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艸 박성수 친구를 만나다.
친구들로부터 박성수 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고향인 무주에 귀향하여 책을 읽고 한시를 지으며 도인의 삶을 구가하고 있다는. 고등학교 때부터 성수는 범상치 않았다. 카리스마가 넘쳤고, 그 먼 산골 촌 무주에서 이리까지 유학을 왔다는 것이 그 유별남을 더했다. 고등학교 때는 성수는 나하고 놀던 격이 달랐고, 내가 가까이 하고 싶었어도 끼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이 들어 고향에 내려와서 유유자적한 삶을 꾸려간다는 소문을 듣고 한편으로는 부러웠고, 한 편으로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광양에서 출발하기 전 날 네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나서는 네이버 지도에 그 주소를 입력하고 산세를 읽어보았다. 바로 앞에 남대천이 흐르는 풍광이 좋은 동네에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양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서 진주에서 대전 가는 고속고로를 타고 북행을 했다. 두 시간 정도 걸려 성수의 집 무주읍 하장백길-63에 도착해서 집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성수를 만났다. 수염과 머리가 허옇고 좋은 인상이 버거킹 선전하는 할아버지 같다.
글씨가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낙관에 찍힌 인주밥의 성분에 따라서 글씨 값이 달라진다는 데, 아마 최고급품을 썼을 것이다. 산책길에 나서기 전에 일필휘지로 써준 글이다. 豪放不羈 호방하여 쪼다같이 살지 말라는 거사님의 귀한 말씀이다.
거실에 들어서니 묵향이 가득했다. 서예작품이 벽면에 걸려있고, 앉은뱅이 책상에는 글을 썼던 연습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마침 때가 되어 무주 장에 나가보자고 했다. 산골의 장마당은 어떨까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장에 갔는 데, 오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무주군 전체의 인구가 이만이 허물어져 만 육천정도 된다는 데 장날마저 한산했다. 점심때라서 였을까? 성수의 단골집 오뚜기 식당에서 돼지 국밥을 시켜서 먹고, 도라지 한 근과 호떡을 두 개, 막걸리 세병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여러 점의 서예작품과 거치대에 세워져 있는 세 대의 기타였다. 기타를 들어 조율상태와 울림을 확인해보니 좋은 기타였다. 기타의 주인의 만만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다. 주인장의 내공을 확인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가 오고간다. 먼저 그 먼 이리로 진학을 하게 된 경위부터 물었다. 무주에서 방앗간을 했던 부잣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공부를 곧 잘해서 이리 남성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가세가 기울었고, 고등학교 시절은 용석이네. 하영이네 집에서 신세를 지다시피해서 학교를 마쳤다. 그 시절 인연으로 정유당선생(용석이 모친)께서 운필법을 가르쳐주셨다. 먼저 붓을 들어보라 하셨고, 좌우로 획을 긋는 것을 보시곤, 글씨에 재주가 있다고 열심히 서예에 정진을 하면 좋은 글씨가 되겠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몰입하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공부를 소홀히 했지만 책읽기를 좋아해서 중국고전을 많이 읽었던 것은 삶의 튼튼한 자산이 되었다.
젊은 시절 보르네오 가구의 외주업체로 이십여 년간 일을 해서 기반을 잡았다. 가구를 접착하는 기술이었는데 독보적인 기술이었다. 보르네오가 가구 산업에서 밀리면서 사업을 직원들에게 물려주었고, 그때부터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 이것은 그동안 간절하게 키워왔던 배움의 열망이었다.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을 해서 한문을 익혔고, 한시를 배웠다. 열정의 결실이었든지 생각지도 않았던 장학금을 받았다. 난생처음으로 장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한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시를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인의 시를 접해야한다. 시는 원래 함축적인 것인데, 한문은 한글에 비해서 함축적인 문자여서 시를 짓기에 좋다. 한시를 짓는 데는 많은 글자가 필요 없다. 천자문만 떼어도 충분하다. 한시를 제대로 지으려면 운을 잡을 줄 알아야 하는데, 106 운목을 알아야 하고, 한시를 입문하는데 오언성어 추구라는 책이 도움이 되었다. 한시를 공부하고 십여 년이 지나면서 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시마가 떠나지를 않아 몇 편 씩 지어내기도 했다. 구양순의 금언에 의하면 시는 窮而後工 (시는 간절함이 있어야 이뤄진다.) 또 시는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요즈음은 정민교수의 한시미학을 읽고 있으며, 매일 붓을 잡아 글씨를 쓰고, 저녁녘에는 강변길을 한 시간 반 정도 걷는다. 집 앞에 흐르는 강물이 무주 구천동에서 흘러내려오는 남대천인데 무주 읍내를 지나서 장수에서 발원한 금강의 본류에 합류를 한다고 지형설명을 해주었다. 하장백리는 별장지로서 손색이 없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남향으로 터를 잡았다. 강 건너 산세가 웅혼하다.
건너편 산자락에 밭이 있어, 봄이 오면 이웃에 사는 농부들을 따라 밭에 씨를 뿌리곤했지만, 잡초를 주고 거름을 주고 해야 하는데 게으른 농부라서 한 번도 수확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게으른 농부이고, 불량한 농부이다. 그래도 해마다 씨 뿌리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 역시 작물들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맞다.
그 동안의 내 삶이 허술한 점이 많았다. 지금이라도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면서 내 자신을 가꾸고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그리고 된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
오후 네 시가 다 되어간다. 성수에게 산책길을 나서자고 했다. 산책길에 나서기 전에 기타연주를 권해보았다. 선뜻 기타를 잡아들더니 바로 연주에 들어갔다. 스트록이나 아르페지오나 능숙한 솜씨다. 구슬픈 전주가 흘러나왔다. 양희은이 불렀던 한계령이다.
지난주 다녀왔던 한계령, 익숙한 노래라서 내가 따라 불렀다. 앙콜로 다시 한번 더, 그리고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와 정태촌의 북한강에서가 이어진다. 16비트의 손가락 움직임이 현란하다. 7080의 정서에 제대로 어울리는 제법 수준 있는 노래들이다. 오매! 섹쉬한 할배. 산초거사 마나님의 사랑이 줄줄 흐르것어!
강변길 소슬해서 좋았다. 왕복 이십 리 길 두 시간이 좀 덜 걸렸다. 강변따라 늘어선 사과농원에서는 올해의 마지막 수확을 서두르고 있었고, 구천동에서 내려온 강물은 맑고 강바람은 서늘했다. 강심에 해오라기가 한 쪽 발을 들고 서서 물고기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산책에 나섯던 강변길, 봄날 벚꽃 피는 밤길이 좋겠다.
풍성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소식을 주고 받은 지가 오래되었던 친구들의 이야기. 이미 할머니가 된 첫 사랑이야기. 성수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 큰 도움을 주었던 두 분의 남성 선배 이야기를 해주었다. 흥미로는 이야기였다. 바로 떠올랐던 얼굴은 없었지만 되새겨보면 나에게도 그런 은인이 있었을 것이다. 남성이라는 준거집단은 우리 모두에게 큰 울타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는 지고 어둑해져 있었다. 아쉬웠다. 성수는 자고 가라 했지만, 내일 일정이 있어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성수가 사는 집 당호가 學水停이다. 물을 배운다는 뜻이다. 노자의 상선약수의 정신과 니체의 “물은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정신을 배우겠다는 뜻이란다.
근작 산초거사의 시 한 수
坐中峰좌중봉
憐離晩秋坐中峰
련리만추좌중봉
天涯橫雲不斷思
천애횡운부단사
寒風瘦秋無常夢
한풍수추무상몽
紅色殘路歸孤車
홍색잔로귀고차
2021신축년 晩秋德裕山中峰
山艸.
(중봉에 앉아)
가는 가을이 애처로워 덕유산 중봉에 앉았네.
하늘 끝 늘어서 있는 구름은
끝없는 그리움이요
차가운 바람에 파리한 가을은
무상한 꿈이로다.
단풍 자자진길에 자동차 외로이 돌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