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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례의 향기
(2015, 4.15일 전주 후반, 대전 전반기)
◉ 순례 성지 : 진산➟ 돼재성당➟ 여산숲쟁이➟ 나바위➟ 지석리➟ 산막골➟ 갈매못
첫 번째 순례를 마치고 아쉬움 반 , 그리움 반 마음으로 다시
두 번째 순례를 시작하려고 한다.
출발하는 날 은총의 비가 사락사락 내려 내 마음이 조금은 사알 작 기쁨이 비겨갔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보고, 맛보고,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현재의 순례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인내의 맛을 향유하기 위하여
화살기도, 지향기도 바치면서 연도를 하니 천상의 영혼들이
우리들의 순례를 축복하여 주는 듯한 충만 함을 생각하며
내가 기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닐까?
□ 첫 번째 간 곳 ― 진산성지
진산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피의 증거자가 태어난 계기가 된
진산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두순교자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다.
윤지충ㆍ권상연의 탄생지와 거주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들인 윤지충ㆍ권상연의 탄생지와 거주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윤지충의 탄생지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도산 리의 장고 터로 추정되고 훗날 이주한 거주지는 진산면 하막현리 지역으로 추정된다.
권상연의 집안은 공주군에서 살다가 진산 막현리 새 뜸과 하막현리 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순교로부터 200여 년이 지났고,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때로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 순교자
◆ 복자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 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 바오로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두 번째 간 곳 ― 돼재성당
돼재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두 번째 세워진 성당이며, 이남의 첫 성당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성당이다.
비에모신부가 본당을 정한 이유는 박해 여파가 남아 산간지대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되재 본당시기(1893~1944)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 성당의 역사는 1893년 4월 비에모(Vellemot, 禹一模, 1869~1950, 바오로) 신부가 차돌박이(현 백석.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를 정하고 전교를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비에모 신부는 다음해 초 거처를 되재(화산면 승치리)로 옮기고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으로 전라도 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일시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1895년에 완공된 되재 성당은 단층 5칸짜리 한옥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성당이다. 성당을 지을 때 화엄사와 쌍계사에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되재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그러나 되재 성당 터는 2004년 7월 30일자로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돼 2005년부터 국가와 도 지원을 받아 되재 성당 복원공사에 들어가 2007년 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 비에모(Villemot, 禹一模, 1869∼1950) 신부
비에모 바오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사제품을 받은 뒤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이 해 6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1893년 전라도 고산의 차돌박이를 근거로 전라도 일대에 전교하였고, 1894년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전교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와 서울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전라도 지방의 모교회(母校會)격인 고산 되재(升峙) 본당을 신설, 건축하고 1898년까지 사목했다.
1898년부터 1916년까지 서울교구 당가(재정부장) 신부로 서울교구의 재정 문제를 담당하고,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 주임 신부, 1926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교구 부주교 겸 명동 성당주임 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부터 노령으로 일선 사목을 떠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로 재직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해 7월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교황 사절 번(Byrne) 주교,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주교 등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다시 만포(滿浦)에서 중강진(中江鎭)까지 250리의 산길을 걷는 소위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하였다.
□ 세 번째 간 곳 ― 전주 여산숲쟁이
순교성지는 백지사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붙여 질식시키는 잔혹한 형벌로 많이 행하진 곳으로 아직도 백지사터라는 이름으로 처형장이 남아 있다.
하늘의 문,
여산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 모후의 자녀로서 순교자들의 신앙고백을 따라
함께 모여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으로 하나 됩니다.
모두들 미사 후
낭독하고 계셨다.
<천주교 여산성지 성당>
배가 고파 옷속의 솜이나 형장 풀밭의 풀을 뜯어 먹고 순교 당한 성지
병인년 박해의 연속인 1868년 무진년에 여산군의 속읍인 고산, 진산, 금산 등에서 체포되어 온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 터다.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전해지는 순교 성지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 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라고 한다.
이곳 여산 숲정이에서 치명한 이들 가운데 10명의 시신은 신도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자루에 담아서 야음에 천호 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안장시켰다고 한다. 천호 성지에 가면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곳 여산에서 순교했다. 따라서 이곳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 순교자
◆ 김성첨 토마스( ? ∼1868)
그의 본관은 선산 김 씨이며 함양 출신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 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 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배교한다면 여산 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 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혹독하게 형벌하는 받았다.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김성첨은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월 4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월 10일(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 네 번째 간 곳 ― 나바위 성당
화산 천주교회의 초창기 명칭.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 리에는 “화산”이라는 산이 있다.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붙여 준 이름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나바위)가 있다.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897년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華山里) 나바위[羅岩] 부락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 농민 운동 때 망해 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나바위는 옛날 선착장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나바위 성당은 1916년에는 목조 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증축했다.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히 회랑으로 인하여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지방 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성당 내부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한국 풍속을 따른 듯 남녀 교우가 서로 구별하여 앉을 수 있도록 남녀 입구가 다르고 앉는 곳도 칸막이로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36년 12월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을 떠나 1845년 8월 17일 상해 인근의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서 함께 출국했던 교우 11명과 함께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에 주교가 됨)를 모시고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망망대해를 표류하며 갖은 고생 끝에 제주도를 거쳐 42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밤 이곳 황산포구 나바위 기슭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바위 성당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1860~1937, 요셉) 신부가 1897년에 설립해 1906년에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화산 정상의 김대건 신부 순교 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 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나바위 성당은 1955년에 성 김대건 신부 순교 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3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 대건 교육관 외에도 소규모 피정 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 따로 있고, 취사를 할 수 있는 설비도 마련되어 있다. 또 피정의 집 앞 운동장은 2천 평 규모의 대지로서 야영장으로도 활용된다.
▒ 순교비와 망금정
화산 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 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 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여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후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월이면 연례 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다. 개인 피정 장소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인 이곳의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에 감탄한 베로모렐 신부는 피정을 하시는 주교님을 위해 1915년 정자를 지어 드렸다. 이 정자를 드망즈 주교는 망금정이라 이름 붙였다. 금강을 바라보며 세분 성직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장소이다.
▒ 목숨 버려야 목숨 건지는 (나바위에서) <김영수> ▒
흰 구름들 자우룩 내리는
결 고운 바위산 나바위에는
바위 속에서도 나무들 무성합니다.
망금정(望錦亭)에서 바라보는 금강과 황산벌엔
영원한 청년의 숨결 가득하고
나는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거룩한 상처의 향내 맡습니다.
목숨 버려야 목숨 건지는 노래
하늘과 땅 맞닿는 여기 언덕에서
나는 바람 한 점에도 손 가벼워지기를
햇살 한 올에도 어깨 따뜻해지기를
촛불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내가 살아서 죽고
또한 죽어서 살아날 때
나는 비로소 작은 미소 하나로 남아
숨은 나뭇잎 하나 깨우는 것입니까
이윽고 흰 구름들이
설렘의 숲으로 하늘 가득 우거집니다.
□ 다섯 번 째 간 곳 ― 지석리 성지
참수 치명한 성 손선지베드로와 성정문호 바르톨로메의 고향이다.
전주 숲정이에서 치명한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의 고향
부여 지석리는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임천 괴인돌 출생 손선지 베드로와 임천 출생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두성인 을 기념하기 위한 시성비가 있는 곳이다. 병인박해 때 혹독한 고문 속에 순교한 이들을 위해 비신자인 손선지 종씨들이 기증한 밭에 시성 비를 세웠다.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 리는 충청도 임천의 고인돌이라는 마을이었다. 손선지(1820~1866, 베드로)의 고향이며, 정문호(1801~1866, 바르톨로메오)도 임천 출생이었다. 당시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정문 호는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하여 살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 골에 함께 정착하여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담배 상인으로 가장한 포졸들에게 잡혀 성인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선지 베드로는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심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형이 집행될 때까지 손선지는 하늘을 향하여 ‘예수 마리아’를 계속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데, 손선지의 영향으로 입교하였고 입교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들 두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이곳에는 아직도 손선지의 종씨들이 비신자로 살고 있는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 비라도 세워 달라고 홍산 본당에 밭을 기증했다고 한다.
■ 순교자
◆ 성 손선지 베드로 (1820∼1866년)
‘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 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1801∼1866년)
‘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손선지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인들과 관리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여섯 번째 간 곳 ― 산막골 성지
신앙 선조들이 기해박해 이후 박해 피해 산간벽지 숨어 신앙생활 하던 곳.
페롱신부가 1858년 사목중심지로 삼은 곳.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이며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머물던 곳
충남 서천군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 막골' 일대가 사목 중심지이며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북 연풍에서 이주해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전주대학교 교수)가 최근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서종태 박사는 “충남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천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있었고 특히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산 막골은 서천 일대의 사목 중심지로서의 주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그동안 돌보는 이 없이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밝혀진 것이 거의 없었다”. 며 조선조 말 박해시기에 서천지역에서 처형된 신자가 57명이나 기록돼 있어 서천지역이 단순히 교회사적지에 그치지 않고 성지로서 의미도 겸하고 있다. “고 하였다. 또 교우촌 '산 막골'은 지금까지 경북 상주군 모동면 신흥1리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에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로 최종 확인됐다.
이 산 막골 신앙 공동체의 신자로는 황석두(黃碩斗, 루가),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황천일 (黃千一,요한), 황석 두의 형, 김 가브리엘, 김 요셉, 김 안드레아, 전춘서(田春西, 안드레아), 김 서방 김필선 (金必先, 요셉), 김성첨(金成添, 베드로), 강호경(姜浩景) 등이 찾아진다. 산 막골 신앙 공동체는 황석두가 양자인 황천일과 형 및 조카인 황기원 등을 이끌고 연풍에서 산 막골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주한 시기는 1857년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57년 3월에 입국한 페롱 신부가 같은 해 가을에 황석 두를 복사로 정하여 산 막골을 사목 중심지로 삼음에 따라 산 막골 교우촌은 서천 지역의 주된 공소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 가브리엘과 김 요셉은 형제간으로 비인서 오래 살다가 1866년 전부터 산 막골로 이주하여 1866년 12월 3일 경포에서 체포될 때까지 거주하였는데, 김 요셉은 페롱 신부 전교 때 본 공소 회장으로 열두 공소 소임을 겸했다고 한다. 또한 임천에서 살다가 산 막골로 이주한 김 안드레아는 1866년 12월 3일 김 요셉 회장과 함께 경포에게 체포될 때까지 산 막골에 살았으며 본디 금산 사람으로 산 막골로 이주한 전춘서는 1866년 12월 28일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풀려나 남포 습의면(習衣面) 간재로 이사할 때까지 산 막골에 살았고, 김 서방은 치명일기 129번에 황천일(요한)과 한가지로 잡혀 서울로가 치명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66년 12월 15일 황천일과 함께 체포될 때까치 산 막골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막동 사람으로 1865년 가을에 황천일 에게 배워 요셉이라고 본명을 지은 김필선은 1867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산 막골에서 살았다. 본디 산막동 사람으로 1865년 봄에 황기 원에게 배우고 베드로라고 본명을 지은 김성첨은 1867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산막동에 거주했고 홍산 판교 사람으로 1866년 봄 박해 이후에 산 막골의 천주교 신자가 살다가 도피한 빈 집으로 이주한 강호경은 같은 해 12월에 체포될 때까지 산 막골에 살았다
페롱 신부는 산 막골에서 1858년 9월 24일부터 1865년7월 24일까지 총 6통의 편지를 작성하였으며, 내포지역에서 사목하던 조안노 신부도 1862년 11월 4일 한차례 산 막골에서 서한을 작성하였다.
◆ 페롱(權, Feron, Stanislas, 1827∼1903) 신부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세리에서 전교한 선교사이다.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 곳 대신학교를 나와 연령미달이었지만 특별배려로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고,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의 사제로 일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Daveluy)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았을 때였다. 그는 곧 몽소승천지방 즉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의 불꽃이 타올라,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행히도 살아남게 된 페롱 신부는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인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1870년 인도(印度)의 퐁티세리로 파견되었고, 그 뒤 30년간을 그곳에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다가, 젊은 시절 그가 봉사했던 한국 교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걸 보고 만족해하면서 1903년 6월에 77세의 고령으로 선종하였다.
□ 일곱 번째 간 곳 ― 갈매못 성지
다섯 성인의 잘린 머리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매달리던 날
하늘에는 은빛 무지개가 다섯 개가 떳다고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은 전하고 있다.
갈매못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의 성인이 치명한 곳이다.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 두 루카 회장,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 요셉 등 다섯 명의 성인이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 수영에서 처형되었다. 갈매못이란 영보리 앞바다가 좌우의 육지와 섬으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 같아 보이는 데서 유래하였다. 오천(鰲川)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던 수영(水營)이 있었고 수군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 못이 순교지가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外烟島)와 관련되어 있다.
1846년 6월에 프랑스 해군 제독인 세실(C´ecille, 瑟西爾, 1787~1873) 함장이 세 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한강을 못 찾고 외연도에 정박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에게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 등 3명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남겨 놓고 돌아갔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 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로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 수영으로 다섯 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향하여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처형할 수 없어 보령 수영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 다섯 명은 이곳으로 이송되어 성금요일인 3월 30일(음 2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중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보좌 주교로 성성 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 두(黃錫斗, 1813~1866, 루카)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트르(Aumaî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도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이중 황석 두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 남포의 서재골(서직골, 서짓골)로 이장되었으며, 1882년 3월 블랑 신부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1967년부터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 오성 바위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리 신부, 위앵 신부, 황석 두 루가, 장주기 요셉 등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 못을 향해 끌려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 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현재 이 바위는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에 있다.
■ 순교자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Daveluy) 주교 (1817∼1866)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 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 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 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 성 다블뤼 안토니 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교우들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 활성화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 (1837∼1866)
프랑스 앙굴 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3월에 안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 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 성 오매트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내에 사제성소와 수도 성소의 증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민 루가 위앵(Huin) 신부 (1836∼1866)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 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성 위앵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수사 수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황석 두(黃錫斗) 루가 (1813∼1866)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 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 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 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황석 두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출판 사업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 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장주기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신학생 양성에 물질적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도록 빌어 주소서.
■ 그외 순교자들
◆ 박 베드로
박 베드로는 본디 충청 신창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 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34세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 사는 그 아우 박 필립보이다. (증언록 130번 224쪽, 치명일기 727번, 수영)
◆ 손 치양 사도 요한
손 치양 사도 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홍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니,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 굴총하던 배 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 (증언록 85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 이 영중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 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 치양과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 가 효수하니 나이 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 이 발토로메오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 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 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참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3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 임운필
임운 필은 임 토마스(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 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이 많은 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 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 뜻대로 하라" 한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성 다블뤼 안또니오 주교님의 좌우명>
오늘의 순례의 생각은
순교자들의 삶의 생활은 온전히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나를 온전히 마음과 몸을 오롯이 받치는 것 .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5. 4. 15 성지순례를 마치며
서운동 성당 김홍숙 혜레나
첫댓글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족적을 꼼꼼이 기록하여 후진에게 알리려는 노고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성지
순례를 생각하고 계시는 교우님들을 위해 성지의 배경, 경위, 특성, 내용 등을 계속 기록, 게시하여 주도록
건의 드리오며, 순례자는 지난온 길의 되새김으로 순교영성을 한단계 더 높힐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