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대 설날 합동세배를 하고 있는 전남 담양군 금성면. 합동세배가 이어져 오다 인구감소로 사라졌다.
25일 합동세배가 열리는 광주 남구 다목적체육관에 90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세배를 받기위해 들어오고 있다.
올해 네번째로 열리는 광주 남구 합동세배가 400여 명의 어르신 등이 체육관에 참석한 가운데 마주보고 세배하고 있다.
(기고) 전통 명맥 잇는 광주 남구 합동세배
나경택 대한노인회광주남구지회
설이 지나고도 한참 뒤인 2월 25일, 광주 남구 다목적체육관에 4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르신과 젊은이, 기관장과 의원, 그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들이 한자리에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합동세배다.
요즘 세상에 이런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방증일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남 농촌 마을 곳곳에서는 설날이면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담양 금성면, 나주 반남면 대안리 등 같은 마을에서는 각 집에서 차례상을 직접 들고 나와 마을회관 마당에 모였다. 덕석을 깐 마당에 차례상이 줄지어 놓이고, 그 뒤에는 부모님이 앉아 있고, 앞에는 자녀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나란히 섰다. 온 마을이 한 가족처럼 함께 절을 올리고, 음식을 나누고, 윷놀이로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나 저출산과 고령화, 도시로의 인구 유출이 겹치면서 그 풍경은 하나둘 사라졌다. 마을에 사람이 줄자 전통도 함께 희미해졌다. 합동세배는 기억 속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4년 전, 광주 남구에서 그 명맥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한노인회 광주남구지회(지회장 나각균)가 도시 속 농촌지역이었던 대촌동에서 오래전 중단된 합동세배를 되살려 남구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이제 매년 설이 지난 후 다목적체육관에서 열리는 남구의 명물 행사로 자리 잡았다.
시골의 합동세배와 도시의 합동세배는 형식은 달라도 정신은 같다. 차례상 대신 예술단의 노래와 태권도 시범, 유치원생들의 재롱이 흥을 돋우고, 체육관 가운데를 사이에 두고 어르신과 젊은이가 마주 보며 절을 올린다. 세뱃돈이 오가고, 덕담이 넘치고, 떡국 한 그릇으로 마무리되는 이 자리는 세대를 잇는 따뜻한 다리가 되고 있다.
나각균 지회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올해 상징인 붉은 말처럼 힘차게 출발하는 남구 어르신들이 됩시다"라고 말했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다. 힘차고 씩씩하게, 거침없이 달려가자는 덕담이 체육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세배를 받으러 누구보다 먼저 행사장을 찾은 봉선포스코A 경로당 정병원(84세) 회장은 30여 분을 걸어왔다고 했다. "건강하니까 걸어올 수 있지요"라며 웃는 그의 얼굴에는 전통을 이어가는 자리에 함께한다는 뿌듯함이 배어 있었다. 봉선2동 지역사회보장협의회 윤성운(70세) 위원장은 "우리 민속 전통이 남구에서나마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이 행사의 의미를 오롯이 담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헌신해 온 박중자(89세), 오순란(76세), 윤정임(71세) 세 할머니가 노인발전유공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알려진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미담이 아닐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는 오랫동안 음력 1월 1일을 '구정(舊正)'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이 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으로 격상시키고 음력 설을 낡은 것으로 격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우리의 명절. 이제는 당연히 '설날'이라 불러야 한다.
합동세배를 되살리는 일도 같은 맥락이다. 잃어버렸거나 잊혀진 것들을 제 이름으로, 제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 그것이 문화를 지키는 일이고,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다.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명절의 의미가 점점 희석되는 시대다. 세배는 번거롭고, 한복은 불편하고, 모이는 일 자체가 낯설어진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4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고개를 숙이는 풍경은 단순한 행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통은 박물관 유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몸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광주 남구의 합동세배가 바로 그 증거다.
올해도 어김없이 울려 퍼진 덕담 한 마디가 긴 여운을 남긴다.
"광주 남구 어르신들, 세배 받으시고 만수무강하기를 바랍니다."
그 말속에는 세대를 초월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이 이어지는 한, 우리의 설날도, 세배도, 전통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 기고는 광주매일에 보냅니다.
첫댓글 확인 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