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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관한 斷想, 그리고 서울 둘레길 6구간
들국화 / 정비석(鄭飛石)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개인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純粹)한 감정이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 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 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은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인 것이다.
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불현듯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을볕이 포근히 내리비치는 신작로(新作路)만 바라보아도, 어디든지 정처 없는 먼 길을 떠나 보고 싶은 충동(衝動)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한히 외롭고 서글픈 때문이리라.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섬돌 밑의 귀뚜라미나 창호지에 넘치는 달빛, 문풍지를 울리는 산들바람, 가을볕 포근한 신작로가 아니어도 가슴을 후벼 파는 까닭모를 외로움과 서글픔에 저절로 신발끈을 매게 되는 계절. 추석을 맞으며 이제는 많은 것들이 사라진 쓸쓸한 연휴를 보냅니다. 시집간 딸이 외손주 앞세워 떠들썩 들어서는 것도 아니고 남남처럼 서먹한 아들이 며느리와 집에 와 겉도는 것도 없는 추석. 그나마 차례를 집에서 지내기에 추석날 오전 한때 사람들 구경하곤 이내 적막강산이 되는 추석입니다.
참으로 속상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민망하고 챙피하여 말은 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을 겪으니 가을, 추석, 가족 이런 것들이 뒤엉켜 집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나선 행선지가 서울 둘레길 6구간. 전에 석수역에서 독산역까지 한시간 정도의 길은 걸었기에 이번에는 독산역부터 출발합니다. 9시.
일기예보는 비가 온다 하였지만 날씨는 쾌청입니다. 추석 지난지 이틀이나 된 까닭인지 산책로에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삽상한 가을 바람의 시원한 감촉, 천변의 갈대, 코스모스를 비롯한 가을 꽃. 이런 것들이, 이제 그립기는 하나 되돌아가기는 꺼려지는 유년 시절 추석의 기억들이, 시간의 순서와 관계 없이 불쑥불쑥 솟아 오릅니다.
추석 하면 무엇보다 송편이 생각나지요. 어려서 집에 있을 때나 학교 다니느라 하숙집에 있다가 집에 갔을 때도 집에서는 언제나 쌀을 빻아 가루를 반죽하여 놓고 추석 차례음식 만드는 분들 외에 손이 남으면 으레 둘러 앉아 송편을 빚곤 했습니다. 쌀은 귀하므로 적은 쌀로도 송편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송편 피를 얇게 펴야 했지요. 하긴 얇을수록 맛도 좋았습니다. 송편 속은 콩고물이나 팥, 동부 등을 불려 껍질을 벗기고 찐 거피 고물, 때론 귀한 참깨로 속을 넣기도 하였고 논두렁의 방콩, 깐 햇밤 등이 속으로 들어 가기도 하였습니다. 흑임자라고 하는 검은 깨나, 참깨, 밤, 방콩, 동부 등이 맛이 있고 거피 고물도 맛이 좋았지만 콩고물은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찌어 놓은 송편 중 무엇이 속에 들었나 골라서 먹어보는 재미가 있었지요. 좋아하는 속이 들었을 때는 좋지만 덜 좋아하는 송편은 마지 못해 먹곤 하였습니다. 그중, 거피 고물은 좀 쉽게 쉬기도 하였습니다. 송편은 될수록 자그마하면서 반달 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들고 겉 모양을 예쁘게 다듬곤 하였습니다. 상위에 솔잎을 깔고(솔잎은 대개 아이들이 뒷동산 소나무에서 뽑아다가 깨끗이 씻어서 사용하였지요.) 송편을 만들어 깔아 놓고 다 만들어 지면 가마솥에 떡시루를 얹고 솔잎 깐 채반 위에 송편 얹고 솥뚜껑 닫고 시루와 가마솥 사이는 밀가루를 갠 시루번으로 틈을 막고는 불을 때서 익힙니다. 갓 쪄낸 송편의 그 따끈따끈한 맛이라니. 차례를 지내고 나서는 대개 이웃에 송편을 돌리지요. 다른 집 송편도 고루고루 맛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이런 추석 풍경은 없지요. 난 이번 추석에 동네 방앗간에서 송편을 샀습니다. 우리고향 송편의 모양이 아닌, 그냥 동들동글한 송편입니다. 그것도 꽤나 비싸 두 그릇 채 못 담을 것 같은 한 팩에 만원이나 합니다. 두 팩을 샀습니다. 추석 차례는 초헌, 아헌, 종헌 하지 않고 단잔입니다. 그래서 기왕 제수를 마련한 김에 고조, 증조, 조부, 부모님 4대를 한잔 씩 올리기로 하여 조부까지 메와 갱만 갈고 잔 올리고 부모님 제수는 또 한 벌을 올립니다. 송편으로만 차례를 지내자면 8그릇의 송편이 있어야 하기에 너무 많다 싶어 송편은 떡처럼 놓고 메와 국을 놓고 차례를 지냈습니다. 차례지내고 송편을 먹어보니 송편 피를 두껍게 한 소위 살떡입니다. 어렸을 때는 쌀이 귀하고 두태(콩 종류)가 싸니까 피를 될 수 있는 한 얇게 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속이 비싸고 쌀이 싸니까 피를 두껍게 한 살떡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향에서는 차례를 지내고 나서 바로 산소에 성묘를 갔습니다. 예전에 산은 보리 풀하고 바닥 풀하고 7월 나무하고 틈틈이 꼴 베고 낙엽 긁고 하니 산이 그야말로 반들반들하지요. 지금처럼 숲이 우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만큼 성묘하는 산길은 오르기 수월하였습니다. 그래도 성묫길에는 가끔 머루 덩굴에 달린 까만 머루를 따먹기도 하고 간혹 숨겨진 으름 덩굴 발견하여 벌어진 으름을 따 먹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우리 산 가는 길에는 뽀리똥이라고 하던 보리수 나무가 있어 떫고 단 그 빨간 열매를 한 주먹씩 따 먹기도 하였습니다. 가시덤불 속에 빨간 맹감 나무 열매도 있었지만 그 것은 별로 먹을게 없었지요.
선친 성묘를 마치면 멀리 있는, 나는 몇 번을 다녀도 외워지지 않는 고조, 증조, 조부 등 조상 묘 성묘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구굴미,오인리,삼바실이라고 하는 지금의 공주, 합강 등으로 성묘를 갔는데 난 그것이 참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조상을 당연히 섬기던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사이에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네 어른 들이나 친척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설날처럼 세배를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러 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집에도 가고요. 그럴때면 주당인 나는 단연 그 집들의 술에 관심이 집중되었지요. 대개 명절이면 차례지낼 술들을 집집마다 빚었습니다. 그리고 그 술맛은 집집마다 달랐지요. 어느집 술이 맛이 좋다는 건 대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보라색이 도는 맑고 투명한 그 동동주의 감칠 맛이라니. 나는 단연코 세상의 어떤 술보다 고향의 그 동동주가 최고로 맛이 있습니다. 은연 중 취했다가 슬그머니 깨는 그 술. 지금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 갑니다. 요새는 고향에 가 보아도 그런 술을 담그는 집은 없습니다. 고등학교 동기 하나가 등산길에 가져 오는 자기가 빚었다는 술이 그래도 비슷한 멋을 내기는 합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술은 누룩 빚기부터 시작입니다. 밀가루를 빻고 그 껍질인 밀기울을 띄워서(숙성시켜서) 누룩을 만듭니다. 그리고 고두밥을 지어서 말리고 고두밥과 누룩을 1대1로 섞고 옹기 단지에 좋은 물을 역시 1대1로 섞어 앉히고 솔가지 들을 넣어 이불로 감싸 둡니다. 며칠 지나 단지 안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다가 술 지거미가 퐁당 갈아 앉으면 이불을 걷어 내고 쌀랑하게 식힌 다음 용수를 박고 술을 뜨지요. 이걸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하면 술이 시거나 덜 익은 술이 됩니다. 난 예전에 몇 번 담아 보았는데 영 그 맛과 향, 빛깔이 나지 않아 포기 하였습니다.
명절 음식 중에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두부입니다. 콩을 불려 맷돌에 갈고 끓여서 콩물내고 간수 쳐서 두부를 만들면 불때어 뜨끈한 아랫목에서 몽글몽글한 순두부에 간장쳐 한 그릇 먹는 맛과 두부 틀에서 갓 꺼낸 뜨끈힌 두부를 간장에 찍거나 김치에 싸서 먹는 그 맛이라니. 난 지금도 두부를 그렇게 좋아 합니다. 거의 모든 국에 두부를 넣기도 하고 전처럼 부쳐낸 두부 부침도 좋아 합니다.
순두부는 또한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아침 밥 먹기 전 시장기를 면하기 위하여 한 그릇씩 사먹던 때가 있었습니다. 리어커에 큰 옹기 단지를 싣고 그 속에 담아온 순두부를 한 그릇 씩 파는 상인이 옵니다. 그러면 한 대접씩 사서 양념간장을 넣고 후루룩 마시는 것입니다. 대학 다닐 때 형님이 일하시던 국악학원이 동대문 시장 입구 건물 2층에 있었는데 1층이 셔터를 열기 전 이른 새벽, 두레박처럼 2층에서 줄로 그릇을 내리면 순두부를 담아서 올려 보냅니다. 그걸 사서 먹던 추억이 흑백 사진처럼 새삼 떠오릅니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입니다만 그때는 명절이나 마을의 큰 일이 있을 때는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직접 잡기도 하였지요. 연세가 많으신 노인이 있는 집에서는 일부러 돼지를 기르기도 하였습니다. 돌아가시면 초상 때 잡아서 쓰려구요. 그러다 건강하시면 명절에 잡아 썼지요. 돼지 잡는 풍경도 떠오릅니다. 징그러운 모습이었지요.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동네를 울리기도 하였구요. 돼지 오줌보에 짚을 넣어 벼를 베어낸 빈 논에서 축구공처럼 차기도 하였습니다.
두서 없는 추석의 상념에 젖어 안양천변 길을 걷다 보니 일부러 조성해 놓은 코스모스 길과 코스모스 밭이 장관입니다. 코스모스는 왠지 서글픈 느낌의 꽃입니다. 국화와 달리 가냘프고 여리고 안타깝고 서글픈, 그런 꽃이라서 코스모스 길은 늘 나그네의 외로운 심회를 자아 냅니다.
코스모스, 운동회
옛 고향 초등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를 열었습니다. 대개는 추석 다음 날 운동회를 하였지요. 고향을 찾은 출향 인사들, 그리고 먹을 것이 대개 많은 때이니까요. 운동회날이면 검정 팬츠 양쪽에 흰 줄을 댄 운동복과 모자는 청군 백군 모자를 썼습니다. 운동회 가는 길가엔 코스모스가 만발하였습니다. 그 코스모스를 따서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흰 운동모자를 머리에 꼭 끼게 씌우고는 힘차게 코스모스 꽃잎을 때리면 붉고 분홍의 꽃물이 모자에 들곤 하였습니다. 운동회 종목은 매년 조금씩 다른게 있지만 거의 비슷한 종목들이었습니다. 단체 종목은 대개 청백전으로 오재미로 박 터뜨리기, 공굴리기,고학년의 기마전, 마스게임의 텀블링, 곤봉체조 등이 생각나고 육상 종목으로는 1500미터 달리기, 장애물 경주, 릴레이 경기 그리고 달리기 개인전입니다. 대개 개인전 달리기나 장애물 경주 등에 상장과 상품이 주어졌는데 지금은 내가 날랜(?)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두둘바리(둔한 사람) 였는지 저학년에서 고학년까지 한번도 상품(노트)을 받아 온 적이 없었습니다. 3학년 이상이 하던 마스게임 텀블링도 얼마나 겁이 많던지 아프다고 핑계 대고 빠졌고요, 1500미터 같은 장거리 경주는 한 두바퀴 뛰다가 기권, 장애물경주도 중도에 다쳤다고 빠지거나 꼬래비가 일쑤였습니다. 기마전도 처음엔 나를, 친구들도 선생님도 기수로 태웠습니다만 한 두 번 해보곤 그 치열한 싸움이 내게는 맞지 않아 스스로 말이 되었고 그것도 기수는 못하고 뒷잡이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 운동회가 나에게는 그닥 재미있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상품 한번 못타는 두둘바리가 챙피하기도 했구요, 4학년인가 어느 해는 우리반이 가장 행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나와, 한 짝꿍이 남녀로 분장하는 부부역할을 맡겼습니다. 나보고 색시로 분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나느 죽어도 못한다고 버텼습니다. 사실 남자 형제뿐인 우리 집에 여자 옷이 어머니 것 말고는 없고 화장품 등은 더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분장이 어렵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말을 안듣는 내가 선생님은 얼마나 미웠을까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는 질색을 하고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곱상하고 예쁜 여자애로 분장하기에 내가 적절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노인 역할을 한다면서 수염 달고 담뱃대 물고 참가했습니다만 갓을 구하지 못해 운동모자를 쓰고 했으니 완전 엉터리라 선생님 속만 상하시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도시에서 오셨는데 유독 나를 귀여워 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위생도 환경도 엉망인 그 당시, 여름이면 당연히 꽁보리밥이 주식이었고 당연히 도시락을 싸도 꽁보리밥, 어느해인가는 보리 수확기에 비가 많이 와서 보리가 거의 썩어 가는 것을 그래도 보리쌀로 찧어 썩은 내가 나는 보리쌀밥을 도시락으로 싸갈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붉은 빛이 도는 썩은 보리쌀 도시락 뚜껑을 열 때 풍기던 그 퀴퀴한 썩은 내가 지금도 나는 듯합니다. 챙피하여 얼른 밥을 먹어 치우곤 하였지요. 그런 여름 어느날 점심시간에 그 선생님께서 나보고 자기 하숙집에 같이 가자시는 것이었습니다. 허름한 왕골 자리 깔고 살던 우리 집에 비하여 그 선생님의 하숙방은 매끈한 장판방이었고 선생님과 겸상으로 차려주는 내 앞의 밥은 눈처럼 흰 쌀밥이었습니다.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면 씹을 새도 없이 스르르 녹아드는 쌀밥의 그 기막힌 맛. 체면 차려 좀 남겨야겠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밥은 그만 바닥이 나던 그 면구스러움. 그 후에도 그 선생님은 한 번 더 나를 점심에 불러 주셨습니다.
나에게는 이처럼 엉망인 운동회지만 그래도 가족들은 모여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상도 못 받고, 참가한 경기도 변변치 않음에도 피곤에 절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오는 길 볏 논에 뛰어든 고라니 쫓아 뛰기도 하면서. 당시는 귀하게 보던 노루였습니다. 얼마나 잘 뛰던지 벼를 훌쩍훌쩍 뛰어넘어 산으로 달아나던 그 훤칠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운동회날 운동장 한 구석에 설설 끓던 가마솥의 국밥이며 기부금을 냈다는 쪽지가 주렁주렁 달린 줄들이며 펄럭이던 만국기, 용진문과 개선문, 청년들이나 고등학생들의 주먹 싸움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모습을 회상하며 안양천변을 끝까지 걸으니 한강과의 합수부. 탁하고 드넓은 한강을 만나 안양천은 그 생명을 다하고 한강의 탁류에 휩쓸립니다. 마치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서두 부분처럼.
한강 수변길, 길 건너에는 난지도가 옛 모습을 알 수 없게 숲을 이룬 산으로 서 있습니다.
한강변을 3.7Km인가 걸어 가양대교 못 미처 동네 숲 공원, 공원이 울창한 숲으로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12시 30분, 벤치에서 샌드위치 점심을 먹습니다. 이젠 6구간을 마쳤습니다. 6구간은 안양천변 길을 길고도 좀 지루하게도 포장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교통량이 많은 도로 옆을 줄곧 걸었기에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물론 벚꽃길은 환상적이었지만. 벚꽃 필 때는 꼭 다시 와 보아야겠습니다. 특히 행우회 회원들에게는 구일 역(구로 역에서 한정거장)에서 독산역까지 한시간 코스를 꼭 안내할 예정입니다. 구일역 근처에 식당이 없으므로 거꾸로 안내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