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수張閏洙
1. 경당급문제현록敬堂及門諸賢錄의 서지書誌 정보情報
통상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이라 함은 말 그대로 문하門下에서 수학한 학자들의 간단한 신상정보를 모은 자료이다.89) 그렇지만 ‘급문제현록’은 단순한 기록적 의미를 넘어서서 어떤 학자 또는 학파의 지적知的 계보도系譜圖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자료가 된다. 즉 일련의 학문적 연계선상에 있는 학자들과 학파의 모습을 입체적·유기적으로 복원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 자료가 된다. 비중 있는 한국 전통 성리학자들의 경우 대부분 별도의 ‘급문제현록’이 있다.
현존하는 「경당급문제현록敬堂及門諸賢錄」은 경당선생문집별집敬堂先生文集別集(이하 경당별집으로 약칭)에 수록되어 있다. 경당별집은 경당의 후손인 칠계재 七戒齋 장세규張世奎(1783~1868)가 모으고 성와惺窩 장경식張景栻(1845~1911)이 교정한 자료를 수정·보완하여 후손 장인섭張麟燮이 정서淨書한 필사본이다. 1957년(정유
년) 권상규權相圭가 서문을 쓰고, 1961년(신축년)에 경당의 9세손인 장인섭(주손冑孫)이 발문跋文을 썼다. 건乾·곤坤 2책으로 되어 있는데, 건 1책에는 시詩, 서書, 기記, 증언贈言, 제문祭文, 잡저雜著가, 그리고 곤 2책에는 부록(세계도世系圖·연보年譜·문인록門人錄)이 실려 있다. 곤 2책 부록에 수록된 ‘문인록’이 바로 경당급문제현록익다.
현행본 「경당문인록(敬堂門人錄)」에는 총 221명의 제자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경당급문록」은 말할 것도 없고, 경당별집 또한 그동안 학계에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민족문화대백과民族文化大百科’(정신문화연구원 간행) 등을 살펴보면 경당선생문집(원집原集)과 ‘속집續集’은 소개되어 있으나, 경당별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그 동안 학계에서는 경당의 학문적 비중을 높게 평가하기는 했으나, 명망 있는 유학자의 필수요소인 ‘급문록’과 ‘연보’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학단學團을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했다.
필자는 2004년 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소재하는 ‘경당 종가敬堂宗家’를 방문하여 소장 문집을 확인하던 중 경당별집과 경당일기敬堂日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경당별집에 수록되어 있는 ‘급문록’은 ‘경당선생급문제현록敬堂先生及門諸賢錄’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제일 앞에 ‘범례凡例’를 두어서 급문제현록의 작성 경위를 대략적으로 밝히고 있다. 우선 범례의 내용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경당선생의 급문제현록은 선생의 외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이 편찬한 것인데 작업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고 또한 빠진 것도 많다. 그래서 선생의 일기 중에서 배움을 청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을 다시금 살펴서 적어 넣었다.
[先生及門諸賢錄 先生外孫存齋李公所編 而未克斷手 且有多闕漏 故更考先生日記 中請學受業者而書之]
각각의 문인들의 성과 휘諱 아래에 자와 나이, 그리고 허다한 사적들에 대하여 빠진 것이 많고, 나이의 차례도 도치된 경우가 있어서 송구함을 면할 수가 없다. 보는 사람들께서 용서해주기를 바란다.[各位姓諱下無字甲及事蹟者許多而年齒次序之倒寘 懼或難免 覽者恕之]
일기 중에 아마도 휘나 자가 중복되어 기록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달리 고거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일기에 의거하여 기록을 해두었다.[日記中 或諱或字而恐或有重複 然無他考據 故依日記錄之]
이 기록은 완성된 글은 아니다. 그냥 책 상자 속에 간직되어 온 지가 3백여 년이 넘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시일을 끌 수가 없어 ‘별집’ 뒷부분에다 붙여놓은 것이다.[此錄未成完書 故藏在巾衍者三百有餘載 而今不敢更爲延拕 玆附別集後]
각각의 문인들에 대해 주를 달면서 당시에 예설禮說에 대하여 문답問答했던 것, 경전에 대하여 강론했던 요지, 그리고 학문에 관련된 것과 시를 창수唱酬하고 용운用韻했던 긴요한 것 등에 대하여서도 마땅히 기록을 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 별집과 연보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 중복을 피하고자 기록에 넣지 아니하였다.[各位註下 宜書當日禮說問答講經要旨及關於學問而切於酬用者 然本別集及年譜詳載 故嫌其重疊而不入錄]
‘범례’에 의거해 볼 때, 급문록의 최초 작성자는 경당의 외손 존재 이휘일이며, 3백여 년 동안 별도의 기록물로 전해오다가 경당별집을 간행하면서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범례에서 밝히듯이 경당별집에 수록된 급문록은 원래 미완성본이었던지라 부정확한 기록도 많고, 무엇보다도 이름만 있고 구체내용이 결여된 곳이 많아서 후속 작업을 필요로 하였다.
경당의 문인들은 경당이 거주하던 안동 서후를 중심으로 한 향반鄕班의 자제들이 주를 이루며, 이를 동심원으로 하여, 안동부 전역 그리고 경북 북부지역 일대에 고루 포진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형제 간 뿐만 아니라 부자 간도 경당을 함께 스승으로 삼은 경우도 있으며,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후손들이 집중적으로 그에게 배움을 구한 것이 특기할만하다. 즉 퇴계로부터 말미암게 되는 영남 남인학파南人學派가 이후 사승관계師承關係를 교호적交互的으로 계승하면서 스스로의 ‘학파적’ 특색을 공고히 해나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특징에 유념하여 ‘경당급문록’을 보완하였다. 즉 경당의 문인들이 주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의 향반 자제라는 점, 그리고 이들이 살았던 시대배경이 주로 17세기에 걸쳐 있다는 사실, 이들 대부분이 서로 간에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등을 중심적으로 고려하였다. 우선, 경북 북부지역에 종가를 두고 있는 주요 성씨들의 족보와 경북 북부지역의 향토지를 검토하고, 또한 지역출신 인사90)와 유림의 협조를 얻어 경당문인록을 보정하였다. 학계에 이름조차 보고되지 않은 이들의 행적과 특히 경북 북부지역 성리학에 관한 많은
연구정보를 담고 있는 이들 학자들의 문집은 향후 이 지방 유학연구사에 있어서 대단히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관계자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바이다.
2. 문인록
안우安遇(1572~1636):자는 성지性之, 순흥인順興人, 청원정淸遠亭의 후예이고 현감 담수聃壽의 아들이며 신명창申命昌의 손서孫婿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전적典籍과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안동 풍천에서 거주하였다. 경당일기와 연보에 등장한다.