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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장합동 인천노회 동시찰 원문보기 글쓴이: 예전인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는 유럽에서 살다보면 신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양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어려서부터 오직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앞서기 위해 배우며 익히는 한국식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 같은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 심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서구 교회가 쇠퇴 내지 몰락해 가고 있다는 일부 지적도 있지만, 간략하게 “양심적이고 성실하게 그리고 사회 선도적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적 삶”으로 분석하는 유럽형 신앙생활에 비해볼 때 한국형 신앙생활은 허황된 면이 적지 않다. 현세 기복적 사고와 생활이 신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서 과정과 방법을 중요시하지 않고 결과와 성과에만 치중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 지적되어 온 우리의 문제점이다. “꿩 잡는 것이 매다”는 속담은 개인의 삶에 만이 아니라, 전도와 목회에도 마치 진리인 것 마냥 통용되고 있다. 부정, 거짓, 술수, 모함 등을 마다않고 “하나님의 축복”인 출세와 성공과 부와 영광을 일궈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목회의 성공여부, 삶의 성공여부는 오직 결과가 말해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적 삶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에 떨어져 썩어져 가는 한 알의 씨”나 “땅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 또는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아니라 그 반대인 “맛을 잃은 소금”, “빛을 가린 등불”로 전락하고 있다. 진실과 성실이 아니라 모험과 대박의 꿈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과 사역을 지배하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게도 다르다. 한국에서 자라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경을 배우고 신학을 공부한 후, 그리고 더 공부하면서 만난 유럽 기독교 사회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 선배들이 배워주고 물려준 - 한국의 보수적 신앙과 보수적 신학 자체를 면밀히 검토해야 하겠다는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이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와 과제를 안겨주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한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한 우리는 겸손하게 서구 사회를 배워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곳에도 지적하고 수정해야 할 문제점들이 적지 않지만 서구 기독교 사회와 그 사회에서의 삶은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기독교적 요소들과 바람직한 삶의 모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 삶을 한 방 대박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루하루 꾸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필자는 “성실한 삶”과 “허황된 삶”의 차이로 요약하고 싶다.
어디에서 이러한 차이가 왔을까? “성경을 잘 몰라서”나 “성경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답은 피상적이다. 아니 틀린 답이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더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만큼 축자적으로까지 성경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성경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가히 세계 톱 수준이다. 따라서 “성경을 몰라서”나 “성경대로 하지 않아서”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성경의 사용과 성경에 대한 사랑에 눈을 돌리면 오히려 정 반대의 답에 도달한다. 즉 성경을 더 사랑하고 더 애용하는 우리 한국 신자들이 성경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성실한 삶보다는 허황된 삶을 쌓아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을 비평하고 고대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맞추어 분석하며 그 중에서 눈에 좋아 보이는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현대적 삶에 적용하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더 성실한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그렇다면, 고전적 성경관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언제라도 인생의 황혼에서 신앙의 만루 홈런을 치는 그런 종류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이 성실한 삶을 추구하려면, 따라서, 성경을 좀 덜 보며, 좀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적당히 얼버무리는 소위 자유주의적 태도를 익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원인은 우리가 성경을 너무 많이, 너무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보는 것에 놓여 있지는 않다. 우선 이 점을 지적하고 싶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인으로 성장한 다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한국 교회가 성장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멋대로 살다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 갑자기 천국을 소유하는 그런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우리가 “허황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경험하는 인생의 대 역전 드라마였다. 그래서 누구나 이러한 삶을 당연시했고 또 누구나 그렇게 변화되기를 기대해왔으며 그것을 정상적인 기독교적 삶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란 멋대로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다가 복음을 듣고 갑자기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가 백 년 이상 이어져 오는 동안 한국교회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인생의 역전 드라마를 경험하는 바울식 회심보다는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찬송을 익히고 기독교적 분위기를 좋아하며 아빠를 부르듯이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경을 자신의 사고와 존재의 틀로 가진 그런 신자들이 훨씬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인생의 기막힌 역전 드라마로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적 삶은 이제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어머니의 태로부터 차곡차곡 배우고 익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멋대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돈과 명예와 출세만을 꿈꾸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영적 축복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느 모로 보거나 “허황된 삶”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기독교적 분위기가 이렇게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독교적 삶이 계속 대박을 손에 넣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것이 지금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이다. 성실한 삶이 아니라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신앙생활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
성경을 곧이곧대로 읽고 외우고 공부하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건한 자세로부터 바로 “우리의 허황된 기독교적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삶이 아니라는 것도 정확하게 옳은 말이다. 성실한 삶을 요구하는 성경에서 허황된 삶이 비롯되는 이 현상의 최 근저에 필자는 한국식 “상(賞)의 신학” 즉 “상급론(賞給論)”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글 성경의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성경은 “삯의 신학” 즉 보상론(報償論)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한글 성경에 오역된 부분들을 수정하고 이 수정에 필요한 신학적 과제를 떠안고, 즉 성경적, 개혁신학적 보상론을 정립하고 이에 맞추어 살아간다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을 성실한 삶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 유럽형 기독교인들에게만이 아니라 -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가능하다. 이 글은 왜 “상의 신학”/“상급론”이 잘못이며 “삯의 신학”/“보상론”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Ⅱ
“상(賞)의 신학”
1. 그 진술
“상(賞)의 신학”은 흔히 “상급론(賞給論)”, 또는 “차등상급론(差等賞給論)이라 불린다.
한국교회에는 아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어서 교인들 중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교리적 차원에서 신봉되고 있다. 필자도 어릴 때 어떤 부흥회에서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감명이 컸던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소위 천국의 개털 모자 이야기이다.
어떤 장로님이 꿈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 천국 문에서 천사가 개털 모자를 주기에 얼른 받아 머리에 쓰고 기쁘게 천국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는 개털 모자를 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금 면류관 아니면 은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장로님은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그를 안내하던 천사에게 “왜 나에게만 개털 모자를 주었느냐”고 항의했다. 천사가 그에게 “당신은 세상에서 믿기만 했을 뿐 상을 얻을 만한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어서 금이나 은으로 만든 면류관은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를 잘 믿고 상을 얻을 일들을 많이 한 신자들은 화려한 면류관을 쓰지만 그렇지 않고 겨우 믿음만을 지킨 신자들은 영원히 개털 모자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이며 겨우 자신의 영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 장로님은 그 다음날부터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고 교회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는 이야기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이 개털 모자 이야기는 아직도 한국교회에 맹렬히 회자되고 있다. 여기 저기 조금씩 다르게 손질된 여러 버전들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청년들에게, 미래의 설교자나 목회자를 꿈꾸는 신학생들에게 교육용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천국(천당)에 간다. 한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근거는 예수님을 믿음에 있다. 누구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죄인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이며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인간의 공로는 크든지 작든지, 혹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구원을 얻음 혹은 의인으로 간주됨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구원(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대속하셨기 때문에 - 예수님의 대속은 구원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 어떻게 살아도 삶이나 행동 자체는 신자의 구원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현실적인 죄는 매일의 회개를 통하여 정리할 수 있다. 즉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신자들이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을 얻는 그의 신분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신자들은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이 삶에 대한 어떤 경각심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고 마구 죄를 지어도 좋다는 자유나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삶은 구원 얻음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서의 상급과 관련되어 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경이 교훈한 대로 산 신자들은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다. 금 면류관 내지 은 면류관을 쓰는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그렇지 않고 매일 죄나 짓고 또 회개하고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마치 불에서 타다 남은 숯검정을 건져 올리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이 결정하지만 천국에서 어떤 상을 받을지 그 영광의 차등은 그의 삶, -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되는 - 인간의 일, 노력, 공로가 좌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상을 바라보며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더 큰 상, 더 많은 상, 더 화려한 영광을 얻으려는 것은 이 땅에서 구원을 이미 얻은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감독하는 하나님이 주신 자극제, 즉 윤리적 동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상급론을 다루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읽어내려는 해석보다는 성경 구절들 안에 개인의 특수한 생각을 몰아넣는 자기 해석의 위험이다. 그래서 종종 상급론을 긍정하는 글들을 보면 인간의 노력이 (차등)상급의 근거라고 말하면서도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공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써두었다. 그러나 이런 자기 해석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의 잘못된 번역에 근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논거
성경이 천국에서의 (차등)상급을 말한다고 인용되는 구절들은 상당히 많다.
한글 개역 성경에 “상급(賞給)”, “상(賞)”, “상주다(授賞)”, “상받다(受賞)” 등 상과 연관된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두 마흔 넷이다. 이 중 서른여덟 구절이 상의 신학/상급론을 지원하는 구절로 다루어진다. 면류관(冕旒冠), 관(冠), 화관(花冠) 등은 상징적 의미로 상을 지원하는 구절로 취급되는데 한글 개역 성경에 이 단어들은 모두 일흔 일곱 번 나온다. 그 중 상의 신학/상급론이 그 지원 구절로 취급할 수 있는 구절은 모두 열다섯이다. 이런 직 간접적인 증거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논거가 제시된다.
신약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언급된 곳은 모두 천당과 지옥, 영생과 영벌이 아니라 천국 안에서의 (차등)상급을 말하는 구절로 해석된다. 상급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렇게 마태복음 12장 36-37절: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고린도후서 5장 9-10절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받으려 함이라”를 차등 상급을 말하는 증거구절로 꼽았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은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전 위에 금, 은, 나무, 풀, 짚으로 건물을 짓는데 마지막 날 나타날 불에 그 공력 즉 일이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불 가운데서 건짐을 받는 것 같은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하는 차등 상급론의 아주 강력한 증거구절이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천국에서 누가 큰 지를 다루는 마 18:1-4; 눅 19:11-27의 므나 비유;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등이 언급된 마 10:40-42도 “차등 상급의 증거구절들”이다.
요약하면 상급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한글 개역 성경에 “상”, “상급”이란 용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 심판이 언급된 많은 구절들, 면류관이 상징적, 신학적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모든 구절들을 천국 안에서의 상,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증거구절로 열거한다. 천국과 관련하여 “크다”나 “작다”는 형용사가 사용되면 이에 비교될 만한 다른 상태가 계단의 각 단계처럼, 상의 차등을 전제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심판, 벌 등을 구원, 천국의 반대어로 이해하지 않고 천국 안에서의 상급에 대한 반대어, 즉 작은 상급 내지 부끄러운 구원을 결정하기 위한 천국 안에서의 심판으로 분석한다. 가장 강력한 증거구절로 제시되는 것은 고후 3장 9-15절과 고전 9장 16-27절이다.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Ⅲ
3. 무엇이 상(상급)인가?
상급론에서 주장하는 상은 다양한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핍박당한 자의 상,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전도자의 상, 유업의 상, 큰 상, 일한 대로의 상,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태의 열매,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적인 축복의 향유(enjoyment), 기도의 응답, 하나님의 칭찬, 생명과 의식주 등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 명칭만을 구분하였을 뿐 무엇이 천국 안에서 주어지는 상인지 구체적으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상급론이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다른 신학 주제와 결합하여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구체적인 상급 항목의 확대나 다변화는 별 경각심 없이 교인들에게 감동을 불어넣으려는 설교자들이나 부흥사들을 통하여 더욱 강하게 자극된다.
예를 들어,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현세적 상으로 구분된 “기도의 응답”, “생명과 의식주” 혹은 세상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할 경우, 더욱이 현세 기복적 축복관과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까지 잘 되는 삼박자 구원론’과 상급론을 결합할 경우, 물질, 건강, 장수, 가정의 행복, 사업의 성공, 출세와 명예 등 소위 번영신학이 선호하는 모든 개념들을 하나님의 상으로 정의하고 이런 것들을 기독교인의 삶에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선하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교훈을 통해 성취/완성된 것으로 읽지 않고 그 대부분의 내용을 신약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기독교적 삶의 원리로 읽으며 상급론과 결합할 경우 무엇이 상(상급)으로 고려되고 추구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된다. 돈과 땅과 재물, 재산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 권력을 쟁취하고 행사하는 것 등 행복한 삶의 모든 요소나 조건들이 상(상급)의 범주에 들어오고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에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될 수밖에 없다.
신학 연구, 신학 토론, 혹은 후학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학적 세계에서 상급론은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적은 아직 없다. 즉 상급론은 아직 신학적 인기를 얻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실생활의 세계에서 상급론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허황된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기독교인들이 성실한 삶이 아니라 꿈을 따라가고, 뜬 구름을 잡으며, 한탕주의식 삶을 추구하게 되는 이유는 상급론이 보장하는 ‘상의 범위’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상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로, 하늘의 나라에서 땅의 나라로,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상으로, 그리고 영적 축복의 영역에서 육적, 물질적 축복의 영역으로 마구 이동, 확대하고 다양화, 다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사람들에게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 적당한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하여 -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상급, 하나님에게 받은 상/상급으로 규정하고 추구할 수 있다. 흔히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이름 하에 부정적이고 비평적으로 거론되는 현실적, 물질적, 사회적 영역의 모든 행복의 요소가 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4. 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상급론이 하나를 심어 하나를 가꾸는 성실한 삶이 아니라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두려 하고 인생의 대박을 터뜨리려고 하는 허황된 삶을 만들어 낸다는 가정을 위에서 제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단순한 가능성이나 기우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 교회에서 만나는 실제 상황임을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왜 그런가? 상급론이 어떻게 허황된 삶의 근거나 자극제가 될 수 있는가?
“상” 개념 자체가 그런 불씨를 품고 있다. 즉 심은 것 이상의 과다한 열매를 주는 것, 받는 것, 기대하는 것, 그리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상”이다. 자연스러운 결과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나 귀결에 붙어 오는 것, 더 주는 것이 “상”이다. 그래서 상급론을 추종하는 사람은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둔다는 생각, 일종의 투자심리의 지배를 받게 된다. 작은 것을 뿌려 그 결과를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덤으로 벌어들인다는 “상”의 기본 의미가 상급론에서는 유한을 들여 무한을 상으로 받는다는 식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상” 개념을 분석해 보자. 상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주어지는 칭찬, 물건, 돈 등 그 대가(代價)이다.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잘한 일에 대하여 칭찬하는 표식,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이다. 돈으로 주는 것을 “상금(賞金)”, 물건으로 주는 것을 “상품(賞品)”, 증서를 주는 것을 “상장(賞狀)”이라고 부른다. “상급(賞給)”이란 무엇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상으로 주는 돈이나 가치 있는 물건”을 뜻한다. 동사로 사용할 때 “상받다” 즉 “수상(受賞)”이나 “상주다” 즉 “수상(授賞)”이 된다. “상타다”, “포상(褒賞)”이라는 용어도 있다.
“상”은 어떤 원인을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좋은 일이거나 잘한 일이라는 가치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상이 주어지거나 상을 탄다. 원인으로서의 잘한 일, 착한 일과 결과로서의 상 줌, 상 받음이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설명해도 좋다. 원인이 될 아무런 일이 없으면 물론 상도 없다. 잘못한 일에는 벌이 따른다. 잘한 일에만 상이 있다. 상급론은, 따라서 “상선벌악(賞善罰惡)” 사상의 한 부분이다. 하늘이, 아니면 운명이나 무형의 힘이, 혹은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다는 한국식 전통 사고를 만물의 창조주요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기독교식 신학으로 표현하며, 그 부정적 부분 즉 “벌악” 부분을 살짝 떼어내고 그 긍정적 부분 즉 “상선”만을 남겨 놓은 것이 상급론이다.
원인과 결과, 잘한 일과 상의 인과관계는 일의 자연스런 진행에, 다른 한 외부적 요소가 개입하여 만들어진다. 그것이 잘 한 일임을 널리 알리고 모두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잘한 것임을 확신시키며, 계속 그렇게 잘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을 본받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상을 준다. 칭찬, 권장이라는 미래를 향한 의도성이 없다면, 즉 과거에 잘한 일에 대한 단순한 보답일 뿐이라면 대체로 상은 주어지지 않거나 질이나 양에 있어서 훨씬 축소된다. 반대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리려는 광고성,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경고성,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본받지 않게 하려는 경계성이 개입하여 벌이 주어진다. 미래를 향한 이러한 의도가 없다면 즉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면 대개 벌은 축소되거나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론은 “권선징악(勸善懲惡)” 사상의 한 부분이다. 하늘이, 아니면 운명이나 무형의 힘이, 혹은 인생을 지배하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다는 한국식 전통 사고를 만물의 창조주요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기독교식 신학으로 표현하며 그 부정적 부분 즉 “징악” 부분을 살짝 떼어내고 그 긍정적 부분 즉 “권선”만을 남겨 놓은 것이 상급론이다.
따라서 상은 앞 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그들의 의도대로 키워나가는 수단의 하나다.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에서 그 긍정적 부분만을 다루도록 변형하며, 앞 세대 대신에 창조주 하나님을, 새로운 세대 대신에 기독교 신자들을 대입한 것이 상급론이다. 상급론은 현실적 천국과 내세적 천국 이후의 문제만을 그 내용으로 삼음으로써 상선벌악과 권선징악이 (한 사회의) 모두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도록 바꾸었고, 그렇게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적 동기가 되도록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원인의 자연스런 진행과 그 결과에 개입하는 외부적 요소 즉 미래와 다른 사람을 향한 교육적 의도나 사회 선도적 목적이 일과 상의 인과관계를 자연적인 가치 이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이다. 즉 좋은 일이 이루어낼 수 있는 자연적인 가치에 칭찬, 권고라는 인위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전혀 새로운 가치를 가진 “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나 잘한 일에 대한 보답 내지 보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상”은 - 칭찬과 권고라는 사회적, 교육적 의도 때문에 - “더 주는 것”, “더 받는 것”이다. 이 때 미래를 향한 의도성의 강도(强度)나 고려되고 있는 사회의 범위에 따라 “상”에 첨가되는 가치나 상의 규모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상이 무엇인지를 경험으로 익혀왔다. 우유를 잘 마셨다고, 혹은 젖을 잘 빨았다고 엄마는 아기에게 칭찬을 하고 쓰다듬어 주거나 꼭 껴안아 준다. 아기가 음식을 먹는 것은 - 아기의 성장과 발육이라는 관점에서 - 잘한 일이다. 음식을 먹는 착한 일은 그 자체로 아이의 성장, 발육이라는 인과관계의 결과 혹은 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이에게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한다. 언제라도 우유를 잘 마셔야 하고 젖을 잘 빨아야 한다는 교육적 가치를 첨가한 결과이다. 엄마의 의도는 그 아기만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상은 아기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제한된다. 유치원, 초등학생이 되면서 상은 조금씩 커진다. 성인이 되면 과거에 상이라고 부르던 것은 더 이상 “상”의 가치를 가지기 어렵게 된다. 웬만한 상급으로는 착한 일, 잘하는 일이란 확신을 심어주고, 그러한 일을 늘 반복하도록 자극하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성인의 입장에서 “더 생기는 것”, “더 주는 것”이라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야 “상”의 효과를 가지게 된다.
껑충 뛰어 현대 사회에서 “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눈을 돌려 보자. 인생을 열심히 살며,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하여 얻어낸 결과물에도 수 억, 수 십 억원 상당의 상금이 주어진다. 인과관계가 만들어내는 가치보다 까맣게 높은 것으로 더 주는 것이 - 현대의 - 상이다. 한국에 상륙한 로또 복권은 “상”이 무엇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천 원을 주고 번호만 잘 고르면 수 십 억, 때로는 수 백 억 원이 “상”으로 주어진다. 더 많은 사람들을 로또 시장에 끌어들여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려는 의도성 때문에 자연스런 인과관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상으로 얹어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상이다. 상 개념은 자연스럽거나 성실한 삶을 자극하기보다는 “상”을 마련하고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미래를 향한’ 의도가 개입한 때문에 과대하게 확대된 “허황된 삶”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물론 성경에서 정리했다는 기독교 상급론이 이런 터무니없는 상을 거론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상급론에는 “잘한 일”과 이 일에 대해 “상으로 주어지는 것”, “한 일”과 이 일 때문에 “상으로 받는 것” 사이의 가치 불균형이 똑같은 원리로 흐르고 있다. 이 불균형은 상을 주는 분에 의해서 발생한 것인데, 상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신적 무엇이 상으로 내 걸린다. 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 선한 삶이든, 순종의 행위이든, 아니면 고통의 십자가이든 - 인간적인 삶으로 신적인 것을 벌어들인다. 유한을 사용하여 무한을 소유하는 것이다. 앞의 3)항에서 언급한 모든 것이 신자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라면 기독교적 삶이야말로 정말 멋진 투자이다. 투자! 작은 것을 내고 큰 것을 희망하는 것. 신적인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나의 작은 유한한 인생을 영적 모험에 내맡기는 것.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이런 투자로, 모험으로, 하나님의 상을 소유하는 방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십일조를 바치면 더 큰 물질적 축복을 받는다!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모두 투자이다. 신앙생활의 규칙들을 제대로 지키면, 지킴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 결론, 보상, 보답 이외에 하나님의 현세적 축복과 미래적 축복을 덤으로 더 소유하게 된다! 건강과 장수와 부와 성공과 출세와 권력과 평안과 안전, 그리고 내세의 화려한 면류관들이 모두 하나님의 상으로 내걸려 있다. 그러니 인생을 투자하라!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바르게 살아가라! 이것이 상급론이 만들어내는 현실적 결과들이다. 잠시를 투자하여 영원을 손에 쥐는 것. 영원을 손에 넣기 위하여 잠시를 바치는 것.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은혜를, 선물을 상으로 내거시고 실제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상으로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상급론이며 상의 신학이다.
상급론, 어떻게 볼 것인가? Ⅳ
5. 분석과 논평
한국식 상의 신학/상급론은 다른 어느 기독교 세계에서도 그 발생과 흥왕의 유래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어디에서도 기독교적 삶을 위해 선풍적 인기를 누린 적이 없었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성경이 한국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며 탄생시킨 한국의 순수 토속적 신학 주제이다. 로마 캐토맄 교회 즉 천주교의 공로 사상에 반기를 들며 개혁자들이 종교개혁 시기에 몰두했던 주제는 상의 신학/상급론이 아니라 삯의 신학 즉 보상론(報償論)이었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공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한 사람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인간의 노력을 구원의 공로로는 제시하지 않지만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 더 큰 상급과 연결하여 인간의 삶을 자극하려 하는 것으로 천주교 신학의 공로주의와 개신교 신학의 은혜주의를 교묘하게 절충한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그 영광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 신학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은 구원에 있어서 만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인정한다. 이 점에서는 분명 개신교 신학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상이나 상의 차등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 개신교가 전적으로 은혜의 영역으로 돌리던 것과는 달리 - 신적 무엇의 조건으로 내세움에 있어서는 천주교 신학에 동조하고 있다.
천국에서의 화려한 영광을 말함으로 상급론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축복을 강조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천국에도 부끄러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공로가 될 만한 일들, 즉 상급을 받을 일들을 일구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믿음이 지시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 그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 물론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지만 - 천국의 부끄러움뿐이다! 한 편으로는 예수님이 하신 일, 그리스도의 생애에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광의 차등 그리고 겨우 불타다 남은 숯검정과 같은 구원이라고 그리스도의 일과 믿음을 고의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논한 것처럼 상의 신학/상급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인간의 노력을 절대로 공로로 내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목 놓아 변증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조차도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항변은 궤변에 가깝다. 상급론으로 그들이 자극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선한 삶, 순종의 삶”이기 때문이다. 상급론을 거룩한 삶/깨끗한 윤리/모범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기 위한 근거로 본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을 전적으로 성령에 이끌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는 개신교의 신학이 바람직한 삶을 자극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상의 신학/상급론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상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가 개신교의 신학을 떠나고 있음을, 그리고 신자들의 삶을 더 강하게 실제적으로 자극할 필요를 느껴서 상급론에 -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와 같은 - 동기유발의 기능을 부여함을 고백하는 것이나 같다. “상급동기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억망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 속에 ‘거룩한 삶의 동기를 유발하려는’ 공로주의가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순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정말 공로성 없는 행위, 은혜에 사로잡힌 인간의 노력을 말하고 그것으로 선한 삶을 자극하려 한다면 상급론이 유별나게 강조되어야 할 필요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 신학이 오랫동안 말해 온 삯의 신학/보상론으로 충분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의 신학/상급론이 중요하고 기독교적 삶을 위한 자극제로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 어떤 변증에도 불구하고 - 공로주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인간의 노력을 자극하여 삶을 바르게 이끌어 보겠다고 하는 윤리적 동기 유발의 족쇄를 교묘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상의 신학/상급론은 천주교의 이중윤리관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로마 가톨릭신학은 예수님의 교훈을 구원적 명령과 복음적 권고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구원적 명령은 죄인이 구원을 얻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절대 필요 요구로, 복음적 권고는 구원과는 관련이 없지만 완전한 순종을 위한 보충적 권고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상설교는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완전한 삶을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헌신을 약속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이중윤리관은 말한다. 물론 이 권고를 따르는 것 혹은 따르지 못하는 것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상급론이 이 이중윤리관과 비슷한 면은 구원 이후 혹은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을 위해 자유롭게 지켜야 할 그런 특수한 규칙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에 있다. 같은 구조 안에서 완전한 순종(천주교), 혹은 상급을 위한 순종(상급론)으로 이름 붙인 것만 다를 뿐이다.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부동성, 정체성, 이지적 교리는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자주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공격의 주 목표는 장로교 신자들에게 삶의 활력소와 교회 생활의 활기를 불어넣거나 되찾게 하는 데 맞추어졌다. 그 중 하나가 성령 충만 혹은 성령 세례를 제 이의 은혜로 제시하는 순복음 신학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삶, 활기찬 증거의 삶을 위하여 중생/믿음/칭의와는 종류가 다른 은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상급론은 성령의 두 번째 은혜를 강조하는 이 순복음 신학과도 대동소이하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상급을 노려 이 세상에서의 풍성한 삶과 사후의 더 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상을 두 번째 은혜로 설정하고 이 기준에 따라 모든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구분하기 때문이다.
정말 상급론을 성경에서 증명하려면 상의 신학/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찾아내야 할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범주의 내용이어야 한다.
첫째, 상, 상급, 면류관 등이 천국이나 지옥과 직접 연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급이란 천국 이후의 논제이기 때문이다. 상과 벌은 - 성경과는 달리 - 상급론에서는 서로 반대개념으로 연결될 수 없다. 상급론에서 “상”은 천국이 전제된 순 긍정적 개념이요, “벌”은 천국이 배제된 순 부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상급론은 하나님의 벌을 “상”이 아니라 천국이나 구원의 반대어인 “심판”에 첨가되는 “어떤 것”으로 내세워야 한다. 또 “상”을 벌이 아니라 지옥의 반대어인 “천국”에 첨가되는 “무엇”으로 내 세워야 한다. 상 혹은 벌을 말한다는 구절이 - 이들이 제시한 구절이 보여주듯이 -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나타나 때로는 천국과 때로는 지옥과 결합되어 있다면 상을 천국 안에서 만의 문제로 설명하거나, 벌을 지옥 안에서 만의 문제로 설명할 수는 없다.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모순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위 첫 번째 규칙을 위반하면서 상급론이 상과 벌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파악하려 한다면 - 앞에서 인용한 상급론이 실제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처럼 - 상과 벌은 모두 천국 안에서의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성경에서 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벌”, “심판”이 “천국 안에서의 무엇” 즉 긍정 안에서 따지는 부정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상급”이나 “상급 없음”을 하나님의 벌,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상급론이 성립하려면 하나님의 “벌”, “심판”이라는 용어가 “천국의 허용,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벌”, “심판”, “밖에 쫓아냄”, “울며 이를 갊”은 절대적 부정을 말하는 것 아닐까? 개혁신학은 오래 동안 이 개념들을 순 부정으로 파악해 왔다. 그런데 상급론은 이 개념들을 긍정(즉 천국의 허용) 중에 들어 있는 부정(그러나 부끄러움)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들어있지 않다면, 상급론은 순전히 궤변적인 신학 이론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세째, 상급론의 구조 안에서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신자들에게 더 이상 벌, 심판, 지옥 등의 개념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구원을 조금도 말할 수 없는 불신자들에게 상급 개념이 결합되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차등)상급만 거론될 수 있고, 지옥의 불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차등)벌만 거론될 수 있다. 그런데 상급론자/상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구절에는 대부분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상을 말하는 구절이 동시에 여전히 벌을 말하고 지옥의 심판을 말한다. 벌을 말하는 구절에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의 상급이 등장한다. 즉 상급론은 성경의 구원론적 구조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원론적 어투, 즉 성경의 표현법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상급을 말한다는 구절은 어느 것이나 신자들과만의 관계에서, 또 벌을 말하는 구절들은 어느 것이나 불신자들과만의 관계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하다.
상급론자들이 상급론의 근거 내지 증거 구절로 제시한 모든 구절들은 위의 세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급론은 성경적 주장이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상급론이 유독 한국 풍토에서만 발생하였고 따라서 이 천 년 기독교 역사상 어떤 유래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급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구절들이 논리적으로 제시한 위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는데 기초한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상급론자들/상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절들에 포함된 “상”, “상급”, “상주다”, “상받다”가 전적으로 오역이라는 데 있다. 이 구절들을 모두 제외하고, 즉 “면류관”이라는 상징적 표현과 심판 등과 관련된 간접적 지원 구절들만으로 상급론을 주장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대답은 “아니다”일 수밖에 없다.
참된 상급으로서의 구원’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하여
“구원이 전부이다” 라는 말은 성경 내용의 올바른 표현이다.
“구원이 전부이다”라는 말을 듣고 어! 저 사람은 “상급이 없다”라고 말하네 라고 생각하며, 반론을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인식이 매우 결여되었음을 보게 한다.
반론자의 주장을 보면,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까지가 ‘구원’이고, ‘상급’은 따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인데, 성경은 구원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나누어서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함을 얻었다’ 라는 말은
① 처음 아담과 하와가 죄 없는 상태에서 가졌던(엄밀한 의미에서는 더 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거룩한 존재됨과
② 그 하나님의 형상인 백성들이 누리는 것 즉, 다스리고 정복하는 ‘통치의 즐거움’을 함께(①과②를) 말하는 것이다.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는 일은 성경의 내용이 아님
처음 하나님의 백성은 아담과 하와이다.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삶이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삶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해는 구원과 상급의 올바른 해석의 열쇠가 된다.
처음 계시된 내용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남자인 아담만을 말하지 않고 여자인 하와를 포함한 남녀를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속에는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적 삶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는 일과,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남자 하나로서는 할 수 없고, 남녀가 함께 하도록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 가진 영원한 생명은 하와와 함께 할 때 의미가 있다.
아담 혼자로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의 이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타락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구원 역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형상인 남녀들이 함께 다스려 가는 세상을 말한다.
이 내용이 처음에 창세기 1:26-28의 내용으로 주어졌고, 그 후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운 약속 안에서 처음의 일을 진행하신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씨”와 “땅”과 “복”이다.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할 것과 세상을 다스릴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의 내용도 그렇다. 구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전체의 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구원의 의미는 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구원은 홀로 누리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 교회적 삶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홀로 영생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홀로 영생하여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구원은 언약 공동체 안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며, 그 언약 공동체가 들어가는 약속의 땅과 그 곳에서 함께 누리는 모든 복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원이 전부다”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의 내용인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모두를 성취하는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원받은 자들의 신비한 연합이며, 그들이 성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복된 삶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사람들에게는 사망만 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복된 존재적 상태를 잃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하여 잃게 된 것은 영원한
① 생명만 잃은 것이 아니라,
②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까지도 잃은 것이다.
그 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구원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이 구약과 신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얻게 되는 구원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잃었던 것을 회복(엄밀한 의미에서는 그 이상의 상태로)하심을 말하는데, 이때 성도들이 얻는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다스림(흔히 ’상급‘이라고 말하는)’을 ‘하나의 의미’로 함께 말하는 것이지 ‘구원’과 ‘상급’을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따로 말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십원’짜리 동전의 가치를 증거 하는 것은 ‘숫자 10’과 ‘다보탑’이다.
우리는 이 둘이 함께 있는 것을 ‘10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말도 ‘영생’과 ‘다스림’이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죄로 인하여 ‘생명(영생)’을 잃었다는 말은 단지 목숨이 유한하여졌다는 것에 한정된 의미이거나, ‘의’에서 ‘불의’로 내려간 존재적 가치의 상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다스리며 누리도록 되어 있던 모든 내용들까지도 전체적으로 상실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는 일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참된 상급이신 하나님(창 15:1)
성경의 증거를 따르면, 성도에게 있어서 ‘상급’은 ‘성 삼위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시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창15:1). 창세기 15장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의 주체인 “후사(씨)”의 문제를 다루고 그 구원자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언약을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을 그의 의로 여기시고, 가나안 땅을 그에게 기업으로 주셔서 그 땅을 다스릴 것을 약속한다.
아브라함이 얻는 것은 ‘의’뿐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약속의 땅)’을 얻는 것까지이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의와 그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존재로서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 의로운 존재에게 허락되는 모든 좋은 것들과 권세 전체를 담고 있는 ‘전부’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곧 죄요, 사망이듯이 그 곳에는 당연히 ‘상급’ 또한 상실 된 상태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말은 ‘지극히 큰 상급’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 상급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은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상급의 절대적 가치와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거룩한 것들 중에서 으뜸의 의미가 아니라, 홀로 절대적 차원에서 거룩하다는 것을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구원이요, 의요, 생명이요, 영생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요, 거룩함이요, 그 구원 얻는 자들이 누릴 소위 상급이라는 것 전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전부이다”라는 말은 구원과 상급을 나누어 생각하여 주장하는 반론하는 자들의 말처럼 “상급이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참된 상급’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해”와 “방패”(시84:11)로 소개하시는데, 고대근동에서는 이 용어를 왕의 칭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정황과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고려하여 볼 때, 창세기 15:1의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왕’ 되심을 강조하는 말로서 ‘상급’이란 용어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패”는 곧 “상급” 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앞의 사건 즉,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직분과 사역과 관계되는데, 창세기 14:18의 내용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14:20에서는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라고 말한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얻은 것은 창세기 14장의 전쟁에 나오는 모든 나라의 왕들과 비교해서 지극히(절대적 가치에서)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시한 내용이다.
이 사건이 종결 된 후에 창세기 15:1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브람의 행위에 따라 어떤 상급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람의 온전한 믿음의 행위가 형성되지도 않은 시점에 하나님께서 위의 사건 (창 14장)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너에게 왕이요 상급 자체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따라 십분의 일을 드린 것도 그 싸움의 승리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했을 때,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맹세하노니 (그렇게 하면 나중에) ”네 말이 내가 아브람을 치부케하였다.
할까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안니하리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을 부요케 하실 자는 ‘씨’ 와 ‘땅’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안에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전에 가지고 누렸던 모든 상태(생명과 창조의 모든 것들을 다스림의 실상)가 바로 ‘상급’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것들이요, 하나님 자신 안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드러낸 계시로서의 내용들이 아닌가?
이 사실 외에 더 이상 이와 같은 총체적이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함께 뭉친다하여도 하나님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 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생명과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권한과 다스리라고 주신 온 세상을 잃었던 것을, 신약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열 고을 다스릴 권세와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와 비교하여 생각해 보라 타락 전 아담은 열 고을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과 바다와 공중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와와 함께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 권세와 내용들을 동일하게 주셨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함께 처음에 부여받았던 모든 것을 잃었고,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 ‘상’ 받을 만한 일을 스스로 할 수 없게끔, 전적으로 타락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은 생명 곧 구원이요, 그 생명 안에는 처음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누렸던 권세와 모든 내용이 그대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부여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며, 성도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열심의 참됨은 열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이 진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들이 하는 충성의 능력과 내용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기에 충성의 정도에 따라 차별되게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기대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안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라는 상급이라고 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상급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원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 따르는 보상적 상급신앙이야 말로 진정한 상급이 무엇인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 비유 (마태복음 20:1-16)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1은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 라고 말함으로 이 비유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란 본 비유에 계시된 특이한 포도원 주인의 인격과 사역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사회적 삶의 정황과 노동관 그리고 노동 시간 등을 본문의 증거와 연관하여 보면, 비유 속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지상의 일을 친근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한데, 그 내용과 원리는 전혀 지상 적이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새벽 6시에 품꾼을 얻으려고 직접 나간 주인은 당시 삶의 정황으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사건이며, 더구나 그 주인이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품꾼을 데려 왔다는 사실은 더욱 기가 막히게 한다. 그리고 그 주인은 품삯을 지불하는데, 한 데나리온씩을 준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한 노동자 가족의 이틀 품삯에 해당되는 풍족한 삯이다. 이렇게 풍족한 삯을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1시간 일한 자에게도 똑같이 지불하는데 ,그것도 나중 온 자를 먼저 준다. 이처럼 본 비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 지상의 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무언가 잘못된 원리를 가진 주인의 특이한 인격과 활동(사역)으로 소개된다.
이 비유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유의 내용을 전후 문맥과 연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19:30 의 내용인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비유의 끝인 마태복음 20:16에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는 말로 비유의 끝을 맺는다.
이 비유 속의 특이한 주인은 당시의 관념을 뒤엎는 충격적인 행동을 보이는데, 충격적으로 품꾼을 선택하고 충격적으로 그 삯으로 똑같은 한 데나리온씩 지불하며, 충격적으로 나중 온 자에게 먼저 준다.
이러한 충격적인 주인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 나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신 주님께 선택된 자는 장차 올 메시아를 바라보며 힘들게 애쓴 세례 요한 때까지의 구약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큰 위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그 주인의 인격과 사역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비로소 그 실제성을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태복음 11:11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신약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그 이전의 구약의 성도들보다 시간적으로 짧은 시간에 실체이신 주님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님은 세례 요한 보다 먼저다, 더 크다 고 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그림자와 실체의 차이로서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먼저 된 자든 나중 된 자든 모두가 동일하게 이 특별한 주인으로부터 선택되었고 그들에게 약속된 삯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오늘날 너희 앞에 있는 주님 자신이심을 드러내는 비유인 것이다.
이제 이 비유를 하신 다음에 주님은 열 두 제자와 함께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구속사역을 진행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그 약속된 구원의 삯을 가장 먼저 받는 자들은 자중 된 자들인 주님의 제자들인 것이다.
이처럼 주께서 이루신 구원으로서의 큰 삯(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한 시간과 충성의 정도의 차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똑같이 약속되었고 베풀어진다는 내용이다.
누가복음 19:11-27과 마태복음 25:14-30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이 비유는 누가와 마태가 주님께 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자신의 공동체들에게 그 합당한 가르침의 목적을 따라 증거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내용을 한층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의 내용은 사실상 마태복음 24:45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 25:46에서 끝난다.
즉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비유(25:1-13)’, ‘달란트 비유(25:14-30)’, ‘양과 염소 비유’(25:31-46)‘로 그 내용은 하나의 통일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마태복음 24:45-25:46의 비유에 나타난 공통된 내용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말해준다.
그 공통된 내용을 보면, 마태복음 24:45-51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맞이하는 종말론적 상태’를, 25:1-13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종말론적 상태’를, 25:14-30은 ‘자기의 소유를 맡긴 주인(누가복음에서는 귀인)의 종말론적 판결’을, 25:31-46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임금의 판결’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19:11-27과 마태복음25:14-30의 비유의 내용은 “열심히 충성한 사람은 더욱 많이 상을 받지만, 게으른 사람은 받을 상도 빼앗길 것이다”라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마태의 비유에 나타난 악한 종은 주인의 인격을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고 하며 자신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주인은 그 종의 논리를 증거로 사용하여 그 논리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즉, 그 종의 주장처럼 주인을 그렇게 알았다면, 마땅히 주인의 돈을 취리 하는 자들 즉, 당시의 은행에 맡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의 말한 대로의 주인이 돌아와서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려 하는 주인이 은행의 이자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종의 자기 변호는 틀렸다.
주인이 그런 사람이라면 종에게 자신의 돈을 맡기지 않고 은행에 맡겨서 뿌리지 않고 변리를 취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에 나타난 주인은 그 종이 말하는 그런 인격을 가진 자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종을 악하다라고 한다. 또한 “그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말한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비유에서도 악한 종에게 “네 말로 내가 판단한다”라고 하며, 그 악한 종이 귀인의 은을 은행에 두지 않은 행동을 지적하며 그 귀인의 인격이 그 악한 종의 주장과 다름을 알게 한다.
특히 주님은 그 당시 30년 전에 있었던 아주 인상적이고 특별한 사건인 아켈라오의 사건을 비유의 접촉점으로 삼고 제자들에게 증거 하신다.
누가복음의 최종 결론을 보면 그 악한 종은 자신에게 맡겨졌던 므나를 빼앗긴다.
물론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는 칭찬이 있었고,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또한 이미 열 므나를 받은 종은 주인으로부터 한 므나를 더 받게 된다.
이처럼 제일 많이 받은 열 므나 가진 종에게 악한 종의 것을 준 것은 그 종의 행위가 악함을 더욱 철저하게 설명해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 사실과 함께 덧붙여지는 것이 있는데,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면 악하고 충성된 자들이 가려지며, 특별히 악한 자의 상태는 비유 속에 나타난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은 자들을 주인이 자신의 앞에서 죽이게 하는 판결을 통해, 비록 종의 신분에 있는 자라도 자신의 인격을 인정치 않는 자는 자신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자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열심히 충성한 사람은 더욱 많이 상을 받지만, 게으른 사람은 받을 상도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달란트 비유 전후에 나오는 나머지 세 비유의 결론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24:51에서는 그 악한 종을“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25:1-13의 비유에서도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라고 한다. 네 번 째 비유인 25:31-46에 있는 비유에서는 아주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비유와 마태복음의 비유의 핵심은 종말론적 심판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생과 영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비유의 내용 속에 나온 착하고 충성된 종이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차지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표현되는 “내가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니라”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며, 이 말들의 본질적인 의미는 “영생과 영벌” 또는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표현을 통해 종말론적 상태로서 구원과 심판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의 내용에 표현상 기록된 “고을을 차지하는 것”이나 “더 많은 것을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니라” 라는 말은 구원 받은 자의 복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11:35의 "더 좋은 부활"에 대하여
(어떤)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을 근거로 "더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은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며, 부활이 차등이 있듯이 부활 후의 '상급도' 똑 같지 않고 차등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히브리서 11:35의 "더 좋은 부활"이라는 의미는 부활에도 더 좋고,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더 좋은 부활" 과 "덜 좋은 부활" 같은 차등적 부활은 없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상태는 "영생과 영벌"로써의 부활뿐이다.
부활에 차등이 있음은 '구원과 심판' 즉, "의인은 영생하기 위하여 악인은 영벌에 처하기 위하여"(마25:46) 모든 인생에게는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성도들에게 '상급'의 차등이 있는 것처럼, 마지막 날 성도들의 '부활'에도 "더 좋은 부활"이 있고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는 그러한 차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면, 그것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히브리서 11:35의 내용 자체에서도 확인된다.
히브리서 11:35을 보면, "(어떤)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데, 여기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다" 라는 말은 당시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사건이며, 어떤 여인들인가의 고민거리가 안 된다.
즉,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알 듯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대표적 부활의 사건은 엘리야와 엘리사 이 두 선지자가 활동할 때에 일어난 부활의 사건이다.
엘리야 때에는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사건을 통하여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것과 엘리야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바알신의 본고지인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사건을 통하여 나타내었음을 잘 아는 것이다(왕상17:20-24).
또 한 사건은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인데 이 때도 어렵게 얻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 아들이 부활한 사건이 있었다(왕하 4:32-37).
이 두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시 신이라 칭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우상이며, 여호와만이 참 된 신이심을 죽었던 생명을 소생케 하는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계시적 의미로 보여 주셨다.
이 사건은 당시 엘리야와 엘리사의 입에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거 하는 동시에 장차 성도들에게 있을 부활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말한 다음에 이어서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 것이다.
구약의 마지막 시점에 있어서도 수많은 핍박이 있었는데, 여호와의 율법을 따르지 안겠다고 말하면 악형(심한 고문)을 통한 죽음의 자리에서 놓아주겠다 하였으나, 당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여호와의 참된 율법을 신앙함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악형을 당하며 순교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더 좋은 부활" 이라는 말은 이러한 신실한 자들이 바라본 '부활'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이 바라본 부활이 "더 좋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 라는 내용과 차등적 의미로서 비교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악형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킨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때 있었던 부활의 사건이다.
즉,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것을 분명히 알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을 악형의 죽음 앞에서도 부인하지 않고 지켰던 것이다.
즉 그들이 믿었던 "더 좋은 부활"은 엘리야나 엘리사 때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마지막 주의 날에 있을 '영원한 부활'로 확장하여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 믿음이 바로 히브리서 11:1에서 말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는 말을 검증해주는 선진들의 믿음이다 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바라본 "더 좋은 부활"이라는 믿음의 의미를 성도들의 부활에도 "더 좋은 부활"이 있고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오히려 힘을 주어 끝까지 완고하게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1:35의 "더 좋은(better)"의 의미가 구원 얻은 자들 안에서의 차등적 개념이 아니라는 증거는 히브리서 11:4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좋은, better)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되었다.
이 곳에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히듯이 "더 좋은"의 의미는 구원받은 자들, 즉 의로운 자들 안에서 있는 차등의 구별이 아니라, 가인의 제사는 악하므로 가인과 그 제사는 열납 하지 않았으며, 아벨의 제사는 의롭기 때문에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 하신 것이다(창4:4-5).
즉, 가인의 제사도 의로운데 아벨의 제사는 더 의롭다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악하고 아벨의 제사는 의롭다는 '의와 악'의 구별이지, 하나님께서 받으신 의로운 제사 중 가인의 제사는 "덜 좋은 제사" 이고 아벨의 제사는 "더 좋은 제사"라는 의미가 아니다.
마태복음 5:20에서도 이와 같은 용례가 확인된다.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도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의 개념으로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주님 앞에 인정되는, 천국에 갈만한 의인데, 단지 "덜 나은 의"이니까, 너희들은 그들보다는 "더 나은 의"로 천국에 이르러라 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히브리서 11:35의 "더 좋은 부활"의 의미는 자체의 해석의 문제와 히브리서 11:4의 증거와 마태복음 5:20의 증거들을 통해서, '부활에도' 구원 얻은 성도들 안에 차등적으로 있는 "더 좋은 부활"과 "덜 좋은 부활"이 있다는 해석과 주장이 옳지 못함을 충분히 증거 한다.
“부활 후의 상급이 똑같다면,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거짓이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상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위의 내용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심각한 문제, 즉, 자신들의 신앙의 우월성을 당파를 지어 주장하며, 다른 파 보다 자신이 추종하는 인물과 그 파가 우월하고 다른 사람은 못하다는 고린도 교회의 '더 좋은 신앙' 과 '덜 좋은 신앙'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옳지 않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바울이나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각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꾼과 도구에 불과 하다는 말이다.
오직 모든 것의 근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우지 아니하는 것들은 거짓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위에 세운다는 것은 그 터 위에 바울의 사역이나 아볼로의 사역이나 그 외에 고린도 교회의 어느 누구의 믿음과 충성과 노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한 구속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모든 사역과 충성들이 금, 은, 보석 그리고 나무, 풀, 짚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그러한 개인의 모든 노력과 헌신과 애씀과 충성 등이 마지막 불로 심판하는 날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라면 상을 잃는 것이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상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금, 은, 보석은 구원 얻은 자가 지상에서 받은 복으로서 더 좋은 복의 의미가 아니며, 나무, 풀, 짚은 구원 얻은 개인에게 '덜 좋은 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앞 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인정될 것과 인정되지 못할 삶을 말한다. 만약 구원 얻은 자 안에서 "더 좋은 복" 과 "덜 좋은 복"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면 금과 은과 보석 자체 안에서 각각의 차이를 말하여야 된다.
그러나 금, 은, 보석은 타서 없어지지 않는 성질의 것 즉, 구원 얻는 삶을 의미하고 나무, 풀, 짚은 타서 없어질 성질의 것 즉, 구원받지 못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므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라는 터 위에, 그리고 그 터에 합당하게 세워져서 마지막 불로 판결하는 심판의 날에는 바울이 지금 전하는 말처럼 바울 자신이나 아볼로나 모든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인생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상을 얻는 자들의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불로 태웠을 때, 오직 나를 자라게 하시고 교회를 자라게 한 것에는 나 자신의 공로나 신앙의 우월함, 즉, 누구는 "더 좋은 복"을 받았고, 누구는 "덜 좋은 복"을 받았다 라고 내세우는 일이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와 희생이 구원의 상을 얻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우되, 나무와 풀과 짚으로 세우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더 좋은 부활"과 "덜 좋은 부활"의 근거로 제시하며, 구원은 구원이고 상급은 따로 자신들의 열심과 충성과 희생에 따른 공로의 여하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다.
“복은 구원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고, 상급은 구원받은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것이다.
성경은 복과 상급의 차등을 분명히 둔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복은 구원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고, 상은 구원받은 자가 천국에서 받는 것이라고 '복'과 '상'을 나누어 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5:3-12 의 내용을 통해서 주께서 친히 증거 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이미 와 아직'이라는 성격 안에서 '복의 개념'과 '상의 개념' 을 설명하고 있다.
원문의 의미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천국이 (장차)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들은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그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를 갈망하고 열망하는 자들은 (현재, 이미)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충족될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현재, 이미) 복이 있다. 그들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현재, 이미) 복이 있다. 천국이 (장차)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속이어 너희를 대적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는 (현재, 이미)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는 너희의 상이 하늘에서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사람들이 너희 앞에 있던 선지자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3-12 에서 확인되듯이 복은 현재 지상의 것이면서 동시에 그 복이라는 내용이 장차 "천국" "위로" "땅을 상속" "충족" "긍휼" "하나님의 아들" "하늘에서 상이 많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11절과 12절은 현재(이미) 얻은 '복'의 내용은 곧 장차 '상'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해지는데, 이것은 '복'은 곧 '상'이다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본 논쟁에서 주목할 만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복은 구원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고 상급은 구원받은 사람이 천국에서 받는 것이다" 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은 물리적이고 지상 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현재에도 장래에도 있는 '총체적 내용'들로서 마태복음 5:3-12의 내용("천국" "위로" "땅을 상속" "충족" "긍휼" "하나님의 아들" "상")으로 보면 충분하다.
설마 “하나님이 복이시다 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큰복을 주셨고 아브라함만 못한 신앙생활을 한 롯 에게는 작은 복을 주신 것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두 사람의 복이 똑같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에 대하여
창세기 12:2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가 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도 모르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고 언약을 하셨다.
그리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복 자체가 된다)"이 되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주는 복을 받는 것이 아니며, 아브라함 그 스스로가 복 자체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땅의 모든 사람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너는 복의 근원"이다 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분명 아브라함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내용'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의 언약' 즉, 구원 사역에 대한 언약과 관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라는 "임마누엘" 사상 말이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마1:23)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그의 소유의 넉넉함 즉, 그의 생애에 주어진 생활의 안락함이나 부유함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역사의 주체이신 '씨'곧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다.
갈라디아서 3:16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요한 복음 3:56에서도 주님은 아브라함이 기뻐한 이유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창세기 22:16의 말씀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22장 16절의 믿음이라는 상황까지 오는데 약 62년이 걸렸다는 시간적 의미와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반신반의하며 연약하게 지내온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성경의 기록된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충성심과 순종적 의지가 그 때 그 순간에 스스로의 결단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약 62년의 세월 동안 아브라함을 신실하게 이끌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의지와 결단과 순종을 앞선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라게 하셨던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경원문을 보면 창세기 22:5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우리가)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라고 1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분명히 성취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22:16에서 독자를 아끼지 않은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내용 또한 약속된 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내용을 '복'으로 주신 것이다.
또 창세기 22:17의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다"라는 내용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내용인데 이 내용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사탄의 세력이 멸망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복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창세기 22:16,17에서는 아브라함의 결단과 의지와 순종을 말하는 듯 하나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적 언약의 내용에 대해 무지한 아브라함을 62년이라는 세월을 거쳐서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이해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의 수준의 단계로 이끄신 하나님의 사역이 돋보이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나 이 언약은 차등 있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성도들인 이스라엘에게 동일한 언약으로 주어졌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므로, 아브라함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면 누구나 그 '복'을 누리는 것으로 동일하게 그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언약으로서의 복은 인생들의 수준에 따라 허락된 차등적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된 전적 은혜로서의 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로서의 복의 개념은 주님 자신의 강력한 표현처럼 "이 돌을 들어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것에서 증거를 얻는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바 '복'의 내용이 분명하다면, 이삭과 야곱 그리고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똑같은 복' '동일한 '복'을 받았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라는 말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복은 곧 구원인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부여된 복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는데 그 것이 곧 언약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로 인한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베드로후서 2:5-9 은 아브라함의 복은 크고 롯의 복은 작다는 주장이 근거 없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롯에게 주신 복은 작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크다"는 내용은 성경에 전혀 없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평가된 것처럼, 롯 또한 베드로후서 2:5-9의 내용을 통해서 의로운 자로 평가받고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 복은 안락함 자체에 있지 않다.
롯 과 같이 소돔과 고모라 성안에서 의로운 심령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 복이 된다.
그의 심령이 고통받았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한 사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건을 잃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내용을 어떤 환경에서도 잃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복이며, 그가 바로 복된 사람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궁핍하나 풍부하나 거기에 요동하지 않고 두 상황 가운데서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졌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복에 대한 정의를 풍족함에 두는 것은 어리석다. 풍족함이라는 것은 중립적이어서 풍족함이 있는 가운데 경건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이 되지만, 풍족함은 자주 경건을 잃게 하는 작용을 하므로 경건을 잃게 되는 풍족함이 자신에게 있다면, 그 풍족함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가난과 궁핍과 병듦도 그것 자체가 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그러한 환경이 자신을 누르고 오해와 공격을 받아도 욥처럼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그 어렵고 힘든 환경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경건한 자인 것과, 복된 자임을 보장받는 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립적 성격을 띤 환경의 다양함 자체만 보면서 복과 저주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롯의 환경을 노아의 환경과 바울의 환경과 함께 생각해 보라! 롯은 아브라함에 비하여 결코 작은 복을 받은 자가 아니다.
위의 본문은 롯의 경건과 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5절에서 확인되듯이 노아의 의와 경건을 말하며, 9절에서 롯과 노아가 차등 없이 경건한 자로 복된 자로 증거 되고 있다.
그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었으니, 그것이 곧 진정한 '복'이요, '상'이 아닌가? 노아의 경건과 노아가 받은 복은 아브라함의 의와 경건과 설사 비교한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그러한 노아의 경건과 의로움이 롯의 경건과 의로움과 함께 차등 없이 동질적 의미로 본문 안에서 증거 되고 있다. 이 증거가 바로 성경의 증거요, 하나님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하나님의 결정을, 또 그 증거를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자신 스스로를 엄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은 돌아설 기회가 있지 않은가?
개인의 복됨과 교회의 복됨 역시 외적인 풍족함에 있지 않음을 시편 73편은 노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그릇된 복을 추구하고, 그러기에 경건한 자와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가 때로는 자신들의 믿음의 자리에서 미끄러질 뻔한 상황이 늘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악인이 복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심판의 내용과 증거요, 의인이 고통하고 궁핍한 현실이 그 의 복 있음과 구원을 보장하는 증거가 된다.
시 73 편 (아삽의 시)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평안함을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높은 데서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하늘을 대적하고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부활 후의 상급이 같다면 므나비유(눅 19:11-27)도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
본 비유는 비유의 내용과 목적으로 볼 때, '므나비유'가 아니라 '어떤 귀인의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비유에 앞서서 주님은 주께서 오신 이유와 표적과 기사로서 모든 사역을 하신 것은 누가복음 19:10의 말씀처럼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군중들의 생각처럼 세상적 왕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님의 사역을 통해 이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당장 에라도 하나님 나라가 나타날 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을 아신 주님은 이제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제자들을 떠날 것이며,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내용을 통해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즉,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심판과 구원의 권세로 오실 것이라는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주님의 비유를 30년 전에 있었던 아켈라오스가 왕 임직을 받으려고 떠나는 상황과 또 그의 왕 됨을 원치 않던 자들의 행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왕이 되어 돌아와서는 자신의 왕 됨을 싫어하던 자들을 죽이는 일을 접촉점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뚜렷하게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던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역사 속에 분명하게 있었기에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본 비유에서는 아켈라오스라 하지 않고 "어떤 귀인"이라고 표현함으로 이것은 비유이신 주님 자신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을 시사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귀인이 종들에게 준 '한 므나'의 화폐 가치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한 사람이 ‘백 일’ 동안 벌어야 되는 액수이다.
이러한 많은 돈을 종들에게 맡긴 경우는 당대 정황으로 볼 때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당시 사회적 정황을 누가복음 17:7-9의 내용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당시에 사람들이 갖고 있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9절의 내용인데, 종들이 주인의 "명한 대로하였다 하여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는 내용이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에서는 종들을 칭찬하고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준다.
또 더욱 놀라운 사실은 종들에게 주었던 한 므나와 장사하여 남긴 열므나, 다섯 므나를 주인이 가져가지 않고 종들에게 그대로 갖게 하시며, 악하고 게으른 종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므나를 가진 종에게 준다.
여기서 한 므나가 당시 성인 노동자가 백 일 동안 벌어서 모을 돈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열므나와 다섯 므나를 가진 종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큰 돈을 자신의 종에게 맡긴다는 것은 당시 청중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며, 이러한 주인의 인격은 지상의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천상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며, 이러한 왕은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 비유를 듣는 자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의 마지막 결론을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았던 원수들에게 내리는 판결로 끝맺는다.
즉 "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결말은 주인의 인격을 바르게 생각하지 않고 엄한 사람 즉 양심과 인격이 굳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아주 완악한 사람으로 여겼던 종에게 그가 비록 주인의 다른 종들과 함께 지내었지만, 즉 같은 공동체 안에 속하여 있었으나, 그 종이 귀인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 과 같은 그렇게 엄한(굳은)사람 이었기에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다는 것은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그 귀인이 왕이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며, 귀인의 인격을 자신이 말한 대로 생각했다면 귀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당시 은행에 두었다가 귀인에게 그 이자까지 돌아가게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주인이 주인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자들이 그 귀인을 따라가서 훼방하여 왕이 되지 못하고 돌아오지도 못할 것을 기대하여 그러한 상황이 되면 한 므나를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인은 그 종에게 마태복음 25:14-30에 나오는 결론처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는 말 대신 자신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자를 끌어다가 죽이라 라는 말로 대치시키며, 그 악한 종이 가졌던 마음과 행위를 왕 됨을 원치 아니하고 귀인을 미워하던 원수들의 마음과 같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 종의 결말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며 결말을 맺고 있다.
착한 종들이 받은 열 므나 혹은 다섯 므나는 각각 열과 다섯이라는 공통된 숫자를 통하여 열 고을, 다섯 고을이라는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의 착함과 충성됨을 증거 하는 상징적 의미 전달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종의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여 이미 열 므나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물음에 그 왕은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빼앗길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을 자세히 보라! 열므나 가진 종이나 다섯 므나 가진 종이나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이 있는 자이다
그런데 열 므나 가진 종에게 그것을 주고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다섯 므나 가진 자 또한 가진 자로서 그 한 므나를 받은 것이다 라는 것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다섯 므나 가진 자나 열 므나 가진 자나 차등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5:14-30의 동일한 비유 내용을 보면, 열 고을 다스릴 권세라는 표현과 다섯 고을 다스릴 권세라는 말이 차등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남긴 종들에게 똑같은 칭찬과 결론을 내린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그러므로 충성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께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으로 오실 때에 처음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다스리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님의 왕 되심을 원하고, 믿고, 그 분이 반드시 왕으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착하고 충성된 삶을 산다면, 비유의 착하고 충성된 종들처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처음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많은 것을 다스리도록 맡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19:11-27의 '어떤 귀인의 비유'는 비유 자체가 왕이신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말하며 그 분으로 말미암는 심판과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그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흔히 상급이라 하는 모든 내용들을 차등 없이 동일한 의미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 17:10에서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