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지와 마실 가는 길
수수께끼 하나. 간다간다 하면서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은? 답은 '가지'이다. 나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노마드'(유목민)족이다. 그런데 지난 35년 동안 금정구 부곡동에 '가지'처럼 매달려 사는 까닭은 집 앞에 온천천이 있기 때문이다. 온천천은 내가 사는 집을 성의 해자(垓子)처럼 두르며 흐르고 있다. 온천천은 나와 세상을 차단시키고 조용한 주택가와 번화한 대학 앞 상가를 분리시킨다. 동(動)과 정(靜), 상업과 예술, 이념과 순수의 두 세계를 단두대의 칼로 내리치듯 확연하게 자르며 흐르고 있다.
내가 집에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스무 걸음도 안 되는 짧은 온천다리(온천 2호교)이다. 마실 나가는 기준도 바로 온천다리가 된다. 온천다리를 건너 밖으로 나가면 외출이고, 이 다리를 건너 주택가로 들어오면 귀가이다. 외출할 때는 무장한 전사처럼 세상을 정복하러 나가곤 했다.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백석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그런 심정으로 외출해 귀가할 때는 단속(斷俗), 세진(洗塵)의 다리에서 옷의 먼지를 털고 선계인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떤 길이든 상처와 추억과 그리움이 묻어 있다. 지금도 온천천변을 거닐면 내 의식 속에는 판화처럼 선명하게 찍힌 몇 개의 기억들이 함께 걸어간다.
구청장이 네댓 번 바뀌면서 온천천은 환골탈태를 했다
한 구청장이 온천천 바닥을 시멘트로 깔면
다음 구청장이 깔아놓은 시멘트를 다시 벗겨냈다
· 에피소드 1 : 다리난간에서 떨어진 선지자
마실 가는 길이 영혼의 산책길이라면 이 시기에는 외출과 귀가만 있었고, 진정한 의미의 마실길은 없었다. 온천다리에서 담배를 빼물고 서 있으면 검은 간장물이 악취를 풍기며 올라와 구수한 담배 맛을 빼앗았다. 온천천 너머는 개발독재의 이념과 굴뚝연기로 자욱했다.
난 늘 시커먼 간장물을 건너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학문과 동시에 이념을 가르쳤다. 난 천변의 허름한 야학에서 독재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흡수했다. 이후 늣늣하고 보수적인 크리스천이었던 나는 조급한 급진주의자로 돌변했다. 개인구원보다 사회구원이 우선이 아닌가? 난 선지자다운 고민을 하다, 어느 날 만취한 채 다리 바로 건너편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잔 적도 있었다. 크리스천인 부모님은 신탁(信託) 대신 인탁(人託)에 귀 기울이는, 술 취한 나를 보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 만취된 상태에서 다리를 넘어오다 속이 메스꺼워 낮은 다리난간을 잡고 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중심을 잃고 온천다리에서 거꾸로 떨어졌다. 몸에 난 상처보다 들이킨 오폐수 간장물로 토사곽란을 만나 아래위로 다 게워내고 사흘들이 누워 있었다.
·에피소드 2 : 첫사랑은 간장물을 따라 흐르고
학창시절 나의 첫사랑은 흔한 미팅에서 만난 여대생이 아니었다. 감미로운 서울말을 쓰는 선술집 종업원 M이었다. 다리 건너 선술집에는 당시에는 드물게 몇 권의 시집과 소설책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술집 여자답지 않게 크고 선량한 눈망울에다 문학적 취향까지 있었다. 스스로 문학적으로 조숙했다고 느낀 나도 꾸덕꾸덕하게 말린 명태 코다리를 뜯으며 술을 마시면서 문학현실을 토로하는 그녀 앞에선 침묵을 지켜야 했다.
"왜 소설 속의 남녀 주인공들은 꼭 하룻밤을 자야 하지?"
"난 무진기행의 하인숙이 젤루 좋아. 내가 돈 벌어 술집을 차리게 되면 술집이름을 꼭 무진기행이라고 할 거야."
우리는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손톱에 뜬 하얀 반달을 보며 온천천변을 거닐었다. 그녀의 집은 서울인데 돈 벌러 부산을 왔다는 것, 술은 팔지만 영혼은 팔지 않는다는 것, 사랑에는 아프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 왜냐하면 아무리 아파도 자기 첫사랑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일한 돈의 상당한 금액을 병든 어머니의 병원비로 올려 보낸다고도 했다. 나는 마치 지구 종말을 기다리는 종말교도처럼 그녀와의 만남에 몰입했다. 술 한 잔에도 정호승 시인의 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와 같이 막다른 감정을 걸었다. 기이한 것은 얼마 뒤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내가 행방을 묻자 술집주인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의 술집주인처럼 떨떠름하게 말했다.
"반반하게 생겨 잘 챙겨줬더니 내 돈을 떼묵고 도망을 가?"
그제야 내 눈을 덮었던 비늘이 떨어졌다. 난 아르바이트 한 돈 전액을 두 번이나 몽땅 그녀에게 빌려주었던 것이다. 난 과장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을 했는데!' 하며 술을 퍼마셨고, 다시 간장물이 흐르는 온천교 다리 위에서 구역질을 해댔다. 온천다리 밑으로 간장물이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밤이여 오라. 깨진 종아 울려라. 나의 첫사랑도 그렇게 삼류소설처럼 간장물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내려갔다.
· 에피소드 3
그러나 부마항쟁 이후 열린 대학 자율화 캠퍼스는 나의 발걸음을 경쾌하게 했다. 난 대중 앞에서 불을 뿜는 듯 연설을 했고, 학도호국단을 해체해 학생회를 만드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80년 그해 오월은 나에게 오지 말았어야 했다.
80년 5월 19일 내 손에는 전두환의 등장에 반대하는 한 뭉치의 유인물이 들려있었다. 당시 문학도였던 나는 특유의 은유법을 빌려 낭만적이고 과대망상적인 선언문을 적었다. '부산시민의 성전을 선포한다. 유신의 망령이 해골을 굴리고 나오는 지금 부산 시민들은 새로운 군부독재에 맞서 싸워야 한다. (중략) 해골바가지 전두환은 물러가고 구속한 민주인사들을 즉각 석방하라.' 그것도 미진해 3·1 독립선언서 말미에 나오는 한용운의 공약삼장의 문구까지 동원했다. '천인공노할 군부의 만행에 대해 우리는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이다.'
나는 그때 절망의 깊이만큼 분노가 솟구쳐 남포동 부영빌딩 10층 꼭대기까지 올라가 수백 장의 유인물을 비둘기 날리듯 날려버렸다. 하지만 음모와 억압에 통달한 정권은 순수한 한 학생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계엄군에 잡힌 나는 계엄군의 총개머리와 곤봉에 맞아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난 군용 지프를 타고 이 온천다리에 내려졌다. 손목에 수갑을 찬 채 피를 줄줄 흘리며 나타난 자식을 보고 부모님은 쓰러지셨다. 감옥과 군대와 또 다시 감옥, 5공화국 시절 난 단 하루도 이 다리를 건너 귀가한 적이 없었다.
출소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부산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어 우리 집 앞으로 지하철이 달리고 있었다. 온천천이 가른 두 개의 세계를 지하철이 달리며 다시 한 번 확연하게 갈라놓았다. 마실 가는 범위는 노포동과 동대신동으로 넓어졌지만 진정한 의미의 마실길은 없었다. 온천 2호교는 똥다리로 불리었고, 난 고문과 옥독(獄毒)의 후유증으로 마실 대신 집에서 칩거하는 날이 많았다.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썼다.
· 에피소드 4 : 맑은 물 문학시대
내 최초의 소설 '살아있는 무덤'을 탈고하면서 악취가 나는 똥다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인생의 격정을 인내했다. 단편 '살아있는 무덤'으로 등단한 뒤 지구를 파내려가는 심정으로 계속 글을 썼다. 이후 베스트셀러도 냈고, 권리를 반감시키고 의무를 배가시키는 결혼도 했다. 그동안 구청장이 네댓 번 바뀌면서 온천천은 환골탈태를 했다. 한 구청장이 온천천 바닥을 시멘트로 깔면, 다음 구청장이 깔아놓은 시멘트를 다시 벗겨냈다. 낙동강물이 유입되고 생활하수가 분리 처리되면서 온천천은 서울의 청계천보다 더 맑아졌다.
지금은 천변에 매운 향 날리는 찔레꽃이 피고, 물속엔 물고기와 개구리가 뛰놀고 해오라기가 찾아오고 수달까지 봤다는 목격담도 있다. 다리의 길이는 어쩔 수 없지만 폭은 두 배로 넓어진데다 주차장과 연결되어 평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차량사고도 증가해 바닥에는 스키드 마크와 스프레이 자국이 난무하고 천변 양쪽의 풍경도 확연히 달라졌다. 건너 편 상가는 더욱 화려해지고 이쪽 주택가는 온통 아파트 숲이 되었다. 피곤해 누운 황소 허리 같은 금정산과 윤산 산비탈에 촘촘히 들어섰던 허름한 건물들은 재개발되어 모두 말쑥한 고층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난 지난 35년 동안 이 다리를 무수히 넘나들며 외출과 귀가를 반복했다. 이념과 순수를 넘나들었고, 거시와 미시, 서양과 동양, 사회와 가정, 세계와 자아를 나들이하다 나의 심신은 파김치가 되었고, 나의 걸음걸이는 철지난 쑥처럼 쇠어버렸다.
· 에피소드 5 : 새로운 마실 길
그런데 언제부턴가 외출과 귀가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리 위의 길이 아니라 바로 다리 밑의 길이다. 양극화된 세계를 나누며 걷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며 산책하는 길이다.
이 다리 밑 천변길은 양극화된 두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면서 두 세계를 아울러 융합하는 예술과 철학의 길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념과 순수, 사랑과 미움, 서양과 동양, 사회와 가정, 세계와 자아,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임계점(臨界点)은 없다. 온천천변은 외출과 귀가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그레이 존(gray zone)'이고, 창조적 공간이며, 사색의 길이다. 일과 휴식 사이에 존재하는 재충전의 공간이고, 바로 내 영혼의 산책 길, 마실 가는 길인 것이다.
요즘 바람이 소슬해서 체육복 대신 등산복을 입고 마실을 간다. 닳아진 문지방처럼 나이가 든 지금, 배꼽이 점점 깊어지고 뱃살이 두터워진다. 소변 뒤 불쾌한 잔뇨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다리 밑 교각에는 어떤 젊은이가 검은 색 스프레이로 '당신의 추억까지도 지키는 호위무사'라는 문구를 크게 써놓았다. 35년 동안 이 마실 길을 다니며 지킬만한 값어치 있는 추억은 얼마나 쌓았을까.
오 분마다 지하철이 지나간다. 지하철은 부산역과 이어져 서울을 넘어 멀리 시베리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의 실크로드에 이른다.
하지만 분단에 의한 철도 중단점이 있는 한 열차는 한 번도 통일의 목적지에 도착한 적이 없다. 나의 문학도 죽는 날까지 이 걸음으로 마실 길을 걸어갈 것이다.
김 하 기 소설가
◇약력: 1989년 창작과 비평에 단편 '살아있는 무덤'으로 등단. 작품 '완전한 만남'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 '식민지 소년' 등. 신동엽 창작기금, 부산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