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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탐방기
․ 박부호 / 朴富鎬․(제11기)
동국대학교 지역 개발 대학원 제 11기생의 해외 연수 일정에 따라 1995년 1월 18일 출발하여 23일까지 5박 6일 동안 줄곧 천혜의 자연 휴양지로 각광 받는 베트남의 호치밍시(구.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여행을 이 지면을 통해서 소개하고저 한다.
1. 개요
1) 지리
풍부한 자원과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는 베트남은 남지나해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S’자형의 나라로, 메콩 강과 송코이 강 일대는 광활한 곡창 지대를 이루고 있다.
인구는 약 7,000만 명이며, 국토 면적은 32만9,566km이다. 이는 이탈리아 보다는 조금 크고, 일본 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다. 북쪽으로는 중국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라오스, 남서쪽으로는 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2) 역사
BC 111년에 베트남 왕국이 멸망한 이후로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구 서기 938년에 중국 원정군을 몰아내고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왕국을 이뤘으나,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의 침입을 받으면서 또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공산 세력에 의해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6년에 프랑스와의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으며, 8년 후인 1954년에 제네바협정이 체결되면서 북위 17°선 근처를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사회주의 체제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 남쪽에는 반공 체제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정부가 각각 수립되었다.
1960년에 남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지하 활동을 시작하면서 남베트남 전역은 다시 게릴라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곳곳에서는 쉴새없이 테러가 발생하고 정부는 쿠데타의 악순환을 겪어야만 했다.
마침내 1973년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해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1975년 4월 30일에 당시의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을 함락시키면서 20여 년을 끌어온 지루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76년 4월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의회를 구성했고 7월에는 공식적으로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월남(남베트남)과 월맹(북베트남)으로 불리던 두 분단 국가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통일국가인 ‘베트남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기후
북회귀선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고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열대몬순기후를 보인다. 베트남의 연평균 강우량은 약 2,000mm이며 북부지방은 6~7월, 중부와 남부지방은 8~9월에 비가 많이 내린다. 호치민의 연평균 강우량은 1,800mm내외인데, 우기에 해당하는 5~10월 사이에 전체 강우량의 85%가 내린다.
연평균 기온은 우기의 경의 평균 최저기온이 24℃(10월), 최고기온이 33℃(5월)를 나타내며, 건기에는 최저기온이 21℃(1월)까지 내려가는 반면, 최고기온은 35℃(4월)까지 올라간다.
4) 문화
역대 왕조 사이의 분열항쟁과 프랑스에 의한 식민정치, 그리고 제네바 협정에 의한 남북분할 등 여러 가지 분열 요소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민족적으로나 언어적, 문화적으로 통일된 국민성을 끈질기게 지켜왔다.
BC 300년 경 이미 베트남에는 ‘돈손문화’ 라는 독자적인 문화 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 탄오아성 돈손에서 발굴된 청동의 북이 바로 그 증거인데, 이는 그 당시에 이미 채광, 합금, 용광기술 등이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돈손문화’는 베트남 북쪽의 일부 산지와 남쪽의 말레이 반도까지 뻗어 나갔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베트남의 각종 문화, 예술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5) 주민. 언어
전체 인구의 약 90%가량을 베트남인 (비엣 족 또는 킨 족이라 불림)이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중국인을 비롯하여 소수민족인 타이족, 먀오족, 크메르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수의 베트남인들은 사회의 지배 계층과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대부분 평야 지대에 거주하면서 논농사를 짓고 있다. 이와 반대로 소수민족의 대부분은 산악 지망이나 고원지대에서 촌락을 이룬 채 화전민 또는 유목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베트남의 공용어는 베트남어(킨어)이다. 같은 말이라도 소리의 높고 낮음과 발음의 길고 짧음에 따라 각각 뜻이 달라서 외국인들은 배우기가 무척 힘들다.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호텔이라든가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경우에 따라 영어, 중국어, 일본어, 불어 등이 사용되기도 한다.
6) 종교
1976년에 종교활동의 자유가 헌법으로 제정된 이후로 각 종교 단체들이 꾸준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베트남 국민의 대다수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16세기에 포르투갈 신부들에 의해 전파된 천주교가 ‘제2의 종교’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밖에 1900년대 초에 들어온 기독교(개신교)는 다소 교세가 약해서 전국에 걸쳐 30만 명의 신도가 있을 뿐이며, 아주 오래 전에 중국인들에 의해 전파된 도교 역시 한때 민간신앙으로 크게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극소수의 신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2. 출발
우리가 과거 월남전 중에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우호국(우리나라와 1958년에 대사급 외교 관계였음)이었으나, 1975년 4월 30일 패전으로 공산화 된 이래 1987년에 베트남 정부가 경제 개방화를 선언한데 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공식 참가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1993년 1월 8일에 정식으로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고, 1993년 6월부터 대한항공이 21년 만에 호치민에 운항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공산주의 국가로서 미지의 베트남 여행을 향하는 마음은 과거 성장 과정에서 배운 공산주의 체제하의 나라에 들어선다는 두려움과 말로만 듣던 우리나라의 1960년대 생활 실상 그대로를 소위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간다는 호기심을 가질 수 있었다.
지역 개발 대학원 원우님 및 가족들이 모인 것은 일정상 1월 17일 22:00시 경주역 앞에서 관광버스로 울산, 포항지역 팀과 합류하여 출발을 했다. 새벽 3시에 김포공항 주변의 나이아가라 호텔에서 사우나를 마치고 7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09:15분에 베트남 항공 VN 939기 편으로 이륙을 했다.
1984년 4월 29일 현대건설 소속으로 중동지역 이라크에 근무차 날아가면서 해외여행 비행기는 두 번째로 타보는 것이 되었다. 당시 주변의 태국과 싱가폴 그리고 쿠웨이트를 기착한 바 있어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해외 나들이라 이젠 보편화된 해외여행 자유화로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서 대단한 각오와는 달리 탑승한 베트남 항공의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의 기내 써비스와 비행기 자체가 웬지 모르게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00여 명의 탑승객 속에 우리 일행만이 한국인으로서 30명 나머지는 베트남 자국민의 과거 패망 전후 보트 피플 내지는 해외에 체류하다 마침 구정 설날(춘절)을 맞이하여 귀향하는 인파들이었다. 2시간 30분여 동안의 비행으로 12:00경에 사이공의 탄손 누트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결국 시차에 의해 현지 시간으로는 2시간 늦은 10시가 되는 셈이었다.
3. 입국/1일차
비행중 가뜩이나 긴장한 가운데 기체가 갸우뚱 하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중하는데 입국 수속 절차 역시 심사대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자국민은 그냥 통과하는데 외국인은 들어서자 마자 푸대접이었다. 군복을 입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피기만 할 뿐 별다른 것 없이 시간만 소비하여 2시간여 만에 입국 수속 절차에 의해 공항을 빠져 나왔다.
수많은 자국민 친지들의 환영 인파와 자전거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 왔다. 단지 버스라고는 우리를 맞이하는 1대 뿐이었다. 현지 합작 법인인 여운공사 소속으로 호치밍시에서는 15대뿐인 최신형인 현대자동차의 리어엔진 대형 버스였다. 버스를 이용하여 먼저 베트남에서의 처음 식사인 중식을 위하여 이동했다. 다행이 날씨가 우리나라의 5, 6월 기온이었다. 시내로 들어서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보다 자전거, 오토바이가 워낙 많다보니 자동차는 상대적으로 작을 수 밖에 안 보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전거, 오토바이 그리고 대중유료 택시격인 시클러(삼륜 인력거)가 2~4명씩 타고 다니는 것이다. 시내의 아름드리 가로수가 즐비한데 밑둥치에 하얀 페인트가 뭐냐하니 밤에 사람들이 술을 먹고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니 나무에 해가 되지 않도록 약을 칠해 놓은 것이라 한다.
해외 여행에서 제일 문제인 식사는 현지 가이더가 가능한 한식당으로 배정해 놓아서 다행이었다. ‘코리아나 한식당’ ‘아리랑 한식당’ ‘인삼 가든(보신탕 전문점)’ ‘국제 한식당’ ‘ABC 한식당’ 등으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돼지 불고기를 위주로 김치 등이 있어 별 어려움은 없었고, 물론 준비해간 고추장, 된장, 컵라면, 진로 팩소주 등등 있어서 식사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다. 단지 당일 저녁 현지식으로 뷔페였는데 도대체 향내음이 나고 밥이 안남미 쌀로 되어 있어 곤욕을 치루는 가운데 빵과 닭고기 요리와 야채류 몇 가지로 해결 할 수 밖에 없었다.
중식 후 시내 중심가를 관광할 수 있었다. 구한국대사관, 주월사령부, 구미국대사관과 노틀담 성당(NOTRE DAME CATHEDRAL : 프랑스 통치 시대인 1880년에 세워진 것으로 호치민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건축에 소요되는 자재를 모두 프랑스에서 날라다 만든 이 성당은 호치민에 남아있는 프랑스식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성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경주에서도 흔히 보는 잡상인들(화폐, 우표, 기념품 등)그리고 어린애들의 야자수 판매와 심지어 구걸하는 거지들이 따라 다녔다. 현지 가이더가 일체 금품을 주지 말라 했는데 한 원우가 1달러를 주니 어디서 왔는지 수십명이 달려들어 너도나도 돈을 달라고 해서 곤욕을 치루었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첫 숙소인 동경 국제 여점(DONG KHANH HOTEL)에 투숙하여 짐을 풀었다. 호텔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저녁식사를 현지식으로 하고 ROOM MATE와 둘이서 호텔 4층에 있는 가라오케를 찾아서 사이공에서의 첫날을 술 1잔과 함께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한국 가요 디스크가 없어서 아는 팝송과 현지인의 알지도 못하는 베트남 노래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1시간여 동안 맥주 8병에 과일안주 2쟁반해서 40달러(32,000원)가 소요되었다. 그중 팀이 5$씩이고 놀라운 것은 중간 중간에 물수건을 갖다 주길래 써비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중에 계산서에 물수건 1개에 1달러씩이란다. 아무튼 국내와 비교 안되는 경험으로 치고 기분 좋게 숙소에 내려와 샤워와 함께 에어콘을 가동시켜 놓고 잠을 청했다.
4. 2일차
새벽 5시쯤(국내 시각 7시)에 기상을 해서 호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자전거, 오토바이가 요란하다. 세면후 호텔 주변을 한바퀴 돌아 다녀 보았다. 길가엔 카페란 곳이 간단하게 차와 식사를 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군데군데 많이 눈에 띄었다. 한 뒤켠에는 장례차인 모양이었다. 울긋불긋 장식(붉은 색을 많이 선호함)한 차량으로 돈 있는 집안이면 요란하단다. 보통 7~10일장이고, 돈이 없으면 2~3일장을 해서 빈부의 차가 격심한 것을 어느 정도 느낄 수 가 있었다. 조식(매번 호텔에서 양식)을 마치고 관광버스로 월남전의 치열했던 쿠치터널(지하 땅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쿠치터널(CHCHI TUNNEL)이라는 곳은 호치민에서 서북쪽으로 약 70km 가량 떨어진 1시간 30분 거리의 ‘쿠치’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땅굴이다. 베트남전 당시에 남부 공산군(일명 베트콩)들이 캄보디아의 국경 근처에다 근거지를 두고 호치민을 공격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땅굴을 파서 만든 지하 요새이다. 한때 미군은 이 지하 요새를 폭파시키기 위해 이곳에 대한 많은 정보를 입수한 뒤 무차별 폭격을 시도한 바 있었으나 끝내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해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땅굴 곳곳에는 수십 명이 함께 생활 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식당, 숙소, 회의실, 산소 호흡실 등이 만들어져 있다. 베트남전 당시 2개의 연대병력이 항상 이 땅굴 속에 머물면서 게릴라전을 펼쳤는데, 현재 이곳은 국방부 산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는데, 관광객들은 현역 군인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땅굴 속의 주요 시설물들을 둘러볼 수 있다. 아울러 땅굴 근처의 미니 사격장에서는 진짜 총으로 직접 사격을 해 볼 수도 있다.
쿠치터널은 땅을 수직으로 내려가서 지하 2~3층 또는 깊이 30m에 총길이 200km의 베트콩 지하요새로 사람 하나가 허리를 구부리고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개미집 같은 미로들로 연결된 곳이다.
쿠치를 왕복하면서 길가로 끝없이 펼쳐지는 열대식물과 함께 시골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시내로 다시 되돌아와서 던하우 사찰과 비엔나 사원을 구경했다. 입구에서 10살 정도되어 보이는 어린애(?)가 젖먹이를 안고서 “MY BABY"하면서 배고픈 시늉을 하고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며 이사람 저사람 따라 다녔다. 참으로 과거의 많은 생각을 하겠끔 했다. 사원에는 많은 신도들이 붐볐으며, 마침 학교와 가까워서 아오자이를 입은 여학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가이더 왈 갑자기 비가 오면 학교 앞은 온통 자전거, 오토바이 사고로 아수라장이란다. 아오자이가 비에 젖은 몸매를 돌아보다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나...
이후 역사 박물관에서 구경을 하면서 베트남의 어려워던 과거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으며, 키가 1m 50정도의 미이라도 볼 수 있으며, 베트남의 특이한 세계유일의 수상 인형극 “물위의 인형나라”를 관람했다. 물위에 지어진 붉은 기와 누각을 배경으로 목각 인형들이 나와서 베트남 민중들의 소박한 삶과 꿈 그리고 신화 등을 줄거리로 환상적인 무대를 꾸민다. 저녁에는 시내 중심가의 번화가에 있는 한 나이트 클럽을 찾았다. 젊은 나이의 소위 말하는 베트남 오렌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삼삼오오 거닐어 다니는 과히 공산주의 체제하의 빈부격차가 엄청남을 알 수 있었다. 씁쓸한 맛의 맥주 몇 잔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5. 3일차
이른 아침 조식 후 붕타우로 향했다. 호치민시에서 남쪽으로 약 125km 가량 떨어져 있어 시간상으로는 약 2시간 거리의 붕타우는 전형적인 열대기후의 영향아래 있어 1년 내내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자연 휴양지로 해안선 길이만도 10km에 이른다. 또 손가락 사이를 솔솔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와 완만한 수심을 자랑한다. 긴 백사장은 남국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며 해수욕객이 붐비는 우리나라의 부산 해운대 같은 곳이며 주변에는 GOLF장 건설을 해 놓아 레져도 즐길 수 있게 해 놓았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미군과 주월 한국군의 휴양소가 위치해 있기도 했던 곳이다.
볼거리로는 옛 프랑스 총독의 별장인 화이트 팰리스와 언덕위의 우뚝 팔을 벌리고 서있는 높이 30m의 하얀 예수상은 함락된 월남을 뒤로하여 보트 피플들이 작별의 눈물을 지으며 떠나가던 곳이다. 예수상의 안으로 올라가 주위를 관광할 수 있으며, 제작년도가 오래된 프랑스 지배하의 거대한 포신도 2개가 나란히 같이하고 있다. 그곳 PALRES HOTEL에서의 하룻밤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놀라운 것은 엄지손가락 만한 도마뱀이 식당이고 객실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천장과 벽을 타고 옮겨 다니니 몇 번씩이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6. 4일차
이튿날 식사 후 호치민시로 출발했는데 30분쯤 오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베트남에서는 호텔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거니와 여권을 매번 카운터에 주었다가 다시 체크아웃 할 때 찾아와야 하는건데 가이더가 미처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호치민에서 붕타우 쪽으로는 시외버스가 많이 눈에 띄었다. 60년대의 우리네 모습 그대로 앞뒤 차장이 있고, 특이한 것은 버스 지붕 위에 자전거와 물건들을 가득 실을 수 있고 또 드럼통이 2개씩 운적석 위에 얹혀 있다. 그건 날씨가 더운 관계로 엔진냉각수 보충이란다. 그곳 기술이 라지에타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 수준이 못된다는 얘기다.
사이공을 지나 메콩 델타를 여행했다. 메콩 델타는 아시아 최대의 곡창지대인 곳으로 호치민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는 미토에서 현지인들이 운영중인「메콩 크루즈」를 즐길 수 있다. 나무배에 올라 정글을 바라보며 갈색 빛이 감도는 메콩강의 웅대한 흐름 속으로 흠뻑 빠져드는 기분이다. 유람선으로 삼각지 타이손 섬에 건너가 열대과일을 다양하게 맛보았다. 망고, 랑브탄, 바나나 등이며 그곳에서 바나나가 1년초인 것을 처음 알았다. 메콩강은 길이가 4,200km로서 티벳,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과 연결되어 있는 강줄기이며 앞으로 교통로로 향후 관광지로 개발 프로젝트 중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그곳을 빠져나와 뱀농장을 거쳐 호치민시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 펼쳐지는 시골 농촌 풍경은 장관이었다. 길 한쪽에서는 모심기가 한창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확을 한다고 벼베기와 특유의 타작을 군데군데 하고 있었다. 열대지방의 2모작 실제 그대로를 볼 수가 있었다. 중식을 한 후 오후에 호치민시에 들어와서는 전쟁 박물관을 보았다.
전쟁 박물관(EXHIBITION OF WAR CRIME)는 프랑스 통치시대 때 사용하던 단두대를 비롯하여, 베트남전에 사용되었던 각종 전적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내부 전시실에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잔악상을 고발하는 수많은 화보들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이 박물관은 최근 들어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고엽제의 피해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데에서 관광객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고엽제 피해로 사산된 쌍머리, 팔다리가 없는 애기들을 알코올에 담겨져 있는 모습을 보면 온몸이 소스라 치는 전쟁 실상이라 하겠다.
7. 5일차
일정에 따라 시내 어느 곳에서 시클러 관광 대기 장소에서 예약해 놓은 시클러가 각자 1명씩 30대가 줄을 지어 시내관광을 했다. 비용을 1인당 1달러씩. 시내 중시미가를 위시하여 벤탄 시장과 차이나타운 그리고 사이공 강변으로 해서 시가지 관광을 마치고 마지막 관광지인 대통령궁(일명 독립궁)으로 향했다.
독립궁(REUNIFICATION HALL)은 구 월남 정부 대통령 궁이다.
옛 총독부 건물인 이곳은 1868년 프랑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당시에는 노로돔궁(NORDOM PALACE)이라 불렸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1975년 4월 30일에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항복을 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62년에 공산주의자의 폭격을 받았으나, 6년 후인 1968년에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인 ‘고비엣투’의 설계로 재건축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하에는 전시 종합상황실이 자리잡고 있으며, 1층에는 각료 회의실과 식당, 2층에는 대통령 접견실과 국서 제출실, 3층에는 대통령 전용의 식당과 극장, 그리고 4층은 대통령 전용 연회장이 있다.
“사이공 최후의 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장소, 소련제 탱크가 대통령 궁 철문을 부수며 진압하고 월남의 마지막 대통령 두웅반민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과 함께 “강물을 둘로 가를 수 없다.”는 호치민 어록이 걸려있다.
옥상에는 미처 뜨지 못한 헬리곱터 한 대가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과거를 말해주듯 앉아 있었다.
저녁에는 사이공에서의 마지막 밤이자 이별의 선상 디너가 있었다. 사이공 강에서 야간 유람선에 승선하여 저녁을 겸한 선상쇼를 보는 관광이 베트남 야간 관광의 참맛이었다. 현지인으로서는 35~50달러의 월급으로는 선상에 오르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란다. 디너쇼에서는 한국 노래도 직접 생음악으로 들려주었다. “도라지, 아리랑, 돌아와요 부산항,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등등” 유유히 흐르는 강을 따라 서서히 움직여 3시간여 동안 유람을 하면서 “식사와 노래”중에 한국의 위상이 덧 보였다. 앵콜과 함께 같이 불러보는 아리랑 등 콧등이 시큰할 정도였다. 과연 우리 한국이 잘살고 있구나(?)하고 해 본다.
아쉬움과 함께 20:00에 하선을 해서 5일 동안 같이 다니던 관광버스로 귀국을 위한 공항으로 이동했다.
8. 귀국 / 소감
사이공에서의 감회 그리고 아쉬움과 미련을 가지고 공항에서 또 한차례 소동을 겪으면서, 계획된 베트남 항공이 사정상 아시아나 항공으로 바뀌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랐다. 기내 서비스는 물론이고 벌써 국내에 도착한 것 같았다. 상냥한 기내 방송과 첨단화된 항법장치로 현재 위치, 시간을 알려주며 비행한다는 마음으로 위스키 한잔 술에 피곤함이 몰려 잠이 들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고 느낀 바가 크다. 적대시한 나라에 무사하게 관광을 마치고 왔으며, 한국의 국제 신장력의 과시와 전쟁의 상혼이 아직도 그들에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월남이 경제성장 할려면 “아오자이를 벗겨”라는 말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천혜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베트남의 북부지방 하노이를 위시하여 다녀오리라 생각해 본다.
buhopark@yahoo.co.kr
http://myhome.naver.com/buhopark
쿠치 터널 입구에서 원우님들과 함께 /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첫댓글 "베트남 연수를 다녀와서"
https://cafe.daum.net/kjsojin/Wrpq/11?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