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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ild Swans at Coole” By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여국현 (시인/영문학 박사)
예술가와 그/그녀의 연인의 사랑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 소설로 기억되지요. 지난 호에서 보았던 엘리자베스 베렛과 브라우닝, 키츠와 브라운, 존 던과 엔 모어는 물론 단테와 베아트리체, 에드거 엘런 포와 버지니아 클렘, 로뎅과 까미유 클로델, 피카소와 도라마르,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 등이 얼른 떠오르지요. 다들 나름의 아름답고 아픈 사랑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거기에 예이츠와 모드 곤(Maud Gonne)을 빼놓으면 섭섭하겠지요. 열렬한 아일랜드 독립운동과 문화운동 활동가인 동시에 배우였던 모드 곤을 향한 예이츠의 사랑은 수많은 그의 시를 낳은 대표적인 문학적 영감의 원천으로 문학사에 기억됩니다. 하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추문을 동반한 씁쓸한 신파류의 끝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오늘은 1923년 노벨상 수상자이자 아일랜드는 물론 현대 영시를 대표하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쿨 호숫가의 백조들」“The Wild Swans at Coole”을 읽으면서 긴 세월에 걸친 모드 곤에 대한 그의 사랑과 두 사람이 함께 참여했던 ‘아일랜드 문예부흥(Irish Literary Revival)’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에는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과 좌절의 시간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아일랜드 문예부흥’ 나아가 아일랜드 독립운동과도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의 1연부터 보겠습니다.
The trees are in their autumn beauty,
The woodland paths are dry,
Under the October twilight the water
Mirrors a still sky;
Upon the brimming water among the stones
Are nine-and-fifty swans.
나무들은 아름다운 가을 색으로 물들고
숲 속 오솔길은 메말랐는데
시월의 황혼 아래 호수는
고요한 하늘을 비추고 있다.
바위 사이 찰랑이는 물결 위에
쉰아홉 마리의 백조들.
‘말로 된 그림’이라는 서정시의 특징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자연 묘사가 특징적이었던 윌리엄 워즈워스나 로버트 프로스트 시의 일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시월 황혼 무렵 호숫가의 풍경이 그대로 떠오릅니다. 특히 ‘가을’이라는 배경과 ‘메마른’이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쇠락의 분위기와 ‘아름다운’, ‘고요한’, ‘찰랑이는’ 등의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생기 있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공존이 인상적입니다. 이 상반되는 분위기와 정조야말로 이 시 전체를 아우르는 정조이자 이 시의 화자와 1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백조들’이 보이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전체 시가 abcbdd 각운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의 배경이 되는 ‘쿨Coole’ 지방은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Galway에 있는 지역으로, 예이츠의 친구이자 아일랜드 문예부흥에도 함께 참여했던 그레고리 부인Lady Gregory의 집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예이츠는 1897년 처음 이곳을 방문한 이후 대부분의 여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1연은 그런 쿨 호숫가의 풍경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행의 ‘쉰아홉 마리’라는 구체적인 숫자가 눈에 띕니다. 시에서 저런 숫자들이 나오면 가끔 궁금해집니다. 저 숫자는 무얼 상징하는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떤 중요한 의미를 담을 수 있으니까요. 완벽을 의미하는 숫자 3, 충만을 의미하는 9, 각각 행운과 불행의 상징인 7과 6, 혹은 무한과 공을 의미하는 0에 이르기까지. 왜 59였을까요? 쉰하나인 예이츠의 나이도 아니고, 특별한 상징을 담은 것 같지도 않고. 예이츠가 말해주지 않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이츠가 얼마나 정성들여 호숫가의 백조들을 보고 또 보고했는가를 말이지요. 한 해 한 해 올 때마다 가는 해를 헤아리듯 호숫가의 백조들을 세며 응답받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아프게 되새겼을 시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도 19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The nineteenth autumn has come upon me
Since I first made my count;
I saw, before I had well finished,
All suddenly mount
And scatter wheeling in great broken rings
Upon their clamorous wings.
내가 처음 백조들을 헤아린 이후
열아홉 번의 가을이 지나갔다.
다 헤아리기도 전에 나는 보았다
모두들 갑자기 솟아오르며
요란스러운 날갯짓을 하며
엄청나게 커다란 부서진 원 모양으로 선회하며 흩어져 날아가는 것을.
이 시는 1916년에서 1917년 사이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백조들을 헤아린 이후 열아홉 번의 가을이 지났다”라는 1~2행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때 예이츠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는데요, 이 시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시를 쓰기 직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다섯 번째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에게 다섯 번의 청혼을 했다? 이전의 청혼이 모두 거절당했으니 다섯 번까지 했을 텐데, 청혼한 사람도 거절한 사람도 모두 대단합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그 ‘마음’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예이츠가 모드 곤을 처음 만난 것은 1889년이었습니다. 첫눈에 그녀에게 폭 빠져버리고 만 예이츠는 2년 뒤인 1891년 그녀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예이츠 자신도 나중에 시인한 것처럼 모드 곤의 거절은 예이츠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됩니다. 당연하겠지요.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첫 번째 거절을 당한 후에도 예이츠는 포기하지 않고 모드 곤에게 세 번이나 더 청혼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모두 거절하고 1903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던 군지도자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와 결혼을 함으로써 예이츠에게 더 큰 좌절과 불행을 안깁니다.
모드 곤이 예이츠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모드 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예이츠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했지요. 더 큰 이유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대한 예이츠와 모드 곤의 입장 차이였습니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열렬한 민족주의 운동가였던 모드 곤은 상대적으로 이 같은 정치적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예이츠의 태도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예이츠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드 곤과는 달리 그는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을 통한 아일랜드의 문화적 정체성 회복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레고리 부인 등과 함께 <아일랜드 문예극장> 창설하고, 나중에는 <아일랜드 민족극 협회>를 출범시켜 영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아일랜드 고유언어로 된 아일랜드 연극을 상연하는 노력을 경주합니다. 하지만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과 선을 긋고 개인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회질서의 유지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이츠의 정치적 태도는 모드 곤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해 본 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하듯 두 사람이 정말 서로를 사랑했다면 이런 차이까지도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은 사실 처음부터 짝사랑에 가까웠고, 모드 곤은 시인 예이츠가 품은 그런 사랑의 본질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고 그녀가 곁에 없어 불행하다고 토로하는 예이츠에게 모드 곤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 물론 그렇겠지요. 당신은 당신이 불행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시를 짓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니까요. 결혼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일 거예요. 시인들은 절대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답니다. 제가 당신과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세상은 제게 감사해야만 해요.
그러니 모드 곤이 예이츠의 청혼을 받아드리지 않은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어쨌든 모드 곤이 이미 결혼을 했는데 1916년 예이츠가 다시 청혼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결혼 할 때부터 예이츠는 물론 주변의 반대가 심했던 존 맥브라이드와 모드 곤의 결혼은 순탄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불과 2년 뒤인 1905년 둘은 맥브라이드가 모드 곤과 전 애인인 밀레보이에(Millevoye) 사이에 낳은 이졸테Iseult를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불미스러운 소문과 함께 별거를 시작합니다. 이혼은 하지 못한 채 별거 상태로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1916년 4월 부활절 기간에 아일랜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일어난 부활절 봉기와 연루되어 체포된 맥브라이드가 5월에 사형을 당함으로써 완전히 끝이 나게 됩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해 말쯤 예이츠는 다시 모드 곤에게 다섯 번째 청혼을 했던 것이지요. 물론 모드 곤은 또 거절을 했고요. 이쯤 되면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은 사랑인지 집착인지 조금 구분이 안 되기도 합니다. 시의 5행에서 백조들이 그리는 ‘커다란 부서진 원’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바로 이 무수한 사실이 상징적으로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rings’는 ‘원’이기도 하지만 ‘반지’이기도 하니까요. 다섯 번에 걸쳐 거절당한 그 완성되지 못한 ‘청혼의 반지’ 말이지요.
I have looked upon those brilliant creatures,
And now my heart is sore.
All's changed since I, hearing at twilight,
The first time on this shore,
The bell-beat of their wings above my head,
Trod with a lighter tread.
저 빛나는 새들을 바라봐 왔는데
지금 내 가슴은 쓰리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황혼 무렵에
맨 처음 이 호숫가에서
내 머리 위로 날던 저 새들의 종소리 같은 날갯짓 소리 들으며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걷던 그때 이후.
19년 동안 보아온 ‘빛나는’ 백조들. 그런데 올해 유독 그 백조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쓰린’ 까닭은 아마 그 청혼이 거절당한 것이 큰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까닭이 있음을 시인은 숨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19년 전 처음 이 호숫가에서 빛나던 백조들을 보았을 때 그는 ‘한결 가벼운 걸음’을 걷던 청년이었지만, 지금 시인은 쉰을 넘은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고, 다섯 번이나 거절당한 사랑의 상처로 인해 마음은 어쩌면 ‘황혼’에 가까운 상태일 테니까요. 자연의 한결같음과 인간의 변화와 쇠퇴라는 불변의 진리 앞에 시인은 변화하는 존재로서 자신, 나아가 인간의 한계를 가슴 쓰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시인의 심정은 4연에서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Unwearied still, lover by lover,
They paddle in the cold
Companionable streams or climb the air;
Their hearts have not grown old;
Passion or conquest, wander where they will,
Attend upon them still.
여전히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짝과 나란히
백조들은 서늘하고 다정한 물결 속에서
헤엄치거나 하늘을 난다.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열정이나 사랑의 성취는, 그들이 어디를 헤매든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다.
19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빛나는 백조들’은 ‘지치지도 않고’ ‘헤엄치거나 날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짝과 나란히’ 말이죠. 끊임없이 사랑을 거절당한 자신과 비교하면 얼마나 부러운 모습이었을까요. 게다가 더욱 중요한 사실,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시인 자신의 마음은 이제 늙어버렸다는 것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백조들은 어디에 있건 ‘열정이나 사랑의 성취’를 이뤄냅니다. 그것이 부럽다는 것은 또한 ‘열정’도 ‘사랑의 성취’도 예전처럼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음을 인정하며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불타던 열정이 사라진 지금의 자신과 달리 여전한 열정으로 빛나는 백조들이 얼마나 부러울까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conquest’란 표현에 특히 주목합니다. ‘열정passion’이야 사랑의 기본적인 감정일 테니까요. ‘conquest’라는 단어는 ‘정복’을 기본 뜻으로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성의) 애정을 얻는 것, 그렇게 얻은 애정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정복’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기본 의미인 ‘정복’이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의 한 핵심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얻고 싶은 것, 그 대상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이야 사랑에 빠진 이의 당연한 욕망이겠지요.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 마음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대상을 ‘정복’하려는,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과도한 욕망이 될 때, 그것은 집착이 될 수도 있겠지요. 자신의 사랑을 이미 네 번이나 거절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성에게 그 남자의 남편이 죽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청혼하는 예이츠의 ‘사랑’도 그와 같아서 ‘사랑’이라기보다는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집착’이 되어버린 것 아니었을까요. 그런 집착은 어떤 왜곡된 결과라도 충분히 나을 수 있으리라 또한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커 보이는 두 사람의 긴 이야기의 결말은 마지막에 확인하기로 하고 시의 마지막 연을 보겠습니다.
But now they drift on the still water,
Mysterious, beautiful;
Among what rushes will they build,
By what lake's edge or pool
Delight men's eyes when I awake some day
To find they have flown away?
하지만 지금 백조들은 고요한 호수 위에 떠서 흐르고 있다,
신비하고도 아름답게.
어느 골풀 사이에 둥지를 틀고
어느 호숫가 혹은 어느 연못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할까 언젠가 내가 일어나
그들이 날아가 버린 것을 발견하게 될 때는?
변해버린 자신과 달리 한결같은 백조들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시인이 아침에 깨어 백조들을 찾을 때 백조들은 날아가고 없겠지요. 짐작하시겠지만 이 백조들은 모드 곤과 또 한 사람의 모드 곤, 즉 모드 곤의 수양딸 이졸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곁을 완전히 떠나 다른 이들의 눈에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을 보여줄 그 두 사람! 그와 동시에 이 마지막 연이야말로 이 시가 시인 예이츠만의 개인감정의 토로를 넘어 ‘미학적 거리두기(Aesthetic Distance)’를 획득하고 보편적 인간 정서로 가 닿는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를 떠난 백조들은 ‘어느 골풀 사이’ 혹은 ‘어느 호숫가, 연못가’이건 그곳에서 변함없는 ‘열정’과 ‘사랑의 성취’ 가득한 모습을 하고 ‘사랑하는 짝과 나란히’ ‘신비롭고도 아름답게’ 유영하겠지요. 시인처럼 변하고 쇠약해가며 마음의 열정도 잃어가는 인간들은 그런 백조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기뻐하겠지요.
예이츠와 모드 곤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을까요? 사실 이 다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저어됩니다. 지난 번 키츠를 읽을 때 말씀 드렸듯, 과도한 진실은 대부분 아픈 법이라 말입니다. 모드 곤에게 다섯 번째의 청혼마저 거절당한 예이츠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모드 곤의 딸 이졸테에게 청혼을 합니다! 이 시는 그 청혼까지 거절당한 뒤에 쓴 것이지요. 예이츠는 이졸테가 아기였을 때부터 봐왔을 뿐 아니라 적잖은 사람들은 이졸테가 그와 모드 곤 사이의 딸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했었지요. 그런 이졸테에게 모드 곤에게 다섯 번째 청혼을 거절당하자마자 청혼을 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요. 당연히 이졸테는 거절했고요.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는 하지만 예이츠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게 완전한 끝이 아니라는 게 함정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청혼에 앞서 1908년 맥브라이드와 별거 중이던 모드 곤과 예이츠는 파리에서 만나 육체적 사랑을 나눕니다. 예이츠의 연인 가운데 한 사람은 이를 두고 “(예이츠의) 한결같은 기나긴 구애가 마침내 보상받았다.”고 썼다지만, 정작 예이츠와 모드 곤,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예이츠는 “비극적인 육체적 결합이 영혼의 영원한 순결성을 부르고 말았구나(the tragedy of sexual intercourse is the perpetual virginity of the soul.)”라고 했답니다. 바꿔 말하면, “끔찍한 육체적 결합으로 인해 앞으로는 영원히 정신적 순결성만 유지하게 되겠구나”라는 말이겠지요.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지만 참습니다.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걸 우리가 알 수 있도록 그가 입을 열었다는 게 가장 끔찍한 일 같습니다. 반면, 모드 곤의 말은 이렇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내 사랑에서 모든 육체적 욕망이 사라지기를 얼마나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육체적 욕망이 당신에게서 사라지기를.”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다른 마음이었는지 느껴집니다. 모드 곤은 예이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래놓고도 예이츠는 맥브라이드가 처형당하자 기다렸다는 듯 청혼을 했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딸에게까지!
위대한 예술가들이 사생활에서는 얼마나 ‘찌질’해지기도 하는지 지금도 우리는 종종 보고 있습니다만 웬만해서는 예이츠에 비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마저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이 자신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마치 본능처럼 그의 의식과 무의식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세상의 어떤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을 테니까요. 소설 속 인물이긴 하지만 우리는 히스클리프도, 안나 카레리나도, 그리고 테스를 파멸로 몰아가는 알렉의 ‘어쩔 수 없는 본능’도 알고 있으니까요. 결국 또 판단은 우리 각자의 몫이 되겠군요.
앞에서 모드 곤이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처럼 현실의 이야기야 어떻든 모드 곤이 예이츠 예술의 영원한 뮤즈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예이츠는 수많은 시들을 모드 곤을 모델로 하고 썼습니다.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을 비롯, 파리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언급한 「청년일 때와 노인일 때」“A Man Young and Old”를 포함한 무수한 시에서 모드 곤은 미의 상징인 ‘장미’나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미녀의 대명사인 ‘헬렌Helen’으로 등장합니다. 모드 곤은 충분히 그럴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연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밀레보이에와 함께 적극적인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아일랜드 연맹>이라는 독립운동기구를 결성했으며, 영국의 문화적 영향이 아일랜드를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하는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도 결성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파리에서는 『아일랜드 해방』L'Irlande libre이라는 프랑스어 신문을 발행했고, 아일랜드에 돌아온 뒤에는 <여성평화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빈번한 투옥과 감금에도 굴하지 않고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1938년 출간한 자서전, 『여왕의 하인』A Servant of the Queen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전쟁을 증오하고 천성상 평화주의자이지만,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한 것은 영국이었다. 전쟁의 제1원칙은 적을 죽이는 것이다.”
얼마나 강인한 여성이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녀는 여든 여섯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나 더블린 <글래스네빈 공동묘지Glasnevin Cemetery>에 묻혔습니다.
하나 더. 그녀가 맥브라이드와 낳은 아들 션 맥브라이드Seán MacBride 또한 유엔에서 활동한 아일랜드의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국제 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창립 멤버이자 의장이었으며, 아일랜드 외교장관을 역임했고, 1974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애초 모드 곤은 예이츠가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수많은 시를 가능하게 했던 뮤즈가 되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바친 예이츠의 유명한 시 한 편을 함께 읽습니다.
He Wishes for the Clothes of Heaven 천상의 천이 있다면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es 나에게 금빛 은빛으로 짠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천상의 천이 있다면,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es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인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파란 천 희뿌연 천 검은 천이 있다면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그 천을 그대 발아래 펼쳐드리련만.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나, 가난하여, 가진 것 꿈뿐이라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내 꿈을 그대 발아래 펼쳐드립니다.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리니.
오전부터 시작한 원고를 마감하는 지금 이 순간, 3월 1일 오후 6시 15분, 102주년 3·1절 저녁입니다. 밖에는 하루 종일 내리던 비에 눈발이 섞이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의 순국선열들을 생각하며 묵념을 올립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쿨 호숫가의 백조들」“The Wild Swans at Coole”이었습니다.
“The Wild Swans at Coole”
William Butler Yeats
The trees are in their autumn beauty,
The woodland paths are dry,
Under the October twilight the water
Mirrors a still sky;
Upon the brimming water among the stones
Are nine-and-fifty swans.
The nineteenth autumn has come upon me
Since I first made my count;
I saw, before I had well finished,
All suddenly mount
And scatter wheeling in great broken rings
Upon their clamorous wings.
I have looked upon those brilliant creatures,
And now my heart is sore.
All's changed since I, hearing at twilight,
The first time on this shore,
The bell-beat of their wings above my head,
Trod with a lighter tread.
Unwearied still, lover by lover,
They paddle in the cold
Companionable streams or climb the air;
Their hearts have not grown old;
Passion or conquest, wander where they will,
Attend upon them still.
But now they drift on the still water,
Mysterious, beautiful;
Among what rushes will they build,
By what lake's edge or pool
Delight men's eyes when I awake some day
To find they have flown away?
쿨 호숫가의 백조들
나무들은 아름다운 가을 색으로 물들고
숲 속 오솔길은 메말랐는데
시월의 황혼 아래 호수는
고요한 하늘을 비추고 있다.
바위 사이 찰랑이는 물결 위에
쉰아홉 마리의 백조들.
내가 처음 백조들을 헤아린 이후
열아홉 번의 가을이 지나갔다.
다 헤아리기도 전에 나는 보았다
모두들 갑자기 솟아오르며
요란스러운 날갯짓을 하며
엄청나게 커다란 부서진 원 모양으로 선회하며 흩어져 날아가는 것을.
저 빛나는 새들을 바라봐 왔는데
지금 내 가슴은 쓰리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황혼 무렵에
맨 처음 이 호숫가에서
내 머리 위로 날던 저 새들의 종소리 같은 날갯짓 소리 들으며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걷던 그때 이후.
여전히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짝과 나란히
백조들은 서늘하고 다정한 물결 속에서
헤엄치거나 하늘을 난다.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열정이나 사랑의 성취는, 그들이 어디를 헤매든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