모니상이 보였다.
지금 다시 자료를 정리할려고 보니 석불삼존상이 있었다고 되어 있었다.
눈의 기능이 흑백이 교차하는 환경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본존불 양쪽의 불상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틱점에 들려서 공장을 견학했다.
그 공장은 스탬프 기법으로 대중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비싸지 않은 모자 하나 사는 것으로 오전 일과를 마감했다.
호텔로 돌아가서 오후에 만나는 시간을 약속하고 휴식했다.
오후 약속시간에 맞추어 나와 보니 베짜맨이 와서 어쩌구 저쩌구...
형님차가 갑자기 자카르타에 가게되어서 다른 차로 대체했다고 했다.
차를 보니 완전 고물차였다.
차만 고물이 아니라 운전사가 완전 불통이었다.
프람바난사원
보로부드르가 불교사원이라면 프람바난은 힌두사원이다.
불교 유적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힌두교는 더 어려웠다.
사원 뒤를 돌아보면 아직 복구못한 석재들이 엄청 많았다.
프람바난 사원 관광을 마치고 가는 길이 아무래도 족자로 가는 길 같았다.
아무리 구두계약만 했더라도 지금 관광을 끝내는 것은 계약위반이다.
나는 “짠디세우”, “짠디세우”라고 목청껏 고함질렀다.
이 친구 못 이기겠던지 차를 유턴하였다.
짠디세우(Candi sewu)
여기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거인상(수호신 끄베라, 혹은 현지어 락사사)와 경비원이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태권도를 한다면서 시연을 하기도 했다.
사원의 안내는 이 친구가 열심히 했지만 이해도 안되고 기억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닸는 사원이었다.
짠디세우는 복원 작업이 한창이었다.
아래 사진은 짠디세우를 보다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잘라낼 부분을 표시한 사진이다.
남아 있는 사진이 이 것 뿐이라서...
결과물은 바로 위 사진이다.
족자에서 사흘째 날
호텔에서 먹는 아침밥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 외식하기로 했다.
이것저것 견주어 보다가 서양에서 온 베낭족이 많이 모이는 거리의 식당에 가기로 했다.
길을 잘 모르니 가까운 거리이지만 베짜를 이용했다.
식사는 토스토와 계란 과일쥬스와 커피가루가 둥둥 뜨는 커피 한잔이었다.
이후 매일의 아침식사는 이하 동이었다.
커피가루가 뜨는 커피 맛이 생각나서 출장가는 사위에게 부탁하여 사 온 커피
꼭 같은 커피는 아니겠지만 즐겨 마시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술탄궁으로 이동하는데 첫날의 베짜맨을 만났다.
둘이 무어라 이야기하더니 나와 마눌이 그 친구의 베짜로 갈아 타야 했다.
완전 깡패다.
술탄궁은 별로 볼 것이 없었다.
경비원이 허리 뒤에 반달형 짧은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서 왔다니까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신발공장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인도네시아에 가구공장 뿐 아니라 신발공장도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샤워하고 쉬다가 점심먹으러 시내에 나갔다,
인도네시아에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전 일과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서 샤워하고 쉬는 것이 일상이 된 것 같았다.
마리오보로 거리
호텔이 족자의 가장 번화가인 말리오보로 거리의 중심에 있어서 길만 건너면 식당과 사람이 가장 많은 거리였다.
길을 건너서 잠시 걷는데도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어깨가 부딪칠 정도였다.
노점상인들이 우리를 일본인으로 알고 쟈파니스라고 하며 말을 걸어왔지만 전혀 시선도 안주고 대꾸를 안했다.
등뒤로 무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욕지꺼리를 한 것 같았다.
점심은 아마도 중국 음식점 Colombo에서 식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사후 호텔로 돌아 오는 길에 한국인을 만났다.
그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는 나에게 이 동네가 좀 험한 세상인데 허술하게 다닌다면서 주의를 주었다.
한국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워서 다시 Colombo식당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임학을 전공했고 중국계의 목재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족자의 대학에서 열대우림을 전공한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근무할 당시 나의 선배(재 아프리카)와 함께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로 급속히 가까워졌고 저녁 초대까지 받았다.
저녁식사는 그의 부인이 정성껏 마련해 주었는데 화제는 보로부드르 사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사원의 내력을 이야기 해주었고 나는 노트에 기록해 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유적 사진찍는 취미 역시 비슷해서 보로부드르 청소하는 날 물을 뿌린 뒤 사진을 찍으면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나
잠시 스쳐 지나가야 하는 여행객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족자의 4일째 날
아침식사는 전날 아침에 다녀왔던 식당으로 갔다.
길을 알고 있으니 베짜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골목 안에 들어서니 청년들이 여럿 여기저기 모여 있으면서 우리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 무서워 보였다.
길거리나 주택가에서 큰 용기를 놓고서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출근하는 사람이나 주택에서 나온 사람들이 사서 비닐튜브에 넣어서 가지고 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현지인의 일상식 같았는데 우리로서는 비위가 상해서 먹기가 쉽지 않을 음식같았다.
족자에 와서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우리한테 별로 호감이 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발리가는 비행기 편이 오후 비행기라서 오전 관광을 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족자를 나 다닐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가루다항공에 전화 했더니 오전 비행기로 떠날 수 있다고 해서 서둘러서 족자를 떠났다.
발리
발리에 도착했다.
원래 호텔의 픽업서비스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보다 일찍 도착한 탓으로 택시로 숙소로 갔다.
내가 선배에게 부탁한 숙소는 꾸타 해변에 바로 붙어 있는 호텔이었는데 방이 없어서 예약을 못하였고
대신에 해변에서 조금 더 들어간 발리식 3층 호텔을 예약했다고 한다.
호텔명은 BALI DWIRA HOTEL인데 2층의 방은 넓고 방문을 열고 나오면 중앙에 풀이 보여서 좋았다.
발리에서 둘째 날
늦게까지 쉬었다가 선배에게 소개받은 발리의 직물공장에 전화했다.
사장이 선배한테 연락받았다며 호텔로 픽업하러 왔다.
직물은 자동기계가 아닌 수동기계로 제직하는데 천의 색상이나 무늬가 상상을 초월하였다.
완성된 직물은 전량 인도에 고가로 수출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엄두를 못 낼 고가의 직물이 인도에서 소비된다는 사실에
인도 상류층의 소비수준이 내가 상상할 수 잇는한계를 뛰어 넘는 것 같았다.
사진을 한두장찍고 싶었지만 필름 카메라로 실내촬영이 잘 안될 것 같고
또 공장을 공개해준 상대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포기했다.
저녁에는 덴파사르에서 공연하는 깨짝댄스를 보고 왔다.
발리의 셋째날
원데이투어를 결정하면서 영어와 일본어 가이드 중 영어가이드를 신청했다.
일본어 투어가 이해가 빠를 것 같았지만 왠지 그들과 섞이기 싫어서였다.
투어 출발시간에 호텔 앞에 소형버스가 왔는데 우리가 가장 마지막으로 탑승한 손님이었다.
가이드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 곁에 와서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이유인즉 당시 한국 가이드들이 체류기한 오버로 모두 추방되었는데
앞으로 한국어 가이드가 전망이 있을 것 같아서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날은 하루 동안 가이드에게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투어는 은공예공장, 목공예공장등을 돌아서 고아가자에 갔었다.
고아가자(코끼리 사원)
가이드는 사원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원내에서 사진속의 소녀(13살로 기억)가 따라 붙어서 스스로 가이드를 청했다.
영어와 일본어가 가능했으며 한국어를 알고 싶다며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점심식사는 낀따마니 고원의 뷔페식 레스토랑에서 바뚜루산과 바뚜루호수를 전망하면서 먹었다.
미리 본 가이드북에서 전망이 좋다고 극찬하였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저 그랬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붓의 미술거리와 발리의 계단식논을 보고 일찍 관광을 마쳤다.
꾸타해변
꾸따해변은 발리 섬의 서쪽해변으로 일몰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바다는 경사도가 거의 없어서 한참을 바다깊이 들어가도 발목이상으로 물이 차지 않았다.
그러기에 파도는 일자로 평행선을 그리며 쉼 없이 다가왔다.
꾸따와 레간
꾸따와 레간은 서로 붙어 있어서 나는 그냥 둘을 합해서 꾸따로 칭하고 있다.
이 지역은 주로 호주인이 많이 오는 곳으로 물가가 싸고 무척 붐비는 곳이다.
식사는 사람이 붐비는 식당에 들어가서 손님들이 많이 주문하는 음식을 손가락질해서 시키면 틀림없이 맛이 있었다.
의류는 다양하며 화려한 무늬의 옷을 싸게 구할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앞을 막는 잡상인 때문에 놀라기도 하지만 족자처럼 기분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발리 드위라 호텔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나갈 수 있을 만큼 해변에서 가깝다.
수영복 차림으로 호텔안에 돌아 다녀도 되고 언제나 호텔의 중앙 풀에 뛰어 들 수도 있다.
수영하다가 맥주 먹고 싶어서 한 병을 주문하면 남녀 직원 한 쌍이 가지고 와서 한국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다.
지금이라면 한류 때문에 대화가 잘 풀리겠지만 당시는 특별히 내 세울 것 없는 상황임에도 코리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직원들은 친절하고 배려심이 높았다.
발리여행을 마치고
발리에서의 여행은 요즈음 말로 힐링여행이 되었다.
그러기에 꼭 다시 오고 싶은 여행지였다.
그래서 2006년에 다시 방문하였다.
재방문은 꾸따의 반대쪽 해안 누사두아였으며 고급호텔에서 유유자적했다.
발리는 호사스러움과 실속이 공존하는 휴양지였다.
발리여정이 끝나고 귀국해야 했다.
당시 발리에서 서울까지 직항노선이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내 손에 쥔 티켓으로는 탈 수가 없었다.
일단 자카르타로 되돌아 가서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아침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방콕에서 일박하기 위해 공항호텔에 갔는데 비용 때문에 공항의 의자에서 하루 밤을 때워야 했다.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그러기에 더 기억속에 뚜렸히 남아 있었던 여행이었다.
가이드북
잘 만들어진 책이다.
알고보니 일본책을 번역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